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당신이 젊은 나이에 무성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젊은이가 되었더라니!”“은아가 자네를 따를 수만 있다면 엄마로서 마음이 너무 편할 것 같아!”최희정은 마음속으로 남몰래 기뻐했다.비록 용천오에게 이런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지만 용천오가 이런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설은아가 그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호위호식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얼마든지 얼굴을 바꿀 수가 있었다!최희정은 설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은아야!”“용천오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니?”“눈앞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해.”“그렇지 않으면 버스 떠난 뒤 손 흔들어도 소용없어!”설은아는 눈썹을 찡그렸다.도무지 용천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그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진주희는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용천오의 말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다.마치 허황된 판타지 한 편을 들은 것 같았다.최희정의 칭찬에 용천오는 광대가 승천했다.“여사님, 과찬이십니다!”“별거 아닙니다.”“은아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리고 은아가 과거와 결별할 수 있다면 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은아, 당신이 고개만 끄덕인다면 저 안에 있는 당신 전남편은 오늘이라도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어!”“당신을 위해 난 모든 것을 할 용의가 있어!”설유아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진주희는 계속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최희정만이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설은아를 다그쳤다.“은아야, 얼른 고개 끄덕이지 않고 뭐 해?”“그렇지 않으면 하현이 죽는다잖아!”“그리고 일단 그 자식이 나오면 넌 그놈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야 돼, 알았어?”“용천오가 이렇게 넓은 도량으로 일을 처리해 줬는데 그 은혜 절대 저버리면 안 돼, 알았냐고?”“원래 내 말대로라면 하현 그놈은 살인죄로 바로 죽어 마땅한 몸이야.”“하지만 용천오가 방금 말했잖아. 넓은 도량으로 하현을 빼내 주겠다고 하니 나도 방해는 하지 않을 거야. 결국 사람을
밖에서 설은아와 최희정 일행이 한참 아수라장을 벌이고 있을 때 하현은 취조실에서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끌려온 이후로 아무도 그에게 무슨 말을 걸지 않았다.누군가 높은 사람이 무성 경찰서에 지시를 내린 것 같았다.지금은 현장 물증과 증거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의도치 않게 당사자인 하현한테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이게 심리 전술의 일환인 건지 아니면 증거를 공고히 해서 하현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기 않기 위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어쨌든 하현이 경찰서에 온 이후로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하현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일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용호태와 성원효의 죽음, 그리고 성호남 일가의 몰살까지 누군가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이런 것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무성에서 거의 없다.그러나 하현이 유독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그가 비록 가장 유력한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법에 따르면 그가 경찰서에 억류된 지 48시간 안에 혐의가 드러나지 않으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그러니 상대방은 아마도 다른 수를 분명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용천오, 지금쯤 아마 경찰서 위아래를 통사정해 날 구하려 하고 있겠군...”잠시 생각에 잠겼던 하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이번 일을 통해 그는 설은아에게 호감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날 망치려고 들겠지...”“이렇게 풀려난다면 법의 심판을 면할 수는 있어도 집법당 당주 자리는 지킬 수 없게 되겠지...”“아주 주도면밀하고 원대한 꿈을 꾸셨군!”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고 난 후 하현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 용천오에 대해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다.