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천진의 말은 온기 하나 없이 무미건조했다.그러나 그가 입 밖에 내놓은 말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치명적이었다.하현의 곁에 서 있던 사청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용천진의 모습을 보니 그가 하현에게 사죄하고 고개를 숙일 뜻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용천진은 오히려 하현을 살인자로 몰아넣을 작정이었다.이제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었다.동시에 일월루에는 각각 십여 명의 용 씨 가문 고수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마스크와 긴 도끼를 등에 멘 채 그들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분명 용천진의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하현을 향해 돌진해 올 기세였다.그리고 흰색 무도복을 입은 용문 전당 선임 탁심설이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현을 보았다.마치 곧 죽을 사람을 보는 듯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장내에는 칼끝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언제라도 피 튀기는 장면이 펼쳐질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용천진, 나도 오늘 뭔가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 당신이 오늘 이곳으로 날 유인해 죽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다만 당신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리석군.”“나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여자를 죽이고 그 죽음을 나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해?”“도대체 누가 이런 계략을 꾸민 거야?”“나중에 그 사람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거든 어서 빨리 그 사람을 죽이는 게 나을 거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지.”말을 하면서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냅킨으로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피를 닦았다.하현의 흔들림 없는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용천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깊은 상념에 빠졌다.그는 원래 하현이 이런 상황에 닥치면 소스라치게 놀라 당황할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우리도 여러 번 호흡을 맞춰 본 셈인데 그동안 꽤 잘 맞았잖아, 응?”“무성상업연맹 자산을 순순히 나에게 모두 돌려주고 벌주만 석 잔 마신다면 나도 이 상황에서 당신 체면 정도 못 세워 주겠어, 안 그래?”하현은 그동안의 소회를 말하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용천진을 떠보았다.“용천진, 꼭 이렇게 꼴사납게 굴어야 했어?”“당신이 했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봤어.”용천진은 마치 하현에게 마음을 열고 성의를 가진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발아래 천하를 둔 군주처럼 말했다.“안타깝게도 당신이 한 가지 잊은 게 있어.”“나 용천진이 처한 상황이 쉽지가 않아.”“남들이 보기에 난 용 씨 가문의 유력한 후계자이고 용문 고위층의 절반의 지지를 받고 있지.”“그렇지만 당신이 잊은 게 있어. 우리 용 씨 가문 노부인이 나한테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야!”“지금 노부인은 용천두를 상석에 앉히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지.”“이런 마당에 내가 무성상업연맹의 자산을 내줄 수 있겠어?”“이것은 나의 퇴로를 스스로 끊고 노부인에게 날 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나 같은 사람은 말이야. 상석에 앉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이런 내가 상석에 앉을 기회를 버린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그래서 여러 번 생각해 보니 당신의 비상한 머리를 빌려야 할 것 같더군.”“아, 걱정하지 마. 내가 당신을 죽인 후에는 다음 생에는 좋은 집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테니까!”용천진은 마음을 터놓은 오랜 친구에게 말하듯 했다.그러나 말속에 담긴 음흉한 속내는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용천진, 별말을 다 하는군. 내년 오늘 당신이 날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어?”“걱정하지 마. 내가 꼭 기도해 줄 테니까. 비싼 향으로 당신의 명복을 빌어 줄 테니까 저세상 가서도 안심하라고.”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아, 한마디만 더 물을게.
