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문상의 태도에 하현은 싱긋 웃으며 반응했다.“솔직히 말해서 당신 부하들은 내 앞에서 전혀 힘도 못 쓰고 있어.”“그런데 당신이 이런 그들한테 기대려고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하현이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을 내뱉자 지수는 매서운 눈초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하 씨! 당신이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사장님은 풀어주고 나와 당당히 붙어 보자구!”“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한다면 성을 갈겠어!”그녀는 분하고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스스로가 고수임을 자처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하현 하나쯤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현 이 개자식이 겁도 없이 부문상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며 그녀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벌써 하현을 백 번이고 더 죽였을 것이다.하현은 지수를 향해 냉랭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기회가 있겠지.”“그때가 되어서 후회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헛!”지수는 기가 차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현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하현은 울그락불그락하는 지수를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눈을 돌려 부문상을 바라보았다.“부 사장, 다시 한번 묻겠어. 천억,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갚아? 당신 얼굴에 갚아 주지! 흥! 능력 있거든 날 죽여 봐?!”“그래!”하현은 희미하게 웃으며 뒷손으로 탁자 위의 맥주병을 집어 들고 ‘퍽'하고 부문상의 이마에 힘껏 내리쳤다.“앗!”처절한 비명이 울렸다.부문상은 하현이 감히 손을 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채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자, 다시 말해 봐. 돈 갚을 거야? 안 갚을 거야?”하현은 여전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퉤! 그딴 돈 없어! 그냥 내 목숨을 가져가!”“죽일 테면 죽여 보라구!”부문상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버텼다.“퍽!”하현은 다시 술병을 들고 같은 동작으로 같은 자리를 박살
”퍽!”지수의 칼이 먹히기도 전에 하현은 오른발을 짚고 바닥 위로 펄쩍 뛰어올라 맥주병을 쥐었다.그는 오른손으로 맥주병을 쥐고 지수의 이마에 사정없이 내리쳤다.“앗!”비명과 함께 지수는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이를 보던 사람들은 모두 경악하고 말았다.하현이 이렇게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일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이를 갈며 앙갚음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지수가 하현이 내리친 맥주병에 맥도 추지 못하고 고꾸라진 것이다.“내가 말했잖아. 당신들은 나한테 안 된다니까.”하현은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지수의 손목에 발을 얹었다.“빠지직!”순식간에 지수의 손목이 부러졌다.하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지수를 뒤로하고 부문상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툭툭 쳤다.“부 사장, 난 아직도 우리가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이 강을 건너고 다리를 부숴버릴 줄은 몰랐어.”“이번엔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엔 절대 봐주지 않을 거야.”“퍽!”말을 마치며 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다시 한번 부문상의 얼굴을 날려버렸다.그리고 포악한 얼굴로 자신에게 덤벼들던 경호원들을 모두 걷어찬 후에야 양유훤과 함께 유유히 그곳을 떠났다.어수선한 룸 안에서 숨을 헐떡이며 얼굴을 감싸쥔 부문상은 두려움과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양유훤은 룸을 나와 차에 오른 뒤에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하현, 비록 천억을 돌려받기는 했지만 부문상 같은 사람을 건드릴 것까지는 없었어.”“난 양 씨 가문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도 날 감히 대놓고 어떻게 할 순 없어.”“하지만 하현 당신은...”“괜찮아. 소인배들일 뿐이야. 그들 몇 명 밟는다고 별일 일어나지 않아. 신경 쓰지 마.”하현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보다 가능한 한 빨리 이 돈을 장부에 넣어 당신 가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게 어때?”“그래야 어르신한테 절대적으로 안전한 휴식처를 마련할 수 있어.”하현이 그렇게 말
