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는 지금 자신감이 넘쳐흘렀다.그는 사지가 멀쩡하고 아무런 장애도 없으며 외모와 집안까지 훌륭했기에 유남준보다 못할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매니저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직접 부딪혀봐야 포기하겠지.’...두원 별장.박민정은 기분을 가라앉힌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자신이 왜 울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거실로 나오자 유남준이 이미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들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서 와서 아침 먹자.”“안 먹을래요. 출근할게요.”말을 마친 박민정이 나가려 했지만 유남준이 그녀를 막아섰다.“아침은 먹고 가.”그의 태도를 보니 자신이 먹지 않으면 보내줄 것 같지 않자 박민정은 마지못해 식탁에 앉아 대충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계속 박민정을 지켜보던 유남준은 그녀의 눈가가 여전히 붉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말실수를 자책했다.의사가 임산부가 화내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했다.“많이 먹어. 앞으로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유남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박민정은 자신을 낮추는 유남준의 태도에도 여전히 쌀쌀맞게 대꾸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사면 돼요.”그녀는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다 먹었으니 출근할게요.”유남준은 그녀가 또 화낼까 봐 두려워 차마 다시 막아서지 못했다.그는 멀어지는 박민정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서다희도 두원 별장에 유남준을 데리러 왔다.그는 불편한 심기로 별장에서 나오는 박민정을 바로 마주했다.“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서다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박민정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서다희를 바라보았다.“서 비서님, 저는 이미 대표님과 이혼했어요. 그러니 앞으로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민정 씨라고 불러주세요.”서다희는 순간 당황했다.‘왜 이렇게 화가 나신 거지? 어젯밤까지만 해도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잘 설득해서 성공적으로 별장에 머물게 했다고 하지 않으셨
박민정도 유성혁의 일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크게 궁금한 건 없었다.다만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차로 그들을 치려고 했던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뿐이었다.‘남준 씨가 조사하고 있겠지.’예상대로 유남준은 이미 병원에 있었다.유성혁 병문안을 왔다는 명목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방문이었다.겁에 질린 최현아는 다리마저 후들거렸다.유석진도 내심 두려움을 느끼면서 겉으로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며 안부를 건넸다.“남준아, 우리는 한 가족 아니냐. 내가 너를 해칠 리가 있겠느냐?”“맞아요. 우리 가족 모두가 남준 씨가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유남준은 그들의 비굴한 모습에 지겨운 표정을 지으며 단호히 말했다.“다음은 없어요.”말을 마친 유남준이 병실을 나섰지만 병실에는 여전히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유성혁은 아버지의 손을 꽉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저 너무 무서워요.”“두려워하지 마. 아빠가 있잖니. 그 녀석이 너를 해치지는 못할 거다.”유석진은 아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없었다.유남준이 돌아온 후, 그가 어떤 존재인지 유석진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한편 최현아는 이들 부자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그녀는 핑계를 대고 병실을 나섰다.핸드폰을 꺼내자 윤소현이 보낸 문자가 있었다.[회사에 계세요?][아니. 병원에서 남편 돌보고 있어. 무슨 일이야?][그냥 물어본 거예요.][요즘 회사에서 잘 안 보이던데 임신이 힘들어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조심해. 우리 남편도 박민정 그년 때문에 큰 피해를 봤잖아.]최현아가 일부러 불을 지폈다.윤소현도 최현아의 뜻을 알았지만 모른 척 차분하게 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남우 씨는 아주버님이랑 달라요. 저는 그 사람 믿어요.]윤소현이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지만 최현아는 담담한 척하는 윤소현을 속으로 조롱하며 문자를 이어갔다.[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지. 박민정
정수미는 동하의 당뇨병이 유전이라는 말에 깊은 혼란에 빠졌다.‘동하가 미현이에게서 유전된 거라면 미현이 역시 윗세대에서 유전된 거 아닌가? 하지만 나랑 그 사람 가족 중 당뇨병은 없는데...’표정이 굳어진 정수미는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겉으로나마 함미현을 위로했다.“미현아, 너무 자책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어떤 엄마든 자기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라지 그렇지 않은 엄마는 없단다.”함미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삼켰다.“네.”정수미는 함미현의 슬픈 눈빛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꼈다.‘내가 어떻게 우리 딸을 의심할 수 있지? 미현이는 분명 내 딸이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나 겨우 찾은 딸인데 다시 잃을 순 없어.’“선생님. 돈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습니다. 제 손자의 건강만 찾아주신다면 선생님과 이 병원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톡톡히 보상해 드리겠습니다.”“걱정하지 마세요. 정 대표님. 저희는 최선을 다해 도련님의 건강을 찾아드릴 것입니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서현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그녀는 이곳에 있는 게 지겨웠다.‘내가 왜 남의 아이를 위해 여기 있어야 하지? 남우 씨 혼자 회사에서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박민정이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남우 씨에게 접근하지는 않겠지?’“엄마, 미현이도 많이 지쳤을 테니 얼른 가서 쉬세요. 의사도 동하 꼭 낳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요.”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미현을 걱정했다.“가자, 미현아. 동하는 병원에 맡기고 우리도 밥 먹으면서 조금 쉬자.”“네.”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을 나섰다.윤소현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모녀 같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질투심이 솟은 그녀는 함미현을 바로 폭로해 버리고 싶었다.만약 함미현의 정체를 폭로한다면 정수미는 끝없이 친딸을 찾으려 할 것이다.‘안돼. 이제 와서 폭로할 수는 없어. 계속 친딸을 찾다가 정말 박민정까지 조사하면 어떻게 해?’지금 정수미가 함미현에게 보이는 태도로 보았을 때, 박민정이
