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본 하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상대가 자살까지 각오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인간으로서 너무나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국면을 뒤집어 놓았다고 생각했던 이희광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현은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말했다.“어떻게 하긴? 얼른 구급차부터 불러야지!”비록 현장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자연히 증언할 수 있겠지만 국술당에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면 그것은 하현에게 있어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수십 명의 생명이 달린 일이었다.하현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해도 명성에는 분명히 영향을 받을 것이고 관청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게 되면 정말로 국술당이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하현이 아무리 인맥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여론의 벽에 부딪히면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 그 또한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였다.그래서 하현은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구급차를 불러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이윽고 그는 조남헌에게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어차피 모든 사정을 다 드러내 놓을 수 없는 이런 사건을 다루는 데는 조남헌만 한 사람이 없다.30분 후 조남헌은 포르쉐를 몰고 나타났다.그는 한 발로 문을 뻥 차고 들어와 하현의 곁으로 얼른 달려왔다.“하현, 무슨 일이든 분부만 내리십시오!”“며칠 동안 먹고 마시고 마사지나 하며 느긋하게 쉬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합니다!”“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하현이 조남헌의 말을 끊었다.“요즘 내가 일부러 그런 나쁜 족속들이랑 좀 어울리라고 하지 않았어?”“그래 좀 알아낸 거 있어?”조남헌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럼요. 알아냈죠.”“이 노인은 거지파의 한 일원입니다.”“거지파? 무학의 성지 거지파?”하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
”간단히 말해 이서국은 이국성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죠!”“게다가 이국성은 줄곧 이서국한테 빌붙어서 먹고 마시고 하느라 많은 사채를 빚졌다고 합니다.”“그러다가 이서국은 이국성이 필요할 때 대가를 치르게 한 겁니다.”“예를 들어 집단 독살 같은 거 말이죠.”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당신이 조사한 거, 믿을 만한 거야?”“이서국 같은 소인배가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며 사람을 조종했다고? 확실해?”“용천오나 조한철 같은 사람이나 그렇게 뒤에서 사람을 조종할 줄 아는 거 아니야?”“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조남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당신도 아시다시피 제가 명령을 받고 무성에 들어와 여러 사람을 만나고 조사해 보았습니다만.”“이 사람들이 신분이 그다지 높지 않아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이었습니다.”“배후에 있는 사실들까지 조사하려면 공해원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공해원도 알아낼 수 없을 거야. 상대방이 이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썼으니 분명 우리가 조사하는 것을 막으려고 할 거야.”“공해원이 손을 쓴다고 해도 상대방이 우리한테 알리고 싶어 하는 정도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야.”“하지만 상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또 누가 와서 일을 벌일 거야.”“그들의 수법은 점점 더 흉악스러워질 거고. 그러니 이 일은 당신한테 맡겨야겠어.”“당신은 천성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수완 좋게 잘 처리하니까 말이야.”하현의 말을 들은 조남헌은 난감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손바닥을 마주치며 힘차게 말했다.“하현, 걱정하지 마세요!”“이후에 누가 감히 또 이런 흉측한 방법을 쓰겠어요?”“분부를 내리실 필요도 없어요. 내가 그놈들 다 밟아버릴 테니까요!”조남헌에게 분부를 내린 후 하현은 그에게 다음날 아침 일찍 풍습과 관례에 따라 간판을 바꾸라고 지시했다.어쨌든 지금의 국술당 간판 아래에서 이미 연이어 사고가 났으니 운
예전에 하현 앞에서 허둥지둥 도망가던 이서국은 지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기고만장해 있었다.말할 때 그는 특히 더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천벌받을 짓을 하다니! 이러고도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우리 위대한 이 지회장님이 수십 년 동안 지금의 국술당 명성을 만들었어.”“결국 당신 손에 넘어가자마자 간판부터 바꿔 달다니!”“왜? 당신이 무학을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람들한테 알려질까 봐? 그래서 간판을 바꾼 거야? 간판만 바꾸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서?”“순진하기는!”이서국의 말에 그의 곁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은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뜨렸고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이서국! 