먼 곳에서 자신에게 힘을 보태려 온 손님들을 위해 하현은 그들에게 우선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하현 일행은 하구봉의 주선으로 어느 개인 클럽으로 가서 늦은 식사를 했다.개인 클럽 안의 인테리어가 대하 풍으로 되어 있고 하구봉이 그곳을 너무 익숙한 듯 앞장서 가자 하현은 궁금증이 일었다.“하구봉, 당신 페낭에 대해 잘 알고 있어?”“그런 셈이지.”하구봉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띠었다.“하현, 솔직히 말할게. 내가 지금처럼 높은 지위를 갖기 전에 가문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일을 했었지.”“페낭에 자주 온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인맥이 있어. 그래서 하수진이 당신을 도와주라고 날 이곳에 보낸 거고.”“그나저나 하현, 이번에 페낭엔 무슨 일로 왔어?”하구봉은 하현이 뭐라고 지시만 내리면 당장 불바다에라도 뛰어들 것처럼 한껏 칼날을 갈고 온 모양이었다.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양식 꼬치구이를 집어 들고는 입을 열었다.“별로 큰일은 아닌데.”“우선은 인도 요승 브라흐마 바찬한테 패배해 큰 상처를 입게 된 양제명 어르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왔어.”“그리고 양유훤이 양 씨 가문의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 해.”하현의 말을 듣고 하구봉과 강옥연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강옥연은 약간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하현, 정말 양 씨 가문의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야?”“양 씨 가문의 진흙탕 싸움이라고?”하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구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양 씨 가문이 남양 3대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몇 년 전 양제명이 부상을 당한 후로는 많이 쇠락했어.”“이번에 양제명이 남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양 씨 가문 내부의 쇠락은 극치에 달했어.”“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해야 할 큰집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지. 그래서 양 씨 가문은 자연스럽게 여러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어찌할 도리도 없이 가문
문이 벌컥 열리자 지방시의 검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비틀거리며 뛰어들어오더니 그대로 하현의 발에 넘어졌다.하구봉과 강옥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보았고 입구에서는 흉악한 표정에 양복을 입은 남자 서너 명이 들어왔다.그들은 거침없이 들어와 젊은 여자를 끌어내려고 했다.젊은 여자는 머리를 풀어헤친 상태여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유려한 몸매가 아주 매력적이었다.하현은 왠지 이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술독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여자는 가쁜 숨을 들이쉬며 무력감에 서려 있는 눈빛을 보였다.“야! 이년아! 어딜 감히 도망가?!”“죽을래?”장발의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앗!”젊은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헝클어져 있던 머리가 날리며 예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자 하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한눈에 여자를 알아보았다.원가령?양유훤의 절친?“이년아! 이송겸이 네년의 체면을 세워 주려고 술을 사주는데!”“거짓말도 모자라 술도 못 마신다고 버텨?”“아주 죽고 싶어 환장했지?!”“이송겸은 그저 일을 제대로 하라고 격려 차원에서 너한테 약을 먹을 것뿐이야!”“성공하면 두둑이 챙겨 주겠다고까지 하는데 거절을 해?!”“잘 들어! 더 이상 얼굴 붉히게 하지 마!”“순순히 내 말 안 들었다간 바로 죽여버릴 테니까!”장발의 남자는 폭언을 퍼부으며 원가령의 뺨을 두 대 때렸다.원가령은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퍽!”장발의 남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무릎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원가랑의 복부를 가격한 뒤 냉소를 흘렸다.“제대로 해! 더 이상 우리 힘 빼게 하지 말라고!”말을 하면서 흉악한 남자들 몇 명이 원가령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방에서 끌고 나가려고 했다.장발의 남자는 뒤돌아서면서 하현 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잘 들어. 당신들은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알겠어? 혹시라도 주둥이 놀렸다간 내 손에 바로 죽을 줄 알아!
