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여비서가 괴롭힘을 당한 상황이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듯했다.머리가 텅텅 빈 부잣집 도련님이라면 이런 스타일의 여자를 누가 마다하겠는가?하현은 앳된 비서를 힐끔 쳐다본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름이?”“아, 제 이름은 소미담입니다.”비서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소 비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그런 뻔뻔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야?”소미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사업자 등록을 심사하는 여세광입니다. 페낭 토박이구요.”“페낭 무맹 여 씨 가문과 한 집안이라 아주 기세가 등등하다고 합니다.”“여기 일 보러 오는 사람들, 특히 남양에 등록하려는 외국 기업들의 비서나 여직원들을 그렇게 괴롭힌다고 들었어요.”“남자한테는 돈을 빼앗고 여자한테는 몸을 탐한 거죠...”여기까지 말한 소비서는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변했다.하현이 이번에 그녀에게 중임을 맡긴 것은 그녀가 잘 처리해 주길 바라서였을 것이다.그런데 연애도 못 해 본 앳된 소녀가 어떻게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그렇다면 여세광은 여 씨 가문 사람인 셈이군?”하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어쩐지 이렇게 기고만장하더라니. 역시 남양이군.”“가자구. 내가 대신 그놈을 만나지. 남양 부잣집 도련님 면상이 어떤지 똑똑히 보자구!”소미담은 몇 마디 더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하현의 굳은 표정을 보고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따라 홀로 들어섰다.그녀는 예약 번호표를 들고 하현을 데리고 2층 사무실로 바로 갔다.소미담은 사무실 입구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응답하는 이가 없었다.하지만 안에서는 애교 넘치는 여자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소미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그녀는 또 한 번 노크를 했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현은 이를 보고 무덤덤한 얼굴로 문을 향해 세차게 발길질을 했다.사무실은 고작 10여 평 정도밖
소미담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지 못했다.분명 화는 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때 여세광의 옆에 있던 여자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야! 지금 내가 여 과장님이랑 재미난 시간 보내는 거 안 보여?”“아침 일찍부터 와서 여 과장님을 즐겁게 해 드렸어야지!”“점심때가 다 되어 왔으면서 뽀뽀도 안 해 드리고 있어?”“그러면서 이제 와 여 과장님한테 무슨 볼 일을 보겠다는 거야? 어? 어떻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냐고?”“내가 만약 너라면 지금 당장 옷 벗고 여 과장님한테 달려들 거야! 그래야 일이 수월해지지!”말을 마치며 여자는 더욱더 여 과장에게 안겨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여 과장님, 제가 제대로 가르쳤죠?”여자는 소미담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여 과장은 껄껄 웃으며 여자의 위아래를 더듬으며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맞아, 당연히 그래야지! 야! 어서 옷부터 벗어 봐! 어디 얼마나 죽여주나 한 번 보자구!”“우리 편안한 자세로 즐겁게 대화하다 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안 그래?”아리따운 여자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소미담을 쳐다보았다.분명 소미담이 너무 고집부리며 뻣뻣하게 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처음에는 누구나 옥처럼 깨끗하고 고결한 척하지만 결국 권력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하현은 눈빛을 예리하게 흐리며 차갑게 말했다.“이게 바로 페낭 기업청이 기업인을 대하는 태도입니까?”하현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상대의 더럽고 비열한 행동에 좋은 낯빛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하현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던 여세광은 갑자기 안색이 일그러지며 하현을 향해 시선을 돌려 화를 내며 말했다.“넌 또 어느 집 개자식이야?”“당신이 그런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내가 무슨 태도를 취하건 당신이 말 할 자격이 있어?”“지금 날 가르치는 거야 뭐야?”“불만 있으면 신고해! 신고하는 번호라도 알려줄까?”여
여세광의 옆에 있던 여자가 이 말을 듣고 어딘가로 전화를 하려고 했다.“아니, 아니, 아닙니다. 여 과장님, 오해십니다.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소미담은 겁을 잔뜩 먹은 얼굴이었다.그녀는 페낭 토박이였기 때문에 여세광 같은 사람에게 미움을 사면 어떤 결과가 뒤따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얼른 앞으로 나서서 90도로 고개를 숙였다.“여 과장님, 하현은 항성과 도성에서 왔습니다. 성의를 가지고 왔으니 잘 부탁드립니다.”“일이 성사되면 섭섭하지 않게 보수를 챙겨 드리겠습니다.”“보수? 네 동생이라도 바칠 건가? 집어치워!”여 과장은 소미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다.“내가 확실하게 이익을 볼 전망이 없으면 시도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 몰라?”“일이 성사가 된 후?”“지금도 제대로 일을 할 줄 모르는데 일이 성사가 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으라고? 지금? 나한테?”여세광의 눈에 비열함과 탐욕스러움이 가득 차올랐다.청순 글래머 스타일인 눈앞의 여자를 데려간다면 그는 오늘 밤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그리고 현장에는 아무도 없으니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해도 상관없었다.