”퍽!”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첫 번째로 달려드는 용 씨 가문 고수의 얼굴에 손바닥을 후려쳤다.용 씨 가문 고수는 밀려오는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지며 몸체가 그대로 뒤로 튕겨졌다.튕겨진 고수는 그들 무리 사이로 쓰러져 몇몇 용 씨 가문 고수들을 연이어 무너뜨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손바닥을 후려친 하현이 이번에는 탁자 위를 탁 쳤다.그러자 탁자 위에 있던 도기 접시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나왔다.“아악!”여기저기서 연거푸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용 씨 가문 고수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이 쓰러졌지만 또 다른 사람들이 밀려들었다.이들은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마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끝없이 이어졌다.하현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용 씨 가문 고수들 앞에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이런 공세는 누가 봐도 하현을 무력화할 수 있는 정도의 기세처럼 보였다.구석에 몸을 숨기고 몰래 이 상황을 지켜보던 용천진의 여자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그녀들은 이렇게 훌륭한 고수들 앞에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창백한 얼굴로 대문 근처로 물러나 이를 지켜보던 사청인도 깜짝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도련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거의 백 명에 가까운 용 씨 가문 고수들이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을 한쪽 구석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던 탁심설은 천천히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들고 한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용천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조심해, 하현도 만만찮은 사람이야.”하지만 용천진은 탁심설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그녀는 용문 전당의 선임이었기 때문이다.만약 그가 하현을 꺾을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솽!”탁심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가냘픈 몸을 비틀어 귀신 그림자처럼 날쌔게 내던지며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탁심설의 동작은 점점 더 빨라졌고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그녀의 양손에 든 장검은 하현을 산 채로 베어버리려는 듯 교활한 발톱을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었다.하현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탁심설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모두 방어했다.하현을 포위하고 있던 용 씨 가문 정예들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탁심설이 전당의 선임을 맡은 만큼 얼마나 실력이 출중한지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 상황에서 하 씨 이 자식이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몸으로 방어할 수 있는가?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던 용천진의 얼굴도 점점 더 굳어져 갔다.그는 이미 하현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만약 이렇게 했는데도 하현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앞으로 일이 아주 번거로워질 것임이 틀림없다!용천진이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하자 탁심설은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자신의 칼날에 하현의 목을 걷어올리고자 애썼다.“퍽!”모두가 탁심설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순간 번쩍이던 장내의 칼날은 사라지고 정적이 흘렀다.잠시 후 탁심설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풀썩 땅에 쓰러졌다.땅바닥에 쓰러지며 그녀는 입에서 왈칵 피를 뿜었다.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용문 전당의 선임인 탁심설이!그렇게 강인했던 탁심설이!뜻밖에도 하현의 주먹에 고개를 떨구고 만 것인가?!이 장면을 본 많은 용 씨 가문 고수들은 그대로 굳어져 얼음이 되었다.용천진의 여자들도 모두 눈앞의 장면에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가 버렸다.사청인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압도당해 버렸다.하현 같은 무적의 존재가 무성에 나타난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용천진, 당신이 준비한 사람, 이제 못쓰게 된 것 같은데.”하현은 손바닥을 툭툭 털며 탁자 위의 휴지를
”어때? 하현, 이제 더는 꼼짝 못 하겠지? 아니면 내 솜씨 한 번 구경해 볼 테야?”용천진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충분한 병력들을 준비해 두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맞아. 당신은 사람도 많고 실력도 좋아.”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난 이미 당신이 날 죽이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걸 짐작했었어. 용천진 당신은 내가 정말 혈혈단신으로 당신이 초대한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해?”하현의 말을 들은 용천진은 약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사청인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려 들어? 이 쓸모없는 것!”“퍽!”그때 누군가가 일월루의 대문을 발로 뻥 걷어차고 들어왔다.무도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남녀가 길게 행렬을 지어 몰려들었다.