강옥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현에게 조용히 말했다.“하현, 저 사람은 남양 3대 가문인 이 씨 집안 셋째 아들 이신욱이야. 양 씨 가문 셋째 집안과는 의형제 사이라고 해.”이 말을 들은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원가령을 쳐다보았다.방금 강옥연이 말해준 이신욱의 신분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이 모든 상황은 양유훤을 겨냥한 음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양유훤을 겨냥한 일이 어쩌다가 하현 자신과 부딪히게 된 것이다.“어이, 여자 하나 잡아오라고 했는데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이 여자는 닭 잡을 힘도 없는 것 같은데 아직도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고 있어?!”“내가 진작부터 약을 먹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라서 이래?”“개자식!”이신욱은 술에 취한 표정으로 장발의 남자를 발로 차 바닥에 넘어뜨렸다.“제대로 안 해? 죽고 싶어?!”“아, 잘못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손이 느려서 흥을 다 깨버렸습니다!”장발의 남자는 놀라서 벌벌 떨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하지만 도련님, 제가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한 게 아닙니다.”“이 외지인놈이 감히 우리한테 싸움을 걸어와서 이렇게 되었습니다.”“원가령을 여기 두고 십억까지 내놓고 무릎을 꿇으라고 협박하고 있어요.”이 말을 듣고 이신욱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고개를 들어 하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이신욱의 얼굴에 냉소가 가득 흘렀다.“뭐?”“페낭에 언제 그런 오만방자한 놈이 왔어? 나 이신욱보다 더 잘났어?”“이봐! 날 막아서고 돈까지 요구해? 게다가 우리 부하들을 이렇게 만들어?”“어느 길바닥에서 굴러먹던 놈이야?”“당신이 뭔데 이래?”“딱 봐도 초행길인 외지놈인 것 같은데. 어디서 그런 영웅 나부랭이 흉내를 내려는 거야? 미인을 구해 영웅이라도 되어 보겠다는 거냐고?”“사람이 주제를 잘 알아야지!”“당신 같은 병신은 내가 매년 수십 명도 더 짓밟아 죽였어!”“한마디만 더 하자면 이곳 페낭이라는 곳은 나 이
이신욱의 무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깔깔거리고 웃기 시작했다.몇몇 예쁘장한 여자들은 입을 삐죽거리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퍽!”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하현의 행동을 보고 하구봉은 순간적으로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그는 양복 차림을 한 남자들을 발로 걷어차더니 순식간에 원가령을 빼앗아 강옥연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려?!”장발의 남자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고 품에서 총을 꺼내 하현이 있는 곳을 겨누었다.“내가 한 방에 당신들을 보내 주지!”그러나 장발의 남자가 총의 안전장치를 풀기도 전에 하현이 먼저 일어섰다.하현은 한 걸음 내디디며 모두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는 사이 장발의 남자 앞으로 쑥 다가왔다.눈 깜짝할 사이였다!사람들은 지금까지 많은 고수들을 봐 왔지만 이렇게 빠른 몸놀림을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장발의 남자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하현은 이미 그의 손에 있는 총을 뒤로 빼앗은 뒤 남자의 허벅지에 갖다 대었다.“날 쏘려고 했어?”“이건 어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방아쇠를 당겼다.“탕!”엄청난 굉음이 울렸다.장발의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지금까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날뛰던 그는 도살장에 쓰러진 돼지처럼 미동도 없었다.“너, 이 자식...”장발의 남자가 이를 갈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현은 그를 발로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동시에 하현은 방아쇠를 연거푸 두 번 당겼다.탕탕!이번에는 남자의 양손에 구멍을 냈고 남자는 힘없이 땅바닥에서 데구루루 뒹굴었다.두 손과 한 다리에 총알 자국을 새겨 넣은 것이다. “앗!”이를 보고 있던 예쁜 여자들은 깜짝 놀라며 이신욱의 뒤로 몸을 숨겼다.하현이 이렇게 무서운 존재일 줄은 몰랐다.깜짝 놀라기는 이신욱도 마찬가지였다.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이신욱은 하현의 뺨을 맞고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그의 얼굴에는 벌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고 그의 심장은 분노로 들끓었다.“이봐! 그래 어디 한 번 해 봐! 당신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보라고!”“그렇지 않았다가는 내가 당신 가족을 몰살시킬 거야!”“이 이신욱,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하현은 손에 들고 있는 총구를 옆에 있던 남자들을 향해 가리키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어떻게 내 가족을 죽이겠다는 거야? 저런 쓸데없는 폐물들 가지고?”