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술집 안.고현문은 전화를 끊고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한 무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도련님, 무슨 일 있습니까?”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유남준이 나보고 유남우와의 협력을 끊으라고 했다.”“뭐라고요? 아니, 유남우는 유 대표 친동생 아닌가요?” 누군가 의아해했다.고현문이 답하기도 전에 다른 이가 나섰다.“재벌가가 다 그렇지. 혈육이고 뭐고 아무 의미 없어. 저 두 형제, 사실상 경쟁자잖아.”“그렇군.”고현문은 아예 흥미를 잃었고 술을 따라주던 여자를 거칠게 밀쳐내며 말했다.“다 꺼져.”그의 싸늘한 목소리에 여자들은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빠져나갔다.고현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는 여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1~2년 전에도 진씨 가문의 영애가 그와 얽혔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이 있었다.“도련님, 너무 화내지 마세요. 어차피 두 사람 다 사촌 아닙니까? 그런데 누구 편을 드시려고요?”고현문은 당연히 유남우를 돕고 싶었다. 사촌이긴 해도 늘 유남준에게 밀려 비교당하는 신세였다. 이번 기회에 유남준을 뛰어넘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유남준과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없었다. 혹여 일이 틀어지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당연히 유남준 말대로 해야지.”그가 담담하게 답하자 주변에서도 맞장구쳤다.“그렇죠. 지금 유남준은 IM과 호산 그룹의 대표인데 유남우는 아직 한참 부족하죠.”그 말을 듣고도 고현문은 더 이상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방을 나섰다.한편, 유남우는 병원을 나선 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차를 몰아 홍주영의 고향을 향해 가고 있었다.홍주영의 고향은 멀었는데 차로 네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그는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달렸다.그때, 고현문에게서 전화가 왔다.잠시 화면을 보던 그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고현문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유남준이 나보고 너랑
홍주영은 그가 다가오자 숨기지 않고 말했다.“도련님이에요.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도련님...“유남우?” 하민재가 되물었다.“네.”홍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하민재는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는 홍주영에게 기댄 채 투덜거렸다.“사장이면 사장, 유 대표면 유 대표, 유남우면 유남우. 도련님 좀 그만 부르면 안 돼요?”듣기만 해도 신경이 거슬렸다.하지만 홍주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요? 그냥 호칭일 뿐이잖아요.”하민재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호칭 문제가 아니거든요.”“하지만 나는 익숙한 걸요.”“그러면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마요. 그냥 ‘유남우’라고 하면 안 되겠어요?”홍주영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그래요, 민재 씨가 듣기 싫다면 민재 씨 앞에서는 그렇게 안 부를게요.”이미 둘은 약혼한 사이였다. 이제부터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될 테니 상대의 기분을 신경 써야 했다.하민재는 홍주영이 그렇게 선뜻 동의할 줄 몰랐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끌어안더니 얼굴을 낮춰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주영 씨는 정말 착해요.”홍주영은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마치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특히 뺨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하민재는 그녀의 경직된 반응을 눈치채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왜 그래요? 뭔가 이상한데요?”홍주영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눈앞의 잘생긴 얼굴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갑자기 왜...”그녀는 얼굴을 돌린 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가슴이 두근거려 말을 잇기도 어려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민재는 피식 웃었다.“주영 씨는 내 미래의 아내잖아요. 뽀뽀도 못 해요?”그러더니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홍주영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밀쳐냈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그만 뒤로 넘어지더니
하민재는 홍주영이 왜 그렇게까지 거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우리 약혼한 사이잖아요. 뭐가 문제에요? 게다가 걱정 마여, 나는 절대 신사적인 사람이니까.”신사적인 사람... 스스로를 신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짜 신사일까?홍주영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안 돼요. 결혼하고 나서 여기서 지낼게요.”그녀는 평생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남자 집에서 머무르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하민재는 한참 후에야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내가 잠시 후에 주영 씨랑 할머니를 모셔다드릴게요.”“네, 고마워요.”그녀는 예의 바르고도 사무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하민재는 다시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불만을 토로했다.“난 주영 씨 약혼자예요. 이제 고맙다는 말 좀 하지 마요. 그냥 나한테 막 시켜요, 데려다 달라고.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라고요. 알겠죠?”홍주영은 그가 술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투정 부리는 아이 같기도 했고 그 모습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그녀는 그를 다시 쳐다보다가 결국 눈길을 피하고 말았다.“알겠어요.”“그래야죠.”하민재는 다시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홍주영은 그가 또다시 뺨에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단순히 피곤했을 뿐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그 순간, 마침 할머니 두 분이 나왔고 그들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아이고, 저 녀석. 저렇게 커서도 주영이한테 기대서 자네.”하민재의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사진 속에서 홍주영은 얼굴이 새빨갛고 하민재는 마치 아이처럼 편안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의 할머니도 웃음을 터뜨렸다.“주영이는 맨날 결혼 안 한다고 하더니,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