정수미가 상처받을까 걱정된 비서가 급히 덧붙였다.“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죠. 아가씨께서 어릴 때부터 대표님 곁에서 자라신 게 아니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정수미도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른 질문을 건넸다.“그럼 소현이는 날 닮았어?”길연서는 말문이 막혔다.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윤소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매번 실수해 놓고 성질은 있는 대로 부린다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윤소현이 매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정수미가 나서서 뒷수습을 해줘야 했다.정수미와 윤소현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길연서가 정수미를 따르기 전, 정수미는 지금처럼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당시 정수미는 조용하고 끈기 있게 참아내며 혼자 모든 것을 이겨냈다.지금의 위치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소현 아가씨는 참 예쁘세요. 대표님 젊었을 때처럼 당당하고 도도한 매력이 있으시죠.”길연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정도로밖에 답할 수 없었다.똑똑한 정수미는 길연서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결국 두 딸 모두 나를 닮지 않았다는 말이네. 하지만 뭐 어때? 모든 자식이 엄마를 닮을 수는 없는 일이잖니.”그녀가 자신을 위로했다.비서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해 볼까요?”“그건 절대 안 돼.”정수미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미현이는 내 딸이야. 내가 친자 검사를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니?”정수미의 말에 길연서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수미가 위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 안에서 함미현은 음식을 먹으며 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함미현은 정수미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잣말을 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박민정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유남우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그는 박민정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물었다. “유 대표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저기와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말에 유남우는 가슴이 아팠다.그는 아무렇지 않을 척 말했다. “괜찮아. 며칠 전에 비를 맞았더니 감기 기운이 있나 봐.”말을 마친 그는 박민정을 향해 손짓했다.“이리 와서 앉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박민정이 유남우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말씀하세요.”“일단 나를 좀 편하게 대해주면 안 될까?”유남우가 물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유남우는 그녀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됐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 “내 속마음을 좀 털어놓고 싶어서 너를 불렀어.”박민정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우가 말했다. “난 더는 호산 그룹을 맡고 싶지 않아.”“왜요?”박민정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난 처음부터 형의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어. 내가 대표의 자리에 앉은 건 형이 기억을 잃고 눈이 안 보여서였어. 어머니는 힘들게 키운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두려워서 나를 그 자리에 앉혔지. 이제 형의 몸이 좋아졌으니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어 유남우가 말했다. “될 수록이면은 내 말을 형에게 전해줘. 나는 예전처럼 자유로운 게 좋다고 말이야.”“이런 얘기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박민정이 말했다.그녀도 유남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유남우의 결혼식에서도 그는 호산 그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유남우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바로 가서 따뜻한
유남우는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차에 타서 병원으로 갔다.그가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홍주영은 밖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민정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걱정하는 표정이었다.그녀는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홍주영이 막았다.“절대 연락하지 마세요.”“왜요?”박민정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방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뒷문으로 나왔어요. 사모님께 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의 몸이 안 좋은 것이 소문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이사회를 해서 도련님을 해임하려 할 것입니다.”홍주영은 계속 말했다. “도련님은 생각이 많으신 분이라 해임된다면 병세가 더욱 심해질 것이에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괜찮겠죠?”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홍주영한테 물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제때 병원에 왔으니 괜찮아요.”이 말을 듣고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여서 고영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 복도 밖에서 유남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홍주영은 임신 중인 박민정을 걸상에 앉혔다.“좀 쉬세요.”“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홍주영은 박민정의 고운 얼굴을 보고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오른쪽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데도 박민정의 카리스마를 가릴 수 없었다.홍주영은 유남우가 왜 박민정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여자인 그녀가 봐도 참 예뻤다. “왜요?”박민정은 줄곧 자신을 보고 있는 홍주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자 홍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너무 이쁘셔서요.”박민정은 바로 대답했다. “비서님도 예뻐요.”홍주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홍주영은 박민정과 윤소현처럼 그 정도로 이쁘지 않다. 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이 이쁘면 어떤 일들은 쉽게 풀려나가요. 이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예