지난번 교훈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지?”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이었다.“평생 잊지 못할 교훈 하나 더 줄까?”“어째서 당신은 이토록 천박한 거야?”하현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이서국의 허리춤에 찬 장검에 눈길을 던졌다가 한숨을 내쉬었다.“당신은 왜 주제 파악을 이렇게도 못 하는 거야?”“무술을 연마하려고 했나 본데!”“칼을 차고 있다고 무술이 다 연마가 되겠어, 안 그래?!”“연마하라는 검술은 연마하지 않고 백날 천박한 것만 연마하나 봐!”“앞으로는 당신 이름을 이서국이 아니라 이천박으로 바꿔. 그 이름이 당신한테 훨씬 어울려!”하현의 조롱 섞인 말에 이서국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이서국은 하현을 보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하현! 이 자식! 감히 날 비아냥대? 죽고 싶어?”“오늘의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내가 전화 한 통만 하면 당신은 이승에서 발도 못 붙이고 이슬처럼 사라질 거야!”“왜? 기댈 언덕이라도 찾은 모양이지? 그래서 그렇게 잘난 척이야?”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서국의 길을 막았다.“당신이 날 밟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당장 해 봐! 뭘 기다려! 당장 해치워 보라고! 무슨 쓸데없는 말이 그렇게 많
열 명의 무도 고수들은 바로 전에 국술당에서 교관으로 일했던 남궁나연을 비롯한 무학의 성지에서 온 열 명의 교관들이었다.이 사람들은 모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고 얼굴에는 잔뜩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이 사람들이 나타나자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흘겨보았다.그들이 무슨 계략을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지 짐작이 갔다.그리고 이서국은 앞장서서 일을 집행하는 사람일 뿐 이 모든 것을 꾸민 사람은 뒤에 따로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하현이 이서국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남궁나연 일행을 모두 끌어들이기엔 이서국의 존재감이 너무도 하찮았다.이서국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하현을 쳐다보며 선두로 뛰어올라 미리 준비한 확성기를 들고 소리쳤다.“여러분, 남궁나연 교관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그녀는 국술당의 수석 교관이었습니다!”“나머지 아홉 명의 교관들도 모두 국술당의 고수들이었습니다!”“그들은 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실력을 겸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무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상향을 누구보다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무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하현이 국술당의 새 주인으로 오자 무학의 이념이 훼손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몇 가지 조언을 하였으나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습니다.”“하지만 남궁나연을 비롯한 이 교관님들은 자신의 이상과 무학의 이념을 충실히 실행해 왔습니다!!“그들은 무도의 꽃을 무성에서 피우기를 원합니다!”“그래서 그들은 불량한 생각을 품은 자와 끝까지 싸우기로 한 겁니다!”“이제 남궁나연 교관 일행은 자립하여 국민무학당을 세우기로 했습니다!”“지금 국민무학당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게다가 남궁나연 교관 일행은 그들이 가진 모든 전술을 전수하기 위해 단돈 천 원에 수업을 열었습니다!”“다이어트를 하고 싶든, 몸을 튼튼하게 단련하고 싶든, 아니면 정말로 무학을 배우고 싶든!”“단돈 천 원만 내면 남궁나연 교관 일
”뭐라는 거야?”하현은 이서국의 말을 별로 심각하게 듣지 않았다.“그게 이서국식 개그인가 보지? 그런데 별로 재미없는데?”“천 원 수업을 개설해 놓고 나중에 의상비, 식비, 교관 접대비 등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거 아니야?”“아니면 수강생 중 추첨해서 천 원에 수업받게 하는, 뭐 그런 거 아니야?”하현의 말을 듣고 들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고 그들의 발걸음도 뚝 멈췄다.그래!만약 이서국이란 놈이 이런 잔꾀를 부렸다면 여기에 홀려 따라가는 사람들은 돈에 속고 사기당하는 거잖아?이서국이란 놈이 사람들을 놓고 바보로 만들려는 거 아니야?“걱정하지 마!”이서국은 자신이 치밀하게 준비한 계략을 하현이 말 몇 마디로 뭉개버릴까 봐 피가 솟구쳤다.“잘 들어. 우리 국민무학당은 오는 학생은 다 받아줄 거야. 무도복과 세 끼 밥도 다 무료로 제공할 거야!”“천 원만 내면 돼. 다른 걸로 속이거나 하지 않아! 절대로!”“이건 대중들에게 복지 차원에서 내가 베푸는 거야.”이서국의 굳은 결심을 듣고 방금 멈칫했던 사람들이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순식간에 국민무학당 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이제 막 새 간판을 단 국술당은 사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그리고 이서국은 오늘 밤 이 행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미리 방송국 기자 몇 명을 불렀다.이렇게 되자 정말 하현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이에 이서국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예쁜 두 여자를 끌어안다시피 하고 옆에 있는 리무진 차에 올라 자신의 계획이 순조롭게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쳐다보았다.“당주, 저 개자식이 우릴 죽이려고 해요! 살인마나 다름없어요!”“이러다가 뉴스라도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 국술당의 명성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무너질 판이에요!”맞은편에서 이서국 일행을 노려보고 있던 이희광의 눈에서 불덩이가 일었다.“부하들 몇 명 데리고 가서 간판이나 마구 부숴버릴까요?”하현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일에 사람을 때