이 사람들의 손에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표정은 하나같이 찬바람이 불었다.군중 앞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진주희였다.그들은 빠르게 흩어져서 하현 주변으로 방어선을 이루며 막아섰고 용 씨 집안 고수들과 대치하기 시작했다.장내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용문 집법당 사람들이야?”“진주희?”이 광경을 보고 용천진은 냉소를 흘렸다.“진주희, 뭘 잘못 알고 온 거 아니야?!”“내가 누군지 잊었어?”“또 집법당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무슨 행패를 부리려고 하는 거야? 내가 정말 만만하게 보여?”“나도 오고 싶지 않았죠.”진주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용천진 당신은 공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용문 사람들을 동원해 용 씨 가문의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집법당의 부당주로서 어떻게 이 일을 가만 보고 있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당주에게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겠냐고요?”“당주?”용천진이 피식하고 냉소를 흘렸다.“내가 비록 당신이 말하는 그 당주가 누군지 모르지만 말이야. 지금 그 말을 듣고 보니 잊었던 게 생각나는군.”“그동안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어!”말을
하현이 일어서자 진주희는 그의 존재를 의식한 듯 반보 뒤로 물러서며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았다.이 모습은 용천진을 적잖이 당황스럽게 만들었다.사청인도 용천진과 마찬가지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하현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바로 용문 집법당의 당주야.”이 말을 들은 집법당 제자들은 모두 손에 칼을 든 채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당주님, 인사 올립니다!”“당주님, 인사받으십시오!”하현을 부르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며 장내를 휩쓸었다.용천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그를 따르던 여자들도 모두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하현이 당주라고?!”용천진에게서 하현이 보통 거물이 아닐 거라는 얘기를 귀띔으로 들은 사청인조차도 하현이 용문 집법당 당주라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아무리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하현이 당주일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하현이 당주라고?”“용문의 새로운 집법당 당주는 젊고 의기양양하고 실력이 출중하여 용문의 신임을 한몸에 받는다고 하던데 설마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그럴 리가?! 하 씨 성을 가진 이놈은 아무리 보아도 당주 같아 보이지 않는데!”“하지만 만약 그가 당주가 아니라면 진주희가 뭐 하러 이렇게 공손할 필요가 있겠어?”집법당 자제들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자 용천진이 데려온 용 씨 가문 고수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용 씨 가문과 용문은 막역한 관계다.많은 용 씨 가문 고수들은 사실 용문에서 나왔다.만약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 용문 집법당의 당주라면 그들이 그에게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하극상, 대역무도한 죄를 짓는 것이었다.화려하게 치장한 용천진의 여자들은 모두 죽일 듯 하현을 노려보았다.땅바닥에서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던 탁심설은 온몸이 더욱 뻣뻣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왜냐하면 용문
곧이어 바깥에서 우레와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소리만 들어도 용천진 쪽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자칫하다간 오늘 밤 이곳이 피의 강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하현의 말을 들은 용천진의 한 측근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소리쳤다.“하 씨! 설령 당신이 정말로 용문 집법당 당주라고 해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용 씨 가문 도련님을 벌할 거야?”“용문은 용문이고 용 씨 가문은 용 씨 가문인데. 용문 집법당에서 집행하는 법을 어찌 용 씨 가문 사람한테 적용할 수 있느냔 말이야?!”이 측근의 말에 감정에 복받친 용 씨 가문 사람들이 덩달아 한 소리씩 덧붙였다.이론대로라면 집법당 당주인 하현은 용천진을 체포할 자격이 없다.동시에 몇몇 측근들은 맹렬하게 손짓을 했고 갑자기 높은 곳에 있던 궁수와 저격수가 머리를 내밀고 총구를 아래로 겨누었다.그들은 여차하면 무기를 앞세워 싸울 태세였다.“용문의 법으로는 용 씨 가문 사람들을 벌할 수 없지.”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졌다.“다만 용천진은 용문 내외 팔당과 서른여섯 개 용문 지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이야!”“용문의 자원을 썼고 용문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어.”“어떻게 보면 반쪽짜리 용문의 고위층인 셈이지, 안 그래?”“그런데 중요한 순간에는 용문의 법망에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해?”“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야?”하현의 말에 떠들썩했던 장내가 조용히 가라앉았다.많은 사람들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하현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기 때문이다.용천진은 용문의 많은 자원을 이용했으니 반쪽짜리 용문 고위층이라고 할 만했다.그가 용문의 자원을 이용했다면 당연히 용문의 법으로 그를 구속할 수 있다.“하현, 천만 번을 말해도 변함없어! 난 정식으로 한 번도 용문에 가입하지 않았어!”용천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일어섰다.“용문