다들 무성 사람들은 주먹으로 이치를 따지고 일을 처리한다고 말한다.하지만 용천오의 계략과 수단은 역시 보통 사람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머리를 숙이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순간 목영신은 마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기세등등하게 입을 열었다.“어서 자백하세요!”“왜 사람을 죽였습니까?”“어떻게 죽인 거냐구요?”“누가 죽인 겁니까?”“어서 자백하세요! 분명히 말해 보라니까요!”“법이 당신을 심판할 겁니다!”설은아의 대학 동창?하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목영신을 두어 번 쳐다본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사실 당신들도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죠?”“내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당신들 믿겠어요?”한 쪽에 서 있던 남자 수사팀장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냉소를 흘렸다.“하 씨! CCTV에 당신 모습이 똑똑히 찍혔어요. 당신은 사건 현장에 나타났고 범행 동기도 분명해요!”“무슨 변명을 늘어놓는 거예요?!”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남자 수사팀장을 쳐다보았다.“그건 당신들이 이미 선입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에요.”“그 영상 속 사람이 나일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하고 봤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거죠.”“영상 속 인물이 나라고 칩시다. 내가 그 현장에 나타난 게 뭐가 어떻다는 겁니까?”“그냥 산책하고 경치나 구경할 겸 해서 가면 안 됩니까?”“게다가 성호남이 그동안 무성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의 미움을 샀는데 그를 죽일 만큼 원한 맺힌 사람이 한둘이겠냐고요?”“변명하지 마세요!”“무슨 궤변을 늘어놓는 겁니까 지금?”남자 형사가 책상을 치자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가 펄쩍 튀어 올랐다.“현장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른 장본인은 바로 당신이라구요!”“우리가 지금 녹취를 하는 건 그냥 의례적인 행위일 뿐입니다.”“당신이 살인범이라구요!”“마음대로 생각하세요!”하현은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일관했다.“안 했으니까 안 했다고 하는 거예요. 난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요.”“허허 떳떳하시다?!”“어제 우리 경찰서 입구에서 당신이 성호남을 협박하는 걸 본 사람들이 수두룩해요.”“그건 어떻게 변명할 겁니까?”목영신의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목영신을 힐끔 쳐다보았다.“당신이 그럴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요?”“당신은 역량도 지위도 한참 모자란 것 같은데.”“허허, 나 이 목영신이 아무것도 못 한다?”“외지인이 무성에서 무슨 수완이라는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요!”목영신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이를 갈듯이 말했다.“그럼 어디 한번 해 보시죠! 어디 얼마나 대단한 뒷배를 가져오나 두고 보죠!”말을 마치자마자 목영신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하현 앞에 툭 떨어뜨렸다.데릴사위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감히 무성 경찰 앞에서 우쭐대는 모습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기억을 더듬어 전화번호를 눌렀다.“뚜뚜뚜!”통화 연결음이 계속 울리도록 아무도 받는 이가 없었다.그러나 하현은 개의치 않고 계속 통화를 시도했다.반대편에서 갑자기 긴장감에 휩싸인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하 사장님! 사장님이세요?!”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랜만에 걸었는데 다행히 내 번호를 기억하는군.”맞은편에 있던 사람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하 사장님, 농담도 잘 하십니다!”“어떻게 사장님 번호를 잊겠습니까?”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목영신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내뱉었다.“할 말 있으면 어서 하기나 해요! 무슨 쓸데없는 짓거립니까?!”“여기가 무슨 다방인 줄 아세요? 아무렇게나 수다나 떨고 있게?!”“1분만 더 줄 테니 할 말 있거든 어서 하세요!”전화기 건너편 남자는 순간 눈동자에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하 사장님, 혹시 지금 무성에 계십니까?”하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응. 나 지금 무성 경찰서에 있어. 일이 좀 생겨서 말인데 나 좀 도와줄 수 있겠어?”“무성 경찰서요?”상대방의 목소리에 약간의 노기가 느껴졌다.“무슨 일인데요?”하현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내뱉었다.“내가 사람을 죽였다며 날 억류시켰어. 그들은 내가 성호남의 일가를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어.