”물론 아니지.”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원래는 국술당에 별로 학생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지금 보니 알아서 저렇게 우리 국술당을 홍보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만간 국술당이 유명해질 것 같아.”이희광과 조남헌은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눈빛을 교환했다.“뭐라구요?”“저들은 천 원에 수업을 열었잖아요?”“게다가 무도복도 공짜고 밥도 공짜예요.”“돈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속셈이라고요.”하현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그렇게 돈을 쓰고 싶어 안달이라니 우리가 좀 도와주지 뭐!”“자, 당신이 숏츠 찍는 걸 책임져. 동영상을 몇 개 찍어서 뿌리는 거야. 저들을 도와서 국민무학당을 홍보하는 거야.”“언론사, 방송사, 신문사, 포털에 일일이 전화해.”“여기는 옷도 공짜, 밥도 공짜라고 대대적으로 알려!”“그리고 주인이 돈이 너무 많아서 천 원만 있으면 평생 여기서 무술 연마하고 밥 먹고 지낼 수 있다고 해...”“천 원 수업이라... 이서국이 이 일에 얼마나 많은 돈을 들이붓는지 천천히 구경이나 하자구!”천 원 수업, 무도복 무료 증정, 무료 식사 제공.하현 일행의 노력으로 이 소식은 삽시간에 무성 전체에 퍼졌다.심지어 무성을 넘어 주변 도시들까지도 소문은 퍼졌다.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무성에서 무술을 배우는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아마 사기꾼들이 사람들을 속이려고 미끼 상품을 던졌거나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수업을 하는 사람들이 남궁나연을 비롯한 열 명의 유명한 교관들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무술을 배우고 싶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일부 부자들조차 하나둘씩 고급차를 끌고 나타났다.이렇게 이득인 일에 나서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곧이어 인근 여러 노인정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매일 노인정 행사를 마련하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던 병원 측도 두 손을 번쩍 들고 이 소식을 환영했다.병원
조바심을 내고 걱정했던 조남헌과 이희광도 눈앞의 광경을 보면서 점차 걱정은 사라지고 편안한 얼굴이 되었다.그들은 열 명의 교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조남헌은 별로 바쁜 일도 없고 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기회는 또 없을 거라며 얼른 와서 등록하라고 했다.단돈 천 원.그는 기꺼이 친구들을 대신해 돈을 내주었다.하현도 가끔 두 손을 입에 가까이 대고 나팔을 불며 말했다.“힘내세요! 남궁나연 교관님!”“역시 무학의 성지 황금궁에서 오신 교관은 다르네!”“언행일치! 역시 대단해!”비아냥거리는 말이 난무했다.원래 무술을 배우는 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무도복과 식사가 무료라는 말에 흥분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황금궁의 무학을 배울 수 있다니!이 얼마나 대단한 이득인가!사람들이 몰려들수록 남궁나연은 점점 더 초췌해졌다.실제로 무술을 가르치는 것은 고사하고 일부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수강 등록 서류는 갈수록 산더미처럼 쌓여가 그 자체로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다.교육생들은 모든 연령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체질도 모두 다르다.무술을 가르칠 때는 한 가지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다.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에 맞게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그래서 대충 가르치려고 해도 남궁나연 일행은 대충대충 할 수가 없었다.하루 종일 밀려드는 학생들 때문에 교관들은 강습 계획도 세우지 못했고 오히려 지쳐서 꼼짝도 하지 못할 판이었다.아무리 고수라도 밀려드는 인파에는 장사가 없었다!“여러분, 여러분.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남궁나연 교관님이 너무 지치셨습니다.”“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결국 상황을 보다 못한 이서국이 일어서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나섰다.이서국의 말이 떨어지자 하현은 조남헌을 힐끔 쳐다보았다.조남헌은 확성기를 들고 큰소리로 물었다.“당신들이 사람들을 속인 건 아니야
이 장면을 보고 이서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남궁나연 일행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교관으로서 그들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무성에서 숭상받던 무학의 교관들이 희망을 주기는커녕 실망만 안겨줬다는 여론이 생기면 그들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이서국은 급히 전화를 걸어 음식을 주문했다.한편으로는 남궁나연 일행에게 간단한 것이라도 좋으니 무학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그렇게라도 해야 상황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오늘 일어난 모든 일로 무성에서 엄청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바로 그때 경호원 같은 모습을 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재빨리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가운데 큰 길을 만들었다.