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문준과 당난영이 데릴사위를 꿈꾸는 동안 하현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중이 아무리 절이 싫어도 완전히 절을 떠날 수는 없었다.그는 안전을 위해 며칠 동안 가든 별장에 머물렀다.다음날 이른 아침, 봄비가 촉촉이 내린 가든 별장의 공기는 이슬의 향기를 품은 듯 상쾌했다.아침 산책을 하던 하현은 마침 아침 운동 준비를 하던 하수진을 만나 버기카를 타고 가든 별장 뒤편에 있는 사설 골프장으로 따라나섰다.하수진은 산뜻한 미니스커트의 골프복을 갈아입고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과 뿔테 선글라스를 착용해 명품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그녀가 하현을 데리고 골프장으로 걸어갔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청춘의 활기와 기운이 가득 흘렀다.하현은 골프채를 손에 들고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하수진, 난 지금 풍랑 앞에 서 있는 처진데 당신은 그런 나를 데리고 골프를 치러 오다니. 당신은 내가 끌려가 내쫓기는 게 두렵지 않아?”노부인의 명령대로라면 하현은 어젯밤 10시에 항성과 도성을 떠났어야 했다.하지만 하현은 노부인의 명령을 듣고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먹고 자고 한 것이다.이미 노부인이 명령한 출국 시간은 10시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항성 전체가 침묵을 가득 집어삼킨 도시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모든 사람들이 마치 태풍 전야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하현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이 상황에서 의문이 들었다.“큰일을 앞두고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니, 참.”하현의 말에 하수진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항도 하 씨 가문의 가훈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에 반해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어.”“아버지의 성품이 그러셔. 아버지도 당신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당신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해야 해?”“그리고 내가 보기엔 하늘이 무너져도 당신은 솟아날 사람이야!”“내 말이 맞지?”“그런 이유로 당신을 데리고 나온 것이도 하
”툭!”“역시 고수는 고수군.”“어쩐지 노부인의 명령에도 꿈쩍도 하지 않더라니.”“영웅인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모르겠군.”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그러자 나무숲 사이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비쳤다.사람들은 모두 파란색 장삼을 입고 있었고 표정은 너 나 할 것 없이 사나웠다.그리고 맨 가운데 깡마른 노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흰 얼굴에 호두 두 알을 손 안에 쥐고 만지작거리던 노인은 하현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기고만장한 기운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하 총관님!?”하수진은 깡마른 노인을 보고 안색이 살짝 변했다.“누구야?”하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는 지금까지 항성과 도성에서 자신 앞에서 지금처럼 기고만장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도 갑자기 나타난 깡마른 노인의 정체가 무척 궁금했다.“이 사람은 옛 문주 곁을 오랫동안 지켜왔었어.”“나중에 옛 문주가 항도 하 씨 가문을 재건한 후 그는 줄곧 총관 역할을 맡았어.”“옛 문주가 은퇴하고 아버지가 자리에 오른 후 하 총관은 줄곧 노부인 곁에서 여생을 보내셨지.”“그를 숨겨진 실세라고 생각하면 돼.”“어쨌든 그는 항도 하 씨 가문에서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니까.”“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실세 중의 실세지.”“아버지도 그를 만나면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하지.”“이 사람이 나온 걸 보니 할머니가 이번에는 정말 많이 화가 나신 모양이야.”말을 하는 동안 하수진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항도 하 씨 가문 문주의 수양딸인 그녀는 항도 하 씨 가문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깡마른 모습에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 총관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실력을 겸비한 사람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자신에 대해 설명하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하수진의 얼굴을 보면서 하 총관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분명 그에게 있어 가장
”이 개자식이!”“하 총관님한테 무슨 말버릇이야?!”청삼을 입을 남자가 잡아먹을 듯 걸어 나왔다.“당장이라도 네 입을 갈기갈기 찢어줄 거야!”“뭐라고? 다시 말해 봐?”하 총관이 앞으로 나오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무리들을 제지했다.그리고 나서 그는 두 손을 뒷짐진 채 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항도 하 씨 가문 총관이야.”“문주와 노부인의 최측근이지!”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인 주제에 뭘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그러십니까?”“당신한테 한 가지 묻고 싶어요!”“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무슨 규칙을 어겼길래 당신 같은 사람한테 무릎을 꿇어야 합니까?”하현이 당당하게 따지고 나오는 것을 본 하수진이 얼른 끼어들려고 했지만 단호한 얼굴의 하현을 보고 그녀는 순간 마음을 접었다.하현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하수진은 지금은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하현은 이 상황이 굉장히 언짢은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무슨 잘못을 했냐고요”“아직도 모르겠어?”하 총관은 한 걸음 앞으로 더 나와서 발을 구르며 호령하듯 큰소리를 쳤다.