하현은 한 발 내디디며 소미담의 앞을 가로막고 여세광을 향해 거침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여 과장, 맞지?”“마지막으로 묻겠어. 오늘 우리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거야?”“우리 체면도 봐주지 않을 작정인 거지?”여세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괴롭혀? 체면?”“당신 같이 하찮은 사람을 내가 뭐 하러 괴롭혀? 당신이 그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겨우 상처치료제나 파는 회사 체면을 내가 왜 봐줘야 하지?”“잘 들어!”“이 직함 말고도 내 뒤엔 여 씨 가문이 있어. 그리고 페낭 무맹이라는 큰 뒷배가 있다고!”“내가 당신들의 사업자 등록을 승인하지 않은 것은 당신들의 양가백약이 예전의 양씨백약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야.”“가짜약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단 말이지.”
”흥! 이제 사람을 부르는 거야? 그것도 여수혁을?”하현이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는 것을 보고 여자는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여수혁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여 씨 가문 도련님이야. 페낭 무맹에서도 높은 신분이라고!”“그런데 당신이 여수혁한테 전화를 할 수 있다고?”“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허세를 부리려거든 좀 그럴듯하게 부려야 하지 않겠어?”“괜히 그런 전화나 하면 뭐가 달라져? 거울 보고 주제 파악이나 좀 해!”“당신이 뭔데 여수혁한테 전화한다는 거야? 그럴 수준이나 돼?”여세광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야! 배짱 하나는 끝내주네! 내 앞에서 그런 허세도 부릴 줄 알고!”“그렇지만 이 사실을 여수혁이 알기라도 한다면 당신은 끝장이야!”“여수혁의 평소 스타일대로라면 감히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거들먹거리는 사람을 당장 무릎 꿇게 만들고 사과하라고 할 거야!”하현은 전화를 끊고 여세광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할 일은 없을 거니까.”“그렇지만 당신이 무릎 꿇고 사과할 일은 있을 거야.”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간드러진 여자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미소가 가득 번졌다.“허세를 부리지 않으면 죽겠나 보지?”여세광은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손가락을 뻗어 책상 위를 톡톡 치며 차갑게 말했다.“좋아. 그럼 기다릴게. 당신한테 30분 주지.”“만약 당신이 날 무릎 꿇게 하지 못한다면 내가 당신 무릎을 꿇게 해 만들 거야!”소미담은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대학을 막 졸업한 여자가 무슨 경험이 있겠는가?그녀는 원래 하현을 데려오면 일을 순조롭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제야 소미담은 후회가 되었다.자신이 목숨이라도 걸고 여세광의 말에 따랐다면 일을 잘 마쳤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연애도 해 본 적 없고 남자 손도 잡아 본 적 없는 자신
양손에 깁스를 하고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여수혁의 발걸음이 비틀거리며 다급하게 다가왔다.그리고 기업청 고위층들이 여수혁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색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여수혁, 이사님들.”여수혁 옆에 있던 여자와 다른 직원들은 모두 허둥지둥 물러서며 너 나 할 것 없이 깍듯이 인사를 했다.여수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페낭 기업청의 청장과 부청장이며 모두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위급 사람들의 눈에 여세광을 비롯한 보통 직원들은 단번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여수혁은 이 사람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현에게 얼른 걸어가 상전을 모시듯 말했다.“하현, 여기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 있어?”“어느 개자식이 곰쓸개라도 씹어 먹은 거야?”“죽여버리겠어!”여수혁이 하현한테 와서 아첨하듯 떠받드는 모습을 보고 여세광과 여자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그들은 하현이 정말로 전화 한 통으로 사람을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여수혁은 페낭에서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물이었다!페낭에서 거칠 것이 없는 이런 거물이 어떻게 하현 앞에서는 강아지 마냥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인가?여세광은 넋이 나간 듯 정신이 멍해졌다.다리에 힘이 빠져 제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아니야. 어떻게 날 괴롭힐 수 있겠어?”하현은 자료를 바닥에 던지고 가볍게 입을 열었다.“다만 내가 남양에는 이렇다 할 자산이 별로 없어서 상처치료제를 좀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고 싶은데 그 일이 잘 안 되어서 말이야.”“여 과장이 여 씨 가문 사람이라고 하길래 당신을 부른 거야.”“내가 그에게서 할 수 없는 일을 여수혁 당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그래서 당신한테 전화를 했던 거야. 혹시 밖에서 다른 사람들 한창 괴롭히고 있는데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하현의 말을 들은 여수혁은 그를 볼 낯이 없는지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겨우 안색을 추스른 여수혁이