사치품으로 치장한 옷차림에 얼굴이 창백하고 가끔 기침을 하는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남궁나연 교관님, 저는 김일영입니다. 과거에 당신이 국술당 수석 교관으로 있을 때 난 여러 번 방문해서 당신의 문하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무학의 성지인 황금궁에서 온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무학 교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무학에 대한 당신의 깊은 학식과 실력도 아주 칭송할 만했고요!”“그래서 오늘 당신이 여기서 천 원으로 무학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외지에서 돌아와 여기에 온 것입니다!”“내 사정을 아직 잘 모르실 텐데.”“우리 김 씨 가문은 무학의 성지인 황금궁과 인연이 깊습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황금궁의 무학을 수련한 적이 있어요.”“하지만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던 관계로 잘못된 수련을 하고 말았죠. 그래서 결국 사악한 교리에 빠지게 되었구요.”“그동안 밤마다 불길에 타오르는 흉측한 기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남궁나연 교관님이 제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난 더 이상 이런 폐인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지금처럼 아무것도
최희정은 하현이 어디서 이 명함을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맞아. 정말로 형홍익 명함인데?”우다금은 최희정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를 버럭 내었다.“아휴! 잘난 데릴사위가 형홍익의 명함을 얻었으니 이제는 금정 최고 거물의 명함도 받을 수 있겠군그래!”“설 씨 집안도 대구 정 씨 가문과 연락이 닿아 아홉 번째 집안이 되어 꽤나 번성하고 발전했을 텐데 왜 이렇게 변한 거야?”“도와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생색은 한껏 내면서 이런 핑계나 대고 있으니 원!”“정말 실망이야!”“이렇게 우릴 무시할 거면 확실히 말할 것이지! 앞으로 내가 절대 이 집안에 얼씬을 하나 봐! 절대 안 올 거야!’우다금은 노점에서 사 온 선물 꾸러미를 떠올리자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그녀는 자신이 쓴 돈을 만회하기 위해 거실에 있는 찻주전자라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우다금의 말에 최희정과 설재석은 어이가 없어서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설은아는 이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현의 손을 잡아끌었다.“하현, 당신이 좀 도와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이 정말...”이쯤 되니 설은아도 자신의 행동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었다.하현과 최희정은 원래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그런 하현이 최희정을 위해 나서서 우 씨 고모를 도와주려 하겠는가?설은아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하현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이런 사소한 일로 형홍익 어르신을 귀찮게 할 필요도 없어. 내 하녀한테... 그러니까 내 친구한테 말 한마디만 꺼내면 돼.”말을 마치며 하현은 핸드폰을 꺼내 형나운에게 전화를 걸어 우소희의 취업 문제를 도와달라고 했다.그는 1분도 되지 않아 전화를 끊었고 우다금 모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잘 해결되었습니다.”“거짓말하지 마!”“어디서 계속 장난질이야!”“데릴사위인 주제에 금정 최고 책임자라도 되는 양 허
”허! 제부! 시도도 안 해 보고 노력도 안 했는데 당신들은 처음부터 안 된다고 못 박고 있잖아요!”“그게 도와주겠다는 사람 태도예요?”우다금은 냉소적인 얼굴로 쏘아붙였다.“당신들이 우릴 친척이라고 생각했으면 어떻게 우리 소희를 도와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제부, 난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내가 자존심도 다 버리고 도와달라고 이렇게 애원하는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드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정말 너무 뻔뻔들 하네!”최희정은 자신보다 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정신을 다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지금 뭐라는 거야? 우리한테 도와달라고 찾아온 언니를 내가 영광으로 생각하며 대했어야 한다는 거야?”“엄마, 아빠...”설은아는 또 말다툼이 시작되려 하자 걱정스러운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하현을 힐끔 쳐다보았다.“하현, 혹시 이모 도와줄 수 있겠어?”설은아는 하현이 금정은행에서 형홍익의 개인 명함을 내놓은 것이 문득 떠올랐다.그렇다면 하현과 형홍익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얘기였다.그래서 하현이 방금 그런 말을 꺼낸 것이었다는 걸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도와줄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눈앞의 난처한 상황을 보고 설은아는 어쩔 수 없이 하현에게 입을 열었다.“하현, 정말 도와줄 수 있어?”설은아의 말에 우다금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은아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면 안 되겠니?”“네 전 남편이 얼뜨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어?”“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하면 되지!”“능력이 없다는 둥 변명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얼뜨기를 내세워 나한테 헛바람이라도 넣으려고 그래?”“놀리는 거야? 놀리니까 재미있어?”“우린 바보가 아니야!”말을 마치며 우다금은 화가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부라렸다.그녀는 설은아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이런
