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심무해는 공손히 입을 열었다.“하현, 제가 잘못 가르쳐서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하현은 술잔을 손에 들고 빙글빙글 흔든 다음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맹주, 폐를 끼쳤다 한마디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하현의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엄 서린 태도로 말했다.“맹주, 대체 뭐 하는 겁니까?”여수혁이 참지 못하고 울부짖었다.“어떻게 이따위 대하놈에게 고개를 숙이십니까?”“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냐고요?”“양유훤이란 천한 년이 키우는 기둥서방에 불과한 남자입니다!”“이전에 양유훤이 양 씨 가문과 찢어지지 않았을 때는 양 씨 가문이 겁이 났죠!”“하지만 지금 양유훤은 양 씨 가문과 찢어졌어요. 우리가 저놈을 두려워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양제명 때문입니까? 저놈이 그를 치료했다고 주장하지만 양제명이 저놈을 위해서 나선 적은 없었어요!”“제가 보기에 이건 속임수입니다.”“그러니 우리는 이놈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여수혁은 심무해가 하현의 뒤에 있는 양유훤과 양제명을 두려워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그는 하현이 별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사람임을 심무해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퍽!”여수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무해는 몸을 뒤로 힘껏 젖히고 달려와 그를 발로 걷어찼다.종이 인형처럼 날아간 여수혁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영창에게 떨어졌다.연이어 부자가 얻어맞은 꼴이 된 것이다.“퍽!”“눈은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남양 무맹 감찰관도 못 알아본단 말이냐구!”“퍽!”“하루 종일 놀기만 하고 남녀가 패를 이뤄 사람들을 괴롭힐 줄만 알다니! 정말 페낭 무맹 체면이 말이 아니야!”“퍽!”“계속해서 감찰관님을 화나게 만들고 있어. 감찰관님이 자비로우셔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지만 난 절대 당신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순간 심무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퍽!”여수혁 부자를 때려눕힌 후 심무해는 두 사람을 하현 앞으로 걷어찼다.“감찰관, 이 두 부자가 여러 번 무례를 범한 것 같은데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잘 통솔하지 못한 잘못이라고.”“감찰관이 처리해 주시게.”말을 하는 동안 심무해는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한 치의 소홀함도 보이지 않았다.여수혁은 얼굴이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어올라 욱신거렸다.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말이 떠오르지도 않아 겁에 질린 눈으로 하현을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다.반면 여영창은 고개를 숙인 채 원망에 가득 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두 부자가 하현을 짓밟으려다 되려 된통 당하고 말았으니 어떻게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하현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고 그의 눈빛만이 고육지책을 쓰고 있는 심무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심무해에게 다가간 하현은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맹주님이 알아서 사람을 불러 처리하시죠.”“지금은 밤 11시니 동이 트려면 아직 7시간이 남았군요.”“맹주님의 사람됨을 알기에 잠시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내일 아침 10시에 하구봉이 사람을 데리고 페낭 무맹으로 갈 겁니다. 그때 이 사건을 조사할 거구요.”“은혜가 있으면 은혜로 갚고, 원한이 있으면 원한으로 갚아야죠.”“은혜도 원한도 없다면 아마 하구봉은 날 대신해 공명정대하게 감찰관의 직책을 수행할 겁니다. 그동안 페낭 무맹이 나쁜 짓을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샅샅이 들여다보겠죠.”“또한 오늘 밤 있었던 이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나란 사람은 몸을 낮추는 것을 좋아합니다. 몸을 낮추어야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거든요. 맹주,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말을 하면서 하현은 심무해의 어깨를 툭툭 쳤다.“맹주님, 알아서 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그 후 그는 하구봉과 강옥연 일행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하현의 말은 담백했지만 여수혁의 마음을 오그라들게 하기 충분했다.아무런 표정 변화