순간 땅바닥에 사방으로 균열이 일어났다.“하현, 쓸데없이 허세 부리지 마!”“그러다 이따가 죄만 더 많아져!”“그러니 지금 당장 기어서 당장 항성과 도성을 나가는 게 더 간단하지 않아!”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내 죄가 뭔지 말해 주시죠!”하 총관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하얀 얼굴에 청삼을 입은 남자가 노기충천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노부인의 말은 천금과도 같아. 노부인은 당신한테 24시간 안에 당장 항성과 도성을 떠나라고 했어!”“하지만 당신은 순순히 떠나지 않았어!”“그리고도 아침부터 허세를 부리며 골프를 치러 나오다니!?” “노부인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어?!”“노부인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도 이따위 짓을 하는 거야!?”“이제 알겠어?”“이게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 총관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난 비록 하 씨이지만 지금껏 내가 항도 하 씨 가문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당신들 눈에는 항도 하 씨 가문이 하늘 같을진 몰라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콧방귀도 안 뀌어!”“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말도 마찬가지야. 당신들한테나 천금 같은 거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야!”“부처님 행세를 하려면 항도 하 씨 가문에서나 할 것이지 왜 나한테 와서 이래?”청삼을 입은 남자는 버럭 화를 내며 하현을 손가락질했다.“저, 저 자식이!”“감히 노부인을 모독하다니!”“넌 이제 끝났어!”“예수님도 네놈을 구하지 못할 거야!”“오늘 네놈의 손발을 박살 내 줄 거야!”“항성과 도성에서 감히 노부인의 말을 거역하다니!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이 개자식!”“퍽!”청삼을 입은 남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이미 한 걸음 앞으로 나가 손바닥으로 그를 후려쳤다.아니, 날려 버렸다.청삼을 입은 남자가 하현의 손바닥 한 방에 날아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그들이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항도 하 씨 가문의 권위였다.그리고 노부인의 절대적인 지지였다.비록 하 총관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서 마주치든 모두들 그들 앞에서는 몸을 벌벌 떨 정도였다.항성과 도성의 귀족들이라도 다르지 않았다.하구천처럼 제멋대로 날뛰는 사람도 그들을 만나면 모두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이 사람들이 언제 누구한테 손찌검을 당해 봤겠는가?청삼을 입은 남자는 땅에 널브러져 얼굴을 가리고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이 개자식이!!“감히 날, 날 때리다니!”“퍽!”“난 항도 하 씨 가문 문주의 귀빈이야. 그러니 당신들도 예우를 다해 날 대해야 해.”“당신 같은 집사 따위가 내 앞에서 무슨 자격으로 큰소리를 치는 거야?”“퍽!”“하 총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데 당신이 뭔데 나서서 지껄이는 거야?
하현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미소가 냉랭하게 흘렀다.말을 마치며 그는 휴지를 꺼내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마뜩잖은 표정으로 손을 닦았다.이 모습을 바라보던 하 총관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결국 하 총관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이 건방진 놈!”“하현!”“뭘 믿고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거야!”“감히 항도 하 씨 가문 집사를 치다니!”“노부인께서도 감히 손을 대지 않는 우리를 감히 너 따위가?!”“도대체 항도 하 씨 가문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이러는 거야?”“우리 뒤에 노부인이 있다는 게 안 보여?”하현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총관님, 눈이 멀었습니까?”“방금 당신 부하가 나한테 덤벼드는 거 못 봤어요?”“난 문주의 귀빈입니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죠!”“총관이신 분이 그 정도 규율도 모르면서 나한테 법 운운하는 겁니까? 규칙이요?”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왕법, 규율이라는 건 다 허울뿐인 껍데기인 거죠.”“당신들한테 유리할 때는 왕법 운운하다가 불리할 때는 가차 없이 내팽개치는 그런 게 왕법이고 규율입니까?”“이런 왕법과 규율을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하 총관님은 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도 안중에 없는 겁니까?”“노부인을 앞세워 이렇게 함부로 행동해도 되는 거냐구요?”“하 총관님,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시죠?!”“어떻게 이런 불경을 저지르는 거냐구요, 네?”“너 이 자식...”하 총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는 항상 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그런데 오늘 역으로 노부인을 앞세워 자신을 공격할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순간 하 총관은 지위고 체면이고 다 내팽개치며 매서운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 씨 이 자식이!”“존엄한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을 건드리는 거야?!”“우리 노부인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거냐고!”“네놈이 죽고 싶어 환
