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미는 동하의 당뇨병이 유전이라는 말에 깊은 혼란에 빠졌다.‘동하가 미현이에게서 유전된 거라면 미현이 역시 윗세대에서 유전된 거 아닌가? 하지만 나랑 그 사람 가족 중 당뇨병은 없는데...’표정이 굳어진 정수미는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겉으로나마 함미현을 위로했다.“미현아, 너무 자책하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어떤 엄마든 자기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라지 그렇지 않은 엄마는 없단다.”함미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삼켰다.“네.”정수미는 함미현의 슬픈 눈빛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꼈다.‘내가 어떻게 우리 딸을 의심할 수 있지? 미현이는 분명 내 딸이야. 그렇게 오랜 세월을 지나 겨우 찾은 딸인데 다시 잃을 순 없어.’“선생님. 돈은 얼마가 들든 상관없습니다. 제 손자의 건강만 찾아주신다면 선생님과 이 병원이 더 발전할 수 있도록 톡톡히 보상해 드리겠습니다.”“걱정하지 마세요. 정 대표님. 저희는 최선을 다해 도련님의 건강을 찾아드릴 것입니다.”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윤서현은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그녀는 이곳에 있는 게 지겨웠다.‘내가 왜 남의 아이를 위해 여기 있어야 하지? 남우 씨 혼자 회사에서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박민정이 내가 없는 틈을 타서 남우 씨에게 접근하지는 않겠지?’“엄마, 미현이도 많이 지쳤을 테니 얼른 가서 쉬세요. 의사도 동하 꼭 낳게 해주겠다고 했잖아요.”정수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미현을 걱정했다.“가자, 미현아. 동하는 병원에 맡기고 우리도 밥 먹으면서 조금 쉬자.”“네.”두 사람은 나란히 병원을 나섰다.윤소현은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모녀 같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질투심이 솟은 그녀는 함미현을 바로 폭로해 버리고 싶었다.만약 함미현의 정체를 폭로한다면 정수미는 끝없이 친딸을 찾으려 할 것이다.‘안돼. 이제 와서 폭로할 수는 없어. 계속 친딸을 찾다가 정말 박민정까지 조사하면 어떻게 해?’지금 정수미가 함미현에게 보이는 태도로 보았을 때, 박민정이
정수미가 상처받을까 걱정된 비서가 급히 덧붙였다.“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일이죠. 아가씨께서 어릴 때부터 대표님 곁에서 자라신 게 아니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정수미도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다른 질문을 건넸다.“그럼 소현이는 날 닮았어?”길연서는 말문이 막혔다.두 사람 사이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윤소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실력도 없으면서 매번 실수해 놓고 성질은 있는 대로 부린다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윤소현이 매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정수미가 나서서 뒷수습을 해줘야 했다.정수미와 윤소현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길연서가 정수미를 따르기 전, 정수미는 지금처럼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당시 정수미는 조용하고 끈기 있게 참아내며 혼자 모든 것을 이겨냈다.지금의 위치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소현 아가씨는 참 예쁘세요. 대표님 젊었을 때처럼 당당하고 도도한 매력이 있으시죠.”길연서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 정도로밖에 답할 수 없었다.똑똑한 정수미는 길연서의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결국 두 딸 모두 나를 닮지 않았다는 말이네. 하지만 뭐 어때? 모든 자식이 엄마를 닮을 수는 없는 일이잖니.”그녀가 자신을 위로했다.비서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친자 확인 검사를 진행해 볼까요?”“그건 절대 안 돼.”정수미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미현이는 내 딸이야. 내가 친자 검사를 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니?”정수미의 말에 길연서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정수미가 위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 안에서 함미현은 음식을 먹으며 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왜 전화를 안 받는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함미현은 정수미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혼잣말을 했다.“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박민정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유남우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왔어?”그는 박민정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박민정은 그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물었다. “유 대표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저기와 선을 긋는 듯한 그녀의 말에 유남우는 가슴이 아팠다.그는 아무렇지 않을 척 말했다. “괜찮아. 며칠 전에 비를 맞았더니 감기 기운이 있나 봐.”말을 마친 그는 박민정을 향해 손짓했다.“이리 와서 앉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아.”박민정이 유남우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말씀하세요.”“일단 나를 좀 편하게 대해주면 안 될까?”유남우가 물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유남우는 그녀를 난감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됐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했다. “내 속마음을 좀 털어놓고 싶어서 너를 불렀어.”박민정은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우가 말했다. “난 더는 호산 그룹을 맡고 싶지 않아.”“왜요?”박민정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난 처음부터 형의 자리에 앉을 생각이 없었어. 내가 대표의 자리에 앉은 건 형이 기억을 잃고 눈이 안 보여서였어. 어머니는 힘들게 키운 그룹을 다른 사람에게 뺏길까 봐 두려워서 나를 그 자리에 앉혔지. 이제 형의 몸이 좋아졌으니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어 유남우가 말했다. “될 수록이면은 내 말을 형에게 전해줘. 나는 예전처럼 자유로운 게 좋다고 말이야.”“이런 얘기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박민정이 말했다.그녀도 유남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유남우의 결혼식에서도 그는 호산 그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빈말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유남우는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바로 가서 따뜻한