이튿날 아침, 홍주영은 할머니께 작별을 고하고 도주로 돌아갔다.집 앞에서는 하민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탓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홍주영이 밖으로 나오자 그는 곧장 다가가 그녀의 여행 가방을 받아들었다.“내가 들게요.”“고...”고맙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녀는 어제 하민재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곧바로 말을 바꿨다.“네, 좋아요.”그 말에 하민재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짐을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차에 올랐다.운전기사가 도와주려 했지만 하민재가 눈짓 한 번 주자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건 분명 자기 아내 될 사람 앞에서 점수를 따려는 사장님의 의도일 터였다. 그러니 굳이 끼어들어 방해할 필요는 없었다.차에 오르자마자 홍주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가 화면을 열어보니 유남우였다.[언제 도착해?]답장을 하려던 찰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민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주영 씨, 먼저 말해 두지만 주영 씨 핸드폰을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홍주영이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네, 상관없어요.”사실 그는 억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하민재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으니까.그러자 하민재는 슬쩍 말을 돌렸다.“근데 주영 씨 이번에 휴가 다섯 날이나 썼잖아요?”“네, 연차 쓴 거예요.”홍주영은 평소에 휴가를 거의 쓰지 않았고 이번이 유일하게 길게 쉰 경우였다.“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이 딱 다섯 번째 날인데요? 근데 벌써 출근한다고요?”하민재는 뭔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의 직감이란 게 가끔은 무서울 만큼 정확할 때가 있다.홍주영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그러나 하민재는 곧바로 반박했다.“주영 씨는 그냥 비서예요. 주영 씨가 없다고 회사가 굴러가지도 않는 것도 아니고.”그는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회사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마침 택배를 가지러 나왔던 비서들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홍 비서는 정말 운도 좋네.”“그러게. 대체 어떻게 해서 민재 씨랑 엮이게 된 거야?”“뭐가 어때서? 민재 씨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알잖아. 그리 좋은 평판은 아니지. 여자도 많았고.”“그러게. 아마도 홍 비서가 유 대표님 따라다니면서 술자리에서 만난 거겠지?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는데 그 와중에 홍 비서는 성공했네.”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으며 말끝마다 시샘이 묻어나왔는데 멀리서 들어도 느껴질 정도였다.하지만 홍주영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부터 무덤덤한 성격이었고 가까운 친구도 거의 없었다. 특히 그런 자리에서 인맥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비서들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아까의 험담은 없던 일처럼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홍 비서님, 약혼 축하드려요!”홍주영은 담담한 얼굴로 답했다.“고마워요.”그러자 한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결혼식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아마 설 즈음이 될 것 같아요.”양가 할머니들이 설날이 가장 흥겹다며 날짜를 그렇게 정하자고 했다.정말 결혼을 한다는 말에 비서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명문가의 사모님이 될 사람이었다.“홍 비서님, 결혼식 때 저희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요?”하씨 가문에서 열리는 결혼식이라면 하객으로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인맥을 쌓을 기회였다. 비서들은 당연히 그녀가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대놓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홍주영은 단호했다.“죄송해요. 저는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할 생각이에요.”그 한마디에 비서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거절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홍주영은 더 이상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녀가 사라지자 비서들은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별