옆에 있던 남자 형사가 거들었다.“젊은이, 사람이 착실하게 살아야죠.”“우리 같은 사람들 앞에서 괜히 센 척하다가 큰코다쳐요!”“만 서장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주제에 여기서 뭐나 된 척하는 겁니까?”“만 서장이 누군지 알아요?”“병부의 신화, 살아있는 전설, 당도대 총교관의 친위대라구요!”“그의 실력은 총교관이 직접 전수해 준 거예요!”“유라시아 전장에서 만 서장은 섬나라의 수장을 직접 참살했어요!”“그 공을 높이 사서 그는 퇴역한 후 젊은 나이에 우리 무성 경찰서 서장이 된 거라구요!”“그는 우리 무성에서 진정한 거물이에요!”“아니 그런 분한테 아무나 전화를 걸 수 있겠어요?”“그와 같이 높은 분이 당신 같은 사람의 전화를 뭐 하러 받아요?”“당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겁니까? 총교관이라도 돼요?”비아냥거리는 말에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다 고개를 돌려 엷은 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만약 내가 총교관이라면?”“뭐라는 거야? 정말! 됐어요! 당신이 총교관이라니! 그분을 모욕하지 마세요!”목영신은 두 눈을 치켜들고 발톱을 바짝 세운 새끼 표범 같은 얼굴로 하현을 노려보았다.“총교관은 우리 대하의 대들보예요. 당신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함부로 모욕했다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 있어요!”“바로 이 자리에서!”“만약 당신이 총교관이라면 내가 이 자리에서 바로 머리를 조아리며 평생 당신의 노예로 살겠어요!”자신이 총교관임을 누가 알겠는가?목영신의 말을 듣고 하현은 조금도 난처해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떠올렸다.“당신 같은 노비는 필요 없어요. 성격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서.”“됐어요! 살이 좀 쪘나? 흥분했더니 숨이 차네!”목영신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이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당신이 죄를 인정하기 싫은 모양인데 난 시간 많아요. 48시간 동안 여기서 천천히 시간 보내면 돼요!”“48시간이 지나면 또 48시
만천우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가 성큼성큼 앞으로 향해 걸어 나왔다.목영신과 그녀의 동료들은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만 서장님 안녕하세요!”“여긴 어쩐 일이십니까?”말을 하면서도 목영신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이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만천우는 목영신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묻고 싶은 말을 툭 내뱉었다.“하현이라는 사람을 잡았어?”“그 사람 어디 있어?”“당장 그를 만나야겠어!”만천우의 말에 목영신과 그녀의 일행들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이게 무슨 일인가?정말로 하현이?!하현이 전화를 건 사람이 만 서장이란 말인가?!더욱 놀라운 것은 전화를 받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만 서장이 경찰서에 나타났다는 것이다.이것은...이것은 대체...“하 대장님, 무성에 오셨으면서 왜 저한테는 미리 말씀도 안 해 주셨어요?”“우리 구역에서 대장님이 경찰에 잡힌 걸 당도대 형제들이 알면 아마 우리 집안을 박살 내려고 할 거예요!”5분 정도 자료를 빠르게 읽어본 만천우가 취조실에 나타나 하현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만천우는 앉지도 않고 선 채로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멋쩍은 듯 웃었다.하현은 만천우가 직접 우려내 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만천우, 난 은퇴한 지 3년이 넘었어. 그러니 그렇게 부르지 마.”“그리고 내가 이번에 무성에 온 건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당신한테 미리 연락할 사이가 없었어.”“그리고 당신의 평온한 삶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말이야.”만천우는 상기된 표정으로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장님...”“그냥 이름을 불러도 돼.”하현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만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여기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다만 이번에 성 씨 가문이 멸문한 일은 좀 복잡해지긴 했
