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문천은 냉담한 기색을 띠며 싸늘하게 조카를 바라보았다.“내가 너한테 몇 번이나 말했니?”“큰일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해야 해!”“그런데...”조카는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멍청한 놈!”하문천은 욕설을 내뱉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어서 말해 봐!”조카는 빠르게 핸드폰 앱을 켜서 가장 위에 있는 뉴스를 눌렀다.“항성과 도성의 풍운아, 항도 하 씨 가문 귀빈이었던 하현, 천 리를 건너 섬나라로 가서 십 년 전 진범을 체포하다!”제목은 그냥 보통의 뉴스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항성과 도성의 현재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제목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아차릴 정도로 명확하고 충분했다.하구봉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내가 한 공로를 빼앗으려는 거야...”“가장 중요한 내 공로를!”“평생 다시 올까 말까 한 내 공로를!”“감히 이 개자식이 이런 식으로 폭로해서 빼앗아가다니!”하구봉은 펄떡펄떡 뛰며 흥분하기 시작했다.도무지 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그는 원래 이 공로로 호위대 책임자의 자리를 굳건히 하려고 했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세대의 문주가 될 기회도 엿보려고 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지금 이 순간 하구봉은 이 뉴스를 보도한 자들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맞은편에서 태블릿 PC를 들고 있던 하문천의 조카는 사색이 되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구봉 도련님!”“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하구천이 이 일을 떠벌린 것 같습니다!”“항성일보에 직접 연락해 자세한 내용을 알려줬다고 해요.”“그 과정을 봤는데 세세한 것까지 아주 정확하고 치밀해서 마치 현장을 직접 본 사람 같았어요.”“간단히 말해 이 일은 하현의 공로라는 걸 조금도 숨기지 않았어요!”“탕!”하구봉은 태블릿 PC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를 갈았다.“
허민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말 속에 단단한 뼈가 박혀 있었다.순간 하구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진퇴양난에 빠졌다.하구천 앞에서 감히 자기가 상석을 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구천이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 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순간 분위기는 어색하고 거북하게 흘러갔다.곽영준과 하민석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그들이 하구천 앞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해 봐야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하구봉이 하구천을 받아쳐 유리천장을 건드릴 수만 있다면 자신들에게도 아마 조금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하구봉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애써 냉정을 되찾았다.그러자 그는 하구천을 곁눈으로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하구천, 무턱대고 이곳에 온 건 내 잘못이야.”“하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하구봉은 말을 마치며 태블릿 PC를 하구천 앞에 놓았다.“이거, 당신이 항성일보에 제보한 거지?”사람들의 시선이 태블릿 PC로 쏠렸고 모두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구봉에게 이 공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이 공로는 휘발성 기사처럼 폭로되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질 지경이 되었다.어쩐지 하구봉이 불같이 화를 내며 들이닥치더라니.하구천은 태블릿 PC를 잠시 들여다본 뒤 입을 열었다.“하구봉, 하현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이 기사가 나간 뒤 가장 큰 이득을 본 자는 그 사람이어야 옳아.”하구봉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하현도 개자식이긴 하지만 그가 지닌 한 가지 장점은 말한 대로 한다는 거야.”“그는 자발적으로 이 공로를 나한테 넘겨주겠다고 말했어.”“그렇다면 그가 뒤에서 이따위 소인배 짓을 할 필요가 없지.”“그러니 이 일이 어떻게 하현이 한 짓이겠어?”하구봉은 아직 핵
방금 오는 길에 하구봉은 이미 세 가지 이상의 경로를 통해 이 일이 하구천이 한 짓이라는 것을 확인했다.하지만 그의 마음속에 하구천에 대한 마지막 믿음이 남아 있었다.하구봉이 알고 있는 한 하구천은 여러 방면에서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다.이런 치졸한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래서 대략의 상황으로 볼 때 이 일은 하구천이 한 짓임에 거의 80%의 확신은 들지만 하구천이 부인하길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이다.하지만 하구봉이 하구천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자 하구천은 ‘탁'소리를 내며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책상 위에 놓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내가 한 짓이야.”“항성일보에 직접 통보해 모든 걸 다 알려줬어.”“그들이 내보낸 기사, 제목까지 모두 내가 심사했어.”“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이 신문사를 내가 사 버렸다는 사실이야. 아마 지금쯤 항성 일대에는 이 소식이 쫙 퍼졌을 거야.”“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리가 뭐 숨길 필요없잖아?”하구천은 웃는 듯 마는 듯,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하구봉의 눈에선 매서운 빛이 스쳤다.“하구천, 당신 왜 그랬어?”“당신한테 득이 되는 게 뭐야?”“남한테 손해 나는 짓을 왜 굳이 한 거냐구?!”하구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남한테 손해만 끼치고 나한테는 이득이 없다고?”“첫째, 이번에 하현이라는 꼴같잖은 놈한테 한방 먹이고 싶었어.”“어쨌든 이놈은 스스로 무적이라 여기고 항성과 도성에서 도발해 왔어. 미야타 신노스케마저 해치웠고.”“그가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지.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텐푸 쥬시로를 생포하기 위해 신당류의 본산에 쳐들어갔어.”“그들이 섬나라에 웅크리고 앉았더라도 하현이 그들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얼마든지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그래야 원래 하현을 극도로 꺼리던 섬나라 사람들이 분기탱천해서 섬나라
