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돈은 빙긋 웃으며 진소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진소흔, 당신 역시 인물은 인물이야.”“당신 같은 사람은 딴따라가 아니라 이 소주의 핵심 측근으로 들어가 진정한 여전사가 되어야 해!”“바다에 뛰어드는 시늉이라니, 난 생각지도 못했어.”“그런데 당신은 그런 방법을 생각해낸 거지!”“좋은 방법이야! 최고 인플루언서가 항도 하 씨 가문의 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지 못해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는 뉴스가 나오면 아주 인터넷이 난리가 날 거야.”진소흔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선생님, 그럼 우리 어느 정도까지 연기하면 될까요? 어디서 뛰어드는 게 가장 효과적일까요?”“개인적으론 빅토리아 항구가 좋을 것 같은데요.”“관광객도 많아서 제가 뛰어내리면 금세 SNS에도 퍼질 거구요.”“그때 선생님이 관광객인 척 지나가다가 나를 구해주고 난 울며불며 서럽게 하소연을 하는 거예요. 정말 완벽하지 않아요?!”이영돈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크게 웃다가 손을 뻗어 손가락을 튕겼다.“진소흔, 당신의 계획은 완벽하지만 좀 더 완벽해야 해.”“예를 들어 아무도 구조하지 않는다든가...”“뛰어내린 당신의 생사는 그냥 운명에 달렸고 부귀영화는 하늘에 달린 거지.”진소흔은 갑자기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멍한 눈동자로 이영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러면 내가 죽잖아요.”“죽으면 좋지. 당신이 죽어야 불타오르는 데 확실히 기름을 부을 수가 있지.”이영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어느 군주 아래서든 신하들의 희생은 필요한 거야.”“이 소주를 위해 희생한 것이니 당신한테는 행운이나 마찬가지야, 안 그래?”“결국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를 위해 용서해야 해...”진소흔은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좀 더 확실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이영돈은 나른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떠난 후 당신은
저녁 6시.화려한 존재감을 뽐내며 저마다 불을 밝히는 시간.항성 빅토리아 항의 야경은 저승길 가는 저승사자도 홀릴 만큼 매혹적이었다.화려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진소흔은 동영상을 무사히 찍고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멍한 표정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등대로 향했다.자칫 고결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마저 풍기는 것은 그녀의 화려한 의상 때문일 것이다.그녀를 알아본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촬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스쳐 지나갈 찰나의 순간들을 카메라에 저장하기 바빴다.6시 15분이 지날 무렵, 의아해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진소흔은 빅토리아 항에서 가장 높은 등대 꼭대기에 올랐다.그녀는 전망대 가장자리에 서서 두 손으로 난간을 잡고 있었다.바닷바람은 놀랍도록 시렸고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그녀의 뺨에 촉촉하고 짭짭한 바다 내음을 실어 날랐다.진소흔의 그림 같은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고 그녀의 화려한 웨딩드레스는 밤하늘에 달무리처럼 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그제야 사람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등대 꼭대기에 서 있는 진소흔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하지만 진소흔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등대에서 아래로 몸을 날렸다.그러나 그녀가 몸을 날리던 순간 전망대 기둥에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 그녀를 잡아당겨 안쪽으로 사정없이 던졌다.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소흔은 땅바닥에 세게 부딪혔다.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버둥거리고 일어서 바다로 뛰어들려고 했다.바로 그때 하현은 냉엄한 표정으로 걸어 나와 진소흔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진소흔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다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아!”진소흔은 바닥에 주저앉았고 마침내 희미하게 정신을 차렸다.어두컴컴하고 좁은 공간이 흐릿한 기억을 뚫고 시야에 들어왔다.누군가가 뺨을 때렸고 진소흔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쑤셨다.“개자식!”진소흔은 맞은편
진소흔의 얼굴에 의아해하는 표정이 떠오르자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뭔가 생각이 났어?”“생각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내가 힌트가 될 만한 걸 말해 줄게.”“빅토리아 항 광장에 있다가 삼계호텔로 돌아갔는데 당신은 거기서 이영돈을 만났어.”“그리고 당신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어.”“마지막에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여기까지 와서 뛰어내리려고 했어.”“못 믿겠다면 당신 핸드폰을 봐.”진소흔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열었다.실제로 동영상이 찍혀 있었다.그러나 진소흔은 아무리 봐도 동영상 속의 사람이 자기 같지 않았다.“당신과 이영돈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그의 연극에서 당신은 그냥 죽는 척하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을 거야.”