”참, 용천오가 최희정을 설득해서 당신을 구하는 데 협조하라고 했대요.”만천우가 덧붙였다.“하지만 부인인 설은아가 반대했다는데요.”“역시.”하현은 만천우의 말을 듣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보아하니 용천오는 역시 내가 죽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야!”“그의 목적은 간단해. 첫 번째는 설은아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아주 도량이 넓은 남자로 보이고 싶은 거지!”“두 번째는 내가 법의 처벌은 면해도 사람들의 여론이 들끓으면 이 바닥 주먹들이 성호남의 복수를 한다며 날 칠 테지. 그걸 바란 거야.”“세 번째는 설령 그가 복수를 하지 않더라도 용천오는 이러한 것이 다 위증이었다는 것을 가지고 날 협박하려 들 거야.”“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는 실시간으로 언론에 폭로해 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거야.”“용 씨 가문은 무성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지.”“무성의 강력한 지배권으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거든!”“무학의 성지인 황금궁과 용문은 말할 것도 없어. 6대 파벌도 용 씨 가문과 아주 막연한 사이야!”만천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매서운 눈빛을 띠며 입을 열었다.“용천도가 만약 이 일에 성공한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겠군요!”“어떻게든 당신을 굴복시키든지 아니면 아예 죽여버리든지 뭐든 할 수 있겠네요!”“용천오 이 자식 정말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웠군요.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결국은 용천진과 용천두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가 어부지리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겠죠.”“평소에 보면 점잖고 신사다운 모습을 보이길래 그러려니 했는데!”“이제 보니 뒤에서 아주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군요!”만천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는 같은 무성 상류층 사람들이라 평소 용천오와의 접촉이 적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니 용천오는 조금씩 조금씩 세력을 넓히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만천우는 앞으로 용천오를 대할 때는 보다 더 신중해야겠다고 다짐했다.그렇지 않
만천우는 자신이 아는 한 하현은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현장의 증거로는 날 풀어주기 어렵지.”“하지만 그 영상은 처음 입수한 것부터가 뭔가 허점투성이야.”만천우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영상이요?”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무성에는 변신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잖아?”만천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인도의 요승?”“무성은 역사적으로 인도와 막역한 사이였지. 인도의 요승은 여러 차례 무성에 와서 이른바 인도 불교의 불법을 전수했지.”“인도의 요가술은 사람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어.”“아!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바로 처리할게요!”말을 하면서 만천우는 벌떡 일어나 나가려고 했다.“펑!”바로 그때 취조실 문이 갑자기 누군가의 발길질에 벌컥 열렸다.순간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 예닐곱 명이 양복 차림의 말끔한 남자와 함께 몰려들었다.남자는 많아 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몸에는 상류층의 아우라가 흘러넘쳤다.그리고 그의 뒤에는 목영신 일행이 서 있었다.하현은 그들을 대충 훑어보았다.남자의 얼굴이 만천우의 용모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러나 차분하고 냉랭한 기운이 흐르는 기질은 만천우의 그것과는 달랐다.남자가 취조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기가 가득 느껴졌다.그의 뒤를 따르는 몇몇 경찰서 수사관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다.만천우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동시에 그는 하현을 한 번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이 분은 저의 큰형님입니다. 무성 관청 이인자 만천구!”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만천구를 바라보았다.하지만 만천구는 하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만천우를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제멋대로 날뛰며 법을 어기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오지 않을 수가
”좋아, 당신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니 한 명이라도 어디 해고해 봐!”우민은은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비아냥이 가득한 얼굴로 하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자! 어서 해 보라니까!”“퍽!”바로 그때 은행 로비의 문이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 열 명이 나타났다.선두에 선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는데 그냥 보기에도 부티가 좔좔 흘렀다.그는 바로 금정은행 은행장, 은둔가 나 씨 가문 나천우였다.나천우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우민은과 이국흥은 모두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려 굽신거렸다.“행장님!”