자신의 행동이 타당한 이유를 거침없이 설명하는 하구천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하구봉은 그의 미소를 보고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애써 충동을 억눌렀다.이때 뒤편에서 허지강이 입을 열었다.“하구봉, 내친김에 소식 하나 더 알려줄게.”“방금 섬나라에 현재 잔존하는 5대 유파가 교토에 모여 섬나라 황궁 앞에서 결의대회를 준비했대!”“신당류 사건의 범인에게 피맺힌 원한을 돌려주어야 한다며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말이야.”“그래서 하 소주가 이 일을 폭로함으로써 당신의 목숨을 구해낸 거야.”“당신은 오히려 하구천한테 감사해야 해. 안 그랬으면 당신은 오늘 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를 운명이었어.”“당신 한 사람 죽는 걸로 끝나지 않고 항도 하 씨 가문이 섬나라 사람들한테 공격받을 뻔했어!”“당신이 잘못한 일을 하 소주가 스스로 나서서 해결한 거야. 이 얼마나 큰 공로야? 머리를 납작 엎드려 고마워해야 한다고!”“그런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의심을 하는 거야?”“하구봉, 당신한테 너무 실망인데!”자신들의 행동이 타당하다는 근거를 대는 하구천 일행을 보며 하구봉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이 언제 섬나라 검객을 겁냈어?”“섬나라 사람들을 대할 때 당신들 무릎은 이미 땅바닥에 주저앉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군.”“잊었어? 우리 항성은 대하의 영역이야. 우리도 대하 사람이라고!”“섬나라가 유라시아 전쟁터에서 일찍이 총교관에게 큰 패배를 맞봤지.”“그들에게 아무리 큰 용기를 줘도 감히 우리 항성을 어지럽히진 못할 거야!”“큰 대군은 국경을 넘을 수 없어. 그렇지만 몇 명의 살수를 보내는 건 간단하지 않아?”하구천이 하구봉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나이가 들었으니 좀 성숙해지라고.”“섬나라에는 검객, 닌자, 음양사, 주술사가 아주 많아...”“섬나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진검승부까지 하지 않아도 돼. 아주 손쉬운 일이거든.”“이번
”게다가 하 소주는 함부로 당신을 모욕하지 않았어. 그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것도 다 당신을 위해서였다고.”“텐푸 쥬시로를 잡은 건 정말 큰 공로야.”“하지만 그 큰 공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현뿐이야.”“당신이 다른 사람의 공을 강탈하면 안 되지! 나중에 남들한테 들통나면 당신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거야!”“섬나라 사람들한테 보복당할 위험도 있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질 위험도 안고 있다고.”“설마 조금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거야?”“하 소주가 모든 걸 다 파악할 순 없어. 스스로의 미래는 스스로가 대비해야지.”“하 소주가 당신을 억압한다고 생각하지 마.”“모두가 당신을 위해서야!”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하구봉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하구천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 사람들이었다.하수진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일부 사람들도 여전히 하구천의 휘하에 들어가는 걸 조심스럽게 생각했었다.하지만 하수진이 나타난 지금 항성과 도성의 판세는 분명했다.이 젊은이들에게 하구천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게다가 그들이 보기에 노부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하구천이 상석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였다.지금 하구봉이 하구천을 배신한 것은 이들이 보기에는 대역무도한 죄를 지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구봉을 압박하려는 것이다.“하구봉, 대의를 위해 당신이 조금 억울할 수밖에 없어.”“하구봉, 이건 하 소주가 당신한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거야.”“하구봉, 이 일은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 짓는 게 좋아.”“하 소주도 더 이상 당신 집안과 하현과의 관계를 따지진 않을 거야.”“그리고 잊지 마. 당신은 어쨌든 하 씨 집안사람이야!”하구봉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이들의 굳은 표정을 지켜보았다.죽일 듯 자신을 압박하는 그들의 말이 귓가에 쟁쟁거렸다.하구봉의 눈에는 과거에
