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국은 조연아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닭 날개를 집어 조하율의 그릇에 담아줬다.“일할 때나 사장이지 사적으로는 언니잖아. 언니라면 당연히 동생이 밥 잘 먹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니야? 몸매 관리보다 건강을 더 생각해 줘야지.”이준국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연아를 바라보더니 흰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내 말이 맞지?”“둘이 아주 난리가 났네? 몸매 관리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하율이 건강이 신경 쓰이는 거야?”이준국은 그녀의 말에 몹시 당황했는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어댔다. 그러고 나서 그 둘의 눈을 피하며 웅얼댔다.“그냥 난 걱정이 돼서 그래. 다른 뜻은 없어.”“아! 그렇구나?”조연아의 말투는 여전히 약간의 장난기가 있어 보였고, 이준국의 얼굴은 술이라도 진탕 마신 듯 더 빨개졌다.조하율은 두 사람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이준국의 접시에 갈비를 몇 조각 놓았다.“오빠, 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 많이 먹어. 다음에 내가 꼭 크게 한턱낼게.”“아니야. 여자를 어떻게 밥을 사게 해. 남자가 사야지. 다음에 내가 낼게.”조연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두 사람 그러지 말고 그냥 더치페이해. 쉽고 결제 때문에 싸울 일도 없잖아? 좋은 생각이지?”이준국은 먹던 갈비를 내려놨고, 조연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정말 짖궂고 나빠.”“오빠, 뭐라고? 언니가 왜 나빠?”조하율은 초롱초롱한 눈을 끔벅거리며 이준국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리둥절한 그녀와 달리 조연아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우리 언니 정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인데……”조하율은 이준국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얼른 변명했지만, 조연아는 그녀의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이준국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말을 돌렸다.“행정 쪽에서 이미 올해 연말 행사 방안을 제출했어. 올해 모노 영상과 손잡을 계획이라 연말 행사도 함께할 예정이래.”차분히 저녁을 먹
조하율은 말을 뱉고 나서 조연아의 눈치를 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설마 그런 미친 짓을 했겠어? 언니랑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두 회사 친목 행사를 연다고? 너무 공들여야 할 것 같은데?”이준국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조하율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목이 타는 듯 사이다를 벌컥벌컥 마셨다.이준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모노 영상 쪽에서 직접 제안한 건데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성의가 없을 것 같아. 그쪽에서도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고. 나중에 직원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게 되면 업무에도 지장이 될 것 같은데…… 아마 이 점을 생각해서 행정 쪽에서도 승낙하고 보고서를 올린 것 같아.”물론 든든한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모노 영상 쪽의 체면이 구겨진다면 번거로운 일이 많을 게 뻔했다. 친목 행사를 거절하면서까지 그런 부담을 안을 필요는 더 없었다.“그래. 그럼 그렇게 해.”조연아의 흔쾌한 승낙에 이준국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약간 놀라면서 되물었다.“이렇게 빨리 오케이라고?”조연아는 아주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럼. 일리가 있어. 모노 영상 쪽에서 제기한 건데 어떤 이유든 우리가 거절할 순 없어. 하물며 이번 행사는 두 회사의 협력 관계를 더 깊게 할 기회일지도 몰라. 그럼 더더욱 거절할 필요 없잖아?”조연아는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사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어느 회사에서 행사에 사장이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고 규정했나? 스케줄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하는 일도 허다하지. 민지훈, 날 바보로 아는 거야?’조연아는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조하율은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역시 언니는 보스다워. 나 같으면 협력은커녕 머리를 때려 박았을걸?”조하율은 주먹을 꽉 쥐며 험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녀의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진 나머지 조연아는 키드득 웃어댔다.“그래서, 네 전남친은 누군데?”조연아가 조하율의 과거 얘기를 꺼내자, 이준국은