“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우민은과 이국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나천우 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환한 미소를 보였다.그런데 평소에는 친근하게 그들을 대했던 나천우가 오늘 이렇게 차가운 얼굴로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나천우는 그들에겐 눈길도 돌리지 않고 하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고 하현의 손을 잡고 힘껏 흔들었다.“하현,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이 말을 듣고 장내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모두 어안이 벙벙해지다 못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곳곳에서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잠시 후 예쁘장한 여직원들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그러나 눈앞의 광경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많은 사람들의 시선은 놀라움과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현에게 쏠렸다.몇몇 여자 고객들도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버렸다.우민은은 마치 사지가 마비된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이국흥은 더했다.사지가 그의 통제 영역을 벗어나 쉼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이게 무슨 상황인가?그들은 하현
이국흥은 염치도 체면도 안중에 없는 사람 같았다.그는 없던 일을 있었던 일처럼 꾸몄다.그의 목적은 단 하나, 우민은이 하현을 혼내 주길 바랐던 것이다.이때 설은아가 얼른 입을 열었다.“부행장님, 그게 아닙니다...”우민은은 이국흥에게 힘을 실어 주러 온 상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은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감히 우리 은행에서 사람을 때려요?”“간이 배밖에 나왔어요?”“지금부터 당신은 우리 은행 블랙리스트에 오를 거예요!”“이봐! 어서 관청에 신고해!”그녀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오만하기 그지없었다.그러자 설은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분명 그녀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될 줄은 몰랐다.설은아가 이끄는 회사의 자금줄이 빠듯한 건 사실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자신이 아홉 번째 집안을 맡은지 얼마나 되었는가?이렇게 빨리 파산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훗날 대구 정 씨 가문의 수장이 되겠다는 것인가?그야말로 허황된 꿈이었다!“하하하! 이게 바로 당신의 최후야!”“이제 알겠어?”이국흥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개자식! 이 개새끼야! 너 방금 정말 미친놈처럼 날 치더라? 정말 대단했지, 안 그래?”“자, 다시 한번 더 해 보시지?!”“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디 한번 보자고!”“퍽!”하현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그의 요구에 답하며 앞으로 걸어가다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다.이국흥은 하현이 감히 자신에게 또 손을 쓸 줄은 몰랐다.뺨을 맞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가까스로 우민은의 몸에 기댄 덕분에 쓰러지지는 않았다.“미친 거야?!”“당신들 여기가 무법천지인 줄 알아?”우민은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이봐, 어서 신고해!”“은행 협회에 통보해서 설은아한테 대출 다 막으라고 해!”이때 하현은 싸늘한 표정으로 우민은과 이국흥을 바라보며 말했다.“두 사람이야말로 내 블랙리
하현을 말리는 설은아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국흥은 험상궂은 얼굴로 이를 갈며 일어섰다.그는 입가의 피를 닦고 하현을 가리키며 말했다.“개자식! 당신 누구야?!”“당신이 뭔데 감히 이러는 거야?”“날 때려? 감히 날 때렸어?”“내가 뭐?”하현은 앞으로 나서면서 또 손바닥을 올려 이국흥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감히 내 아내한테 그런 모욕감을 주다니! 나한테 누구냐고 물었어?”“내가 누군지 당신 눈엔 안 보여?”“혹시 설 대표가 당신 부인이야?”이국흥은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뭔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신이 그 소문으로만 듣던 그 쓰레기 같은 놈?”“그런데 감히 날 때려?!”“죽여버릴 거야!”하현은 또 그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퍽!”“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렇지만 내 여자를 건드리는 놈은...”“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오늘이 당신 제삿날인 줄 알아!”퉁퉁 부은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은 이국흥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벌벌 떨었다.