일련의 일들을 처리한 하현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이튿날 아침, 양유훤이 와서 하현과 함께 아침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때, 한 경비원이 한달음에 달려왔다.“하현, 입구에 한 남자가 왔는데 양손에 깁스를 하고 있습니다.”“이름이 여수혁이라고 했고 두 분께 사죄하러 왔다고 합니다.”하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사죄를 하러 왔다? 재미있군.”양유훤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하룻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여수혁이 하현에게 사죄를 하러 온 것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똑똑한 여자였다.속으로는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내색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가서 얼굴이나 보자구!”하현은 두유 한 잔을 들고 마시면서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마당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그는 양손에 깁스를 한 채 등 뒤에 싸리나무 가지를 메고 무릎을 꼿꼿이 꿇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어젯밤 미성 주점에서 보였던 의기양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에 있는 여수혁에겐 부잣집 도련님의 풍모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눈두덩이 푸르덩덩하게 부풀어 있는 초췌한 모습인 것으로 보아 그는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임이 분명했다.하현이 걸어 나오는 모습과 동시에 그의 곁에 양유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여수혁의 눈가에는 경련이 파르르 일었다.그는 하현이 어젯밤 미성 주점으로 사람을 보내 왜 자신을 유인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그래서 어젯밤 밤새 죄를 인정하고 아침 일찍 하현에게 달려온 것이었다.너무 일찍 오면 하현이 아침 휴식을 하는 데 방해할 수도 있고 또 너무 늦으면 자신의 사죄가 아침 10시를 넘기게 되어 버릴까 봐 적당히 시간을 봐서 온 것이었다.하현은 잠시 여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두유를 한 모금 마시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수혁, 이 아침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강직하고 굳센 양유훤의 심성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미 그녀의 마음속엔 양 씨 가문에 대한 어떤 정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여수혁의 말을 듣게 되자 그녀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하현은 여수혁에게 물러가라고 한 후 양유훤에게 일단은 양제명 곁에서 푹 쉬라고 말했다.그리고 나서 그는 양유훤을 대신해 그다음 일을 직접 처리하기 시작했다.이미 예전에 양 씨 가문에서 조제하던 상처치료제의 제조법도 알았고 게다가 동결된 양유훤의 자산도 단시간에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그렇다면 지금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가능한 한 빨리 양유훤을 도와 회사를 정식으로 만들어 이름하여 양가백약을 시판해야 한다.회사 운영이 정상 궤도에 오르고 양유훤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모든 상황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하현은 믿었다.양유훤한테 비서 연락처를 받은 하현은 핸드폰으로 몇 가지 메시지를 보낸 뒤 임무를 수행했다.그날 오후 하현이 외출을 하려고 나섰을 때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핸드폰을 본 하현이 얼른 전화를 받았고 맞은편에서는 약간 어색한 대하어가 흘러왔다.전화를 건 사람은 여자였다.“하현 핸드폰 맞습니까? 전 양 사장님의 비서입니다. 아침에 당신이 지시하신 일은 제가 이미 일부 처리했습니다!”“말씀하신 사무실도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 독립된 사무 빌딩에 한 층을 다 쓸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했습니다.”그러다가 비서는 약간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저기...”“내가 말했지만 지금부터 양 사장의 일은 곧 내 일이야.”“그러니 어려워하지 말고 어서 말해 봐.”하현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혹시 돈이 부족한 거라면 말해.”“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그냥 말하면 돼.”전화기 맞은편에 있던 비서는 하현이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해하며 말을 흐렸다가 차근차근 말을 하기 시작했다.“제가 방금 사업자 등록을 하려고 했더니 그쪽에서 양가백
