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은 손을 닦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넷째 공주님, 비즈니스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장사도 이렇게 말을 꺼내는 법은 없지요.”“풀어주고 말고 하기 전에 이걸윤의 생사부터 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잊지 마세요. 카지노에서 한 서약서. 현재 그의 목숨은 나한테 달려 있습니다. 그는 나의 개나 마찬가지인 셈이죠. 내가 물라고 하면 물고 짖으라면 짖어야 하는 개 말이죠.”“그가 살아남길 바란다면 간단해요. 당신 부하들을 데리고 하구천을 죽이러 가는 겁니다.”“하구천은 죽고 이걸윤은 사는 거죠. 이 거래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니 취소할 뜻이 전혀 없습니다.”넷째 공주는 심호흡을 한 뒤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하현, 당신이 항성과 도성 귀족들을 도발해서 우리 노국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 잘 알고 있어.”“노국이 다시는 항성과 도성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거잖아, 안 그래?”“이걸윤에게 하구천을 죽이라고 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지.”“하지만 나도 한 가지 일러둘 게 있어. 당신은 날 혼혈 공주라고 치켜세우는데 말이야.”“난 일개 공주일 뿐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노국 황실을 대변할 수 있겠어?”“나와 항도 하 씨 가문이 사이가 틀어진다고 해도 노국과 항도 하 씨 가문이 틀어지는 건 아니야.”“노국과 두 도시 사이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당신이 단칼로 베어버린다고 해서 베어질 수 있는 게 아니야.”“게다가 지금 내 손에 쥔 능력으로는 하구천을 죽일 수 없어.”“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 혼자서는 안 되는 일이야. 항도 하 씨 내부에 조력자가 없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그러니 하현, 당신의 음모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당신이 작위를 원하든, 돈을 원하든, 영주권을 원하든 이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당신네 대하인들은 다 그런 거 아니야?”“미국의 영주권 한 장을 위해 조상을 등지고 나라를 팔아 영예를 추구하잖아.”“난 지금 당신한테 노국의 영
”하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넷째 공주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방금 말했잖아?”“첫째, 하구천을 죽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둘째, 내가 가진 역량으론 하구천을 죽일 수가 없어!”“다른 조건을 제시해 봐!”“너무 지나친 조건이 아니라면 내가 만족시킬 수 있을 거야!”넷째 공주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난 당신이 거의 불가능한 일을 원해도 다 들어줄 수 있어!”넷째 공주는 진심을 보여주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합니다.”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다른 조건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하구천을 죽이는 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당신이 아니라 내가 판단합니다.”“노국과 항도 하 씨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러길 원한다면 당신은 하구천을 죽일 방법을 생각해내야 합니다.”“하구천 하나도 못 죽이면서 어떻게 당신의 진심을 믿으란 말이죠?”“하구천이 죽어야만 당신의 진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정말 나와 화해를 하고자 하는 성의가 있다면 말이죠.”하현에게 있어서 하구천은 확실히 다루기 힘든 사람이다.하구천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수진을 상석에 앉힌다는 전제하에 건드리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것이다.하지만 만약 하구천을 건드린 사람이 노국의 넷째 공주라면 상황이 달라지고 하현은 그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넷째 공주가 실제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기회주의자들인 항성과 도성의 귀족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노국 황실의 눈에 그들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바둑돌 같은 존재들이다.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항성과 도성의 전반적인 상황을 안정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하현이 보기에는 넷째 공주가 하구천을 죽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실용적인 대국이다.넷째 공주가 보기에 하현의 모든 행동은 복수를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이것이 지금
”손님들 배웅해 드려!”보이차를 한 주전자 더 우려낸 후 하현은 넷째 공주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하 씨!”넷째 공주는 이를 악물었다.뭐라고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보이차를 하현의 얼굴에 뿌리고 싶었지만 결국 그 충동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그녀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한동안 하현을 노려보던 넷째 공주는 결국 그대로 돌아섰다.몇 분 뒤 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끔찍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멋지고 유려한 남자 비서가 샴페인 한 잔을 공손히 건네며 말했다.“넷째 공주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넷째 공주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원탁의 기사들!”원탁의 기사란 성전 기사단 내에서 선발된 정예부대였다.말하자면 성전 기사단의 특전사이며 병왕 중의 병왕이었다.넷째 공주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원탁의 기사를 대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녀의 부름을 듣고 잘생긴 남자 비서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넷째 공주의 마음에 전력을 다할 결심이 선 것 같았다....넷째 공주의 럭셔리한 차량 행렬이 떠나는 순간 하현은 응접실 발코니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해안선을 바라보았다.잠시 후 도도하고 차가운 그림지가 아름다운 형체를 뽐내며 다가왔다.하수진.그녀는 방금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었다.옷은 그녀의 차가운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날씬한 그녀의 라인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보통 남자들은 이런 아리따운 여자 앞에서 이성을 붙잡아 놓기 어렵다.그러나 하현은 몇 번 훑어보고는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에 눈길을 돌렸다.하수진은 이 모습을 보고 눈을 흘겼다.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이런 그의 모습을 봤다면 심장이 목석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넷째 공주가 떠난 후 당