아무 말도 없이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청장님 마음 이해합니다.”청장은 손바닥을 휘둘러 여세광의 얼굴을 수차례 더 때린 뒤 냉랭하게 말했다.“어서 하 선생님한테 사과하지 못해?!”“하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여세광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며 굽신거렸다.“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일은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하현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무릎 꿇고 말해.”“들었어 못 들었어? 무릎 꿇고 말해!”하현의 말을 듣고 여수혁은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여수혁은 이를 악물고 한 발로 여세광을 발로 차며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여 씨 가문이 하마터면 하현에게 폭삭 주저앉을 뻔했는데 감히 이 자식이 하현을 괴롭히다니!한차례 발길질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수혁은 몇 번을 더 여세광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여세광은 얼굴이 부어올랐지만 일어서지도 저항하지도 않고 밀려오는 고통을 견뎠다.이 광경을 보고 있던 하현은 여수혁의 발길질이 더 이어지면 여세광이 기절할 것 같아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렸다.“우선은 그만 때려.”여세광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일을 다 처리한 후에 때려도 늦지 않아.”하현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여세광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이 말에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여세광은 어떤 말대꾸도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있는 자료들을 주워 모은 뒤 책상으로 올라가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하현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무덤덤한 눈빛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만약 자신이 남양에서 아무런 뒷배도 없었다면 이런 하찮은 사람들에게까지 무시를 당하며 피를 토했을지도 모른다.이러니 평소에 일을 보러 온 기업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까?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그러나 남양의 업무 스타일이 어쨌든 그것은 하현과 무관하며 남양 관청을 대신해 이 부조리를 정리하기도 성가신
소미담도 자신의 부족한 경험 때문에 하현이 힘들게 되었다는 걸 알고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하현, 제가 경험이 부족해서 힘들게 해 드렸습니다.”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그가 막 차를 잡으려고 나왔을 때 갑자기 길모퉁이 한 상점으로 시선이 떨어졌다.이곳은 예전에 대형 명품숍이었는데 남양인들한테 별로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은 문을 닫았다.그리고 가게 입구에도 ‘임대’라는 플래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하현은 몇 번을 유심히 눈길을 준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몫이 아주 좋군. 만약 우리 양가백약의 플래그십 스토어로 만들 수 있다면 분명 효과가 좋을 거야!”소미담도 이 가게의 지리적 위치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문제없습니다. 제가 바로 관리사무소에 연락해서 임대를 알아보겠습니다.”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임대하지 말고 그냥 사.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 말하고.”기세도 등등한 데다 돈까지 많은 하현이 소미담에게 혓바닥을 살짝 내밀며 깨방정 같은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하현이 진정한 ‘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하현은 말을 마치며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자 운행하던 택시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게다가 운전기사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일제히 사무실 건물 꼭대기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그들의 시선을 따라 하현도 시선을 돌려보았다.순간 그는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건물 꼭대기 난간 가장자리에 한 여자가 넋을 잃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여자는 금방이라도 발을 헛디뎌 건물 아래로 추락할 것 같았다.소미담은 이 모습을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행인들은 하나같이 위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고 몇몇은 핸드폰을 들어 관청에 신고하려고 했다.하현은 잠시 눈을 희미하게 모으더니 순간 안색이 변했다.투신하려는 사람이 그가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원가령!하현은 많은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바로 옥상으로 돌진했다.위에는 이미
”이미 여러 번 기회를 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점점 더 너무해! 전화 한 통도 없고! 선물 한 번 보내지도 않고!”“쓰레기야! 바람둥이 쓰레기!”“다시는 이런 쓰레기 같은 놈한테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계속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원가령은 얇은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듯 울부짖었다.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언제라도 옥상에서 떨어질 듯 소리를 지르는 원가령의 모습에 경비원들은 모두 긴장해서 온몸이 얼어버렸다.정말로 여자가 뛰어내린다면 책임져야 할 사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순간 한 경비원이 소리쳤다.“안 돼!”“원가령, 뛰어내리면 안 돼. 이렇게 젊은데 뛰어내리면 어떻게 해?”하현은 앞을 밀치고 나와 얼른 입을 열었다.“잊은 거 아니지? 난 당신 남자친구일 뿐만 아니라 약혼자이기도 하잖아!”