”제부, 희정아, 은아야. 이 일은 아무래도 너네들이 해결해 줬으면 좋겠어!”“어쨌든 너네들은 매일 친구 모임에도 다니면서 여러 거물들과 친분도 있고 인맥도 많을 거 아냐?”“너네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 같은 과부와 내 딸은 어떻게 살아?”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최희정의 식구들은 신세한탄과도 같은 말을 내뱉는 우다금을 보고 더욱 어찌할 바를 몰랐다.“너네들, 우리 소희가 일자리도 없이 집에서 폐인이 되어 가는 걸 차마 볼 수 있겠어?”“양심에 찔리지 않겠냐고?”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소희는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손을 놓은 뒤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엄마, 희정이 이모나 이모부가 별로 능력이 없는 것 같아.”“이 사람들은 이제 돈이 많아서 우리 같은 가난한 친척들은 아예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나 봐!”“돈푼깨나 좀 있다고 잘난 줄 알아?”“능력 있다고 자랑이나 하지 말던가!”하현은 우소희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머리가 텅텅 빈 데다 당돌하기까지 했다.이 말을 듣고 설은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모, 우리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은 금정에서 확실한 인맥이 없어요.”“게다가 형 씨 가문 그룹은 금정뿐만 아니라 전국 단위로 미술품과 골동품을 취급하는 굴지의 그룹이에요.”“매년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수천 명이 넘어요.”“그중에는 배경도 대단하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도 널렸고요.”“그런데 형 씨 가문이 우리가 뭐라고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어요?”“형 씨 가문 고위층과 아는 사이긴 하지만 취업 청탁을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에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해 볼 거예요!”설은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녀의 성격은 최희정과는 완전히 달랐다.겉으로 매정한 말을 못 한 채 질질 끌려가지 않았다.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었고 실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지금 이렇게 말한 것도 한편
”나도 형 씨 가문 그룹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굽신거리며 여기 온 거잖아요!”우다금은 맡겨둔 물건을 찾으러 온 것처럼 아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희정아, 긴말하지 않겠어.”“너네 아홉 번째 집안은 곧 파산하겠지만 속담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 부자가 망해도 3대는 먹고산다고.”“은아가 우리를 형 씨 가문에 다리를 좀 놔주면 되지! 잠시 인사한다고 안면을 트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우다금은 아주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물론 너네가 혹시라도 그쪽에 신세지는 게 두려워서 우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면...”“솔직하게 말해!”“난 그럼 친척들한테 가서 그대로 전할 테니까!”최희정과 설재석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특히 최희정은 더욱 눈알이 휘둥그레졌다.재물을 탐하는 것 외에 그녀가 가장 중시하는 것이 바로 체면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가방 하나를 사도 SNS에 올려 자랑하는 사람이었다.그런데 만약 자신이 우다금을 도와주지 않은 일이 사람들한테 알려진다면 앞으로 그녀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하지만 이 일은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일이었다.그녀가 돕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능력 밖의 일이라는 말이다.금정처럼 오래된 도시에 토박이들이 깊이 뿌리를 내린 곳의 은둔가 형 씨 가문은 금정 간 씨 가문이나 김 씨 가문과도 비견될 만한 존재였다.대구 정 씨 가문도 확실히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이긴 했지만 문제는 설은아가 아홉 번째 집안이고 그것도 파산 직전 상태라는 것이다.이 상황에서 그녀가 형 씨 가문과 조금 친분이 있다고 해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형 씨 가문 그룹에서 이 정도 알량한 친분 때문에 체면을 봐주며 뒷거래를 하겠는가?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건 알지만 체면 때문에 최희정은 천천히 설은아의 얼굴에 시선을 돌렸다.최희정은 설은아가 먼저 이 일을 승낙해
