박민정은 그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요즘 너무 바빴어.”박민정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이었다.“어서 앉아. 건강은 좀 괜찮아졌어?”연지석은 천천히 다가오며 무심결에 박민정의 배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답했다.“많이 좋아졌어.”그의 시선은 다시 박민정의 얼굴로 옮겨졌고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는 그의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옆에 있던 설인하는 그제야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대표님, 두 분 아는 사이였어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회사와 외부 사람들 앞에서 설인하는 박민정을 대표님이라고 불렀다.“그래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인하가 나간 뒤 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연지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연지석이 건강을 회복하고 집안에서 그를 이곳으로 보내 사업을 확장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정말 다행이다. 이제 자주 볼 수 있겠네.”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어떻게 지냈어?”“그냥 전과 같지 뭐. 나름 잘 지냈어.”“그렇다면 다행이야.”박민정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나 유남준이랑 다시 시작하려고.”연지석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물잔을 들어 흔들리는 표정을 숨기며 답했다.“그렇게 결정한 거야?”“응.”박민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지석은 물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평소와 다름없는 물이었지만 목을 넘어가자 유독 쓰게 느껴졌다.“네 마음이 확고하다면 잘된 일이지.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네 편이야.”“고마워.”박민정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제 계약 이야기를 해볼까?”연지석이 이번에 찾아온 이유가 사업 제안을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박민정은 그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좋아.”두 사람은 사무실 안에서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에리는 홍보 촬영 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그는 박민정의 사무실에 들렀으나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설인하에게 물었다.“대표님은요?”“대표님은 업무 중
서다희는 민수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로 유남준에게 전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에리와 계약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적 있으신가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서류를 넘기다 말고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얘기하기는커녕 혹시라도 화내게 할까 봐 어제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는데.’마음속 깊은 감정을 서다희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유남준이 바로 물었다.“민수아 씨가 또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고요 그냥 에리가 사모님한테 평범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서다희가 답하자 유남준 주위의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 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유남준이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한가하지?”서다희는 유남준의 말에 당황했다.“근무 중에 여자 친구랑 수다 떨 시간도 있고 아주 한가한 가 보네.”서다희는 말문이 막혔다.서다희는 억울했지만 유남준의 잔소리를 듣고 결국 풀이 죽은 채로 사무실을 나갔다‘다시는 대표님한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냉정하고 무정해!’...PMJ 그룹.아침 촬영을 마친 에리가 박민정이 아직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고 주변을 서성이며 진서연 쪽으로 가 물었다.“대표님 이번 프로젝트 미팅은 꽤 오래 걸리네요. 아직 안 끝났어요?”설인하가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온 큰 클라이언트인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는 분이라고 하시니 오래 걸릴 만도 하죠.”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과 연지석이 함께 나왔다.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에리는 그 장면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본능적인 경계심인지 아니면 같은 감정을 품은 대상을 알아본 것인지 에리는 연지석을 보며 그 어떠한 호감도 느끼지 못했다.연지석의 예리한 시선도 에리를 발견하고는 설인하와 다른 여자들을 훑은 후 에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에리 씨! 명성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연지석이 에리에게로 곧장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에리도 예의 바르게 연지석의 손을 맞잡았다.연