하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여비서가 괴롭힘을 당한 상황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듯했다.머리가 텅텅 빈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이런 스타일의 여자를 누가 마다하겠는가?하현은 앳된 비서를 힐끔 쳐다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름이?”“아, 제 이름은 소미담입니다.”비서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소 비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뻔뻔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야?”소미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사업자 등록을 심사하는 여세광입니다. 페낭 토박이구요.”“페낭 무맹 여 씨 가문과 한 집안이라 아주 기세가 등등하다고 합니다.”“여기 일 보러 오는 사람들, 특히 남양에 등록하려는 외국 기업들의 비서나 여직원들을 그렇게 괴롭힌다고 들었어요.”“남자한테는 돈을 빼앗고 여자한테는 몸을 탐한 거죠...”여기까지 말한 소비서는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변했다.하현이 이번에 그녀에게 중임을 맡긴 것은 그녀가 잘 처리해 주길 바라서였을 것이다.그런데 연애도 못 해 본 앳된 소녀가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그렇다면 여세광은 여 씨 가문 사람인 셈이군?”하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어쩐지 이렇게 기고만장하더라니. 역시 남양이군.”“가자구. 내가 대신 그놈을 만나지. 남양 부잣집 도련님 면상이 어떤지 똑똑히 보자구!”소미담은 몇 마디 더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하현의 굳은 표정을 보고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라 홀로 들어섰다.그녀는 예약 번호표를 들고 하현을 데리고 2층 사무실로 바로 갔다.소미담은 사무실 입구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었다.하지만 안에서는 애교 넘치는 여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소미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또 한 번 노크를 했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현은 이를 보고 무덤덤한 얼굴로 문을 향해 세차게 발길질을 했다.사무실은 고작 10여 평 정도밖
소미담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지 못했다.분명 화는 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때 여세광의 옆에 있던 여자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야! 지금 내가 여 과장님이랑 재미난 시간 보내는 거 안 보여?”“아침 일찍부터 와서 여 과장님을 즐겁게 해 드렸어야지!”“점심때가 다 되어 왔으면서 뽀뽀도 안 해 드리고 있어?”“그러면서 이제 와 여 과장님한테 무슨 볼 일을 보겠다는 거야? 어? 어떻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냐고?”“내가 만약 너라면 지금 당장 옷 벗고 여 과장님한테 달려들 거야! 그래야 일이 수월해지지!”말을 마치며 여자는 더욱더 여 과장에게 안겨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여 과장님, 제가 제대로 가르쳤죠?”여자는 소미담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여 과장은 껄껄 웃으며 여자의 위아래를 더듬으며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맞아, 당연히 그래야지! 야! 어서 옷부터 벗어 봐! 어디 얼마나 죽여주나 한 번 보자구!”“우리 편안한 자세로 즐겁게 대화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래?”아리따운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소미담을 쳐다보았다.분명 소미담이 너무 고집부리며 뻣뻣하게 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처음에는 누구나 옥처럼 깨끗하고 고결한 척하지만 결국 권력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하현은 눈빛을 예리하게 흐리며 차갑게 말했다.“이게 바로 페낭 기업청이 기업인을 대하는 태도입니까?”하현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상대의 더럽고 비열한 행동에 좋은 낯빛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하현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던 여세광은 갑자기 안색이 일그러지며 하현을 향해 시선을 돌려 화를 내며 말했다.“넌 또 어느 집 개자식이야?”“당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무슨 태도를 취하건 당신이 말 할 자격이 있어?”“지금 날 가르치는 거야 뭐야?”“불만 있으면 신고해! 신고하는 번호라도 알려줄까?”여