홍주영은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도련님께서 치료하려고 해외로 가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사귀었겠네요.”박민정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세상은 원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많은 것들은 진작에 정해져 있는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박민정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아직 유남우한테 감정이 있는 줄 알았다.홍주영이 말했다. “민정 씨, 도련님한테 마음이 있다면 고백하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민정 씨가 있어요. 오직 민정 씨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표정이 굳어졌다.“주영 씨. 대표님과 저는 그냥 어렸을 때 인연이 있을 뿐, 사귄 적도 없어요. 지금 저는 이미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어요. 남우 씨도 결혼했고요. 우리는 각자 자식도 있어요.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 남우 씨와 사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확실한 건 전 지금 남우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홍주영이 오해할까 봐 이어 말했다.“대표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전에도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박민정의 말을 듣고 홍주영은 그제야 자기가 오해한 것을 알았다.“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네요.”“괜찮아요.”박민정은 말을 다 하고 시간을 보았는데 벌써 오후 6시가 다 되어갔다.마침내 의사가 응급실에서 걸어 나왔다. 유남우의 상태가 이미 안정되었다고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유남우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주영 씨, 전 오늘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남우 씨 좀 부탁해요.”유남우가 무사하니 박민정은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홍주영이 또 오해할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네.”박민정은 이제야 떠났다.그녀가 병원을 나간
병원으로 달려간 윤소현은 유남우의 곁을 지키는 홍주영을 보고 말했다. “왜 남우 씨가 병원에 입원해요? 어떻게 돌봤길래 이렇게 되냐고요?”금방 의식이 돌아온 유남우는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먼저 들어가 봐.”“알겠어요.”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갔다.유남우가 자기 비서를 감싸는 걸 보고 기분이 언짢아진 윤소현이 말했다. “남우 씨,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난 그냥 남우 씨가 너무 걱정돼서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임신 중이라 호르몬으로 인해 감정 변화가 많다고.”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여동생이랑 조카 데리고 검진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거의 다 했어요. 엄마가 가라고 하셨어요. 금방 결혼했으니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유남우에게 기댔다.그녀가 갑자기 자기한테 기대자 유남우는 너무 불편해서 표정마저 굳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윤소현을 밀어냈다.윤소현도 사람이고 여자다. 유남우가 자신을 향한 애정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우 씨, 우리는 이미 결혼했어요.”유남우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 들어.”윤소현은 순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유남우가 신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와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받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의 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깊어져 갔다. “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윤소현은 나갔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남은 인생이 망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걱정했다.윤소현은 병원 안의 공원에 가서 산책하려 했는데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308호실 환자 가족분입니까?”“맞는데요. 무슨 일이죠?”윤소현은 의아해서 물었다.“다른 게 아니라 방금 환자 가족 두 분이 병원비를 많이 내서요. 근데 우리 쪽에서는 연락이 안 되네요
박민정은 물컵을 챙긴 뒤 보안실로 향해 CCTV 영상을 확인했다.그녀는 경비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넸고 곧바로 어제 퇴근 후의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영상 속에서 주영리가 자신의 물컵에 뭔가를 넣는 모습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좋아, 아주 좋아.’증거는 충분했다.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박민정은 일부러 화장실에 간 척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물컵 속 남은 물을 감식 의뢰하기 위해서였다.컵에 남아 있는 물에 약물이 들어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으니까.병원을 다녀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고 회사 내에서는 이를 두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생겼다.“보란 듯이 대놓고 결근이네. 뭐, 이제는 최 사장님 같은 백이 있으니까 다 무시하나 봐. 화장실 간다더니 한 시간은 넘게 있었을걸?”질투 어린 목소리가 사방에서 속삭였지만 박민정은 이런 말을 신경 쓸 리 없었다.한편, 주영리는 책상 한쪽에 앉아 있었지만 마냥 긴장을 풀지 못했다.직속 상사인 제임스가 아까 말하기를, 곧 최 사장님이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고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직접 찾겠다고도 했다.주영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설마 최 사장이 박민정의 말을 듣고 그녀의 편을 들어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건 아닐까?그녀는 불안에 휩싸여 일조차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결국, 최 사장이 들어왔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주 비서, 당장 이리 와!”최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주영리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휴게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불안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밖에서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모두 최 사장이 박민정을 위해 직접 나선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박민정을 험담하던 사람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박민정 역시 이 상황을 지켜보며 속으로 비웃었다.‘참 간사하네.’휴게실.최 사장은 들어오자마자 주영리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너, 네가 어제 나를 죽일 뻔한 거 알아?”주영리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최 사장님, 무슨 말씀이