연지석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유남준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서다희가 혀를 찼다.“에리라는 대스타를 해결하기도 전에 죽마고우가 오다니. 어렵다, 어려워.”“네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너를 벙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유남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그는 이내 서다희에게 지시했다.“염혜란 쪽 일은 잘 지켜봐야 해. 절대 실수는 안 돼. 그리고 제일 좋은 의사를 찾아서 치료를 시켜.”“알겠습니다.”유남준이 서다희에게 지시를 내릴 때 병원에는 이미 여러 전문의가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이 전화를 받았을 때 의사가 말했다.“민정 씨, 국내 전문가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바로 염 여사님 검사를 진행해도 될까요?”“전문가요?”박민정은 전문의를 보낸 적이 없는데 모두 도착했다는 소식에 의아함을 느꼈다.“그 전문의들은 누구 지시로 온 건가요?”의사도 의아해하며 물었다.“민정 씨가 지시한 게 아닌가요? 잠시만요,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확인해 본 결과 그 전문가들은 정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박민정은 함미현에게 연락하여 그녀가 지시한 것인지 물었다.함미현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윤소현 아닐까요?”‘윤소현?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지.’박민정은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이건 윤소현 방식 같지 않아서요. 같이 가서 확인해 보죠.”“그래요.”박민정과 연지석은 점심을 먹은 후 병원으로 향했다.연지석은 아직 회사에서 자리 잡지 못해 잠시 PMJ 그룹에 머물고 있었다.에리는 여러 번 그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매번 매니저에게 막혔다.“네가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아니야.”이미 유남준에게 당한 적이 있던 터라 매니저는 에리가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기를 원했다.“알았어.”에리는 체념하며 매니저를 따라갔다.한편 박민정과 함미현은 병원에 도착해 전문가들을 만났다.의사들은 그냥 돈이 많다고 해서 초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의사들은 박민정과 함미현을 쳐다보고는 바로 박민정에게 다가갔다.“정 대표님
함미현은 정수미가 염혜란에게 의사를 붙여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정말 좋은 마음에서 보낸 걸까?’속으로는 의심했지만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요. 엄마.”“내가 해야 할 일이지. 널 이렇게 키우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안 그래도 기회만 되면 보답하고 싶었어. 다 나으면 같이 병문안 가자.”정수미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전화를 끊은 함미현이 박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다 들으셨죠?”“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좋은 마음으로 보낸 걸까요?”함미현은 여전히 믿지 못했다.박민정도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분석했다.“정수미가 정말로 아주머니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그렇긴 하지만 제 앞에서 착한 척만 하는 거라면요?”함미현은 여전히 정수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다.윤소현이 그녀에게 정수미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염혜란을 살펴본 전문가들이 병실을 나왔다.그들은 함미현에게 염혜란은 치료가 가능하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그럼 얼마나 걸릴까요?”함미현이 바로 물었다.“최대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의사가 답했다.“일주일이요?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함미현은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넸다.박민정은 의사의 말을 듣고 정수미의 성의가 진심 어린 마음이었음을 눈치챘다.정말 염혜란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염혜란이 건강을 회복하면 함미현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었고 정수미는 그 사실에 관해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의사들은 정수미의 지시로 염혜란을 치료하기 위해 해당 병원에 남아 있었다.함미현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지만 정수미에게 전화를 건 후 병원에 남았다.다른 한 편, 정씨 가문.윤소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엄마, 미현이는 아직 안 들어왔어요?”“양어머니 돌보러 갔어.”정수미는 자신이 의사를 보내 염혜란
함미현은 병원에서 염혜란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아직 말은 못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다.“엄마, 정말 나를 전혀 기억 못 하는 거야?”함미현이 염혜란에게 물었다.염혜란이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갈라진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해 보였다.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두려워하는 듯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미현아.”윤소현이 문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윤소현의 등장으로 염혜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함미현은 그녀에게로 향했다.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함미현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소현 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윤소현은 그녀의 겸손한 태도를 즐기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별일은 아니고 혼자서 아주머니를 돌본다고 하길래 도와주러 왔어.”“도와주신다고요?”함미현이 놀라며 손을 저었다.“아닙니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나쁜 년.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도와줄 리 없어. 또 민정 씨에게 해코지하려고 그러나?’