“당신이 정말로 죽어야만 그의 연극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거지.”“하수진을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대상으로 만들어서 항도 하 씨 가문의 핵심에서 내려오게 한 뒤 어쩔 수 없이 이걸윤이라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려는 수작이지.”“왜냐하면 당신이 죽으면 경찰들이 조사를 할 것이고 당신의 죽음이 하수진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여론은 절대적으로 하수진을 향하고 있을 테니까.”“그들은 상황을 이용해 항성 경찰서장과 심지어 정의를 수호하는 항성 총독까지도 내쫓을 수도 있어.”“간단히 말해서 당신의 죽음은 이영돈의 손에 예리한 칼이 될 거란 얘기야.”“불난 집에 부채질도 하고 말이야. 완전히 일석이조인 거지!”“대단해! 정말 대단해!”순간 하현은 감탄을 가장해 비아냥거렸다.이런 비열하고 파렴치한 짓을, 사람의 생명을 장기판의 말처럼 쓰는 이런 짓을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가 있는가!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목숨쯤은 언제든 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다.하현은 하루 종일 진소흔을 따라다니며 시간을 허비했지만 사건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진소흔은 죽고 하수진은
진소흔은 이영돈과 나눴던 말들을 곰곰이 떠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하현이 오늘 제때 그녀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녀는 이미 송장으로 발견되어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을 것이다.그러나 오후 내내 이영돈과 접촉했던 과정을 떠올리며 자신이 무심코 투신 얘기를 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진소흔은 이영돈이 자신을 죽게 할 의도로 그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아냐, 그럴 리가 없어...”진소흔은 창백한 얼굴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이 선생님이 어떻게 날 죽게 할 수가 있겠어?”“설령 그가 나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난 그에게 있어 쓸 만한 카드야!”“난 그가 같은 편으로 묶고 싶은 사람한테 살랑거리며 다가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그가 날 왜 죽이겠어? 날 죽인다고 뭐 좋은 게 있다고!”“게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하수진에게 누명을 씌우자는 얘기는 내가 먼저 얘기했어!”“내가 얘기하지 않았다면 이 선생님은 그런 생각을 아예 못했을 거야.”“그래서 난 당신 말을 믿을 수가 없어!”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진소흔 앞에 꺼내놓았다.“오후에 당신 방에 틀어져 있던 영화야. 제목은 ”“방에 들어갔을 때 마침 여주인공이 바다에 뛰어내리는 장면을 봤을 거야, 그렇지?”“그걸 보고 당신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하수진을 함정에 빠뜨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이게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당신도 식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잖아. 주변의 환경과 암시가 당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쯤은 알고 있잖아...”“당신이 감정이 격해져서 빨리 이영돈에게 뭔가 보여주려 했을 때 마침 이 대목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바다에 뛰어들겠다는 말을 하게 된 거야...”“그리고 이영돈의 능력으로. 성전 기사단이라는 간판으로 당신에게 일종의 심리적 암시를 준 거야. 당신이 깊은 바다에 뛰어들어 정말로 죽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 거지...”“그는 당
”단물 빠진 껌이야. 토사구팽이라고...”하현은 그간의 일을 말하며 탄식하듯 내뱉었다.“이영돈은 정말 대단해. 어쩐지 도박왕 화풍성마저도 그에게 당해 나한테 도움을 손길을 펼치더라니.”하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만 진소흔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저항하고 있었다.“아니야. 난 당신 말 못 믿어!”“이 선생님은 날 죽이지 않았어. 그럴 리가 없어. 영상을 찍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던 건 내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 몽유병에 걸려서 그런 거라구!”이영돈은 그녀에게 영주권을 준 남자나 마찬가지였다.그녀의 가장 큰 물주이자 후원자였다.그녀는 자신의 부귀영화와 미래에 딸려올 고귀함이 모두 이 남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이제 그녀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졌고 이 남자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진소흔의 성격으로 볼 때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일임에 틀림없었다.“몽유병?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하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진소흔, 눈 똑바로 뜨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당신의 능력은 정말 경이로워. 인정! 인정!”“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려는 의도 아니야?”“그가 가벼운 최면술로 당신한테 심리적 암시를 준 거, 당신 정말 눈치 못 챘어?”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만약 당신이 믿지 못하겠다면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당신을 보고 그가 놀라는지 안 놀라는지 시험해 보면 알 거 아니야.”“물론 갑자기 나타난 당신을 그가 죽일지도 몰라. 그건 꼭 염두에 둬.”“그리고 내가 당신을 구한 것은 당신한테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살아있는 것이 나한테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하지만 이영돈이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믿지 않는 한 뭐 내가 아무리 말해 봐야 소용없지.”“당신 알아서 해.”하현은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진소흔의 얼굴을 가볍게 툭툭 건드린 후 명함을 남겼다.“난 이영돈이랑 달라.”“난 책임감 있는 남자거든!”“적