“하현, 그만해! 그만하라고!”설은아는 한사코 하현을 말리며 붙잡았다.“또 때리면 정말 사람이 죽겠어!”그녀는 마음속으로는 그를 고맙고 든든하게 여겼지만 불똥이 그에게 튈까 봐 걱정도 되었다.오래된 도시 금정의 은둔가 가문이 뒷배에 있는 금정은행 부장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는가?금정은행의 뒷배인 나 씨 가문은 금정 금융계의 거물이었다.“개자식! 감히 날 때리다니?!”“흥! 넌 이제 죽었어! 내가 반드시 널 죽여버릴 거야!”이국흥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나 그는 감히 하현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입만 떠들썩하게 떠벌렸다.“반드시 관청에 보고해서 감옥에 처넣어 버릴 거야!”“그리고 제멋대로 날뛰는 네놈 때문에!”“이 여자도 상상하기 힘든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블랙리스트에 올라 금융계에선 다시는 일 원 한 푼 빌릴 수 없게 만들 거라고!”“
설은아는 얼굴이 굳어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부장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부장님이 이천억, 아니 이조를 준다고 해도 난 이런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어요!”“설 대표님, 왜 그렇게 고지식하게 굴어요!”“아니 그냥 잠 한 번 자는 것 가지고 뭘 그래요? 결국 서로 윈윈하는 거 아닙니까?”“다른 사람들은 이런 기회가 없어서 꿈도 못 꾼다고요!”“그런데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요?”“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혼도 한 번 했겠다 잠 한 번 자는 거,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남의 편의를 봐주고 내 이익을 챙기면 되는 거죠.’“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도 대표님은 육 씨 도련님의 사람이 되어서 금정에서 편하게 사업할 텐데, 그런 기회를 발로 차버려요?”“대표님이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금정에선 사업하기 힘들어져요!”“왜 돈을 앞에 두고 내팽개치려는 거예요?”이국흥은 이 바닥에서 닳을 대로 닳은 인물이었다.이런 일에 경험도 많고 비열함 따위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상대를 앞에 두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며 이리저리 이로울 대로 몰아가고 있었다.정신력이 보통인 여자가 아니라면 그의 능수능란한 언변과 뻔뻔스러운 행동에 쉽게 넘어가고도 남았다.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이 부장님, 내가 돈이 필요하긴 해요!”“하지만 돈 때문에 내 몸과 영혼을 팔진 않을 겁니다!”설은아에겐 분명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었다.“좋아요, 안 받으셔도 됩니다!”“없던 일로 하죠!”이국흥은 테이블을 탁 치며 노기등등한 표정을 지었다.“게다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은 우리 금정은행에 따로 오백억 빚이 있습니다!”“계약대로 다음 달에 갚아야 하고요!”“기한이 지나면 우리 금정은행은 대표님의 아홉 번째 집안 자산을 몰수할 권리가 있습니다!”“그렇게 되면 대표님도 자리를 보전할 수 없을 겁니다!”
”대출이 갱신이 안 되어서 우리 회사가 두 달째 월급을 못 주고 있어요.”“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고 공장 생산도 중단되었어요.”“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정말 파산할 거예요.”설은아는 조심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말했다.“이 부장님,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요.”“부장님도 우리 집안에 대해 잘 알고 계시고요. 우리 뒤에는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이 있어요.”“도와주신다면 그 은혜 꼭 보답하겠습니다.”이국흥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설은아를 바라보았다.“설 대표님,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대표님 회사는 지금 장부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 위험평가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내가 직업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직업윤리를 어겨 가면서까지 대표님을 도와드릴 순 없잖습니까?!”“안타깝지만 우리 은행에서 이번 대출 연장은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하지만 우리 은행에서 대표님께 기회를 안 드리는 건 아닙니다...”말을 마치며 이국흥은 미리 준비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서남 천문채 육 씨 도련님이 당신한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이건 이천억을 빌린다는 차용증입니다. 대표님이 여기 서명만 하면 당장 효력이 발생하고요.”“언제든지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하지만 육 씨 도련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룻밤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육 씨 도련님?!설은아는 낯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녀는 분명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선 겨울 칼바람 같은 매서운 기운이 넘실거렸다.“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직업윤리도 없고 염치도 없으세요?”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국흥은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당연히 무슨 말씀인지 알 텐데요.”“난 대표님이 육 씨 도련님의 요구대로 했으면 합니다!”“그분이 누굽니까? 서남 천문채에서 어마어마한 지위에 있지 않습니까? 잘 아시면서 왜 그러