“우리 사이에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이제 한 가족이니 언니로서 네 일을 모른척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윤소현은 그 말과 함께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병실로 향했다.“어이구, 아주머니 상태는 왜 아직도 이래? 일주일이면 괜찮아진다고 하지 않았어?”함미현은 윤소현을 따라 들어오며 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의사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호전이 있겠죠.”윤소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염혜란의 옆으로 갔다.염혜란은 윤소현을 보자마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미친 듯이 손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엄마!”함미현이 급하게 소리쳤다.윤소현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며 비난했다.“이 미친 여자야!”놀란 윤소현이 손을 들어 염혜란을 때리려고 할 때 함미현이 급하게 그녀에게 사과했다.“소현 씨, 제발 너그럽게 봐주세요. 엄마가 아프셔서 그러는 거예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평소 같으면 윤소현은 절대 이런 상황을 참지 않았
윤소현은 함미현과 함께 병실에 있으면서 염혜란을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이 보낸 경호원들이 너무 철저히 지키고 있어 그녀가 염혜란에게 접근할 때마다 감시를 받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윤소현은 염혜란에게 손댈 기회가 없었다.저녁이 되어 윤소현은 함미현과 함께 간병인 실로 향했다.문 하나만 열면 바로 염혜란에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새벽쯤 윤소현은 밀려오는 잠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조심 염혜란의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염혜란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윤소현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지시했지만 직접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믿을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윤소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약과 주사기를 꺼내 염혜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통증에 의해 깨어난 염혜란은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소리를 질렀다.깜짝 놀란 윤소현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염혜란은 간병인을 했었고 시골 출신이라 건강을 회복한 후 체력은 임산부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윤소현의 손을 잡고 주사기를 떨어뜨렸다.그때 소란스러운 소리에 병실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켰다.“뭐 하는 거야!”윤소현은 급히 주사기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저는 그냥 일어나서 아주머니 상태를 확인한 거예요. 왜 들어오셨죠? 깜짝 놀랐잖아요.”소란스러움에 깨어난 함미현이 달려왔다.병실 안에서 염혜란이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왼손은 오른팔을 감싸고 있었다.“엄마, 왜 그래?”놀란 함미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염혜란에게 달려갔고 염혜란은 윤소현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더니 입에서 거품을 뱉어내며 쓰러졌다.윤소현은 그 모습을 보고 남몰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이 늙은 년을 처리했어!’“빨리. 빨리 의사를 불러.”함미현은 급하게 응급 벨을 눌렀다.다른 한편 박민정은 갑자기 꿈속에서 깨어났고 선잠을 자던 유남준도 그녀의 기척에 잠에서 깼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정씨 가문.정수미는 단잠을 자던 중 전화로 인해 깨어났다.그녀는 전화를 받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들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정말 그렇게 말했나요?”“네. 제가 똑똑히 미현 아가씨가 하는 말 들었습니다. 미현 아가씨께서 돈과 권력을 위해 대표님을 속이셨다고 하셨어요. 말씀하시면서도 대표님을 엄마가 아닌 대표님이라 지칭하셨고 자기 때문에 염혜란이 그렇게 된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함미현과 윤소현을 지켜보던 사람은 함미현이 한 말만 듣고 윤소현이 한 말을 듣지 못했다.정수미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그래서 뭘 속였죠?”사실 정수미도 속으로 생각하는 바는 있었지만 자기 생각을 믿기에는 너무 충격적이었다.“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아마 미현 아가씨가 소현 아가씨를 두려워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정수미는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침대에서 일어난 그녀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오싹함을 느꼈다.“알았어요. 주소 보내줘요. 염혜란 씨 보러 가야겠어요.”“네. 알겠습니다.”정수미는 전화를 끊고 손을 내려놓았다.발코니로 걸음을 옮긴 그녀는 검을 하늘을 바라보며 공허하고 슬픈 마음을 느꼈다.그녀는 단지 자신이 낳은 딸, 이 세상에 있는 그녀의 유일한 혈육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딸이 자신을 미워하기를 원하지 않았다.‘왜 미현이는 내가 염혜란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걸까?’정수미는 목구멍이 뭔가에 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무슨 일이 있어도 진실을 밝혀야 했다. 함미현이 그대로 자신을 오해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정수미가 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몸도 안 좋으신데 쉬시는 게 어떠세요? 월요일 아침에 병원에 가셔도 되잖아요. 길이 꽤 멀어서 최소 세 시간 이상 걸릴 거예요.”정수미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차에서도 쉴 수 있잖아요.”“알겠습니다.”기사가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하자 정수미가 눈을 감았다.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어렵게 얕은 잠에 빠졌지만 꿈에서 20여 년