이신욱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하구봉이 양복 차림의 남자들을 붙잡아 땅바닥에 마구잡이로 내동댕이며 험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하현을 비호하는 사람들의 실력이 어떻게 별 볼 일 없을 수가 있겠는가?다만 항도 하 씨 가문에 있을 때 하구봉의 날카로움이 하구천이나 하수진에게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지금 페낭에 오니 자연스럽게 숨겨둔 날카로운 발톱이 드러난 것이다.이신욱은 자기 사람들이 맥없이 꼬꾸라질 줄은 몰랐다.그러나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도 그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채로 말했다.“개자식! 실력 좀 있다고 해서 뭐?”“사람을 때릴 수 있다고 해서 뭐? 그게 어쨌다는 거야?”“흥! 내 전화 한 통이면 당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야!”“전화? 사람을 부르겠다고?”하현은 실실 웃으며 강옥연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우선 원가령을 가까운 병원으로 데리고 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말을 마친 하현은 이신욱의 얼굴을 툭툭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좋아. 당신이 그렇게 자신 있다면 당신한테 기회를 주지!”“나와 하구봉이 해변에서 당신을 기다릴게.”“아무나 불러.”“만약 당신이 부른 사람이 날 놀라게 할 정도라면 나도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고 내 스스로 내 두 손과 한 발을 부러뜨릴게.”“하지만 날 놀라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끝장이야!”말을 마치며 하현은 마지막으로 이신욱의 얼굴에 손바닥을 날린 다음 하구봉과 사람들
하현은 해변에서 남양 특유의 각양각색 달콤한 과일들을 한 움큼 쥐고 먹으면서 이신욱을 기다렸다.“하현, 이신욱 자료 여기 있어.”하구봉이 핸드폰을 꺼내 자료를 보여주었다.“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이 씨 가문에서 최고 후계자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집안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어.”“페낭의 주먹계를 휘어잡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은 건 사실이야.”“우리 둘만으로는 좀 모자라지 않을까? 사람을 좀 불러올까?”이신욱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고 기회를 준 하현의 행동이 하구봉은 못내 불안한 모양이었다.끝까지 싸워서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싸움에 있어서는 수적으로 많은 쪽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는 법이다.만약 이신욱이 수천 명을 부른다면 둘이서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뽐내 봐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하현은 손에 들고 있던 과일 껍질들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물티슈로 손을 깨끗이 닦은 다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 필요없어. 만약 이신욱이 불러들인 사람들을 우리가 다 밟아버린다면 앞으로 내가 페낭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겠어?”“어떻게 양유훤을 도울 수 있겠냐고?”하구봉은 감탄에 마지않은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 역시! 하구천이 왜 당신을 이길 수 없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하구천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해 몇 가지 안배를 해 뒀을 거야.”“신중하긴 하지만 혈기가 없어 보여서 사람들이 실망스러워하겠지.”하현은 하구봉의 눈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마치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라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었다.“붕!”30분 도 채 되지 않아 해변가에 수십 대의 차량이 나타났다.하나같이 가속페달을 밟고 나타난 차량들은 이신욱 만큼이나 기고만장한 모습이었다.토요타 랜드크루저!레인지로버!벤츠!롤스로이스!럭셔리 SUV의 향연이었다.차량들은 사방 천지에 먼지를 휘날리며 요란스럽게 등장했다.이신욱과 친분이 있고 언제든
이의진도 눈살을 찌푸리며 거들었다.“하현, 내 말 잘 들어! 지금 당장 사과해!”“그리고 무릎 꿇어!”“그렇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벽돌 나를 생각은 하지도 마!”“당신은 그냥 굶어 죽어!”하현은 이 씨 남매가 하는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오만방자한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3분, 고명원에게 어서 와서 차를 따르라고 해.”“나 하현이 말했다고 전해.”“어서 어서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을 넘길 시엔 차를 따르는 걸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이영산을 비롯한 이 씨 가족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얼굴빛이 새까맣게 변했다.하현이 이렇게 고명원을 도발하는 것은 그들을 불구덩이로 집어넣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이놈이 이 씨 가족들을 데리고 같이 죽으려고 작정한 거야?“야! 당신이 뭔데? 감히 고 사장님을 오라 마라, 차를 따르라 마라 하는 거야?”