홍주영은 유남우의 말을 들으며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하민재는 여러 여자와 함께 있었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여자들은 모두 달랐다.그녀는 사진을 꽉 쥐었다. 마음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하민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지금 그녀의 약혼자였다. 그녀의 약혼자로서 이렇게 많은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겠는가?그러나 약혼 전후로 하민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홍주영은 고개를 들어 유남우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도련님, 제 사적인 문제입니다.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또한, 저는 도련님께서 제 약혼자를 조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련님께서 조사하신 것들은 제가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던 내용이에요.”홍주영은 순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결정이라고 해서 덥석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그녀는 이미 하민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후에야 이 결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유남우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홍 비서, 알다시피 그런 남자가 한 여자에게 마음을 정착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지 마. 바람둥이가 변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홍주영은 손을 꽉 쥐었다.“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어요. 저는 민재 씨가 저 때문에 변할 거라고 기대한 적 없어요. 저희는 단지 결혼이 필요했고 서로에게 적합했을 뿐입니다.”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공간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도련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홍주영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더 이상 볼일이 없으시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막 집에 왔는데 아직 정리도 못 했거든요.”말을 마친 그녀는 유남우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장 나가버렸다.유남우는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남았고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과거 자신만을 바라보던 그 작은 소녀가 점점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옆에 있던 애인이 맞장구쳤다.“손연서 같은 여자, 설령 아이를 가질 수 있다 해도 아들을 낳긴 힘들었을걸?”그러곤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다.“오빠, 역시 나밖에 없지? 내가 오씨 가문의 대를 이었으니까.”그들이 낳은 아들, 성훈이는 이미 포동포동 살이 올라 커다란 덩치가 되어 있었다.손연서가 아이를 돌볼 때는 건강한 식습관을 신경 써서 관리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방치된 상태였다.먹고 싶은 건 다 먹고 공부도 등한시하며 오냐오냐 자랐다. 오성훈은 기름진 음식을 입안 가득 우겨넣으며 거칠게 내뱉었다.“손연서 그 여자, 진짜 재수 없어요. 더러운 년이에요.”이런 말투는 모두 엄마를 따라 배운 것이었다.하지만 오준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다시 들었다.온 가족이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듯했으나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하인이 다가와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그에게 건넸다.오준수는 발신 번호를 확인했는데 비서였다.그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뭔데?”“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엔 그룹에서 저희 그룹과의 모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준수는 순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뭐? 무슨 헛소리야? 지엔 그룹과의 계약은 최소 5~6년은 남았어! 갑자기 취소될 리가 없잖아!”그동안 그가 매일같이 술 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지엔 그룹과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만든다고?비서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그뿐만이 아닙니다. 또...”그러나 남은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오준수는 불길한 예감에 다급하게 다그쳤다.“또 뭐가 있는데?”비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지엔 그룹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오씨 가문과 협력하는 기업은 곧 정씨 가문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요.”이 말은 마치 날벼락과도 같았다.오준수의 머릿속
손연서는 박민정의 말을 듣고도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민정 씨, 고마워요.”“우리 사이에 뭘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연서 씨도 도와줬잖아요.” 박민정이 웃으며 말했다.과거 그녀가 윤소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 손연서가 나서서 힘을 써준 적이 있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손연서는 여전히 감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손연서가 떠난 후, 박민정은 정수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정수미는 오씨 가문의 남자들을 가장 혐오했다. 자신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정부를 만들어 원래의 배우자를 해치다니. 이런 남자들과 도덕 없는 애인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민정아, 그 여자의 남편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박민정이 기억을 더듬으며 답했다.“오준수예요.”오준수.정수미가 옆에 있던 비서를 바라보자 비서는 바로 떠올렸다.“오현웅 회장의 아들입니다.”“아, 그 사람이구나.”정수미의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그 오준수, 몇 번 본 적 있어. 나한테도 몇 번 찾아온 적 있고. 근데 별 볼 일 없는 놈이야. 그냥 허세뿐인 한량이지.”문득 떠오른 듯, 정수미가 박민정을 보며 말했다.“그런데 내가 그 사람 아버지 체면을 봐서 오씨 가문과 거래를 한 적이 있거든. 네 친구를 돕고 싶다면 계약을 취소하면 돼.”박민정은 정수미가 오준수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줄이야.“그거 참 잘됐네요. 마침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별것도 아닌 일에 머리 쓸 필요 없어.”정수미는 오씨 가문 따위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씨 가문이 정씨 가문과 비교하면 동네 구멍가게와 대형 프랜차이즈 마트 정도의 차이였다.“김 원장이 그러잖아. 너 요즘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이 일은 다른 사람이 하게 둬.”정수미가 덧붙였다. 그때 옆에 있던 정윤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언니, 내가 해줄게요.”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정수미가 먼저 찬