설은아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다금의 시선은 계속해서 최희정에게로 향했고 결국 불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저기 말이야.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널 찾아왔지 뭐야!”“너도 알다시피 난 체면을 엄청 중시하는 사람이잖아!”“일이 없었으면 나도 이렇게 굽신거리며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우리 소희가 보석 디자인을 배웠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직장을 못 잡았어.”“요즘 기업들은 정말 제대로 된 인재를 못 알아보는 거 같아.”“내가 마음먹고 그들한테 전화해서 우리 딸 진짜 인재다, 그러니 적어도 월급은 오백만 원은 되어야 하고 5성급 호텔에 해당하는 숙소와 전용차도 제공해야 한다고 했어!”“그런데 그 회사에서 우리 딸한테 삼백만 원밖에 못 주고 숙소도 다 함께 사는 기숙사형태로만 제공해 준다고 하잖아!”“아니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우다금은 말을 하면서도 분노가 치미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가슴을 쳤다.반면 우소희는 마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최희정은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언니, 언니 마음은 이해해. 그러면 내가 은아랑 얘기해 볼 테니까 SL그룹에서 몇 달 일해 보는 건 어때?”“SL그룹?”우다금은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너네 SL그룹에 자금줄이 끊겨서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내 딸이 거기 들어가서 뭐 공짜 일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게다가 내 딸은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했어. 얼마나 고급진 전공인데!”“너네 SL그룹은 지금 파산 직전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내 귀한 딸을 거기에 갖다 붙여?!”우다금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우소희도 옆에서 끼어들었다.“맞아요. 내가 신분도 이렇게 높은데 어떻게 파산 직전의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절대 못 가요!”“SL그룹에 가면 아무런 공부도 안 되고 그냥저
보기만 해도 끔찍한 장면이 벌어졌다.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마동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알이 휘둥그레졌다.그의 눈앞에서 마사영이 차 유리에 부딪혀 상처투성이가 된 것이다.이 광경을 본 뒤 마동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눈이 뒤집혔다.“개자식! 감히 내 후배를 이 꼴로 만들어! 그렇게 자신 있어? 뒷감당할 자신 있냐고?”마동수는 포효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괴물처럼 커다란 주먹을 움켜쥐었다.순간 하현의 손바닥이 마동수의 얼굴을 덮쳤다.‘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마동수의 몸이 튕겨나가 트럭 좌석 위에 나가떨어졌다.그의 시야에는 하현의 매서운 표정만이 어른거렸다.“실력도 별로구만. 괜히 쓸데없는 말만 많은 놈이군.”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티슈를 꺼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닦았다.마동수는 눈앞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자신이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하현한테 먼저 일격을 당하다니!마사영도 이 광경을 보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그녀는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하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사장님, 이리 와서 처리 좀 해주시죠.”...고명원이 사람을 데리고 와서 현장을 처리하는 동안 하현은 설은아를 데리고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설은아의 부상은 경미했지만 심적으로 많이 놀란 상태였다.그래서 링거를 맞고 있는 설은아에게 하현은 상대 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해서 사고가 난 거라고 둘러댔다.상대 운전자가 전적으로 책임지고 차를 수리해 주기로 했고 수천만 원의 의료비도 배상한다고 덧붙였다.설은아는 하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에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병원을 떠났다.다만 가족들에게는 교통사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현에게 당부했다.가족들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현은 아무 말 없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며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오
”그러니 내가 지금 당신을 찾아와 따지는 게 지나친 일은 아니지, 안 그래?”마동수는 당연한 듯 입을 열었다.하현은 그의 이름을 듣고 어딘가 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순간 얼마 전 엄도훈이 자신에게 한 얘기가 떠올랐다.“당신 둘은 무학의 성지인 서남 천문채에서 내쫓긴 그 마동수와 마사영이지?”“내 기억이 맞다면 서남 천문채는 당신들에게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던데.”이전에 엄도훈은 이 두 사람이 치명적인 권법을 터득하기 위해 동료 몇 명을 죽이는 극악무도한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그래서 그들은 서남 천문채에서 제명되고 급기야 현상금이 붙은 채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하현은 고성양에게 이런 배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게다가 고성양과 그의 모친은 곤경에서 벗어나자마자 사람을 시켜 이런 문제를 일으킬 줄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다.설은아가 아직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하현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정홍매와 고성양의 일은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내 탓만을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어.”“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어때?”“이를테면 내가 위자료의 의미로 당신에게 일억 정도 준다든가 말이지. 어때?”하현은 냉정을 유지하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아내와 아들은 당신이 죽길 원해.”