여세광의 옆에 있던 여자가 이 말을 듣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고 했다.“아니, 아니, 아닙니다. 여 과장님, 오해십니다.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소미담은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이었다.그녀는 페낭 토박이였기 때문에 여세광 같은 사람에게 미움을 사면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얼른 앞으로 나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여 과장님, 하현은 항성과 도성에서 왔습니다. 성의를 가지고 왔으니 잘 부탁드립니다.”“일이 성사되면 섭섭하지 않게 보수를 챙겨 드리겠습니다.”“보수? 네 동생이라도 바칠 건가? 집어치워!”여 과장은 소미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다.“내가 확실하게 이익을 볼 전망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 몰라?”“일이 성사가 된 후?”“지금도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는데 일이 성사가 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으라고? 지금? 나한테?”여세광의 눈에 비열함과 탐욕스러움이 가득 차올랐다.청순 글래머 스타일인 눈앞의 여자를 데려간다면 그는 오늘 밤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그리고 현장에는 아무도 없으니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해도 상관없었다.하현은 한 발 내디디며 소미담의 앞을 가로막고 여세광을 향해 거침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여 과장, 맞지?”“마지막으로 묻겠어. 오늘 우리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거야?”“우리 체면도 봐주지 않을 작정인 거지?”여세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괴롭혀? 체면?”“당신 같이 하찮은 사람을 내가 뭐 하러 괴롭혀? 당신이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겨우 상처치료제나 파는 회사 체면을 내가 왜 봐줘야 하지?”“잘 들어!”“이 직함 말고도 내 뒤엔 여 씨 가문이 있어. 그리고 페낭 무맹이라는 큰 뒷배가 있다고!”“내가 당신들의 사업자 등록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당신들의 양가백약이 예전의 양씨백약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야.”“가짜약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흥! 이제 사람을 부르는 거야? 그것도 여수혁을?”하현이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는 것을 보고 여자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여수혁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여 씨 가문 도련님이야. 페낭 무맹에서도 높은 신분이라고!”“그런데 당신이 여수혁한테 전화를 할 수 있다고?”“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허세를 부리려거든 좀 그럴듯하게 부려야 하지 않겠어?”“괜히 그런 전화나 하면 뭐가 달라져? 거울 보고 주제 파악이나 좀 해!”“당신이 뭔데 여수혁한테 전화한다는 거야? 그럴 수준이나 돼?”여세광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야! 배짱 하나는 끝내주네! 내 앞에서 그런 허세도 부릴 줄 알고!”“그렇지만 이 사실을 여수혁이 알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끝장이야!”“여수혁의 평소 스타일대로라면 감히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당장 무릎 꿇게 만들고 사과하라고 할 거야!”하현은 전화를 끊고 여세광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할 일은 없을 거니까.”“그렇지만 당신이 무릎 꿇고 사과할 일은 있을 거야.”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간드러진 여자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미소가 가득 번졌다.“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죽겠나 보지?”여세광은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손가락을 뻗어 책상 위를 톡톡 치며 차갑게 말했다.“좋아. 그럼 기다릴게. 당신한테 30분 주지.”“만약 당신이 날 무릎 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당신 무릎을 꿇게 해 만들 거야!”소미담은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대학을 막 졸업한 여자가 무슨 경험이 있겠는가?그녀는 원래 하현을 데려오면 일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제야 소미담은 후회가 되었다.자신이 목숨이라도 걸고 여세광의 말에 따랐다면 일을 잘 마쳤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연애도 해 본 적 없고 남자 손도 잡아 본 적 없는 자신
하현 일행이 집복당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는 이미 십여 대의 관용차가 서 있었다.이 차들은 경찰서 소속인 것도 있었고 주택건설부 소속인 것도 있었고 동사무소 소속인 것도 있었다.말하자면 정부 차원의 합동 집행부가 다 모인 것이다.수십 명의 제복을 입은 남녀들이 집복당을 둘러싸고 저마다 삿대질을 하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다.채굴기를 몰고 와서 위세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맨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대머리 남자였고 한 사람은 키가 좀 크고 다른 한 사람은 좀 뚱뚱했다.키가 큰 사람은 주택건설부 유니폼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 새겨진 명패에는 이홍파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뚱뚱한 사람은 경찰서의 황택호 형사였다.두 사람은 관청 동기로 알려져 있으며 항상 함께 출동해 각종 불법 건축물과 불법 매장을 소탕했다.