항성, 가든 별장.하현 일행은 아침 차를 마시기 위해 모여 있었다.이때 하현은 무심코 태블릿 PC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문주 어르신, 뭐 하나 여쭤봐도 될는지요?”“하구천이 머리에 총을 맞은 게 아닐까요?”“항도 하 씨 가문이 이런 사람을 후계자로 뽑으려 하다니.”“장성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려는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뉴스에 나온 내용을 보고 하현은 금세 돌아가는 판세를 읽었다.쓱 보면 알 수 있을 법한 얘기였다.뉴스가 이렇게 자신을 비난하며 섬나라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린 건 다 하구천의 짓임이 분명했다.하구천은 이렇게 하면 섬나라 사람들이 하현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하구봉이 일어설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며 심지어 그 자신은 섬나라 사람들에게 큰 인정을 베푼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리고 한 짓임에 틀림없다.하구천에게는 기쁘고 축하할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하문준도 뉴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조카는 다 좋은데 소심해서 탈이야.”“전체를 보는 배포도 부족하고 심성도 얕아.”“노부인은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석에 앉히지도 않는 것이 내 친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지.”“하지만 노부인께서 생각하지 못하시는 게 있어. 배포가 작고 심성이 얕은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은 항도 하 씨 가문에 하등의 이득도 없어.”“항도 하 씨 가문은 대하 남쪽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병사들이 반드시 경쟁해야 하는 곳이었지. 이런 곳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충분한 안목과 두둑한 배포가 필요해.”하문준의 눈에는 실망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하구천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이렇게 경중을 모르고 속임수까지 써서 날뛸 줄은 몰랐다.겉으로 보기엔 하구천이 이득을 본 것 같지만 항도 하 씨 가문을 순식간에 불의의 상황에 빠뜨린 꼴이 되었다.간단히 말해 하구천의 펼쳐 놓은 판은 그야말로 너무나 형편없는 대국이었다.그가 상석에 앉고 말고 따지기 전에 그의 마음속에는
하현은 당난영의 말에서 그녀의 진심을 느끼고는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부인, 안심하셔도 됩니다.”“섬나라 사람들의 음모와 모략이 속출하고 있지만 모두 다 대처할 수 있습니다.”“저는 그들 두 검객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들의 10대 검객들조차 모두 해치울 수 있습니다.”“언젠가 그들이 다시 날 건드린다면 섬나라 교토에서 한꺼번에 다 덤벼도 상관없습니다.”“생각해 보니 아주 그림이 멋질 것 같은데요.”하수진이 옆에서 이를 듣다가 끼어들었다.“어머니, 도대체 누가 어머니 자식인 거예요?”“지금 가장 위험한 사람은 분명 저잖아요?”“아버지가 날 사람들 앞에 노출시켜 상석에 앉히려고 하시니 모든 사람들이 날 해치우려고 할 텐데 말이에요. 아버지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거예요.”당난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안전은 전혀 걱정하지 마. 아버지가 문주 호위대 중 절반을 네 곁에 배치시키셨어.”“이런 식으로 해도 너한테 사고가 난다면 아버지는 당장에 문주 자리를 내놓아야 할 거야, 하하하!”하문준도 손뼉을 치며 웃었다.“좋아, 좋아. 내가 자네에게 섬나라를 급습하게 했으니 이미 난 자네 솜씨에 아주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섬나라 측이 해괴망측한 기인들을 불러내지 않는 한 하현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어.”“물론 자네한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주게. 내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테니.”하현이 웃으며 말했다.“문주께서 저한테 일을 맡기실 때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저와 섬나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죽기 살기로 싸웠죠. 제가 그들의 얼굴을 때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요.”“그러나 이번엔 다릅니다.”“문주께서는 텐푸 쥬시로의 일을 염두에 두시고 가능한 한 빨리 그의 입에서 십 년 전 그 일에 관한 단서를 얻어야 합니다.”“곧 노부인의 생신이라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하문준의 눈빛이 살짝 번쩍였고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분명 텐푸 쥬
하문준과 당난영이 데릴사위를 꿈꾸는 동안 하현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하지만 중이 아무리 절이 싫어도 완전히 절을 떠날 수는 없었다.그는 안전을 위해 며칠 동안 가든 별장에 머물렀다.다음날 이른 아침, 봄비가 촉촉이 내린 가든 별장의 공기는 이슬의 향기를 품은 듯 상쾌했다.아침 산책을 하던 하현은 마침 아침 운동 준비를 하던 하수진을 만나 버기카를 타고 가든 별장 뒤편에 있는 사설 골프장으로 따라나섰다.하수진은 산뜻한 미니스커트의 골프복을 갈아입고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과 뿔테 선글라스를 착용해 명품 이미지를 물씬 풍겼다.그녀가 하현을 데리고 골프장으로 걸어갔을 때 그녀의 얼굴에는 청춘의 활기와 기운이 가득 흘렀다.하현은 골프채를 손에 들고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하수진, 난 지금 풍랑 앞에 서 있는 처진데 당신은 그런 나를 데리고 골프를 치러 오다니. 당신은 내가 끌려가 내쫓기는 게 두렵지 않아?”노부인의 명령대로라면 하현은 어젯밤 10시에 항성과 도성을 떠났어야 했다.하지만 하현은 노부인의 명령을 듣고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먹고 자고 한 것이다.이미 노부인이 명령한 출국 시간은 10시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항성 전체가 침묵을 가득 집어삼킨 도시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모든 사람들이 마치 태풍 전야를 맞이하는 심정으로 하현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이 상황에서 의문이 들었다.“큰일을 앞두고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다니, 참.”하현의 말에 하수진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항도 하 씨 가문의 가훈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에 반해 당신은 아주 잘 하고 있어.”“아버지의 성품이 그러셔. 아버지도 당신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당신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걱정해야 해?”“그리고 내가 보기엔 하늘이 무너져도 당신은 솟아날 사람이야!”“내 말이 맞지?”“그런 이유로 당신을 데리고 나온 것이도 하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