”양제명이 네 뒤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네깟 놈이 미야타 신노스케를 처리할 수 있었겠어?”“이번에 우리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가 텐푸 쥬시로를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네가 그의 무릎을 꿇릴 수 있었겠냐고?”“몇 번 운 좋게 이긴 걸 가지고 아주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이라니!”“노부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도 못하는 놈이 어딜 감히 덤비는 거야?!”“어디서 감히 날 건드려?!”“내가 하천성을 직접 가르쳤다는 걸 모르는 게야?”“설마 호위대 몇 명한테 기대어 큰소리나 뻥뻥 치는 사나운 늙은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똑똑히 들어! 너 잘못해도 한참 잘못했어!”“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거야!”하 총관이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면서 분을 뿜었다.사방팔방에서 광풍이 몰아치듯 하 총관은 거침없이 하현을 비난하며 몰아세웠다.모두가 하 총관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하현, 너에게 마지막 기회이자 유일한 기회를 주겠어!”“얼른 무릎 꿇어!”“무릎을 꿇고 벌을 받아!”“그리고 노부인에게 가서 석고대죄해!”“그런 다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항성을 떠나!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마!”“그렇지 않으면 노부인이 당장에라도 널 절단낼 거야!”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하 총관님, 절 어떻게 절단낼 건가요?”“건방진 놈이!”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데도 하현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은 얼굴로 하 총관에게 대들었다.마침내 하 총관은 화가 극에 달했다.그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로 하현 앞으로 돌진했다!그리고 오른발을 휘둘러 하현의 머리를 향해 세게 휘둘렀다.하 총관의 다리는 공중에서 휙휙 소리를 내며 바람을 일으켰다.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날랜 움직임이었다.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바라보고만 있었다.뒤쪽에 있던 하수진만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소리쳤다.“조심해!”조금 전 땅에 널브러진
청삼을 입은 집사의 말에 하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흥미로운 눈길로 산길 방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하 총관이 땅바닥에 널브러지던 그때 한참 전부터 서 있던 도요타 센추리가 쓱 지나가면서 문이 활짝 열렸다.그러자 몸집이 크지 않은 깡마른 노인이 차에서 내렸다.머리는 올백으로 뒤로 곱게 젖혀져 있었고 하얀 겉옷을 휘날리며 다가왔다.희미하게 감도는 바람을 헤치며 그는 마치 신선처럼 다가왔다.“천도 어르신!”그 모습을 본 청삼 입은 집사들은 무릎에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땅바닥에 얼른 무릎을 꿇었다.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최측근 고수, 천도가 등장한 것이다!하현의 눈길도 덩달아 흥미로운 빛으로 가득한 채 그의 모습에 쏠렸다.전설로 불리는 항도 하 씨 가문 전신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천도의 기세는 하현을 압도할 듯했고 천천히 정원을 거닐 듯이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걸어 나왔다.줄곧 하현의 뒤에 서 있던 하수진의 안색이 갑자기 일그러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하현의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말했다.“문주의 호위대는 어디 있지?”하수진의 명령과 함께 방금 도착한 수십 명의 문주 호위대들이 험악한 얼굴로 하현과 하수진 앞을 가로막았다.“문주 호위대?”천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이놈, 네놈이 감히 노부인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나한테도 당당히 떠들어 댈 수 있겠군. 흥! 참으로 순진한 놈이구만!”입을 열지 않던 천도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항도 하 씨 가문 문주 호위대도 결국 항도 하 씨 가문 사람이야.”“그들이 감히 노부인에게 등을 보이겠다고?”“네놈이 조금 가진 실력으로 우쭐대더니 감히 노부인을 상대할 생각을 해?”“노부인의 명령을 귓등으로 들었군!”“하현, 네놈의 생각과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내가 할 말을 잃을 지경이야.”“문주의 체면을 봐서 내 특별히 12시간을 더 주지.”“문주 부인의 체면을 봐서 하 총관
”미안합니다만.”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땅바닥에 떨어진 긴 칼 한 자루를 주우며 담담하게 말했다.“이거 천도 당신 칼이죠?”“난 무릎이 뻣뻣해서 꿇지 못합니다.”“그리고 난 스스로를 땅강아지와 개미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내가 저세상으로 모셔다드리면 어떻겠습니까?”“뭐? 날 데려다준다고?”천도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내 앞에서 이런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 사람은 몇 년 만에 처음이야. 네놈의 배포는 인정할 만하군.”“하지만 네놈이 노부인의 명령을 무시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결말은 당연한 일이지.”말을 하면서 천도는 허리춤에서 천천히 장도를 뽑아 들었다.“3분이면 돼.”“네놈 정도라면 3분 안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네놈을 처리한 후 노부인께 가서 사죄를 드려야겠어.”“네놈 같은 녀석을 열두 시간이나 더 살려 두었으니 말이야.”“그건 내 죄야.”“3분도 너무 길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미소 속에는 냉랭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1분이면 됩니다.”“1분 안에 내가 당신을 처리한다면 아침 차를 느긋하게 마실 시간도 있겠군요.”“이 자식이!”하현의 말을 들은 순간 천도의 표정이 겨울바람처럼 매서워졌다.그는 마치 유령처럼 재빠르고 유려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하현이 있는 곳으로 돌진해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하현도 천도 못지않은 차가운 기색을 띠며 날아오는 칼날을 세차게 쪼개 버렸다.두 사람의 기세가 허황된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직접 상대에게 살수를 쓴 것이었다.“촹!”칼날이 마주치자 큰 소리가 났고 강한 기류가 폭발하면서 두 사람의 몸은 심하게 요동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천도의 발바닥이 땅을 스치며 깊은 도랑 자국을 두 가닥 남겼고 그대로 7~8미터를 미끄러져 겨우 멈춰 섰다.천도의 희끗희끗한 얼굴에선 약간의 긴장감과 동요가 일었다.하현은 세 발짝 뒤로 물러섰고 한 발짝 물러설 때마다 깊은 발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