”솨솩!”용천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현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우뚝 섰다.그의 동작에는 언짢은 기운이 가득했다.사실상 화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용천진 앞으로 다가왔다.용천진의 최측근들과 부하들이 제지할 틈도 주지 않았다.“퍽!”하현은 손바닥을 내던지듯 후려쳤다.저항하려던 용천진은 장내가 떠나갈 듯 비명을 질렀고 시뻘건 피가 하늘로 솟구쳐올랐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용천진의 몸은 뒤에 있던 큰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쓰러진 용천진은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차가운 손이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퍽!”하현은 손바닥을 뒤로 힘껏 뺐다가 그대로 용천진의 얼굴에 가격해 기절한 용천진을 깨웠다.“용천진, 이러면 재미없지.”“사람이 봐줄 땐 넙죽하고 받아들여야지. 당신은 매번 이렇게 버티다가 결국 내가 손을 쓰게 만들다니! 정말 피곤해!”“용천진, 마지막으로 묻겠어...”“어떤 선택을 할 거야?”세상이 무너진 듯한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이럴 수가?!어떻게 이런 일이?!용천진이었다.그는 무도의 고수였다!비록 전신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그 누구도 함부로 그에게 덤비지 못했다.그런데 하현 앞에서 그는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방금 용천진이 땅바닥에서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한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그를 따르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땅에 주저앉아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그녀들의 마음속에 큰 산이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용천진은 항상 백전백승의 존재였는데 어떻게 이런 꼴을 당할 수가 있는가?용천진은 사색이 된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잠시 후 그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몇 번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생각지도 못했어. 완전히 생각지도 못했다구!”“나 용천진도 반평생 전장에서 있었던 셈인데 어떻게 무성 용 씨 가문 노부인의 신임이 두터운 용천두 한 사람을 누를 수 없단 말이야?!”“난 심
최희정은 하현이 어디서 이 명함을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맞아. 정말로 형홍익 명함인데?”우다금은 최희정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를 버럭 내었다.“아휴! 잘난 데릴사위가 형홍익의 명함을 얻었으니 이제는 금정 최고 거물의 명함도 받을 수 있겠군그래!”“설 씨 집안도 대구 정 씨 가문과 연락이 닿아 아홉 번째 집안이 되어 꽤나 번성하고 발전했을 텐데 왜 이렇게 변한 거야?”“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생색은 한껏 내면서 이런 핑계나 대고 있으니 원!”“정말 실망이야!”“이렇게 우릴 무시할 거면 확실히 말할 것이지! 앞으로 내가 절대 이 집안에 얼씬을 하나 봐! 절대 안 올 거야!’우다금은 노점에서 사 온 선물 꾸러미를 떠올리자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쓴 돈을 만회하기 위해 거실에 있는 찻주전자라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우다금의 말에 최희정과 설재석은 어이가 없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설은아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하현, 당신이 좀 도와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이 정말...”이쯤 되니 설은아도 자신의 행동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하현과 최희정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런 하현이 최희정을 위해 나서서 우 씨 고모를 도와주려 하겠는가?설은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하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이런 사소한 일로 형홍익 어르신을 귀찮게 할 필요도 없어. 내 하녀한테... 그러니까 내 친구한테 말 한마디만 꺼내면 돼.”말을 마치며 하현은 핸드폰을 꺼내 형나운에게 전화를 걸어 우소희의 취업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다.그는 1분도 되지 않아 전화를 끊었고 우다금 모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잘 해결되었습니다.”“거짓말하지 마!”“어디서 계속 장난질이야!”“데릴사위인 주제에 금정 최고 책임자라도 되는 양 허
”허! 제부! 시도도 안 해 보고 노력도 안 했는데 당신들은 처음부터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잖아요!”“그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태도예요?”우다금은 냉소적인 얼굴로 쏘아붙였다.“당신들이 우릴 친척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우리 소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제부, 난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내가 자존심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이렇게 애원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정말 너무 뻔뻔들 하네!”최희정은 자신보다 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정신을 다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찾아온 언니를 내가 영광으로 생각하며 대했어야 한다는 거야?”“엄마, 아빠...”설은아는 또 말다툼이 시작되려 하자 걱정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하현, 혹시 이모 도와줄 수 있겠어?”설은아는 하현이 금정은행에서 형홍익의 개인 명함을 내놓은 것이 문득 떠올랐다.그렇다면 하현과 형홍익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얘기였다.그래서 하현이 방금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도와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눈앞의 난처한 상황을 보고 설은아는 어쩔 수 없이 하현에게 입을 열었다.“하현, 정말 도와줄 수 있어?”설은아의 말에 우다금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은아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면 안 되겠니?”“네 전 남편이 얼뜨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어?”“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지!”“능력이 없다는 둥 변명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얼뜨기를 내세워 나한테 헛바람이라도 넣으려고 그래?”“놀리는 거야? 놀리니까 재미있어?”“우린 바보가 아니야!”말을 마치며 우다금은 화가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라렸다.그녀는 설은아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이런