정수미는 자신이 여기 있으면 대화가 불편할 거란 걸 눈치채고 비서에게 밖에 가 햇볕을 쬐겠다고 했다.그녀가 나가자 세 사람은 한결 편해졌다.지원 엄마는 더욱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예찬 엄마, 다음 학기부터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잖아요. 예찬이는 어느 학교로 갈 예정이에요?”박예찬의 학교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박민정은 도한 엄마에게도 초청장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아직 한 장 더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박민정은 지원 엄마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학교는 이미 정했어요. 혹시 지원이도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다면 같이 다니게 할까요?”“좋아요!”지원 엄마는 학교가 어디인지 묻지도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박민정과 유남준이라면 분명 좋은 학교를 선택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그럼 제가 시간 될 때 초청장을 드릴게요.”“고마워요, 예찬 엄마.”지원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한편, 손연서는 아이가 없어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다.그녀는 엄마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과거 자신이 왜 남의 아이를 키우겠다고 선택했던지 후회스러웠다. 만약 전 남편의 본모습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은 남자를 만나 지금쯤 자신도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잠시 후, 지원 엄마와 도한 엄마는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떴다.손연서는 계속 남아 박민정에게 과일을 깎아 주었다.박민정은 문득 그녀에게 물었다.“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기억을 잃은 후로 손연서의 소식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손연서는 사과를 깎아 한 조각 건네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주 편해요. 예전보다 훨씬 나아요.”그러다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다만, 이제 와서 좀 후회가 돼요.”“후회요?”“네, 민정 씨가 아이를 키우는 걸 보면 정말 부럽더라고요.”손연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런데 전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왜 그런 말을 해요?”박민정은 손연서가 아직 젊은데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게 이
유남준은 떠나지 않고 혼자서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남준아.”김인우가 먼저 다가왔다.“술 한잔하러 갈까?”유남준은 그를 흘겨보았다.“하랑 씨 임신했다며? 무슨 술이야.”“오늘 밤은 우리 없이도 잘 지낼 테니까, 우리도 재미 좀 찾아야지.”김인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다희, 정민기, 방성원을 바라보았다.서다희는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우리 애가 싫어할 거예요.”방성원도 거들었다.“우리 딸이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걸 싫어하거든.”정민기는 무표정하게 한마디 했다.“전 술 안 마셔요.”김인우는 입을 달싹였지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자신만 아직 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좋은 남자친구, 좋은 남편이 되어 있었다.유남준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 너도 철들 때가 됐어.”“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지...”서다희가 말했다.“우리 애가 그러더라고요. 심심하면 의미 있는 일을 하라고. 굳이 술 마실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대표님?”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술은 몸에 안 좋아.”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모두 성인군자가 되어 있었다.“그럼 뭐 할 건데? 밤새 여기서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잖아.”“그건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방이라도 하나 마련해서 쉬는 게 좋겠어. 난 그래도 딸 보러 먼저 가볼 생각이야.”방성원이 말했다.“알겠어.”김인우는 바로 옆방을 준비하도록 했다.딱히 할 일이 없는 남자들은 모여서 카드나 한 판 하며 시간을 보냈다.옆방에서는 김인우의 예상대로 모두가 박민정을 위해 오늘 밤만큼은 함께 있기로 했다.다만, 고영란은 두 아이를 데리고 먼저 돌아갔다. 박윤우와 박예찬도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유남준을 찾아왔다.유남준이 그들에게 말했다.“너희, 이제 세 살짜리 아기 아니잖아. 알아서 잘 곳 찾아가.”결국 두 아이는 방 한쪽에서 나란히 잠들었다.그 모습을 본 김인우가 감탄했다.“남준아, 유전자 진짜 대단하다. 윤우랑 예찬이, 완전 네