주영리는 우유를 마시며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참나, 그때 밥 먹을 때는 얼마나 고상한 척하던데. 뒤에서는 그렇게 더러운 짓을 하고 있었네요.”옆에 있던 동료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요. 어쩌면 이제 최 사모님이 됐을지도 모르잖아요.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고요.”주영리는 조롱하듯 덧붙였다.“흥, 그 여자가 사모님 자리랑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예쁜 여자는 넘쳐나는데 고작 그런 애가? 겁낼 거 없어요.”다른 여직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맞아요. 겨우 그런 걸로 뭐가 무섭다고. 하!”주영리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때 누군가 외쳤다.“어? 저거 봐, 한정판 벤틀리잖아! 혹시 회사에 또 대형 고객이 온 거야?”그 말을 듣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그 차로 향했다.그리고 곧이어 그 차에서 내리는 박민정을 보고는 다들 말을 잃었다.주영리는 한순간 멍해졌지만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봤죠? 저거 분명 최 사장님 차일 거예요.”곁에 있던 동료가 주영리를 치켜세우듯 말했다.“주 비서님, 진짜 대단하네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요. 저 여자 진짜 못됐네요.”박민정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영리를 발견했다.그녀는 손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주영리는 원래 박민정이 자신에게 보복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 박민정이 고급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같은 부류라고 착각했다.뻔뻔하게도 주영리는 박민정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민정 씨, 어제 재미있었어요?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다고요?”박민정의 손이 번개처럼 빠르게 올라가더니 주영리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팍! 소리가 울리며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주영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파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날 쳤어요? 내가 아니었으면 오늘 민정 씨가 그 고급 차 타고 출근할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천한 주제에 겉으로만 고상한 척하려고?”주변 동료들이 이 장면을 지켜
유남우의 온화한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그래? 정말 우연이네.”그는 여태껏 박민정을 잘 감춰왔지만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두 사람이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이게 유남준에게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어쨌든 형의 겉모습에 속아선 안 돼. 그리고 회사에서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면 진작에 나에게 말했어야지.”유남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뭐든 오빠한테 의지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제힘으로 해내고 싶어요.”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전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그대로 둘 수 없어요? 회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해결할게요.”주영리가 감히 자신을 함부로 대하다니, 그녀는 반드시 주영리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부탁이에요.” 박민정은 손을 뻗어 유남우의 팔을 붙잡았다.“제발, 도와줘요. 네?”박민정의 간절한 애원이었지만 유남우는 난감한 얼굴로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안 돼. 난 네가 걱정돼서 안심할 수가 없어.”박민정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하지만 저는 이 일이 정말 필요해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왜 꼭 떠나야 하는 거예요? 그냥 오빠 형 문제잖아요. 그걸 가지고 저를 강요할 순 없잖아요?”유남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그만하자. 알겠어. 회사 문제는 정리할 시간을 줄게. 하지만 그 뒤엔 같이 떠날 거야.”박민정의 눈빛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지난 1년간 그녀는 모든 걸 유남우에게 맞춰왔다.그를 사랑했으니까.하지만 겨우 이 작은 부탁조차 들어주지 않다니.박민정이 말을 잃고 침묵하자 유남우는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채고 달래듯 말했다.“화내지 마. 다른 곳으로 가도 네가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줄게.”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이 원래는 그를 무시하려 했지만 기침 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왜 이렇게 심하게 기침해요? 혹시 병이 재발한 거 아니에요?”유남우는 그
박민정은 처음으로 유남우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유남우를 부축하며 유남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기요, 형이라는 사람은 원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빠가 몸이 약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어떻게 오빠를 때릴 수 있어요? 게다가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체면 하나 세워주지 않고요.”박민정은 이렇게 지나치게 차가운 형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꾸짖음에 유남준은 마치 목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오빠, 우리 그냥 가요.”박민정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남우에게 말했다.“그래.”