”아, 아니...”“대, 대사님! 대사님!”이때 나천우는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하현을 쫓아가려고 발버둥쳤다.임단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나천우를 뒤따랐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하현은 그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나천우 부부가 급한 마음에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어 얼른 하현을 뒤쫓으라고 하려던 참이었다.나천우를 뒤쫓아온 형나운은 나천우의 전화기를 툭 쳤다.“천우 오빠, 또 일을 그르치려고 그래?!”그녀는 따끔하게 주의를 주었다.“지금 하현이 화가 나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게 생겼는데 부하들이 쫓아간들 어쩌겠어?”“하현이 돕지 않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겠어?”나천우는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형나운, 우리가 잘못했어.”“우리가 눈이 멀었나 봐.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제대로 볼 줄 몰랐으니 말이야!”“하지만 너랑 나랑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부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잘 좀 봐달라고 말 좀 해 줘!”“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까!”“돈 문제는 절대 신경 쓰지 마!”“맞아.”이때 임단도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형나운, 그러면 주소라도 알려줘. 우리가 가서 삼고초려라도 해 볼게!”“좀 진정해. 이렇게 쫓아가 봐야 아무 소용없어.”형나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해 볼게.”그 시각 진회강 강변에 위치한 금정은행 본사 앞.설은아는 머뭇거리다가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은행 로비로 발걸음을 옮겼다.마침 택시를 타고 지나가던 하현이 설은아의 모습을 보았고 자금난에 허덕이는 그녀의 사정을 급히 떠올리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뒤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뒤따랐다.하현이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그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전화를 받아보니 형나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 사장 부부가 잘못을 깨닫고 직접 사과드리고 싶다고 해요.”“내 얼
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형나운도 틀림없이 이 사기꾼에게 속았다고 생각했다.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감히 자신을 풍수대사라 할 수 있겠는가?장난하는 건가?이런 사람이 사기꾼이 아니라면 누가 사기꾼이란 말인가?임단이 참지 못하고 옆에서 끼어들었다.“그럼 당신은 음양학을 배운 학생이에요?”하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아니요. 난 굴착기를 배웠어요. 기술도 좋고 자격증도 있어요.”“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하현의 말을 들은 나천우는 갑자기 표정이 냉랭해졌다.“지금 뭐라는 거예요?”“굴착기를 배운 사람이 무슨 풍수를 본단 말이에요?”“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대하에서 풍수지리가 얼마나 큰 위상을 차지하는지 몰라요?”“우리를 속이려 들다니 후환이 두렵지도 않아요?”나천우의 말에 형나운의 안색이 새까맣게 일그러졌다.그녀는 다급하게 나천우에게 눈길을 돌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오빠, 그만하면 안 돼!”“우리 두 집안의 친분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내가 이런 중요한 일을 두고 오빠를 속였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바보야?!”“너 나 속이는 거 아냐?”나천우의 얼굴은 냉랭하게 식었다.“너도 자세히 봐 봐. 이 젊은 사람은 풍수라는 두 글자도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떻게 믿으란 얘기야?!”“이 사기꾼을 만나려고 내가 금정은행 투자 포럼도 안 나가고 여기 왔겠냐고!”임단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비난에 열을 올렸다.“형나운, 당신 정말 경솔했어!”예전 같았으면 두 집 사이에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형나운이 하현에 대해 거의 신처럼 말했다는 것이다.나천우와 임단은 자신들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줄로 알고 커다란 희망을 품고 여기 왔다.다만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큰 법이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나 사장님?”형나운은 하현의 목소리에 그에게 눈길을 떨구며 손을 내저었지만 하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담담한 눈