“당신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때문에 뛰어내릴 생각을 하는 거야?”“뭐?!”하현의 말을 듣고 경비원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의아한 눈빛으로 원가령을 쳐다보았다.사람들은 원래 원가령이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청순가련한 여자로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한 남자가 뛰어나와 자신을 남자친구, 약혼자라고 주장하며 다른 남자 때문에 생을 마감하려는 그녀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이게...원래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던 원가령은 비틀거리며 술을 마시다 뛰어내리려고 했다.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뛰어든 하현의 성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하현, 우리가 친한 사이긴 그렇다고 사람들 앞에서 날 이렇게 모욕할 순 없어!”“어서 빨리 설명해! 우리 사이는 결백하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이라구!”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원가령, 어디서 그 말을 했는지 잊었어? 경찰서야. CCTV에 다 찍혀 있다구!”“당신이 내 여자친구인지, 내 약혼녀인지 난 언제든 증명해 보일 수 있어! CCTV를 돌려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천우는 주광록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형님, 사양하지 마세요.”“하현, 이 형님 좀 봐줘!”“이 형님이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그래!”주광록은 어쩔 수 없이 나천우의 체면을 생각해 몸을 곧게 펴며 말했다.“알았어. 자, 그럼 하 대사 좀 봐 보세요!”방금 두 사람이 악수를 했을 때 하현은 주광록의 몸에 죽음의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죽음의 기운이 무엇을 뜻하는가?간단히 말해서 사람의 운이 극도로 떨어졌다는 것이다.겉으로 보기에 그의 몸은 여전히 건강한 듯했지만 사람 전체에 생기가 뚝 떨어진 것이다.죽음의 기운은 보통 임종을 앞둔 노인에게만 나타난다.하지만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의 사람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염라대왕이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가 거역할 수 있겠는가?바로 이런 불길한 기운이 죽음의 기운인 것이다.하현이 자세히 주광록의 얼굴을 보니 역시나 온몸이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만약 그가 관직에 몸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미 열흘이나 보름 전에 죽었을 것이다.관운이 그를 그나마 비호해 주었기 때문이다.다만 관운이 그를 지켜주었다고 하더라도 일단 죽음의 기운이 퍼지면 결국 주광록은 목숨을 잃을 것이다.한참을 주광록에게 시선을 깊숙이 고정했던 하현은 그의 손에 차량 열쇠가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아마도 아우디 A8인 것 같았다.하현의 눈에는 바로 이 열쇠가 불길한 기운의 집합체로 보였다.지금 이 순간도 죽음의 기운이 계속 퍼져 주광록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하현은 잠시 눈초리를 가늘게 뽑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주 부장님,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제가 보기엔 부장님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아마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게다가 이 불길한 기운은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최근 주변 사람들에게 잦은 사고가 발생했거나 심각한 병이 덮쳤을 겁니다.”“
나천우의 말을 들은 주광록은 다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어르신도 참 강경한 스타일이시지.”“예전에는 나한테도 방법을 좀 생각해 봐 달라고 하셨었지. 아는 명의들 좀 소개해 달라고.”“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당신이 아는 사람들이었어.”분명 주광록은 은둔가 나 씨 가문과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그렇지 않았더라면 나천우의 아버지가 그에게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임단은 주광록에게 손수 차를 한 잔 따라주며 말했다.“많이 애써 주신 거 다 알아요.”주광록은 자리에 앉은 뒤 나천우 부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그런데 두 분이 이렇게 느긋하게 차도 마시러 나올 기분이 되었다니, 아마 문제가 해결된 모양이지?”“하하하! 확실히 해결되긴 했죠!””안 그랬으면 주 부장님의 혜안이 밝았다고 할 수 없죠, 안 그래요?”“그리고 이 모든 게 다 하 대사 덕분입니다.”“주 부장님, 제가 소개해 드리죠.”“이분은 저와 형제나 다름없고 저의 귀인이자 뛰어난 풍수지리사, 하현입니다!”“또한 우리 부부의 오랜 골치거리였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나천우는 하현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하현, 이분은 금정 관청 주택건설부 부장님이신 주광록, 내 형님이나 마찬가지야.”“앞으로 금정개발에 무슨 어려움이 있거나 누군가 집복당을 괴롭히는 일이 있다면.”“언제든지 주 부장님한테 전화해. 그러면 그가 모든 걸 책임지고 해결해 줄 거야! 장담해!”하현은 나천우가 자신을 위해 금정의 인맥을 소개해 준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다지 탐탁지는 않았지만 오른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주 부장님, 안녕하세요.”주광록도 하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했다.두 사람의 손바닥이 닿은 순간 하현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주광록을 바라보았다.죽음의 기운?한창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주광록의 몸에서 죽음의