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유남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는 순간적으로 막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예전에 자신만을 사랑하던 그녀가 이제는 다른 남자를 이렇게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한편 최 사장의 정보를 모두 조사한 서다희는 돌아오는 길에 사모님과 대표님이 함께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그는 막 부르려던 찰나, 대표님이 방에서 지친 모습으로 나오는 걸 보고 멈췄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서다희는 한 걸음씩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어젯밤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알아냈습니다. 성은 최씨라고 하더군요. 본토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입니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남준이 고개를 들었다.“뭐 해야 할지는 알겠지?”“네.” 서다희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사람을 붙여서 민정이와 유남우를 따라가게 해.”“유... 유남우 도련님이요?”서다희는 놀랐고 그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까 대표님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대표님 동생이었다.하지만 박민정이 왜 유남우와 함께 떠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더는 묻지 않고 명령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박민정은 유남우와 함께 돌아오는 길 내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많이 아프죠?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의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
유남준은 유남우가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의 눈엔 차가운 분노가 서렸다.“유남우, 나한테 설명할 건 없나?”유남우는 여기에 유남준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러니 어젯밤, 박민정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유남준이란 말인가?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박민정은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두 사람의 외모가 이렇게 똑같은데, 왜 유남우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민정아, 먼저 가서 쉬어. 내가 조금 있다가 갈게.”“알겠어요.” 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남준은 단호히 말했다.“안 돼. 민정이는 아무데도 못 가.”겨우 다시 찾은 박민정을 그냥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이 말을 들은 유남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옆 방에서 잠깐 쉬고 있어.”“좋아요.” 박민정은 유남우의 말대로 옆 방으로 이동했다.그녀가 떠난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유남준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민정이가 실종된 게 네가 한 짓이었어?”이젠 부정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남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민정이는 원래부터 내 사람이었어.”이 뻔뻔스러운 말에 유남준은 주먹을 쥐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그런데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그 질문에 유남우는 오히려 비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기억에서 지우는 법이지.”이어 그는 도발하듯 말했다.“형, 충고 하나 할게. 형 것이 아닌 건 억지로 붙잡아봤자 아무 소용없어.”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그 말을 너 자신에게 하는 게 맞겠지. 민정이는 내 아내야. 우리에겐 네 명의 아이도 있어. 그리고 너는 이미 결혼한 몸이잖아. 네 자리로 돌아가서 네 인생이나 책임져!”그러나 유남우는 비웃으며 대꾸했다.“나랑 윤소현은 애초에 결혼한 사이가 아니야. 우린 결혼증명서도 없어. 그리고 그 애? 하하, 그건 내
박민정은 오늘의 유남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남... 남우 오빠...”그녀는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왜 그래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 속엔 격렬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그의 목구멍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고 쓰렸다.박민정이 손을 내리려는 순간, 그는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너 지금 뭐라고 불렀어? 남우 오빠?”그의 눈가는 점점 더 붉어졌다.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박민정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놀라 움찔했다.그리고 며칠 전 꾼 꿈이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도 지금처럼 이상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졌다.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며 말했다.“난 유남우가 아니야. 난 유남준이야!”“너... 날 잊어버린 거야?”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듯했다.박민정은 그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유남우가 아니라고?그렇다면 어째서 두 사람이 똑같이 생겼단 말인가?박민정의 머릿속은 완전히 혼란스러웠다.유남준은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물었다.“말해봐, 지난 1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왜 나를 잊었어? 왜 유남우만 기억하는 거지?’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황당했다.박민정은 그의 말투와 분위기를 보니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가 진짜로 유남우가 아니라면...그녀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합니다.”그리고 덧붙였다.“어젯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박민정은 몇 걸음 물러나더니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이었다.“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저...”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뻗은 다리로 그녀 앞으