정수미는 박민정의 시선을 마주하고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낯설지 않은 눈이었다.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박민정은 정수미와 마주치자 예의 있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정 대표님. 오랜만입니다.”정수미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두 딸 때문에 정수미는 박민정에게 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그래. 오랜만이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병원에 당연히 친구 보러 왔죠. 정 대표님도 그렇지 않으세요?”박민정은 정수미가 염혜란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그럼 같이 갈까요?”박민정이 제안하자 정수미는 거절하지 않고 대답했다.“좋지.”박민정은 앞서 걸었고 유남준은 그녀의 옆에서 따라갔다.정수미는 그 둘을 보며 윤소현이 항상 말하던 박민정과 유남우의 관계를 떠올렸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뒤따르던 정수미가 유남준에게 말했다.“유 대표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함께 오시는 걸 보니 아내를 정말 아끼시는군요. 앞으로도 아내를 잘 지켜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지 마시고요.”정수미의 말에 유남준과 박민정은 모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박민정은 정수미가 자신의 딸인 윤소현을 위해 가시 돋친 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까지 그녀는 유남우에게 관심을 둔 적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유남준은 정수미의 말을 알아차리고 돌아서며 말했다.“저는 제 아내를 믿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가정사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딸이나 잘 보살펴 주시죠.”정수미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으며 말문이 막혔다.옆에서 걷고 있던 비서가 정수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유남준이 정말 박민정과 유남우 사이의 일을 모르는 걸까요?”“글쎄. 모른 척하는 사람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지.”정수미는 딸인 윤소현의 말이 맞다고 믿으며 유남준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두 일행은 동시에 수술실 앞에 도착했다.함미현과 윤소현은 박민
“어휴,”김인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년간 알고 지냈던 유남준을 떠올려본 김인우는 그가 농담 삼아 하는 말도 알고 보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래도 이번만큼은 정말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유남준이 걸어왔다.“오늘 수고 많았어.”깜짝 놀란 김인우가 물었다.“남준아, 일단 칭찬부터 하고 죽이려는 건 아니지?”그 말에 유남준이 김인우를 흘겨보았다. 이 사람에게 정말 피해망상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인우를 무시한 채 유남준은 박민정과 함께 박예찬을 데리러 갔다.조하랑은 유남준의 앞에서 이토록 겁을 먹은 김인우를 바라보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맨날 내 앞에서 잘난 척만 하더니, 너도 이렇게 쩔쩔매는 사람이 있었네.”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때 나한테 부탁했던 일은 잊었나 봐요?”조하랑은 그제야 자신이 김인우를 이용해 강연우를 쫓아냈던 일을 떠올리며 상황 파악을 마치고는 서둘러 사과했다.“미안해요, 방금은 내가 깜빡했나 봐요. 진짜 미안해요.”김인우는 조하랑에게서 사과를 받고 나서야 더 추궁하지 않았다.윤소현은 멀리서 티격태격 중인 김인우와 조하랑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리고 화목하게 웃고 있는 박민정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유남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서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남우 씨.”“왜?”유남우가 고개를 숙여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죠.”윤소현은 오늘 활동을 통해 유남우와 조금 더 가까워지길 바랐지만 그는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평범한 활동들조차 전부 거절했다.“그래.”사실 유남우는 그저 일찍 집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다.윤소현은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남우 씨...”윤소현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유남우의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는 윤소현에
윤소현 팀의 학부모들은 죽기 살기로 뛰었지만 김인우가 속한 팀은 마치 누가 이기든 딱히 상관없다는 듯 일부러 느릿느릿 뛰고 있었다.“이 사람들, 다 뭐 하는 거야?”박예찬이 하품하며 말했다.“역시 어렵겠어요. 서로 눈치 보고 그러는 거죠, 뭐.”“그럼 나한테는 볼 눈치가 없다는 거야?”김인우가 혀를 찼다.“유남우랑 정씨 가문에 비하면 아저씨는 좀 꿇리지 않아요?”박예찬이 대꾸했다.그리고 김인우는 아이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그는 이미 박예찬에게 그 자동차를 얻어준다고 약속까지 했으니 한 번 뱉은 말은 지켜야만 했다.김인우는 그대로 윤소현의 쪽으로 걸어갔다.“지훈아, 이 자동차 아저씨한테 팔래? 나중에 아저씨가 네가 원하는 거 사줄게. 어때?”처음으로 박예찬을 완벽하게 이긴 유지훈은 한껏 들떠 있었다.“안돼요! 이건 제가 이겨서 받은 거란 말이에요. 예찬이도 갖고 싶으면 노력해서 얻으라고 하세요.”오늘은 유지훈이 드디어 박예찬을 이긴 날이었다. 아이는 어린 마음에 승리의 기쁨에 도취해 있었다.김인우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뒤를 돌아 유남준을 바라보며 아프리카로 보낸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길 바랐다.