”제부, 희정아, 은아야. 이 일은 아무래도 너네들이 해결해 줬으면 좋겠어!”“어쨌든 너네들은 매일 친구 모임에도 다니면서 여러 거물들과 친분도 있고 인맥도 많을 거 아냐?”“너네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 같은 과부와 내 딸은 어떻게 살아?”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희정의 식구들은 신세한탄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 우다금을 보고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너네들, 우리 소희가 일자리도 없이 집에서 폐인이 되어 가는 걸 차마 볼 수 있겠어?”“양심에 찔리지 않겠냐고?”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소희는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손을 놓은 뒤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엄마, 희정이 이모나 이모부가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이 사람들은 이제 돈이 많아서 우리 같은 가난한 친척들은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나 봐!”“돈푼깨나 좀 있다고 잘난 줄 알아?”“능력 있다고 자랑이나 하지 말던가!”하현은 우소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머리가 텅텅 빈 데다 당돌하기까지 했다.이 말을 듣고 설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모, 우리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금정에서 확실한 인맥이 없어요.”“게다가 형 씨 가문 그룹은 금정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취급하는 굴지의 그룹이에요.”“매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넘어요.”“그중에는 배경도 대단하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도 널렸고요.”“그런데 형 씨 가문이 우리가 뭐라고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어요?”“형 씨 가문 고위층과 아는 사이긴 하지만 취업 청탁을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에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설은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의 성격은 최희정과는 완전히 달랐다.겉으로 매정한 말을 못 한 채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고 실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한 것도 한편
”나도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굽신거리며 여기 온 거잖아요!”우다금은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아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희정아, 긴말하지 않겠어.”“너네 아홉 번째 집안은 곧 파산하겠지만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산다고.”“은아가 우리를 형 씨 가문에 다리를 좀 놔주면 되지! 잠시 인사한다고 안면을 트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우다금은 아주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물론 너네가 혹시라도 그쪽에 신세지는 게 두려워서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면...”“솔직하게 말해!”“난 그럼 친척들한테 가서 그대로 전할 테니까!”최희정과 설재석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특히 최희정은 더욱 눈알이 휘둥그레졌다.재물을 탐하는 것 외에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가방 하나를 사도 SNS에 올려 자랑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자신이 우다금을 도와주지 않은 일이 사람들한테 알려진다면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하지만 이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그녀가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능력 밖의 일이라는 말이다.금정처럼 오래된 도시에 토박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의 은둔가 형 씨 가문은 금정 간 씨 가문이나 김 씨 가문과도 비견될 만한 존재였다.대구 정 씨 가문도 확실히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이긴 했지만 문제는 설은아가 아홉 번째 집안이고 그것도 파산 직전 상태라는 것이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형 씨 가문과 조금 친분이 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형 씨 가문 그룹에서 이 정도 알량한 친분 때문에 체면을 봐주며 뒷거래를 하겠는가?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건 알지만 체면 때문에 최희정은 천천히 설은아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최희정은 설은아가 먼저 이 일을 승낙해