하수진은 하현의 말뜻을 알아듣고 빙긋이 웃었다.“그렇다면 내 쪽에서 방비를 더 강화해야 할까?”“만에 하나 넷째 공주가 사람을 구해 낸다고 한다면 하구천과 손잡고 우릴 죽이려 들 테니까.”“괜찮아.”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넷째 공주가 가진 힘의 한계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녀가 결국 동원할 수 있는 건 대하계의 힘뿐이야.”“성전 기사단, 원탁의 기사들을 모두 데려온다고 해도 내 앞에서 사람을 구해 내진 못할 거야.”하수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만약 사람을 구할 방법이 없다면 그녀는 몇 명을 인질로 붙잡아 당신과 협상을 하려 할지도 몰라.”하수진의 말에 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말은 할 필요도 없어. 항도 하 씨 정예 부대가 여기 있는데 누가 당신을 건드리겠어?”“동리아는 도성 정부에서 비호하고 있는 인물이야...”“최영하에겐 용전 항도 지부가 있고...”“강옥연에겐 용문 항도 지회가 있어...”“화소혜 뒤엔 화 씨 집안에 버티고 있고...”“넷째 공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사람들을 죽이지는 못할 거야.”“그렇게 쉽게 납치될 사람들이었다면 아마 몇 명은 벌써 함정에 빠지고도 남았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겠어?”하현은 단호한 표정이었다.이미 이걸윤과 맞서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현재 항성과 도성에서 그를 뒷받침해 주는 세력의 힘은 강철처럼 막강했다.넷째 공주가 이 강철을 뚫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하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항성에서 손을 쓸 수 없다면 강남과 대구도 있어.”하현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강남에는 당인준이 있어!”“대구에는 당천도가 있고.”“게다가 대하는 우리 땅이야. 그녀가 부리는 개와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 대하 경내에 버려졌어. 그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나 마찬가지야.”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니 지금 넷째 공주의 신세가 참 난처하기 짝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하현을 보고 하수진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이걸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하현은 한 걸음, 아니 두어 걸음 앞서서 진을 치고 이걸윤 일행이 쳐들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이제 하수진은 자신도 모르게 넷째 공주가 어떤 선택을 할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제발 그녀가 하구천을 죽이러 가길 바랄 뿐이다.그렇지 않으면 넷째 공주가 무엇을 선택하든 하현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참, 우리 넷째 공주님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아.”하현이 화제를 바꾸며 USB를 꺼내 하수진 앞에 놓았다.“이 USB에 담긴 자료가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딱 필요할 때 런셀일보 기자한테서 나왔으면 좋겠어.”하수진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의아해했다.“이건...”“별 거 아니고 넷째 공주가 무릎을 꿇는 영상이야.”“물론 내 얼굴은 편집했지.”“만약 콧대 높은 노국 황실에서 노국의 넷째 공주가 극동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넷째 공주라는 자리가 온전히 그녀를 위해 존재할까?”하수진은 입을 쩍 벌리며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현은 도대체 몇 수를 앞에 보고 일을 진행한 걸까?넷째 공주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정말로 처참한 꼴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하현이 넷째 공주의 뒷일을 도모하던 그 시각.태평산 중턱에 있는 건물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넷째 공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검은색 봉투를 열었다.그 안에는 주소와 이름이 있었다.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그녀는 곁에 있던 남자 비서에게 봉투를 건네주며 말했다.“원탁의 기사에게 이걸 전해줘.”“빨리 대구에 다녀오라고 일러.”“살아 있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죽었다면 시체를 보게 되겠지.”...환한 햇살이 비치는 도시, 대구.대하의 10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대구 정 씨 가문은 나가주에 위치해 있었고 지금 사무실에서는 비즈