하현의 말에 임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원래 이 일을 몰래 진행하려고 했었다.그런데 하현의 조언을 듣고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몰래 땅을 취하려고 하면 상대는 이 땅에 뭔가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훼방을 놓으려 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정개발이 이여웅과 경쟁하기 위해 완전히 악수를 두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손가락질하며 정신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최소한의 대가로 이 쓰레기 매립장을 차지할 수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의 충분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다.금정 화원 유적지를 찾는 순간 이 프로젝트는 홍보도 없이 단숨에 유명해질 수 있다.임단의 눈에 감격에 겨운 빛이 가득 흘러넘쳤다.그녀는 하현이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다.그런데 그는 진작부터 그녀를 도울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임단으로서는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양측 사이에 일어난 약간의 오해가 풀렸을 즈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웅웅웅!”식사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 나천우의 핸드폰이 갑자기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는 잠시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은 뒤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하현, 잠시 후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올 거야.”“당신이 이래저래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하지만 이 사람은 알고 있으면 당신의 풍수관에도 큰 도움이 될 거야!”“만약 그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면 앞으로 당신은 금정에서 훨씬 운신의 폭이 커질 거야.”하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천우를 힐끔 쳐다보았다.은둔가의 나 씨 가문 나천우가 이렇게 진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상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누군데?”나천우는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약 30분이 지나자 노크 소리가 들렸고 임단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나천우, 아, 제수씨도 계셨네요? 이제 두 분의 사업이 크게
”무덤에 가서 단련을 해요?”노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사님, 저는 일찍 일어나서 산책을 하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기껏해야 옆에 있는 공원에 가는 거예요. 무덤에 가지 않습니다!”“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가장 꺼리는 거예요!”노인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무덤에 가 본 적이 없는 그가 왜?하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그럼 길에서 현금을 주운 적이 있습니까? 그 안에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가 있어서 혹시 그 종이를 들고 장수를 빌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하현은 노인을 자세히 응시했지만 음기는 이미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어딘가에서 음기에 접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니 돌아가셔서 계속 조심하세요. 어르신의 체질로 봤을 때 해가 뜨기 전에는 외출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하현의 말을 들은 노인 부부는 삼만 원을 남기고 떠났다.하현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가 아직 남아 있는 손님들의 문제를 해결했다.다행히 이 손님들은 기본적인 택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도 않았다.거의 정오가 다 되었을 무렵 하현은 나박하에게 전화를 걸어 금정 남쪽 편에 있는 금공관으로 갔다.두 사람이 예약한 방에 막 도착하자마자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나천우와 임단이 일어섰다.임단은 직접 하현에게 차를 따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당신이 금정개발을 위해 방법을 강구해 주었는데 내가 별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어!”“게다가 당신이 써 준 종이에 물까지 묻혀 망가뜨리다니!”“다 내 잘못이야.”나천우도 미안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당신이 한 말이 자꾸 떠올랐어. 젊은 나이에 풍수지리술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금정의 지맥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지금까지 금정의 그 수많은 대사들은 좋은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결국 당신이 발견했어!”“당신한테 정말