삼십 분 후 삼계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하현은 지금 이곳에 살지 않지만 보안은 여전히 매우 좋았다.진소흔과 방금 이 호텔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의 호위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꼭대기 층에 있는 공중 정원에서 하현은 보이차를 우려내었다.따뜻하고 깔끔한 뒷맛이 일품이었다.그는 진소흔이 온몸을 벌벌 떨며 맞은편에 앉자 직접 차를 따라 그녀에게 주었다.“자, 대스타님, 보이차 한 잔 하시고 진정하시죠.”“올해 막 올라온 거야. 한 근에 몇 천만에 육박하는 귀한 차야.”진소흔은 차를 마실 기분이 영 아니었지만 하현이 건네주자 마지못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이 모습을 본 하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눈앞에 있는 좋은 차를 음미하지 못하는 진소흔이 안타까웠던 것이다.진소흔은 정상급 인플루언서인 만큼 매너를 아주 중시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슴처럼 주변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하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시며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십여 분 동안 벌벌 떨던 진소흔은 마침내 좀 진정이 되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하현, 난 죽고 싶지 않아.”“날 구해줄 수 있어?”“당신 정말 날 구해줄 수 있긴 한 거야?”“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아?!”“노국의 남작이자 성전 기사단 부단장인 이걸윤 휘하에 있는 맹장이야, 맹장!”“아무렇게나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구!”“당신을 믿게 하려면 나한테 당신 능력을 보여줘야 해!”하현이 그녀를 보호할 하등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녀는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을 태세였다.“나 하현이야. 내 앞에서 그런 신분 따위 아무 의미 없어. 난 용문 집법당 당주야. 이거면 충분하겠지.”“항성과 도성에서 용전 항도 지부와 용문 항도 지회 모두 내가 통제하고
진소흔은 별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하현이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낸 뒤 자신이 해피톡 플랫폼에서 차단된 일을 떠올렸다.지금 그들은 삼계호텔 가장 꼭대기 층에 있었고 이곳은 왕족이나 귀족들이나 묵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이 사실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하현이 보여준 능력은 진소흔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이미 보여준 것이었다.어찌 되었건 용전 항도 지부와 용문 항도 지회를 모두 아우르는 인물이라면 항성과 도성에선 거의 따를 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항성의 최고지도자와 도성의 최고지도자가 모두 하현과 막역한 사이라니!생각에 이에 이르자 진소흔의 가슴이 뛰었다.하현의 품에 안겨 그의 신임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의 말 한마디로 다시 대하 연예계 정상을 탈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진소흔은 얼굴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하현, 내 성의를 보여주려면 뭘 해야 해?”“그건 당신한테 달렸지.”하현은 웃으며 찻잔을 쥐었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잖아.”“내 몸?”진소흔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나같이 속물적이고 닳고 닳은 여자는 하현 당신 눈에 안 찰 텐데, 안 그래?”“아, 물론 당신이 관심이 있다면 나야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있지.”하현은 쓰잘데기 없는 말에 대답하기도 귀찮은 듯 심드렁한 기색을 보였다.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진소흔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의 필살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조금은 불쾌한 듯 긴 다리를 움츠린 진소흔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이걸윤에 대해 알고 싶은 거야?”“미안하지만 내가 그의 덕을 보자고 밑에 있었던 건 맞지만 핵심 측근이 아니어서 이 소주에 대해 아는 게 없어.”“그것도 아니면 SNS에 하수진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거라도 올리란 말이야?”“그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 가지고 몸을 던진다고 할 수 있겠어?”“어쨌거나 내가 당신한테 빚을 지