오늘 그들의 목표는 바로 집복당이었다.고명원은 앞에 나서진 않았지만 부하들을 시켜 집복당 문을 막도록 하여 이홍파와 황택호 두 사람이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합동 단속반은 기세가 등등해서 뭐라도 하나 걸리기만 한다면 내부 인테리어 전부를 깡그리 부술 태세였다.이렇게 되면 일이 더 커진다.고명원은 연합 단속반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오직 하현의 집복당이 잘못되어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게 될까 그것이 두려웠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는 왕인걸도 와 있었다.그는 집복당에 와서 아첨이라도 좀 해 볼까 했는데 마침 이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하현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왕인걸과 고명원이 뭐라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하현은 얼른 손을 흔들며 그들을 제지했다.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나박하가 합동 단속반에서 나온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아이고, 이거 이홍파 팀장님과 황택호 형사님 아닙니까?”“무슨 바람이 불어서 두 분이 함께 우리 집복당엘 다 오셨습니까?”“이 누추한 곳에 두 분이 자리를 빛내주시니 영광입니다.”말을 하면서 나박하
”전부?”이 말을 듣고 강우금의 얼굴에는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여자한테 빌붙어 살면서 꼴에 자기가 재벌 2세인 줄 아나?”“정말 요즘 사람들은 자기 분수를 너무 몰라!”“전부는 고사하고 그의 전 재산을 다 부어도 소남가인 옷 한 벌 못 살 거야. 아니, 양말 한 켤레라도 산다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어!”금정의 스타트업 사장이나 재벌 2세들도 소남가인 브랜드의 옷을 함부로 사지 못한다.그런데 한낱 한량에 불가한 하현이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비싼 옷을 산단 말인가?매장의 직원들과 손님들이 좋은 구경거리를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소남가인 직원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살짝 망설였지만 결국 황보정에게 세심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었다.곧 황보정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모두 골랐다.수십 개의 옷 가방들이 순식간에 매장에 늘어섰다.이게 다 얼마인가?몇십억은 되어 보였다!“삑!”하현은 별일 아닌 듯 단번에 카드를 긁었다.그러자 승인되었다는 소리가 나면서 영수증이 좌르륵 쏟아져 나왔다.“어머?!”순간 소남가인 매장 안팎에선 수군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주변에 있던 직원들과 손님들은 하현을 쳐다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황보정에게는 질투와 부러움의 시선들이 쏟아졌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하현이 저 많은 옷을 한 번에 결제하다니!그야말로 거부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 이럴 수 없어! 절대로!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강우금과 그녀의 매장 직원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뒤늦은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와 그녀들을 단번에 쓰러뜨렸다.그들은 도저히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방금까지 그들은 입만 열면 하현을 비난하는 말을 퍼부었다.노점상에나 가서 옷을 사라고 쫓아냈다.그런데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들의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역시 가장 난처해하는 사람은 강우금이었다.그녀는 도저히 믿기지
강우금의 말을 들은 손님들은 하나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옷도 안 사고 민폐만 끼치다니!덜떨어진 저런 사람이 이런 가게를 드나들 수는 없다!정말 재수없어!황보정은 슬쩍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강우금, 당신 같은 점장이 어디 있어요?”“정말로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우할 거예요?”“우리가 정말로 못 살 거라고 생각해요?”“이런 식으로?”강우금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황보정,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내가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당신이 그럴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요?”“난 금정 쇼핑몰 판매율 10위 안에 드는 사람이에요! 연봉이 일억이 넘는다고요!”“흥! 그런데 당신은 뭐죠? 하얗게 세탁한 싸구려 티셔츠 한 장 입고 와서 무슨 부자 행세를 하고 그래요?”“그리고 정말로 옷을 사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사세요! 여긴 당신이 살 수 있는 옷이 없어요!”말을 하면서 강우금은 바깥을 가리키며 냉소를 흘렸다.