유지훈처럼 유치한 아이가 아니었던 박예찬은 김인우에게 다가가 말했다.“아저씨, 그냥 두세요. 장난감 하나 갖고 뭘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그 말을 들은 윤소현이 비웃으며 말했다.“장난감 하나도 못 얻는 주제에 그렇게 큰소리를 쳐?”박예찬의 화를 돋우기는 겁났던 유지훈도 눈치를 봐가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이건 예찬이가 가질 수 없는 거야.”박예찬은 그런 두 사람을 무시하며 김인우의 팔을 잡았다.“아저씨, 우린 다른 거 하러 가요.”“그래.”김인우는 아이의 말에 흔쾌히 대답했다.그 역시 윤소현이 미리 다른 부모들과 짜고 치는 고스톱 중이라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윤소현은 박예찬이 다른 상품을 원하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다시 다른 학부모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세 사람 중 조하랑이
“잘 되고 있어요. 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에요.”“그럼 다행이네요.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민정 씨.”이윽고 손연서는 박민정의 손을 끌어 잡으며 말했다.“제가 인맥이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이 몇 있으니까, 필요하면 소개해 줄게요.”“네, 그럼 굳이 사양하진 않을게요.”박민정이 웃으며 대답했다.도훈 엄마도 다가와 말을 걸었다.“예찬 엄마, 우리 집이랑도 협력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그래요.”박민정은 흔쾌히 수락했다.지원의 엄마도 민망한 기색을 보이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다른 학부모들 몇몇을 데리고 도움을 제안했다.박민정은 예상치도 못한 장소에서 여러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역시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는 건 나쁠 게 없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한편, 윤소현과 유남우는 먼 곳에서부터 박민정의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딴 사람들, 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지.”윤소현이 작게 중얼거렸다.오늘 온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미 최현아에게서 문자를 받은 상태였고 윤소현의 친정이 그 유명한 정씨 가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여기저기서 그녀에게 다가와 아부를 떨어대기 시작했다.그 모습에 윤소현의 눈빛에는 자부심만 가득 들어찼다.“소현 씨, 듣기로는 조금 이따가 계주 경기가 있을 거래요. 그런데 소현 씨는 지금 임신 중이시니까 뛰면 안 되잖아요. 저희가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경기를 취소해달라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 엄마가 아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다른 엄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맞아요, 맞아요. 취소합시다. 임신한 상태에서 뛰면 안 되죠. 아이부터 지켜야 하는데.”하지만 그 말에 유지훈은 대놓고 싫다는 기색을 내비쳤다.“안돼요, 절대 취소하면 안 돼요! 계주 경기 상품이 한정판으로 새로 나온 차인데, 저랑 예찬이 둘 다 그걸 갖고 싶어 하거든요. 제가 무조건 갖고 말 거예요!”사실 유지훈에게 그 차는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지만 박예찬이 유치원에 온 이후로 자신이 항상
잠시 생각하던 유남준이 말했다.“앞으로 내가 너 만나러 올 때마다 먼저 네 왼손을 잡을게. 어때?”박민정은 처음에는 조금 번거로운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떠올려보니 그 정도 번거로움은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좋아요.”유남준은 말없이 박민정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이 이제 가끔 어린애처럼 굴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모만 빼면 유남준과 유남우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들의 뒤에 서 있던 유남우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고, 윤소현의 얼굴은 화가 난 나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비록 조금 전의 일이 단순한 오해라는 걸 알긴 하지만 윤소현은 여전히 속이 상했다. 왜 유남우도, 유남준도 모두 박민정의 편만 드는 걸까?“남우 씨, 만약에 나랑 박민정 둘 중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면 남우 씨는 누굴 선택할 거예요?”윤소현이 물었다.유남우는 그런 윤소현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부드러운 눈빛을 장착한 채 대답했다.“그런 질문은 아무 의미 없어.”윤소현은 그 대답에 목이 메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유남우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난 남우 씨가 정확히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남우 씨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박민정을 더 좋아하는 거예요?”그녀는 자신이 박민정에게 밀리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유남우는 왜 박민정을 좋아했던 걸까?박민정은 유남우를 자신보다 먼저 만난 것뿐 아닌가? 만약 유남우를 먼저 만난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그가 지금 좋아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넌 내 와이프야. 그게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야.”유남우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그 미소에는 따스함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소현은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말했다.“정말이죠? 그럼 오늘 밤엔 꼭 나랑 같이 있어 줘야 해요.”잠시 머뭇거리던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 말에 금세 눈물을 그친 윤소현