“그들은 당신이 죽어야만 숨을 쉴 수가 있다고 말했어.”마동수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하지만 걱정하지 마. 당신이 떠나는 길, 외롭지 않게 해줄 테니까.”“난 이미 다 알아봤지.”“당신을 죽인 뒤 장인 장모 일가족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고명원을 죽일 거야!”“당신 여자는 며칠 있다가 죽일 거야.”“내 아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여자거든.”“며칠 편안하게 데리고 있다가 같이 보내줄게.”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이곳은 금정이라 그는 가능한 한 몸을 낮추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는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김나나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하현은 설은아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떠났다.도중에 설은아는 하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일이 이렇게 정리되었으니 더 이상 만류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차가 교외로 빠져나왔을 때 하현의 핸드폰이 갑자기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언뜻 눈을 들어보니 엄도훈이었다.전화를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다급한 엄도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현 형님! 큰일 났습니다!”하현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큰일 날 게 뭐가 있어?”엄도훈은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명원 그놈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그는 고성양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그 모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아주 날을 잡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셈이었던가 봐요!”“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홍매와 고성양을 가두어 놓은 곳에 가 보니 이미 아무도 없었다는군요.”“정홍매와 고성양이 아주 사라졌어요!”“이 일은 형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어쨌든 폭로가 된다면...”점점 어조가 무거워진 엄도훈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정홍매 모자가 형님한테 폐를 끼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하현은 엄도훈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내뱉었다.“정말 쓸모없는 인간들이군!”정홍매와 고성양이 누군가에게 구출되었다면 그들의 실력이 아주 범상치 않다는 것을 뜻한다.자신을 찾아와 복수할 확률도 크다는 얘기다.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은 아무 상관없지만 문제는 설은아에게 손을 댄다면 조금 상황이 복잡해진다는 것이다.설은아는 옆에서 지켜보며 하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의아해하며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쾅!”바로 그때 뒤에서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설은아는 놀라서 제대로 반응도 하지 못했는데 순간 그녀가 몰던 차의 속도가 증가하기는커녕 오히려 느려졌다.“조심해!”하현은 순간적으로 설은아의 몸을 덮친 뒤 핸
하현은 펄쩍펄쩍 뛰는 김나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그런 말을 하면 체면이 덜 깎일 것 같아서 그래?”하현의 말을 들은 설은아는 가슴이 철렁해서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당겼다.“하현, 그만하면 됐어. 그 정도로 해. 나나는 어쨌든 내 친구야.”“김나나, 너도 내 말 좀 들어봐. 이제 그만 하현에게 사과하고 이 일은 그냥 넘어가면 안 돼?”그녀는 하현이 이런 식으로 김나나를 몰아붙이는 건 결국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호의가 김나나의 눈에는 하현을 비호하려는 의도로 보였다.김나나는 콧대를 한껏 치켜세우며 차갑게 말했다.“설은아, 이 쓰레기한테 사과하라고? 너 머리에 물 들어갔어?”“사과를 하라니?”“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김나나의 말에 주위에 있던 예쁜 여직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다들 하현을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하현이 너무 잘난 척한다고 생각한 것임이 틀림없다.하현은 김나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조 행장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조 행장님은 끝까지 내 말을 무시할 생각인가 봅니다.”“강남에 있는 천일그룹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금정까지 손을 뻗칠 수 없는 건 사실이죠.”“영향력이 부족할 수 있죠.”조 행장도 이에 맞장구를 쳤다.“확실히 영향력은 떨어지죠.”“그럼 이러면 어떻습니까? 이래도 부족합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명함 한 장을 꺼내 조 행장 앞에 툭 내던졌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 장천중.조 행장의 얼굴빛에 살짝 균열이 생겼다.“이래도 부족하냐고 물었습니다.”“조 행장님, 뒷배가 아주 든든한가 봅니다.”하현은 마지막 명함을 꺼내 조 행장의 눈앞에 철썩 내리쳤다.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그 이름, 간민효라는 석 자가 명함에 박혀 있었다.이를 본 순간 조 행장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휘청거리기까지 했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