“1킬로미터 정도 나가면 많은 노점상들이 있을 거예요!”“거기 가면 한 벌에 몇 천 원짜리가 널렸을 거라고요!”“그래도 당신이 우리 가게에서 옷을 사고 싶다면 내가 특별히 기회를 주겠어요. 당신이 그래도 집복당 아가씨니만큼 이월된 재고 상품들 중 쓸 만한 것을 권해 줄 수는 있어요.”“하지만 문제는 살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아무리 이월 상품이라고 해도 값이란 게 있는 건데 당신이 살 수 있겠어요?”하현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손을 뿌리치며 물건을 카운터에 올렸다.그리고 나서 황보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다른 데 가서 사자고!”황보정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바로 하현을 따라 가게를 나섰다.강우금은 이 광경을 보고 냉소적인 목소리로 직원들을 불렀다.“그들이 만진 물건들과 지나간 자리 얼른 소독하고 방향제 뿌려!”“저런 싸구려 인간들이 우리 가게를 더렵히게 놔두면 안 되지!”“뭐라고?”“다른 가게에 가서 산다고? 흥! 아무리 둘러
강우금의 말을 듣고 갑자기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찾은 듯 주변에서 쇼핑하던 사람들이 하현에게 눈을 힐끔거렸다.남자가 돈을 벌어서 가족들 부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부잣집 여자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다니?!정말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야!“강우금?”황보정은 순간 누군가가 하현을 조롱하는 소리를 듣고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우리는 여기 옷을 사러 온 것이지 당신의 비아냥 따위를 들으러 온 게 아니에요!”“이런 식으로 손님을 대한다면 당장 당신 회사에 불만을 제기할 거예요!”황보정에게 있어 자신이 모욕당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하현이 모욕당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불만을 제기한다고요?” 강우금은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들썩였다.“황보정, 머리가 어떻게 된 거예요?”“내가 금정 쇼핑몰에서 판매율 10위 안에 드는 점장이라는 걸 몰라서 그래요?”“불만을 제기한다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라도 있을 것 같아요?”“문제가 뭔지 알아요? 여자한테 빌붙어서 사는 이런 남자들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흥! 당신이 어떻게 불만을 제기하는지 어디 한번 두고 볼게요!”“난 당신을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아마 당신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나한테 불만을 제기하기는커녕 잘했다고 상이라도 줄 거예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집복당은 이제 한물간 거 아니에요? 내 앞에서 이럴 자격이나 돼요?”“이 옷, 정말 살 수 있어요?”이를 듣던 몇몇 손님들은 더욱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황보정 일행을 쳐다보았다.그녀들은 하현이 여자한테 빌붙어 있는 것뿐만 아니라 몰락해 가는 집안의 여자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고 있을 줄은 몰랐다.아마 오늘 그의 작전은 십중팔구 실패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하현은 강우금 같은 여자와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며 기분 상하기 싫어서 황보정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마음에 들어 했던 옷을 집어 냉랭하게 말했다.“이 옷으로 합시다. 다른 건 나중에 사죠.”강우금은 하현의 손에
”손님, 아무렇게나 만지면 안 됩니다. 이 옷은 너무 비싸서 더러워지면 팔 수가 없거든요!”황보정이 옷을 꺼내 보려고 손을 뻗었을 때 점장으로 보이는 거만한 여자가 하이힐을 앞세우며 다가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황보정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며 말했다.“아, 죄송합니다. 저 옷 사고 싶은데 좀 꺼내 봐 주세요.”“꺼내 봐 달라고요?”점장은 황보정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깨끗하게 세탁한 셔츠에 눈길을 모으며 말했다.“정말 살 수 있어요? 꺼내 봐 달라고요?!”“그게 무슨 말이에요?”“우리 황보정이 집복당 손녀인 걸 몰라요?!”황보정 곁에서 가방을 들고 있던 나박하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버럭 했다.“집복당 손녀?”점장이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렸다.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했던가!비록 집복당 명성이 예전만 못했지만 점장은 함부로 황보정을 건드릴 용기는 없었다.점장의 목소리를 듣고 하현은 약간 귀에 익다는 생각이 들어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진홍민의 절친 중 한 명인 게 분명했다.예전에 진홍헌이 대대적으로 고백했을 때도 이 여자는 현장에 있었다.하현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녀의 가슴에 ‘강우금’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을 눈치채고 하현도 더는 쓸데없는 말씨름을 하기 싫어 아예 입을 다물었다.“손님, 어떤 색이 마음에 드시는데요?”“우리 매장에는 다양한 색상들이 있어서 선택할 수 있어요.”강우금은 미소를 지으며 한껏 판매에 열을 올렸다.황보정은 강우금의 말을 듣고 돌아서서 하현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하현, 여기 와서 좀 봐줘요. 어떤 색이 더 예쁜지.”“예?”“하현?!”강우금은 그제야 하현을 알아보았고 처음에는 살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내 냉소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비록 그날 하현이 진홍헌의 청혼식에서 크게 한판 벌였지만 나중에