설은아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다금의 시선은 계속해서 최희정에게로 향했고 결국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저기 말이야.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널 찾아왔지 뭐야!”“너도 알다시피 난 체면을 엄청 중시하는 사람이잖아!”“일이 없었으면 나도 이렇게 굽신거리며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우리 소희가 보석 디자인을 배웠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직장을 못 잡았어.”“요즘 기업들은 정말 제대로 된 인재를 못 알아보는 거 같아.”“내가 마음먹고 그들한테 전화해서 우리 딸 진짜 인재다, 그러니 적어도 월급은 오백만 원은 되어야 하고 5성급 호텔에 해당하는 숙소와 전용차도 제공해야 한다고 했어!”“그런데 그 회사에서 우리 딸한테 삼백만 원밖에 못 주고 숙소도 다 함께 사는 기숙사형태로만 제공해 준다고 하잖아!”“아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우다금은 말을 하면서도 분노가 치미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가슴을 쳤다.반면 우소희는 마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최희정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 마음은 이해해. 그러면 내가 은아랑 얘기해 볼 테니까 SL그룹에서 몇 달 일해 보는 건 어때?”“SL그룹?”우다금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네 SL그룹에 자금줄이 끊겨서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내 딸이 거기 들어가서 뭐 공짜 일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게다가 내 딸은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어. 얼마나 고급진 전공인데!”“너네 SL그룹은 지금 파산 직전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내 귀한 딸을 거기에 갖다 붙여?!”우다금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우소희도 옆에서 끼어들었다.“맞아요. 내가 신분도 이렇게 높은데 어떻게 파산 직전의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절대 못 가요!”“SL그룹에 가면 아무런 공부도 안 되고 그냥저
보기만 해도 끔찍한 장면이 벌어졌다.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마동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알이 휘둥그레졌다.그의 눈앞에서 마사영이 차 유리에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것이다.이 광경을 본 뒤 마동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눈이 뒤집혔다.“개자식! 감히 내 후배를 이 꼴로 만들어! 그렇게 자신 있어? 뒷감당할 자신 있냐고?”마동수는 포효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괴물처럼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었다.순간 하현의 손바닥이 마동수의 얼굴을 덮쳤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동수의 몸이 튕겨나가 트럭 좌석 위에 나가떨어졌다.그의 시야에는 하현의 매서운 표정만이 어른거렸다.“실력도 별로구만. 괜히 쓸데없는 말만 많은 놈이군.”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티슈를 꺼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았다.마동수는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자신이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하현한테 먼저 일격을 당하다니!마사영도 이 광경을 보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그녀는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하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사장님, 이리 와서 처리 좀 해주시죠.”...고명원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처리하는 동안 하현은 설은아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설은아의 부상은 경미했지만 심적으로 많이 놀란 상태였다.그래서 링거를 맞고 있는 설은아에게 하현은 상대 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난 거라고 둘러댔다.상대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차를 수리해 주기로 했고 수천만 원의 의료비도 배상한다고 덧붙였다.설은아는 하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병원을 떠났다.다만 가족들에게는 교통사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현에게 당부했다.가족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현은 아무 말 없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오
”그러니 내가 지금 당신을 찾아와 따지는 게 지나친 일은 아니지, 안 그래?”마동수는 당연한 듯 입을 열었다.하현은 그의 이름을 듣고 어딘가 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순간 얼마 전 엄도훈이 자신에게 한 얘기가 떠올랐다.“당신 둘은 무학의 성지인 서남 천문채에서 내쫓긴 그 마동수와 마사영이지?”“내 기억이 맞다면 서남 천문채는 당신들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던데.”이전에 엄도훈은 이 두 사람이 치명적인 권법을 터득하기 위해 동료 몇 명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서남 천문채에서 제명되고 급기야 현상금이 붙은 채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하현은 고성양에게 이런 배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게다가 고성양과 그의 모친은 곤경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람을 시켜 이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설은아가 아직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하현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정홍매와 고성양의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 탓만을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어.”“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어때?”“이를테면 내가 위자료의 의미로 당신에게 일억 정도 준다든가 말이지. 어때?”하현은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아내와 아들은 당신이 죽길 원해.”“그들은 당신이 죽어야만 숨을 쉴 수가 있다고 말했어.”