“그럼 됐어. 약속했으니까 꼭 지키는 거야.”박민정의 눈가에 다정한 미소가 어렸다.연지석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응.”비행기가 곧 이륙할 예정이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연지석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다음에 보자.”“그래, 잘 가.”박민정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마음 한구석에 얹혀 있던 돌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지금까지는 늘 자신이 연지석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자신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그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연지석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유남준이 다정하게 박민정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우리도 돌아가야지.”“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공항을 빠져나왔다.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인가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운전기사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고 유남준은 조심스럽게 박민정에게 씌워 주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차로 향했다.가는 길에 박민정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분주한 인파를 둘러보았다.지금 그녀는 보청기를 끼지 않고도 주변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는데 그 순간이 참으로 신기했다.“민정아,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문득,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었다.박민정도 따라서 멈춰 서며 그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뭔데요?”유남준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박민정은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참...”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박민정은 조금 쑥스러워졌다.“갑자기 왜 그래요?”유남준이 미소를 지었다.“그냥, 지금 말하고 싶었어.”“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좋아해.”“좋아하는 게 다야?”유남준이 장난스럽게 되물으니 박민정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그럼 뭐라고 해야 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예요.”“그래, 좋아한다는 것도 괜찮지.”유남준이 흐뭇하게 웃었다.박민정이 그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미가 박민정이 병상에서 일어나려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민정아, 어디 가려고?”“친구 만나러요.”“지금은 푹 쉬어야 할 때야.”정수미가 걱정스레 만류했다.“며칠 후에 만나면 안 돼?”하지만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그 친구가 곧 해외로 떠나거든요.”연지석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이번에도 배웅하지 않는다면 정말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그래. 대신 조심해야 해.”정수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박민정이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네.”박민정은 짧게 대답하고 병실을 나섰다.밖에서는 유남준과 정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언니, 어디 가려고요?”정윤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지금은 쉬어야 하는데.”“좀 있다가 설명할게. 지금은 시간이 없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며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남준 씨, 지석이가 출국한대요. 지금 공항에 있어요.”그녀는 가장 중요한 신뢰를 지키고 싶었다.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숨기고 싶지 않았다.유남준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차로 데려다줄게.”“정말요?”박민정은 망설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에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당연하지. 별일도 아닌데 뭘.”유남준은 가볍게 대답하며 차 쪽으로 걸어갔다.“가자.”“네.” 박민정이 웃으며 따라갔다.차에 오르자 유남준은 공항으로 향하며 물었다.“갑자기 왜 떠나는 거야?”박민정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원래 진주시에 온 것도 국내 사업 관련 일이 있어서였어요. 그런데 내가 실종되면서 오래 머물렀던 거죠. 아마 이제 가족 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그럼 제대로 인사해야겠네.”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네.”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기분 나쁘진 않아요?”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예전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예전에는 연지석과 박민정 사이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연지석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머물렀다.차를 몰고 떠났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정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정아, 나 집에 가려고. 너한테 인사하려고 연락했어. 지금 몇 병동에 있어? 잠깐 보러 갈게.]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후, 한참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한편, 박민정은 수술을 마친 뒤 처음으로 상태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실을 제거하고 청력을 확인하는 중요한 검사들이 진행됐다. 의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김인우 역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는 백 퍼센트 확신하지 못했다. 과연 박민정의 청력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박민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살짝 떨고 있었다.오랜 세월, 그녀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만약 내가 정상적인 청력을 되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누구보다 떨리고 누구보다 기대됐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장비들이 제거되었고 그녀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울렸다. 