황보정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현은 앞에 놓인 다과를 말끔하게 먹은 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이 일은 이렇게 잘 마무리되었으니 나중에 쇼핑몰에 가서 옷이나 몇 벌 사자고!”“앞으로 내 대변인이 될 사람이니 말끔하게 보여야지.”“우리가 하려는 프로젝트는 대단히 수준 높은 프로젝트거든. 당신이 앞으로 접촉할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거나 하니까 절대 무시당하지 않도록 준비를 단단히 해야지!”하현은 오늘의 이 결정을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내린 것이 아니었다.현재 임단은 이미 금정 화원에 있는 쓰레기 매립장 인수 일을 착수했다.비록 세간에서는 임단이 머리가 나쁘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하현은 금정 화원의 유적지가 발굴되는 순간 프로젝트 전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이러한 전제하에 황보정이 자신의 대변인이 되어 일하겠다는데 멋진 옷 몇 벌 사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황보정이 비록 풍수사로서 인정은 받았지만 방값이 꽤나 비쌌고 수입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이전에 저축해 두었던 돈은 의사를 구하는 데 거의 써 버렸기 때문에 정말로 수중에 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황보정은 한참 예쁘게 꾸밀 나이였지만 제대로 된 번듯한 옷도 몇 벌 없었다.하현은 이 기회를 빌어 황보정에게 옷도 몇 벌 장만해 주고 살아갈 발판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황보정은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나지막이 말했다.“하현, 아직 입을 만한 옷이 있어요. 살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왜? 안 사게?”옆에 있던 나박하는 차를 마시며 껄껄 웃었다.“하현이 옷을 사 준다고 하잖아!”“우리가 말끔하게 차려입지 않으면 하현의 체면이 깎여!”“이제 하현은 금정 제일의 풍수지리사로 불리게 되었어!”“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너무 허름하게 입으면 손님들이 우리 대사님의 실력을 의심할 거야!”“그러니 사양하지 마. 잠시 후에 우
다음날 아침 일찍 하현은 방을 나섰다.설은아의 방문을 지나칠 때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두 사람이 또다시 다투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거실에 와 보니 최희정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하현이 지나가자 그녀는 눈을 흘기며 슬쩍 곁눈질할 뿐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미간에는 그를 향한 마뜩잖은 기색이 가득했다.최희정은 어젯밤 설은아와 하현의 말다툼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그의 뻔뻔함과 노여움을 눈빛으로 드러낸 것이다.하현도 최희정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문을 나서려는 순간 최희정이 우다금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최희정이 우다금과 연락을 하고 있다고?지난번 저지른 일로 우다금은 따끔하게 혼이 나야 했었다.하지만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서 하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집복당으로 갔다.“하현, 아침은 먹었어요?”집복당 입구에 도착해 보니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황보정이 나와 있었다.그녀의 눈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고 이제는 집복당 일을 하기 시작했다.하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황보정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다과를 좀 만들었는데 한번 먹어 볼래요?”황보정은 오늘 짧은 잔꽃 무늬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고운 자태였고 걸을 때 슬쩍슬쩍 보이는 하얀 다리는 눈부시게 빛났다.특히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하현은 싱그러운 젊은의 기운을 물씬 느꼈다.아찔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말했다.“그럼 감사히 먹어 볼게.”“감사할 사람은 나예요. 내 눈을 낫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몸도 정상으로 돌려놓았잖아요!”황보정은 동작이 재빨랐다.“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내가 남들 관상을 봐주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세요. 내가 박명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상을 계속 봐준다면 결국 내가 천기를 누설할 거라고 하셨어요.”“이번엔 다행히 당신을 만나서 살았지만 다