유남우는 더는 고집 부리지 않고 차에 타서 병원으로 갔다.그가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홍주영은 밖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민정 역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걱정하는 표정이었다.그녀는 고영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홍주영이 막았다.“절대 연락하지 마세요.”“왜요?”박민정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방금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뒷문으로 나왔어요. 사모님께 말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련님의 몸이 안 좋은 것이 소문날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들은 다시 이사회를 해서 도련님을 해임하려 할 것입니다.”홍주영은 계속 말했다. “도련님은 생각이 많으신 분이라 해임된다면 병세가 더욱 심해질 것이에요.”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괜찮겠죠?”그녀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홍주영한테 물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예요. 전에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어요. 제때 병원에 왔으니 괜찮아요.”이 말을 듣고 박민정은 비로소 마음이 놓여서 고영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병원 복도 밖에서 유남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홍주영은 임신 중인 박민정을 걸상에 앉혔다.“좀 쉬세요.”“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홍주영은 박민정의 고운 얼굴을 보고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오른쪽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데도 박민정의 카리스마를 가릴 수 없었다.홍주영은 유남우가 왜 박민정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여자인 그녀가 봐도 참 예뻤다. “왜요?”박민정은 줄곧 자신을 보고 있는 홍주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자 홍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너무 이쁘셔서요.”박민정은 바로 대답했다. “비서님도 예뻐요.”홍주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홍주영은 박민정과 윤소현처럼 그 정도로 이쁘지 않다. 박민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얼굴이 이쁘면 어떤 일들은 쉽게 풀려나가요. 이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예
홍주영은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도련님께서 치료하려고 해외로 가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사귀었겠네요.”박민정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세상은 원래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녀는 운명을 믿게 되었다.많은 것들은 진작에 정해져 있는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박민정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도 아직 유남우한테 감정이 있는 줄 알았다.홍주영이 말했다. “민정 씨, 도련님한테 마음이 있다면 고백하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도련님의 마음속에는 항상 민정 씨가 있어요. 오직 민정 씨밖에 모르시는 분이에요.”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표정이 굳어졌다.“주영 씨. 대표님과 저는 그냥 어렸을 때 인연이 있을 뿐, 사귄 적도 없어요. 지금 저는 이미 결혼하고 이혼까지 했어요. 남우 씨도 결혼했고요. 우리는 각자 자식도 있어요.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전 남우 씨와 사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확실한 건 전 지금 남우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그녀는 홍주영이 오해할까 봐 이어 말했다.“대표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전에도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그래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박민정의 말을 듣고 홍주영은 그제야 자기가 오해한 것을 알았다.“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네요.”“괜찮아요.”박민정은 말을 다 하고 시간을 보았는데 벌써 오후 6시가 다 되어갔다.마침내 의사가 응급실에서 걸어 나왔다. 유남우의 상태가 이미 안정되었다고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유남우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주영 씨, 전 오늘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남우 씨 좀 부탁해요.”유남우가 무사하니 박민정은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홍주영이 또 오해할 거로 생각했다.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네.”박민정은 이제야 떠났다.그녀가 병원을 나간