장발의 사내는 냉랭한 눈빛으로 말했다.“사는 게 지겨워?”장발의 사내는 여차하면 하현을 밟아 죽일 듯 눈을 부라렸다.그때 온몸에 거즈를 두른 남자가 뒤에서 들어왔다.알고 보니 소항 회관에서 하현과 충돌한 그 남자였다.남자는 하현의 얼굴을 똑똑히 본 순간 두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눈빛으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그는 장발의 사내에게 얼른 귓속말로 속삭였다.소항 회관에서 그는 하현에게 단번에 걷어차였다.고성양의 손발은 부러졌다.엄도훈은 하현 앞에서 나라님 모시듯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이로 미루어 보아 하현의 신분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장발의 사내는 남자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쏜살같이 그의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하현! 당신은 이제 죽었어!”이영산은 하현을 가리키며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의 최후를 한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따가 일이 생기면 당신 혼자 다 책임져! 절대 우리 끌어들이지 마!”이 씨 가족의 친척들도 모두 사나운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며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
장리나는 이 말을 듣고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하현, 얼른 형님께 감사하다고 해야지!”“형님이 아니었으면 어디 가서 그렇게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겠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다 혓바닥 깨물까 봐 겁도 안 나?”“하 씨! 당신 나한테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당신 정말...”장리나는 하현에게 조롱이 가득 담긴 말을 퍼부으려고 했다.그런데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퍽’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발로 문을 차고 들어왔다.차를 마시고 있던 하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곧이어 러닝셔츠를 입은 남자 몇 명이 들이닥쳤다.그들 앞에 서서 담배를 물고 있는 긴 머리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씨 가족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모두 꺼져! 이 룸은 우리가 접수한다!”이영산은 오늘 아침 마침내 인생의 절정을 맞이했는데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그는 술기운을 내뿜으며 테이블을 세게 쳤다.“무슨 소리야? 우리 아직 다 못 먹었다구!”“우리 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이 여기서 밥을 먹을 건데 당신들 감히 이런 식으로 굴 거야?”시가를 물고 있던 남자는 무심한 듯 이영산을 쳐다보았다.장청 캐피털 고 사장님?고명원?고명원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영산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방금까지의 원망과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무례하다고 느끼던 이 씨 가족들도 장청 캐피털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겁을 먹었다.고명원은 어쨌든 그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게 어떻게...”이영산은 말할 수 없이 난감한 표정이었다.그는 얼굴을 돌려 주변 친척들을 몇 번이나 쳐다본 뒤 멋쩍은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거의 다들 드셨죠?”“고 사장님이 이렇게 내 사업을 챙겨주시고 수백억짜리 프로젝트도 맡겨주셨는데 이 룸을 원하셨다니 드려야죠!”“다
설은아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하현에게 제지당했다.그가 오늘 여기 온 것은 이영산이 도대체 어떻게 기고만장한 허풍을 떠는지 보기 위해서였다.이제 막 좋은 볼거리가 시작되었는데 못하게 막아서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이영산의 부모도 소리를 듣고 와서 눈동자에 살벌한 눈빛을 떠올린 채 주시하고 있었다.데릴사위인 주제에 우리 아들의 경사를 축하하는 자리에 와서 재를 뿌리겠다는 것인가?!하현이 아니었으면 자신의 아들에게 아내가 하나 더 생겨 설 씨 가문의 모든 자산을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아이고, 이게 누구야? 바로 그 전설의 데릴사위 아니야?!”“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어쩜 저렇게 머리가 안 돌아갈까?!”“머리가 좋았으면 노점에서 사 온 무 따위를 장모에게 선물했을까?! 흥!”“게다가 우리 영산이가 선물한 그림을 감히 가짜라고 모욕하다니!”“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꼴같잖게 센 척하기는!”이영산은 그동안 설 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포장해서 이 씨 일가들에게 한껏 허풍을 떤 것이 분명했다.장리나는 당연히 이영산의 편이니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은아는 이영산이 이렇게 낯짝이 두꺼울 줄은 몰랐다.순간 그녀는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요!”“됐어! 뭐가 어떻게 되고 저렇게 되고 상관없어!”“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고 그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자기 것이 아니라면 노력해서 얻을 생각을 해야지!”이 씨 가문 둘째 할아버지는 경험자 같은 자태로 말을 이었다.“젊은이, 내가 자네라면 지금쯤 순순히 설 씨 집안을 떠나 경비원이라도 해서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했을 거야. 그게 데릴사위보다는 훨씬 나아!”“자네가 그러는 걸 자네 조상이 알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거야!”하현은 웃으며 말했다.“맞는 말씀입니다. 딱 봐도 데릴사위 경험자로서 하시는 말씀이신 듯하군요!”“뭐?