”다만...”화성봉은 종이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 지맥도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물이 묻어 잘 보이지 않습니다...”“이곳은 공중 정원의 유적지가 있었던 곳입니다.”“그런데 이곳의 좌표가 없으면 우리는 그 지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금정 화원의 진위 여부를 세상에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안타까워하는 화성봉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임원들의 시선이 갑자기 임단에게 쏠렸다.은연중에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의 기색이 슬몃슬몃 떠올랐다.“우선, 내가 전화해서 하현에게 물어보겠습니다...”임단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다음 날 아침.일찍부터 집복당에서 인테리어를 지켜보던 하현은 나천우와 임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그들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하현에게 청했다.하현은 금정개발에 관련한 일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거절하지 않았다.서둘러 황보정에게 자신의 일들을 맡긴 뒤 그는 떠날 채비를 했다.그러나 하현이 문을 나서기도 전에 장용호가 당황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대사님, 큰일 났습니다. 누가 쓰러졌어요.”“우리 집복당 앞에서 사람이 쓰러졌어요.”“그는 최근 며칠 동안 밤마다 유령을 보고 잠을 이루지 못해서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왔다고 했어요.”“줄을 서라고 했더니 결국 기절해서 입에 거품까지 물었어요...”장용호는 은근히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가 손을 쓰는 도중에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자신에게 오명이 씌였을 터였기 때문이다.하현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로비로 다시 들어갔다.로비에는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회색 가운을 입은 노인을 둘러싸고 있었다.노인은 완전히 기절한 채 가끔 경련을 일으키며 입가에 흰 거품을 물고 있었다.그의 옆에는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안 죽는다고 버티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잖아요?”“진작에 집복당에 가자고 했건만 괜찮다고 그렇게 버티더니 이게 뭐예요? 시간만 끌었잖아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아 몰고 간 뒤 화성봉은 벌벌 떨며 말했다.“임 사장님, 이거 누가 그려준 거죠?”“이 그림을 그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보통 대단한 분이 아닙니다.”“혜안이 아주 깊은 분이 틀림없습니다.”“이분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했던 금정의 지맥을 간단하게 그려낸 분입니다.”“게다가 공중 정원이 있는 곳도 정확히 지목했어요!”“이 땅을 점령하고 그 증거만 찾을 수 있다면!”“우리 금정개발은 단연코 이 업계를 휩쓸 것입니다!”“임 사장님, 이분이 누군지 말해 주십시오! 그를 좀 만나야겠습니다!”“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평생 무료로 그분 밑에서 일을 할 겁니다.”지금 이 순간 화성봉은 대가의 풍모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마치 어린아이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상기된 그의 얼굴과 감격에 겨운 그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금정개발의 고위 임원들은 하나같이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다들 어리둥절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임단이 아무렇게나 꺼낸 종이에 그렇게 대단한 정보가 들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의 지맥?만약 이것이 금정 부동산 업계에 알려진다면 모두가 미쳐 날뛸 것이다.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부동산에 대해 정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대하는 예로부터 풍수를 중시해 왔다.명당자리에서 계속 살면 당연히 건강하고 인재가 끊이지 않아 집안이 번창한다고 믿었다!부동산 개발 회사가 이런 곳에 주택을 개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성공이 없었다.그런 주택을 개발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금정의 지맥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그래야 명당자리를 제대로 보고 개발할 수 있는 것이다.금정땅의 지맥이 그려진 종이가 지금 임단의 손에 있었다.방금 전까지 금정개발은 거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렸는데 한순간에 분위기가 반전되었다.이제는 창창한 앞날이 펼쳐진 성공적인 미래가 눈에 그려졌다.이 안에
확신에 찬 화성봉의 말을 듣고 임단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금정개발이 파산하지 않고 번창할 수만 있다면 금정개발을 하현에게 넘겨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나천우도 이 일로 인해 상류사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아마도 후방에서 뛰어난 책략을 펼쳐 큰 성과를 이룬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임단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여웅 그놈이 이 일로 득의양양해할 것을 생각하니 이 또한 달갑지 않았다.그놈은 어릴 때부터 임단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언젠간 임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녔다.만약 몰아치는 그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다면 그놈은 더더욱 기고만장해질지도 모른다.아니면 소남 임 씨 가문을 직접 앞세워 이여웅을 직접 짓밟아 버릴까?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사소한 일에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임 씨 가문이 나서서 이여웅을 제압한다면 가문 쪽에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을까?은둔가 나 씨 가문을 이용하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포기한 방법이었다.은둔가가 은둔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쉽게 말하자면 은둔가는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을 좋아한다.이렇게 직접 앞에 나서서 싸우는 일은 은둔가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임단은 자신도 모르게 의기소침해졌다.정말 이대로 이여웅 그 개자식의 오만한 얼굴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 때문에 그녀는 점점 더 심난해져서 찻잔을 들어 단숨에 차를 들이켰지만 그만 찻물을 옷에 살짝 흘리고 말았다.순간 정신을 다잡은 임단은 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종이 한 장을 꺼내 흘린 찻물을 닦았다.“잠깐만요.”그때 가만히 있던 화성봉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임 사장님, 움직이지 마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얼른 임단의 앞으로 달려가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그는 방금 어렴풋이 명당자리를