그건 수술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들려?” 김인우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묻자 박민정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네. 들려요.”그녀의 대답에 김인우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잘됐어! 정말 잘됐어. 수술이 성공했어.”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박민정도 고개를 끄덕였다.“당분간 푹 쉬어야 해. 무리하면 안 돼.” 김인우가 급히 덧붙였다.“이제 테스트를 좀 해볼게요.”“네.”김인우는 간단한 청력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완전히 정상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보청기가 필요 없는 상태였다.“아주 좋아. 앞으로 조심해서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검사만 받으면 문제없을 거야.”검사를 마친 뒤, 박민정은 병실 밖으로 나왔고 거기엔 유남준, 정수미, 정윤아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어때요, 김 선생님?”정수미가 다급히 물
연지석은 잠시 말없이 있었다.“홍 비서가 처음엔 몰랐지만 이제 알고 나서 후회하는 건가?”“그건 아니야. 그냥 우리 두 사람이 약혼한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나보고 배신하지 말라고.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미리 한마디만 해 달래.” 하민재의 말에 연지석은 서류를 넘기면서 무심히 말했다. “괜찮은 여자 같은데?”“형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하민재가 되묻자 연지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연애 전문가가 아니지만 네가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 홍 비서는 너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했잖아. 너무 기대하지 마. 실망하는 건 결국 너야.”그 한마디가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던 하민재를 깨웠다. 그제야 왜 자신이 불편했는지 깨달았다.“형, 솔직히 말해서... 나, 주영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홍주영과 함께 지내면서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연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좋아한다면 노력해. 먼저 네 자신부터 바로잡고.”“하지만 주영 씨는 유남우를 좋아하잖아...”그 한마디에 연지석도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하민재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형, 왜 우리가 좋아하는 여자들은 다 유씨 형제랑 얽히는 걸까?”더 이상 서류를 볼 기분이 없었던 연지석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이미 놓았어. 하지만 너는 다르잖아. 이미 홍 비서와 약혼까지 했으니까 널 선택한 거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잠시 말을 멈췄던 연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난 곧 해외에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해. 여긴 네가 좀 맡아줘.”“알았어.”하민재는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반대편에서도 연지석이 전화를 끊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설인하의 자리로 갔다.“인하 씨, 민정이 수술은 어떻게 됐어요?”설인하는 그제야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아마 오늘이면 수술이 성공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연지석이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퇴근 후 시간이 나면 병원에 가서 박민정
홍주영은 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그제야 하민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시작했다.혼자 소파에 앉은 홍주영은 침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레 유남우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그녀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민재가 지금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그저 일시적인 신선함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예전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으니까.하지만 이제 그녀도 나이가 찼고 결혼해야 할 때가 됐으며 무엇보다 할머니를 안심시켜야 했다.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홍주영은 노트북을 꺼내 업무를 시작했다. 일에 몰두하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드니 하민재가 기대에 찬 얼굴로 걸어나오며 말했다.“주영 씨, 와서 좀 봐요. 내가 잘 정리했는지 확인해줘요.”홍주영은 노트북을 닫으며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아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문을 넘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수선했던 방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바닥에 놓여 있던 여행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주영 씨 옷도 전부 정리해서 옷장에 넣어뒀어요.”하민재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활짝 열자 안에는 가지런히 개켜진 옷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계절별로 정리된 옷들이 걸려 있었고 색상과 종류에 따라 완벽하게 분류되어 있었다.홍주영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이런 정리는 능숙한 사람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명문가 출신인 하민재가 직접 했다고?“그냥 만족하다고만 해주면 안 돼요?”그가 칭찬을 바라는 듯 바라보자 홍주영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만족해요. 내가 하는 것보다 훨씬 낫네요.”자신도 믿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난장판이었던 방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그럼 됐어요.”“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