”물론 두 사람이 오늘의 이 성과를 이룬 데는 여러 친척들, 어른들, 형제, 자매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저와 제 남편이 이런 연회를 마련한 것은 여러분에게 감사하기 위해서입니다.”이영산의 부친은 거만한 자세로 껄껄 웃으며 일어섰다.“여러분, 오늘은 마음 편히 즐겁게 먹고 마시길 바랍니다!”“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82년산 마오타이든 뭐든 원하는 만큼 준비해 뒀으니까요!”이영산도 의기양양한 얼굴로 일어섰다.“부모님, 여기 어르신들, 형제, 자매 여러분!”“오늘 저를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저 이영산, 절대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건배!”말을 마치며 그는 호탕한 얼굴로 술 한 잔을 마셨다.“영산이와 의진이가 능력이 있었던 거죠. 그러니 이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었던 거구요! 앞으로 우리 친척들 좀 많이 살펴 주세요!”“맞아요.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대단한 성과를 거두다니! 정말 대단해요!”“장청 캐피털 일을 따내다니!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요?!”“성월TV도 마찬가지예요! 배후에 금정 간 씨 가문이 떡 받치고 있는 곳이죠! 따라서 이것은 금정 간 씨 가문과 연줄을 맺은 거나 마찬가지예요!”“이제 우리 이 씨 가문이 완전히 떴어요!”친척들은 하나같이 영광스러운 얼굴로 이영산 남매를 바라보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항렬이 가장 높은 둘째 할아버지가 테이블을 탁 치며 큰소리로 말했다.“자손을 낳으려거든 이영산 같은 아들을 낳아야지!”“우리 이 씨 가문에 이영산이 있으니 이제 우리 가문은 더 높은 곳으로 갈 일만 남은 거야!”이에 이영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에 내걸며 호탕하게 웃었다.“둘째 할아버지, 숙모님, 숙부님. 과찬이십니다!”“저와 제 여동생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이 씨 가족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이 씨 가문에 꼭 보답하겠습니다!”이어 이의진도 곱게 화장한 얼굴
이튿날 아침, 밤잠을 설친 하현은 방을 나서자마자 설은아의 차에 몸을 실었다.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하현을 원망하기 시작했다.분명 오늘 이영산이 밥을 사기로 했다고 어제 다 얘기를 했는데 결국 하현은 이렇게 늦게 일어난 것이다.설은아의 스포츠카에 올라타서야 하현은 알게 되었다.이영산이 요 며칠 동안 무슨 개똥 같은 운이 그렇게 좋았는지 수천억짜리 공사를 수주했고 그와 함께 신분이 순식간에 치솟았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여동생, 이의진도 직장에서 순풍에 돛 단 듯 승진하며 겹경사를 맞았다고 했다!최희정과 설재석 부부도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하려고 했지만 임시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설은아를 대표로 내세웠다.설은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영산은 하현을 콕 집어 말하며 꼭 데려오라고 했다.말하자면 자신의 높아진 위상을 하현에게 보여줌으로써 코를 납작하게 할 셈인 것이다.하현도 이영산이 절대 좋은 마음으로 자신을 부른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상관없었다.설은아가 참석하라고 하니 함께 가 보는 것이다.낮 12시.하현과 설은아가 홍궁관 2번 룸에 도착했다.룸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안에는 커다란 테이블 다섯 개가 놓여 있어서 한 번에 오십 명 정도가 함께 식사할 수 있었다.테이블당 최소 몇백만 원이 든다고 하니 이영산이 떼돈을 벌었다는 얘기가 나올 만도 했다.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고 화색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은 상류층 자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설은아는 낮은 목소리로 이 사람들이 모두 이 씨 집안사람들이라고 하현에게 설명했다.이 씨 집안은 삼류 가문이었지만 그 수는 적지 않았다.게다가 금정 토박이였기 때문에 항상 자신들의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며 한껏 자존심을 치켜세우고 다녔다.설은아와 하현의 등장은 이 씨 집안사람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이영산의 친부모는 이 자리를 주최한 장본인이지만 하현을 보고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자태로 문 바로 앞자리를