“사실 별거 아니야. 어렸을 때 연극하면서 연애 딱 한 번 해본 적 있었어. 한 3, 5개월 정도 사귀었나? 그리고 데뷔하고 나선 연애는 못했어. 남자 배우들이랑은 뭐... 작품 홍보 때문에 케미네 뭐네 기사를 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야. 사적으론 연락도 안 해.”“그러니까 이진혁, 호신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다... 이 말이야?”조하율의 대답에 이준국은 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입이 귓가에 걸린 모습이었다.“그럼.”조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진혁 오빠야 워냑 후배 잘 챙겨주기로 유명하니까 좀 친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동료야. 기자들은 어떻게든 엮으려고 드는 것 같긴 하지만. 뭐 워낙 작품같이 하다 서로 눈 맞는 경우도 많고.”“그럼 넌...”이준국의 얼굴이 다시 긴장감으로 살짝 굳었다.‘뭐야. 내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뭐 하는 거지?’조연아는 괜히 머쓱한 마음에 주위만 둘러보았다.“아니. 배우한테는 촬영장이 직장이나 마찬가지잖아? 직장에선 연애만 해야지.”“그럼. 그럼.”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이준국이 조하율을 향해 엄지를 내밀었다.“넌 진짜 프로인 것 같아.”“풉.”“왜 웃어?”참다 못한 조연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조하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그냥...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무... 무슨 소리야. 크흠.”조연아의 말에 괜히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이었다.저녁 8, 9시쯤, 화기애애한 식사가 끝나고 조연아가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11시였다.“언니, 일찍 쉬어.”조하율이 그녀를 향해 손을 저었다.“응.”고개를 끄덕인 조연아가 차 안에 앉아있는 이준국을 향해 분부했다.“내 동생 집까지 잘 데려다줘요. 기자들한테 사진 안 찍히게 조심하고요.”“아이고, 대표님. 걱정마십시오!”그렇게 서있던 조연아는 차가 안 보일 때쯤에야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카드키를 찾은 조연아가 고개를 든 순간.복도에 쓰러진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의 눈이
이때 조하율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오빠, 우리 파파라치들한테 찍힌 것 같아.”“응. 아까 코너 돌 때 나도 눈치챘어. 저 차 아까부터 우리만 따라오고 있거든.”“대충 누구인지 알 것 같아. 그 바닥에서도 끈질기기로 유명한 자식들이야. 우리 사람들 많은 나이트캐슬로 가자. 거긴 워낙 사람이 많잖아. 그럼 따돌리기 더 편할 거야.”“응.”“그래.”고개를 끄덕인 이준국은 방금 전 속도 그대로 나이트캐슬 쪽으로 향했다.어려서부터 임천시에서 자라온 하율이 작은 갓길로 이준국을 안내했다.“오빠, 오른쪽. 그리고 왼쪽. 다음 골목에서 좌회전.”끼익.“으악.”빠른 좌회전으로 떨어진 무언가가 하율의 허벅지를 가격했다.“뭐야?”정신을 차린 조하율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뭐야. 언니 휴대폰이잖아?’“오빠. 언니가 휴대폰을 두고 내린 것 같아. 휴대폰 없으면 많이 불편할 텐데... 언니는 비즈니스적으로 오는 연락도 많을 테고...”어느새 파파라치들을 따돌린 이준국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일단 너부터 데려다주고 대표님한테 전해 드릴게.”“아니. 일단 언니한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까부터 계속 진동이 울리는데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아. 어차피 나 내일 스케줄 없어서 좀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그래. 그럼 네 말대로 하자.”고개를 끄덕인 이준국은 조연아의 빌라로 핸들을 틀었다.약 20분 뒤.“지율아, 같이 올라가자.”차를 세운 이준국이 뒷좌석에 앉은 조하율을 향해 말했다.“파파라치들... 따돌리긴 했다지만 또 불쑥 나타날 수도 있잖아. 이렇게 어두운 아파트 단지에 너 혼자 두고 올라가는 거 마음에 걸려서 그래.”“그래.”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카드키와 핸드백을 발견한 이준국과 조하율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뭐... 뭐야.”조하율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우리 언니 물건이잖아.”