박민정은 미소를 띤 채 유남우에게 걸어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별과 바다를 품고 있는 듯했다.유남우는 넋을 잃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눈 부신 햇살에 유남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은 유남준과 똑같았다.하지만 박민정은 끝까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유남우를 보며 말했다.“가요.”유남우는 박민정이 자신을 유남준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앞쪽으로 걸어갔다.임신 중인 박민정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아무 말 없는 유남우에 혼잣말을 시작했다.“이따가 예찬이한테 말 좀 잘 해줘요. 화가 좀 난 것 같은데, 남준 씨를 안 부른 제 탓이에요.”유남우는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실수로 이 평온한 순간을 깨뜨릴까 봐 말을 최대한 아꼈다.그들 뒤에서는 전화 통화를 마친 윤소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유남우와 박민정의 뒷모습이 들어왔다.윤소현의 동공이 순식간에 좁아지며 두 눈빛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그때, 타이밍 좋게 유남준의 차도 도착했다.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걸어간 윤소현은 이내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박민정을 향해 소리쳤다.“박민정, 염치도 없어?”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윤소현을 발견했다.그리고 유남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그만해, 윤소현.”그제야 박민정은 자신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남우 씨였어요?”박민정은 확신할 수 없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두 걸음 더 다가와 유남우의 팔을 단단히 잡은 윤소현이 말했다.“그럼 누구겠어? 유남준인 줄 알았어?”박민정은 자신이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유남우 역시 자신의 실수를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박민정은 퇴근 후, 유치원으로 향했다.김인우와 조하랑 역시 박예찬의 가족을 대표해 참여하기로 했다.두 사람을 발견한 박예찬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두 사람, 방해만 안 되면 다행이네요.”그 말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야, 이 녀석아. 내가 널 방해할 사람처럼 보이냐?”마음의 상처를 입은 조하랑 역시 입을 열었다.“예찬아, 아줌마 상처받았어.”참다못한 박민정이 박예찬을 보며 말했다.“예찬아, 예의를 갖춰야지. 아저씨랑 아줌마는 널 위해서 쉬는 시간까지 포기해가며 여기까지 와 주신 거야.”박민정의 말에 박예찬은 금세 불만 섞여 있던 표정을 감추었다.“그럼 부탁드릴게요.”“그래야지.”김인우가 대답했다.할아버지가 육아에 미리 적응하라는 명목으로 그와 조하랑을 유치원으로 보내지만 않았어도 김인우는 이런 따분하고 지루한 활동에 참여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가장 성가신 점은 지금 날씨가 너무 더웠다는 것이다.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 박예찬은 박민정에게 다가와 물었다.“엄마, 그 사람은 안 왔어요?”유남준에게 가까스로 호감을 갖게 된 아이였지만 자신의 유치원 활동에 와 주지 않았다는 조금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말했다.“아저씨랑 아줌마가 와 준다고 해서, 굳이 아빠한테까지 얘기하진 않았어.”아빠?박예찬은 그 호칭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엄마, 예전에 했던 말 벌써 까먹은 거예요?”어딘가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인 박민정이 물었다.“무슨 말?”“아무것도 아니에요.”박예찬은 어딘가 화가 난 듯했다.그는 비록 김씨 가문의 집에서 잘 지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민정과 유남준의 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보다 어느 정도 나아졌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박예찬은 조하랑과 김인우에게 다가갔다.박민정은 화난 모습으로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단순히 유남준이 와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그녀는 뒤늦
함미현은 앞으로 정씨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고 윤소현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그리고 윤소현은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함미현이 이런 속셈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최근 들어 정수미에게 대놓고 미움받고 있던 윤소현은 어쩔 수 없이 유씨 가문으로 돌아가야 했다.유남준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사에서 지내다시피 했던 탓에 집에는 항상 그녀와 고영란만 있었다.고영란은 별다른 일만 없으면 두 손자들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하거나 다른 부잣집 사모님들과 함께 미용실로 가 관리를 받으며 윤소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렇게 윤소현은 집에 혼자 남아 속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불만을 삭여야 했다.집으로 돌아온 최현아가 말을 걸어왔다.“동서, 이제 배도 많이 나왔네. 도련님이 집에서 안 챙겨줘?”그 말을 듣는 윤소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없어요. 매번 들어오라고만 하면 항상 야근 핑계를 대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최현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말을 이었다.“최근에 민정이가 회사 차렸다는 건 알고 있지?”“모를 리가 있겠어요?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우리 윤씨 가문 사업을 인수했더라고요.”윤소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났을까?”