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 내가 엄도훈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는 나한테 신세를 진 셈이야.”말을 마치며 하현은 화제를 바꾸었다.“참, 대구 정 씨 가문 아홉 번째 집안이나 되면서 왜 갑자기 자금난이 생긴 거야?”“그리고 왜 나한테 한마디도 안 했어?”하현은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원래 아홉 번째 집안에는 아무런 자금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설은아가 상석에 앉게 되자 대구 정 씨 가문의 일부 친족들이 불만을 품었고 그들은 비밀리에 물밑으로 많은 일을 벌여 원래 가문의 자금이었던 돈의 일부를 소리 소문도 없이 빼내었다.아홉 번째 집안이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자금이 유출된 후 여기저기 구멍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설은아는 최선을 다해 구멍을 메워보려 했지만 아무리 해 봐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특히 그녀는 금정에 온 후 대구 정 씨 가문이 벌여 놓은 난장판을 떠안아 자금에 대한 압박이 더욱 커졌다.설은아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은행에 두 배의 이자를 물고 대출을 했지만 여전히 이천억이란 돈이 모자랐다.그래서 그는 오늘 고성양을 만나 돈을 빌려볼 생각이었던 것이다.“당신한테 왜 말 안 했냐고?”설은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말해 봤자 무슨 소용 있어?”“당신 능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한 번에 이천억을 융통하기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대구 정 씨 가문의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한테 이로울 게 없거든.”설은아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그것은 아홉 번째 집안이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과 대구 정 씨 가문 고위층 사이에 일생일대 도박과도 같은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만약 그녀가 하현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청한다면 계약을 어기는 것이 된다.문제는 대구 정 씨 가문은 절대 함부로 할 수 없는 만만찮은 가문이라는 것이다.하현은 말끝마다 그녀를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으로 만들겠다고
저녁 9시.술과 밥을 배불러 먹은 하현은 소항 회관을 떠나 설 씨 가문으로 돌아갔다.하루 종일 고생한 그는 전에 최희정과 한바탕 크게 싸운 것도 있고 해서 그녀를 다시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아 소리 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자신의 방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설은아의 방에서 ‘아앗’하는 소리가 들렸다.하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방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꽃향기가 물씬 풍겨왔다.설은아는 방금 목욕을 한 것으로 보였고 하얀 목욕 수건은 몸의 중요 부위만 감싸고 있었다.그녀의 백옥 같은 긴 다리는 수건 바깥으로 훤히 드러나 있어서 하현의 눈앞을 아찔하게 만들었다.하현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미녀들을 만났다.그녀들 각각의 매력도 상당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하지만 그를 가장 설레게 한 사람은 역시 설은아였다.순간 하현은 자신의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다행히 그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아 얼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들어왔어?”누군가 들어오자 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며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지만 하현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긴장을 풀었다.하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이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들어왔어. 괜찮아?”설은아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 조금 삔 것뿐이야. 주물러주면 괜찮아질 거야.”“내가 해줄게.”하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설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설은아는 침대에 앉아 곧고 긴 다리를 하현 앞에 쭉 뻗었다.하현은 설은아 앞에 쭈그리고 앉아 긴 다리를 주물렀다.손끝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펄쩍 뛰었다.백옥같이 아름답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그녀의 다리는 곱고 매끄러웠다.하현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그녀의 다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설은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하현, 안마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왜 만지작