마동수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하지만 걱정하지 마. 당신이 떠나는 길, 외롭지 않게 해줄 테니까.”“난 이미 다 알아봤지.”“당신을 죽인 뒤 장인 장모 일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고명원을 죽일 거야!”“당신 여자는 며칠 있다가 죽일 거야.”“내 아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여자거든.”“며칠 편안하게 데리고 있다가 같이 보내줄게.”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이곳은 금정이라 그는 가능한 한 몸을 낮추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는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나나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하현은 설은아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도중에 설은아는 하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일이 이렇게 정리되었으니 더 이상 만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차가 교외로 빠져나왔을 때 하현의 핸드폰이 갑자기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언뜻 눈을 들어보니 엄도훈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다급한 엄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 형님! 큰일 났습니다!”하현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큰일 날 게 뭐가 있어?”엄도훈은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명원 그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그는 고성양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그 모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아주 날을 잡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셈이었던가 봐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홍매와 고성양을 가두어 놓은 곳에 가 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다는군요.”“정홍매와 고성양이 아주 사라졌어요!”“이 일은 형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폭로가 된다면...”점점 어조가 무거워진 엄도훈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정홍매 모자가 형님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하현은 엄도훈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정말 쓸모없는 인간들이군!”정홍매와 고성양이 누군가에게 구출되었다면 그들의 실력이 아주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자신을 찾아와 복수할 확률도 크다는 얘기다.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지만 문제는 설은아에게 손을 댄다면 조금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설은아는 옆에서 지켜보며 하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의아해하며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쾅!”바로 그때 뒤에서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설은아는 놀라서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는데 순간 그녀가 몰던 차의 속도가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느려졌다.“조심해!”하현은 순간적으로 설은아의 몸을 덮친 뒤 핸
하현은 펄쩍펄쩍 뛰는 김나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그런 말을 하면 체면이 덜 깎일 것 같아서 그래?”하현의 말을 들은 설은아는 가슴이 철렁해서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당겼다.“하현, 그만하면 됐어. 그 정도로 해. 나나는 어쨌든 내 친구야.”“김나나, 너도 내 말 좀 들어봐. 이제 그만 하현에게 사과하고 이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돼?”그녀는 하현이 이런 식으로 김나나를 몰아붙이는 건 결국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호의가 김나나의 눈에는 하현을 비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김나나는 콧대를 한껏 치켜세우며 차갑게 말했다.“설은아, 이 쓰레기한테 사과하라고? 너 머리에 물 들어갔어?”“사과를 하라니?”“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김나나의 말에 주위에 있던 예쁜 여직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다들 하현을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하현이 너무 잘난 척한다고 생각한 것임이 틀림없다.하현은 김나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조 행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조 행장님은 끝까지 내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 봅니다.”“강남에 있는 천일그룹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금정까지 손을 뻗칠 수 없는 건 사실이죠.”“영향력이 부족할 수 있죠.”조 행장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확실히 영향력은 떨어지죠.”“그럼 이러면 어떻습니까? 이래도 부족합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명함 한 장을 꺼내 조 행장 앞에 툭 내던졌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 장천중.조 행장의 얼굴빛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이래도 부족하냐고 물었습니다.”“조 행장님, 뒷배가 아주 든든한가 봅니다.”하현은 마지막 명함을 꺼내 조 행장의 눈앞에 철썩 내리쳤다.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그 이름, 간민효라는 석 자가 명함에 박혀 있었다.이를 본 순간 조 행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휘청거리기까지 했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