임단에게 있어 금정개발은 그리 큰 존재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자신의 실패로 인해 나천우가 상류사회에서 두고두고 입방아에 올려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사업체를 향한 이여웅의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야 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임단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심장이 살짝 오그라 붙었다.그들은 나서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임단은 약간 실망한 듯 십여 명의 임원들을 쳐다보았다.평소에 높은 연봉과 보너스를 받으며 지내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입을 닫아 버린 것이다.정말 이렇게 쓸모없는 사람들일 줄은 몰랐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임단의 시선은 회사에서 새로 고용한 고문 풍수지리사 화성봉에게로 향했다.화성봉은 금정에서 명성이 매우 높았고 장천준과 황보동에 견줄 만한 풍수지리사였다.그는 자신의 이런 높은 지위로 일 년에 몇 번씩만 고위 관직들의 풍수를 봐주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다.그가 금정개발의 수석 풍수지리사가 된 이유는 전임 수석 풍수지리사가 퇴직한 이후 아무도 대신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은둔가 나 씨 가문의 많은 인맥을 동원해 겨우 화성봉을 데려온 것이다.이런 까닭으로 그는 비록 금정개발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위만은 상당히 높았다.임단은 공손한 얼굴로 화성봉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화 대사님, 방법이 없을까요?”“임 사장님, 제가 돕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방법이 없습니다...”“금정에서 시장에 나온 핵심 요지는 모두 진화개발이 가격을 올려놓았습니다.”“정말로 진퇴양난입니다.”“대체 부지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렵게 되었군요.”“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침반만 들고 금정을 몇 바퀴나 걸었습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땅을 찾지 못했습니다.”말을 마치며 화성봉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실제로도 그는 적잖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쓰레기 매립장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이 땅을 차지하기만 한다면 우리 금정개발은 앞으로 분명히 번창해서 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게 될 거야.”하현이 이곳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천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하현이 풍수 관상에 대해서는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땅을 보는 눈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이 땅은 이미 많은 풍수 대가들이 가 봤지만 쓰레기 매립지였기 때문에 풍수가 완전히 뒤틀리고 망가진 곳이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하현이 대충 위치만 보고 이곳을 개발한다면 분명 금정 부동산 업계의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하지만 하현이 자신들에게 베푼 은혜가 깊기 때문에 나천우도 털어놓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그렇게 하면 하현의 체면을 구기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천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완곡하게 돌려 말했다.“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게 될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하현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간단히 말하자면 우리가 개발하는 주택 외에는 다른 어떤 집도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거야!”“다른 어떤 집도 팔리지 않는다고?”이 말을 듣고 나천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하현이 아무리 기고만장하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땅을 선정할 수 있는가?금정 부동산 업계를 휩쓸려면 쓰레기 매립장 부지 하나로 될 수 있겠는가?“금정 부동산 업계를 싹쓸이하겠다니?! 하현, 야망이 너무 큰 것 같은데...”임단도 나천우와 마찬가지로 살짝 어리둥절해하다가 곧바로 어이가 없는 듯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하현이 너무 허무맹랑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아무리 뛰어난 해외 개발업자가 지은 주택이라도 금정 부동산 업계를 휩쓸지는 못할 것이다.하현의 말은 너무도 순진하게 들렸다.순간 그녀는 하현에게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어쨌든 그녀가 이번에 하현을 찾아온 것은 그가 은둔가 형 씨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