“여보세요, 혹시 민정 씨 남자친구 되세요?” 주영리는 일부러 친절한 척하며 물었다.유남우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민정이의 핸드폰이 왜 당신에게 있죠? 누구시죠?”“아, 저는 민정 씨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예요. 오늘 야근하다가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 혹시 무슨 급한 일인가 해서 받았습니다.”주영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이어갔다.“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세요? 혹시 민정 씨가 부탁해서 전화하신 건가요?”“민정이가 집에 오지 않았어요. 혹시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유남우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였다.박민정은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을 것이다.그는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집에 안 갔다고요? 혹시 최 사장님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에요?”주영리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오늘 퇴근 후에도 우리 회사 고객인 최 사장님과 함께 있던데요. 제가 두 사람이 같이 나가는 걸 봤거든요.”그녀는 이리저리 돌려 말했는데 박민정의 명예를 훼손하려는 속셈이었다.“민정 씨가 말하지 않았나요? 전 다 얘기한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남녀가 단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있다니... 혹시...”주영리는 일부러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아니겠죠? 그래도 민정 씨는 그런 사람 같진 않은데요.”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주영리가 노리는 속셈을 정확히 간파했기 때문이다.그는 박민정을 믿었다.“그 최 사장이라는 분 연락처를 알려주실 수 있어요?”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영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여전히 빈정거리는 태도로 대답했다.“저 같은 작은 직원이 고객님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민정 씨는 워낙 예쁘고 사교적이니 아마 알고 있을 거예요.”이어 그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전에 민정 씨가 최 사장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자랑하는 걸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아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우는 더는 말을 섞지 않고 전화를 끊
박민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최 사장의 손에서 벗어나 유남준에게 몸을 던졌다.그녀의 온기가 그의 품에 닿는 순간, 유남준은 깊은 충격 속에 얼어붙었다.온 몸에 힘이 풀린 박민정은 그의 품에 기대며 안도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성채를 찾은 기분이었다.“두 분, 아는 사이인가요?”최 사장은 눈앞의 큰 키에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주춤했다. 그의 강렬한 아우라에 기가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유남준은 품에 안긴 박민정을 다시 한번 꼭 안으며 현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차가운 눈빛으로 최 사장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꺼져.”최 사장은 그의 압도적인 기세에 겁을 먹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떠나며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였어요.”비록 유남준이 누군지 몰랐지만 이 호텔의 최고급 스위트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격을 알고 있던 최 사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달았다.‘박민정 같은 평범한 직원이 이런 남자와 인연이 있을 줄이야...’ 그는 뒷모습이 초라하게 사라졌다.최 사장이 떠난 후, 유남준은 자신의 품에서 안도하며 깊이 잠든 박민정을 보았다. 그는 그녀를 소중히 들어올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힌 그는 그녀가 혹시라도 깰까 봐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다음 침대 옆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1년이었다.그는 드디어 그녀를 찾았다.박민정은 전혀 변한 게 없었고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유남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이 모든 게 꿈일까 봐, 아니면 또다시 그녀가 환영처럼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다행히 그녀의 체온이 그의 손끝에 또렷이 전해졌다. 그녀는 환상이 아니었고 진짜로 그의 앞에 있었다.그러나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서 이리로 와.”서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다. 방
지난번 춤을 추었을 때 박민정은 두꺼운 화장을 해서 얼굴의 흉터를 가렸다.하지만 오늘은 화장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 선명히 드러난 흉터를 보고 최 사장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잡아들며 혀를 찼다.“참 안타깝네. 이렇게 예쁜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망가질 수가 있지?”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덧붙였다.“완벽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흠이 있네! 알았더라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데.”최 사장은 미모에 대한 기준이 높았다. 그는 수많은 미녀와 유명 인사들을 상대하며 자신만의 까다로운 기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그의 말이 들려오는 동안 박민정은 오히려 얼굴의 흉터에 안도했다. ‘이 흉터 때문에 나를 포기해줬으면...’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너무나도 순진한 희망이었다.“하지만...” 최 사장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내려가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몸매는 정말 훌륭하군.”그는 탐욕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 했다.순간 박민정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절대 이런 사람에게 내 몸을 내줄 순 없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렵게 입을 벌린 그녀는 자신의 혀를 세게 깨물었다.순간적인 통증과 입 안에 퍼지는 쇠 맛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통증 덕분에 여태 흐릿했던 그녀의 시야가 또렷해졌다. 마침내 눈을 떠낸 박민정은 모든 의지를 쏟아 최 사장을 힘껏 밀쳐냈다.최 사장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고 놀라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가씨,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깼지?”박민정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꺼져! 아니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최 사장은 그녀의 말에 비웃으며 더욱 대담하게 행동했다.“하하하,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박민정은 그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느끼고 몸을 재빨리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최 사장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강제로 끌어당겼다.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