고명원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뭐라구요?”정홍매도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그녀는 남편이 고향에 가서 조상님께 향불을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줄곧 그 이유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그런데 이런 이유가 있었다니!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간단합니다. 당신은 기가 강한 사람입니다. 남을 압도할 만큼. 그래서 당신의 강한 기운이 조상의 기운을 눌렀던 거죠.”“만약 당신의 기운이 충분히 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당신은 열 번도 더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 평생, 당신 아들이 태어난 후 당신이 몇 번이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는지!”하현의 말을 듣고 고명원은 마침내 큰 충격을 받았고 탄복해 마지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하현, 당신은 정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엄 회장님이 이렇게 당신을 좋아하는군요!”“맞습니다. 난 정말이지 몇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그때마다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하지만 운이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죠.”“옛날 사람들은 큰 재난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훗날 반드시 복이 온다고 했어요.”하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런 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당신에게 조상의 비호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신에게 후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죠!”“그래서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 보길 권합니다.”“그러면 다음에 조상님께 제를 올릴 때 저절로 향불을 태우고 싶을 겁니다.”“봉분의 풀들도 그렇게 푸르지는 않은 것 같군요.”“조상들의 숨결이 모두 기운을 다했기 때문이죠!”“개자식!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자꾸 그런 말 하면 내가 당신 입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여보! 가! 가자구!”“자기가 무당이야? 뭐야?”“저 말을 믿느니 차리리 죽는 게 나아!”말을 마치자마자 정홍매는 고명원을 데리고 얼른 나가려고 했다.“
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의술은 정말 잘 몰라. 하지만 살인술은 좀 알지.”“한번 보여줘?”“단번에 당신의 목숨을 앗아버릴 수 있는데.”하현의 말을 들은 엄도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리고 나서 아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농담하지 마세요! 형님! 농담도 참!”“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전 지금 형님이 제 목숨을 구해 주길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구요!”하현은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은침을 자신의 손가락에 살짝 찔러 피 한 방울을 짜낸 뒤 엄도훈의 미간에 떨어뜨렸다.그리고 큰 혈이 지나가는 명치 몇 군데에도 떨어뜨렸다.그러자 가슴에 있던 흔적이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어? 어? 사라지고 있어?! 정말로 사라졌다구!”몇몇 측근들은 모두 놀란 얼굴을 한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눈앞에서 흔적들이 서서히 옅어지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바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엄도훈은 처음에 하현이 뭘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그런데 이제 보니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온몸을 얽매고 있는 기운도 함께 사라졌고 이윽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고명원도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는 처음에 하현이 농간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일을 보고 자신의 식견이 이렇게 모자랄 줄은 몰랐다.“형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해요!”“정말 감동했어요!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동이에요!”엄도훈의 얼굴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다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긴 해요.”“집이나 가게에 팔괘경을 비치하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을 많이 봤어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은 거예요?”“그 물건이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다들 그런 골동품을 쓰니까요.”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가지고 있던 팔괘경은 출토될 때부터 원한에 얽혀 있었어.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그 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