병원으로 달려간 윤소현은 유남우의 곁을 지키는 홍주영을 보고 말했다. “왜 남우 씨가 병원에 입원해요? 어떻게 돌봤길래 이렇게 되냐고요?”금방 의식이 돌아온 유남우는 비난하는 목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홍주영한테 말했다. “먼저 들어가 봐.”“알겠어요.”홍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실을 나갔다.유남우가 자기 비서를 감싸는 걸 보고 기분이 언짢아진 윤소현이 말했다. “남우 씨,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난 그냥 남우 씨가 너무 걱정돼서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임신 중이라 호르몬으로 인해 감정 변화가 많다고.”유남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여동생이랑 조카 데리고 검진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거의 다 했어요. 엄마가 가라고 하셨어요. 금방 결혼했으니 같이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요.”윤소현은 말하면서 유남우에게 기댔다.그녀가 갑자기 자기한테 기대자 유남우는 너무 불편해서 표정마저 굳어졌다. 그는 손을 들어 윤소현을 밀어냈다.윤소현도 사람이고 여자다. 유남우가 자신을 향한 애정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우 씨, 우리는 이미 결혼했어요.”유남우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 들어.”윤소현은 순간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유남우가 신체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와 자기 배 속의 아이를 받아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의 뿌리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점점 깊어져 갔다. “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요.”윤소현은 나갔다.그녀는 지금 자신의 남은 인생이 망한 건 아닌가 생각하며 걱정했다.윤소현은 병원 안의 공원에 가서 산책하려 했는데 간호사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308호실 환자 가족분입니까?”“맞는데요. 무슨 일이죠?”윤소현은 의아해서 물었다.“다른 게 아니라 방금 환자 가족 두 분이 병원비를 많이 내서요. 근데 우리 쪽에서는 연락이 안 되네요
윤소현은 박민정이 한 일을 까발리기 위해 병원 내부 CCTV와 병원 외부 CCTV를 확보해 서울에 있는 이모에게 보냈다.정수미의 동생 또한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명성을 더럽히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윤소현은 자기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박민정이 파렴치한 여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너무 피곤해서 집으로 갔는데 집에 있는 세 여자가 엄청나게 신나 했다.“민정아, 고마워. 내가 이 목걸이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어?”민수아가 말했다.“보스, 정말 고마워요.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러 갈 수 있게 되다니.”진서연도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민정 씨, 우리 은정이를 위해서 전문 보육사를 찾아줘서 정말 고마워요.”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녀는 이것들을 준비한 적이 없다.그녀는 솔직한 성격이라서 바로 말했다.“내가 준 게 아니야.”다들 의아했다.“네가 보낸 게 아니라고? 네 이름으로 돼 있던데?”민수아는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다희 보낸 메시지였는데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녀는 뭔가를 알아차렸다.“민정아, 남준 씨가 보낸 것 같아.”서다희는 그녀들한테 유남준이 주는 거라고 말하면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박민정이 보낸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순순히 받아들였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진서연은 눈을 껌뻑거리며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보스랑 화해하고 싶어서 우리한테 잘 보이려는 게 아닐까요?”민수아와 설인하도 같은 생각이었다.“됐어요. 이 선물 필요 없어요. 다시 돌려주자고요.”설인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녀는 박민정이 다시 결혼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혼자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진서연은 좀 아쉬워했지만 말했다.“보스, 화해하고 싶지 않다면 선물을 다시 돌려줘도 괜찮아요.”그러자 민수아도 말했다.“맞아, 목걸이는 나중에 내가 돈이 생기면
박민정은 사랑의 존재는 믿었지만 그 사랑이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특히 오늘 유남준이 연지석, 유남우, 그리고 에리 세 남자를 언급하고 나서 그녀는 더욱 불안해졌다.그녀는 유남준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은 믿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단지 좋아함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믿은 적이 없었다.그녀는 유남준이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마치 유남준이 그녀를 의심하며, 자신이 연지석 같은 다른 사람을 선택할까 봐 불안해하는 것처럼 말이다.“민정 씨가 어디가 모자라서 자신감을 잃은 거예요? 제가 봤을 때 민정 씨는 이미 아주 훌륭해요.”박민정을 바라보는 설인하의 눈빛은 반짝거렸다.박민정은 혼자서 아들 둘을 키우면서 노래를 만들고 회사를 차렸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사랑에 관한 데서 자신이 없는 거죠.”박민정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연애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했다.심지어 결혼 상대도 잘못 만나서 결혼하고 나서도 신혼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연애의 설렌 느낌은 더더욱 경험해보지 못했다.그래서 이제는 두려웠다.설인하는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녀를 응원했다.“어찌 됐든, 민정 씨는 자기를 믿으세요. 전 전에부터 계속 민정 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민정 씨처럼 혼자 힘으로 살아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그녀는 예전처럼 도망가도 방성원에게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삶이 싫었다.“그거 알아요? 저 사실 재작년에도 집에서 도망친 적이 있어요. 나는 내가 방성원을 떠나고 잘 지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사기꾼한테 잡혀갈 뻔했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진저리가 나요. 그리고 결국에는 방성원이 와서 나를 구해주더라고요.”박민정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그리고 설인하는 쓴웃음을 하며 말했다.“소름 끼치는 것이 있는데 뭔지 알아요?”“뭔데요?”“그날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방성원이 보낸 것이었어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고 싶었대요.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