용천오는 맞은편에 앉은 설은아를 실눈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난 당신이 제안한 사항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습니다.”“하지만 난 양측의 수익이 바뀌어야 한다고 봐요. 에를 들어 내가 7에 당신이 3이라든지...”“물론 나도 잘 알아요. 그렇게 된다면...”“우리의 합작 사업이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걸요.”“이틀 정도 시간이 있다면 나와 함께 무성에 잠시 다녀오시는 건 어떠세요?”“무성에서 우리 용 씨 집안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보시면 좋을 듯한데요.”“그렇게 된다면 우리 용 씨 가문과 합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도 알게 되실 거구요.”“심지어 용 씨 가문이라는 큰 나무에 기댄다면 대구 정 씨 가문에서의 당신 지위는 더없이 안정될 거예요.”“어찌 되었든 대구 정 씨 가문은 대하의 10대 가문 중 거의 꼴찌나 다름없고 우리 용 씨 가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요.”“물론 당신이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면 우리도 양보할 수 있죠.”“이 세상에서 결혼보다 더 단단하고 온당한 협력 방식은 없으니까요...”“나 용천오, 설은아 당신을 향한 마음은 진심입니다.”“당신도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이 오랜 세월 동안 함께 하고 싶은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었어요...”용천오의 말에 설은아의 곁에 있던 여비서와 여보좌관은 감격에 겨운 눈빛을 보였다.이것이 바로 전설로만 듣던 박력남의 모습인가!듣자 하니 용천오가 대구 정 씨 가문과 새로 발견한 금광 채굴권을 합작하게 된 것도 대구에 와서 우연히 설은아를 만나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안타깝게도 설은아는 줄곧 그에게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용천오는 이런 합작건을 만들게 된 것이다.심지어 정 씨 가문 내부에서는 설은아가 계약한 몇 건의 사업도 뒤에서 다 용천오가 힘을 썼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정 씨 가문 상석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설은아가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가문을 장악할 수 있
설은아는 천천히 계약서를 작성한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지만 얘기가 진전되기 전에는 어떤 시찰도 무의미하다고 봅니다.”용천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비즈니스 합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럼 사적으로 기분 전환한다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참, 내가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군요. 최여사님을 무성에 초대했더니 아주 흔쾌히 수락해 주셨습니다...”“최여사님이 오실 때 같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어쨌든 어머니 혼자 먼 길 보내시게 할 순 없잖습니까!”설은아의 매끈한 이마 위에 검은 실가닥이 언짢은 듯 떠올랐다.설은아는 용천오의 부지런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해야 할지 머리가 아파왔다.한편 도성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그녀와 하현은 보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그리고 또 한편으로 최희정은 하현과의 이혼을 완전히 정리하라고 그녀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설은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용천오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좋아요, 설은아 씨. 오늘은 더 이상 당신을 방해하지 않을게요!”“무성에 갈지 말지는 나중에 알려줘요. 답장 기다릴게요!”“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하지만 당신이 답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 사이의 공적인 합작은 계속되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없어요.”용천오는 말을 마치고서야 돌아섰다.꼿꼿한 체구에 잘생긴 얼굴, 최고 명문가 특유의 기품 넘치는 모습에 뭇여성들의 마음이 절로 녹아들었다.떠나는 용천오의 뒷모습을 보며 설은아는 계약서에 시선을 떨구었다.왠지 허한 마음 바닥에서 그네를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대구 정 씨 가문은 그녀가 이 계약을 따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금광 개발 사업에 발을 담근다는 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는 일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용천오의 자신만만한 태도와 저돌적인 모습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오후 4시, 남아 있던 일을 처리하고 난 후 설은아는 사
설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엄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돈은 정 씨 가문 돈이지 내 돈이 아니야.”“난 몇 억밖에 없어요. 전부 엄마한테 줬잖아.”최희정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난 그런 거 몰라. 잘 들어. 나한테 매달 몇 십억씩 주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을 거야!”“날 피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 마. 내가 기분이 좋아서 요즘 너한테 따지지 않았을 뿐이야.”최희정은 말을 마치며 들고 있던 에르메스 가방을 꺼내 보이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보였다.에르메스 가방은 몇 억을 줘야 겨우 살 수 있는 가방인데 최희정이 갖고 있어서 설은아도 놀랐다.“엄마, 이 가방 어디서 났어?”“어디서? 당연히 내가 직접 샀지!”최희정은 설은아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내가 산 게 아니면 뭐 네가 사 줬겠니?”“이런 불효녀 같으니라고!”“똑똑히 들어. 만약 용천오가 아니었다면...”호기롭게 말을 늘어놓던 최희정이 갑자기 뚝 말문을 닫았다.자신이 실언한 것을 깨닫고 얼른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최희정은 설은아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설은아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분명 용천오가 최희정에게 당부한 것이 틀림없다.“용천오가 준 거야?”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고 최희정을 흘겨보며 말했다.“엄마,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잖아!”“나와 용천오는 지금 함께 비즈니스를 도모하는 단계일 뿐이야. 엄마가 그 사람이랑 만나서 이런 물건을 받는 건 보기 좋지 않아.”“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비즈니스상 굉장히 곤란해져.”“가방 이리 줘. 비서한테 돌려주라고 해야겠어.”“다른 물건이 혹시 또 있으면 그것도 줘. 내가 같이 되돌려줄 테니까.”“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사 줄게.”최희정은 손에 든 에르메스 가방을 얼른 뒤로 숨기며 설은아를 노려보았다.“설은아! 정말 너 너무해!”“나와 용천오가 친한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 사람이 준 물건을 내가 왜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