”형나운, 정말 축하해!”“우릴 속이지 않았군!”“그런데 그 대사님은 어디에 계셔?”“얼른 좀 소개해 줘!”나 사장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우리 병은 이미 수많은 국내외 명의들한테 보여줬어. 국수인 장북산 선생님도 보셨지!”“어르신은 우릴 보고 병이 아니라 악에 부딪힌 것이라고 하셨어.”“풍수에 정통한 사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대.”“하지만 수많은 풍수지리사를 만나봤지만 도저히 해결되지 않았어.”“어쨌든 형나운, 당신이 대사님한테 말 좀 잘 해 줘!”나 사장의 부인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형나운, 우리를 살릴지 말지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어.”“이 일이 잘 해결되면 최고 가문에서 기가 막힌 남편감을 물색해 줄게. 정말 섭섭하지 않게 해 줄 거야!”옆에 살짝 비켜서 있던 하현의 이마에 주름살이 잔뜩 드리워졌다.기가 막힌 남편감?뭐가 기가 막히다는 거지?형나운은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나 사장님, 그 대사님은 바로 가까운 곳에 있어요.”“하현, 소개할게요. 이 분은 나천우 사장님, 그리고 이쪽은 나 사장님 사모님, 임단.”“나 사장님은 나 씨 가문 출신이에요.”“나 씨 가문은 형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금정에 토박이로 아주 뿌리가 깊은 가문이죠.”“예로부터 은행업을 해 왔고 지금도 금정에서 가장 큰 은행인 금정은행을 움직이는 가장 큰 지주이자 실세죠.”“나 사장님 부부는 결혼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자식이 없어요. 그래서 온갖 치료를 받았지만 성과가 없어서 결국 풍수지리술에 기대 보려고 하고 있어요.”“할아버지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셨고요.”“우리 형 씨 가문과 나 씨 가문은 사이가 좋아서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만 당신한테 말도 없이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형나운은 조금 찔리는지 불안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하현, 이렇게 불쑥 말을 꺼내면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잘 알지만 제발 나 사장님 부부를 좀 도와줬으면
하현은 이맛살을 구기며 말했다.“말로 하면 되지! 당신 왜 이러는 거야? 이런 행동을 왜 하는 거냐고?”“내가 그런 사람이야?”“하현, 치료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형나운은 미안한 듯 겸연쩍어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주동적으로 이런 자세를 보인 거예요. 언제든지 와도 상관없다고.”“아무튼 당신이 날 고쳐 줄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요.”“강하면 강할수록 난 더 좋아요.”“당신 정말...”“마초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하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고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퍽’하고 내리쳤다.“이렇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누가 말했어?”“지난번에 난 기혈과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줬어.”“그런데 지금 당신 문제는 완전히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 호전되지 않아!”하현의 말을 들은 형나운은 순간 얼굴이 벌게졌다.그녀는 얼른 엉덩이를 내리고 똑바로 선 다음 서랍 속에서 노란 가죽으로 싼 고서적 한 권을 꺼내 하현에게 건네주었다.하현이 힐끔 쳐다보니 ‘영춘’이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처세술에 관한 책인 ‘영춘’은 여자아이의 수련에 안성맞춤이었다.하지만 진짜 ‘영춘’은 기본적으로 무학의 성지에서 내려오는 비법서 같은 것이고 방금 형나운이 꺼낸 책은 남은 자투리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녀는 자투리 잡서에 가까운 책으로 수련을 하는 바람에 자주 숨이 막히는 증상이 생긴 것이다.하현은 그제야 뭔가를 알아차리며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써 준 뒤 그녀에게 책을 던져주며 말했다.“이 책은 영춘의 상반부에 불과해. 그래서 내가 상반부만 보충해 줬어. 이렇게 한다면 별일 없을 거야.”“후반부는 당신이 기회를 봐서 오매 도교 사원에 가서 문의해 봐.”“만약 내가 당신한테 준다면 오매 도교 사원이 아마 날 죽이려고 들 거야.”“아, 알겠어요.”형나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하현이 보충해 놓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