최현아는 일부러 윤소현을 자극하기라도 하듯 의문을 제기했다.사실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어디서 났겠어요? 아주버님이랑 어머님께서 주신 거겠죠.”윤소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박민정에게 대단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예전에는 항상 박민정과 윤소현의 사이에 불화가 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최현아였지만 계속해서 패배의 쓴맛만 보는 윤소현의 모습이 점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두 올케가 서로 영원히 지치지 않고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동서도 엄연한 유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어머님의 며느리잖아. 게다가 뱃속에는 유씨 가문의 아이까지 품고 있고. 그런데 어머님께선 왜 아직도 그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에리의 모습을 보던 연지석의 눈빛이 차가웠다.이때, 하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형, 박민정은 또 왜 건드린 거야? 피도 안 섞인 애들 아빠 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배 속에 있는 쌍둥이 애들까지 형이 다 떠안으려고?”하민재가 답답한 듯 쏘아붙였다.연지석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이번에 돌아온 건 정말 일하러 온 거야. 그러면서 민정이도 한 번 보살펴주고.”“정말이야?”하민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정말이지.”연지석은 일부러 태연하게 말했다.“민정이는 이미 유남준이랑 새 출발 하기로 한 것 같아. 나도 그거 다 알면서 민정이한테 매달릴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야.”하민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형, 세상에 여자는 많아. 제발 천천히 좀 찾아.”“응, 알겠어.”그때, 누군가가 연지석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연지석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확인해보니 설인하가 커피를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설인하가 뭐든 빨리 배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아는 박민정이 그녀를 연지석의 비서로 배치해준 것이다.연지석은 설인하를 발견하자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설인하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얘기하고 끊어.”연지석이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설인하는 커피를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부사장님, 여기 커피 가져왔습니다.”“네.”연지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설인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어색하게 서 있던 설인하가 입을 열었다.“그, 연 대표님. 저한테 아무 일이라도 맡겨주실 수 있을까요?”설인하는 연지석을 따라다니며 중요한 일을 맡고 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정작 이렇게 잡일만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연지석은 설인하의 말에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한 그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지석은 단순히 그녀의 얼굴만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어떤 일을 하고
유남준의 대답에 박민정은 기가 막혔다.“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요? 뭐, 연지석이랑 계약 취소하고 에리도 해고할까요?”유남준은 깊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수만 있다면...”“절대 안 돼요!”박민정이 그의 말을 끊었다.“제 친구인 것도 있긴 하지만, 능력을 봐서라도 절대 남준 씨 말대로 해줄 수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예전이었으면 무슨 일이 있든 박민정은 항상 유남준의 말대로 했을 텐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유남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그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내가 하려던 말은, 가능하다면 그 두 사람이랑 조금 거리를 뒀으면 좋겠다는 거야. 내가 질투 나니까.”유남준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을 담아 해명했다.그 말은 들은 후에야 박민정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네요. 말도 끝까지 못 듣고.”잠시 망설이던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걱정 마요. 난 그 두 사람을 단순한 친구로만 생각할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으니까요.”비로소 안심한 유남준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박민정은 그대로 유남준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오늘 이렇게 온 거, 쉬는 날이어서 온 게 아니죠?”“내 회사야. 내가 쉬는 날이라고 하면 쉬는 날이지.”박민정은 아직도 유남준의 회사가 IM 그룹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일반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우린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얼른 회사로 돌아가서 다시 일 봐요.”그녀 역시 회사 운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리더인 회사 대표부터 게으른 태도로 일한다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없었다.“알겠어.”유남준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졌다.오늘에서야 힘들게 민수아와의 데이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