바닥에 떨어진 소지품을 확인하던 조하율은 바로 핏자국을 발견했다.“오빠, 피... 피야.”그녀의 떨리는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해야 하지?”당황한 조하율은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납치인 건가? 누가? 누가 도대체 언니를... 왜 납치한 거지? 뭘 노리고? 돈?”“일단 진정해.”이준국이 조하율의 어깨를 부여잡았다.“이런 상황에서 대표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분뿐이야.”“그분?”눈이 커다래진 조하율이 의아한 눈으로 만두를 바라보았다. 그분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이에 이준국은 말없이 조하율의 손을 잡고 임천산 별장으로 향했다.“안녕하세요. 늦은 시간 무슨 일로 방문하신 거죠? 대표님과 예약은 하셨습니까?”경호원이 형식적으로 물었다.“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님 수행 비서입니다. 민지훈 대표님을 꼭 만나뵙고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명함을 건넨 이준국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명함을 받아든 보디가드는 이준국과 명함을 번갈아 바라보다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대표님,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님 수행비서란 분이 급하게 대표님을 만나뵙고 싶어 하는데요.”“뭐요?”박 집사의 말에 민지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들어오라고 하세요.”그리고 다음 순간, 서재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들어온 이준국이 소리쳤다.“대표님. 저희 대표님께서 사고를 당하신 것 같습니다.”그의 말에 민지훈이 잡고 있던 만년필 촉이 뚝 하고 부러졌다.깜짝 놀란 건 옆에 서 있던 박 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죠?”최대한 침착한 척 물어보았지만 눈동자에 스치는 당황스러움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대표님, 제발... 저희 언니 좀 구해 주세요. 복도에 피도 떨어져있었어요. 저희 언니 피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다친 걸까요?”자초지종 설명이 끝나고 털썩 주저앉은 조하율이 주저없이 애원했다.“알아요. 이렇게 두 사람 이미 이혼했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뵙는 거 굉장히 실례라는 거요. 그런데... 이 임천시에서 언니를 찾을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 형부이신 민 대표님
조하율을 부축해 일으킨 이준국 역시 민지훈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제가 도와드릴 만한 건 없을까요?”“내 여자의 동생... 맞죠?”민지훈이 조하율을 힐끗 바라보았다.“잘 케어해 줘요.”“네? 아...”잠깐 흠칫하던 이준국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처제분은 제가 잘 보살펴드리겠습니다.”만두 일행이 민지훈을 찾아간 건 어찌 보면 최고의 선택이었다. 단 10분만에 빌라 CCTV 영상을 획득한 민지훈은 범인이 발칙하게도 조연아의 차를 운전한 채 유유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 것을 발견했다.“저 사람 누구죠? 굉장히 눈에 익은데요.”지하주차장 영상을 계속하여 반복 재생하던 오민이 중얼거렸다.“추신수... 그 자식인 것 같습니다.”민지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아. 이 체형 딱 봐도 추신수 맞네요. 이 자식... 이젠 하다하다 빌라로 쳐들어가서 납치까지.”“추적하세요. 그리고 필요하다면... 죽여도 됩니다.”차가운 눈빛을 내뿜던 민지훈의 눈동자에 깊은 심연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알겠습니다.”다음 날 새벽쯤, 오민이 보낸 경호원 일행은 동해 바다에서 버려진 조연아의 차량을 발견했다.“대표님, 차량을 버리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CCTV 사각지대라 그 뒤로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서가 끊어진 것 같은데 어떡하죠?”밤새 눈 한 번 감지 못한 민지훈은 생각보다 부정적인 소식에 표정이 더 굳어버렸다.‘감히... 내 여자한테 손을 대?’이미 마음속은 지옥이었다. 더 앉아있다간 정말 미칠 것만 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어디 가십니까?”그런 그의 뒤를 바싹 쫓으며 오민이 물었다.“동해로 갈 겁니다.”“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바닷가에 차만 버려놓고 다른 곳으로 갔을지도...”“차까지 버리고 인질 두 명과 함께 갈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그럼 대표님 말씀은... 그 자식이 두 사람을 데리고 배라도 탔다는 겁니까? 추신수 그 자식... 도대체 원하는 게 뭘까요? 도박꾼들이야 뭐 가장 원하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