”풍수?”“하 대사?”“풍수관?”설은아는 명함을 움켜쥐고 노기 어린 얼굴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제대로 된 일을 하지는 않고 강호의 사기꾼이 되겠다는 거야?”“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당신이 풍수지리술을 안다는 걸 어떻게 몰랐을까?”“풍수를 보는 일이 얼마나 진지하고 엄숙한 일인지 알아?”“몇 마디 말로 사람들을 속이며 돈을 벌 수 있는 게 아니야!”“자칫 잘못하다간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기도 하는 거야! 알기나 해?”하현의 명함에 적힌 직함을 보면서 설은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집복당, 아홉 대째 내려오는 대단한 실력, 주역 대사...하현은 자신의 본업에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남원이나, 무성, 대구에서는 하현이 정말로 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금정에 와서 하현과 간민효가 친밀하게 지내더니 지금 눈앞에 내놓은 명함이라는 것을 보고 설은아는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이전에 하현이 보여준 모든 것은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닐까?지난 모든 것은 하현이 설 씨 가문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허상 같은 것이었다!그리고 이 허상을 만든 장본인은 하현이 밖에서 만나고 있는 간민효임이 틀림없다!금정 간 씨 가문의 간민효는 이 모든 것을 해낼 능력이 있는 여자이다.바닥에 널브러진 사진들이 그것들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들이다!분노한 설은아를 보며 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우선, 그런 눈빛으로 날 쳐다볼 필요가 없어.”“난 당신한테 말할 수 있어. 나와 간민효는 금정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과거의 모든 일은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어.”“둘째, 그녀와 난 그저 평범한 친구일 뿐이야. 당신한테 하나하나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 함께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어.”“셋째, 내가 풍수관을 연 것은 나름의 목적이 있어서야. 내가 개업을 할 수 있다는 건 나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는 걸 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간민효랑 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면 당신 믿겠어?”설은아의 두 눈에 찬서리가 내려앉았다.“그럼 내가 김탁우랑 그냥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한다면 당신 믿겠어?”“그거랑 이거랑은 달라.”설은아의 말을 듣자마자 하현이 되받아쳤다.“뭐가 달라?”설은아도 지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긴장감을 올렸다.“김탁우가 이 사진을 주었을 때 우리 부부간의 감정을 해칠 수 있다며 약간 망설였었어.”“하지만 지금 보니 이 사진들이 아니었어도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훼손될 감정도 없는 것 같아!”“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둘 게 있어!”“내 차는 정비한다고 당신 비서 이시운이 가져갔어.”“그래서 일이 끝난 후 김탁우가 마침 가는 길에 날 데려다준 것뿐이야!”“나와 그 사람은 결백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누구와는 정말 다르지!”하현은 설은아의 말에 다소 화가 치밀어 올라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난 당신을 믿어. 하지만 김탁우는 믿지 않아.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설마 당신이 그것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을 텐데?”“하현, 함부로 말하지 마! 김탁우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설은아는 얼굴 가득 노기를 띠며 말했다.“내가 이 사진들을 당신 앞에 내놓은 것은 적어도 당신이 조금이라도 반성하길 바래서였어!”“앞으로 이 들개 같은 여자랑 엮이지 말라고 말이야!”“하지만 당신은 결국 나의 호의는 전혀 헤아리지도 못하고 이런 무의미한 질투까지 하고 있어!”“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재혼에 대해 엄마한테 잘 말할 수 있는지 그런 거나 궁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하현은 냉정을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조건을 내걸었잖아?”“당신을 대구 정 씨 가문 수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그래서 나도 그쪽으로 노력하고 있어...”“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