하현은 싱긋 웃으며 손에 든 보이차를 한 모금 마셨다.자신의 설득이 별 효과가 없자 진소흔은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하현, 당신들은 아랫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독을 쓴다는 걸 알고 있어.”“내가 별 가치가 없다 생각되면 날 독살해. 그러면 내가 배신할까 봐 두려운 일은 없을 거 아니야.”“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이제 어딜 갈 수도 없어. 당신 보호 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당장 차에 치여 죽을 거야!”“하현, 내가 몸을 던지고 진심을 보여주기 싫다는 게 아니라 뭘 대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선 독약 같은 거, 나한테 없어. 설령 내가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게 당신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는데 내가 왜 독약을 낭비하겠어?”“그리고 사람은 변하기 쉬워. 나라를 배신하고 부귀영화를 좇는 당신 같은 사람은 더욱 변덕스럽지.”“난 당신한테 약점 잡힌 것도 없고 진심이 담긴 성의도 보이지 않는데 내가 왜 당신을 보호해야 해?”“단순히 이영돈을 미워해서?”“그럴 필요가 있을까?”“그러니까 당신이 내놓을 것도 없고 성의도 보이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가도 된다는 말이야.”“잘 가. 배웅은 생략할게.”하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마쳤다.이걸윤 밑에 있었던 여자를 어떻게 유용하게 써먹을지 아무 생각도 없이 상대했겠는가?하현이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여자는 그동안 적어도 세 자릿수에 달하는 노국의 귀족과 재벌들을 상대했다고 했다.그녀의 체력에 탄복해 마지않으며 하현은 다른 사람에게 모질고 자신에겐 더 모진 진소흔에게 분명 특별한 한 수가 있다고 믿었다.지금까지 미친 척 바보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가진 패를 다 까놓고 말하면 상대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결국 그녀가 정말로 이걸윤 일행을 하현에게 판다면 그와 함께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그래서 하현은 가련한 척하는 이 여자의 표정에 속지 않았다.어찌 되었건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
여수혁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하현, 나 여수혁이야! 페낭 무맹 무맹주의 여 씨 가문 사람이라구!”“내 스승님은 남양 무맹 맹주야!”“나한테 당신 같은 사람은 목숨도 아니야!”“당신 지금 이런 행동한 거,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땅바닥에 널브러진 여수혁은 힘겨운 얼굴로 남은 힘을 끌어모아 내뱉었다.“퍽!”“저리 꺼져!”하현은 여수혁을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그러자 여수혁은 벽에 몸을 부딪혔고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 핏물이 솟구치더니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배후에 누가 있든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어.”하현은 앞으로 나가 손을 뻗어 여음채의 창백한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당신한테 기회를 주겠어. 잠시 문을 닫고 정리하면서 잘 생각해 봐.”“다음에도 또 이런 일로 사기를 치고 있다는 얘기가 내 귀에 들어오면 정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땐 인정사정없이 완전히 풍비박산을 만들어 버릴 테니까!”...궁지에 빠진 여음채와 여수혁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하현은 길을 막고 있는 페낭 무맹 제자들을 발로 걷어차고 원가령을 부축하며 양유훤의 차에 올라탔다.양유훤은 사람들을 양 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데려갔고 원가령을 응급실 침대에 눕힌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현, 오늘 밤 가령이 일로 귀찮게 해서 미안해.”“어떻게 된 건지 들어서 잘 알고 있어.”“당신이 없었다면 오늘 밤 가령이는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하현이 병원 대기실 소파에 앉자 하이힐을 신은 양유훤이 그에게 다가와 생수 한 병을 건넸다.“당연한 일을 한 걸 가지고 뭐. 마침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하고 난 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지만 오늘 밤 원가령의 일은 아마 십중팔구 당신을 노리고 한 짓일 거야.”“조심하는 게 좋아.”양유훤도 의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나 때문에 온 게 분명해.”“이번에 내가 천억 대금을 순조롭게 회수해서 적자에 허덕이
”퍽!”여수혁은 무맹 사람이고 남양 무맹의 맹주에게서 수련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페낭 무맹 맹주였다.뼈대 있는 집안 자손이었고 천부적인 재능을 겸비했다.그래서 그가 하현과의 거리가 좁힌 지금 한 번에 몸을 날리자 무서운 기세가 펼쳐졌다.방금 양유훤 앞에서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여수혁은 하현에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의 계산대로라면 지금 이 주먹으로 하현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대하 촌놈! 죽어!”여수혁은 섬뜩한 미소로 쏜살같이 덤벼들었다.이런 벼락같은 기세라면 소 한 마리도 때려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 광경을 보고 여음채와 부일민은 눈이 번쩍 뜨였다.여수혁의 대담한 기세에 깜짝 놀란 것이다.“양유훤, 봤지?!”“이게 당신이 선택해야 할 남자의 모습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양 씨 가문 데릴사위가 되지!”“입으로만 떠드는 남자가 무슨 소용있어?”“여수혁 같은 고수를 만나면 바로 무릎을 꿇을 거야!”부일민과 예쁘장한 간호사들은 모두 비아냥거리는 기색을 띠며 하현을 주제넘은 사람이라고 비꼬았다.주변 구경꾼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왜 여수혁을 감히 도발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장내에 오직 양유훤과 하구봉만이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그들은 모두 하현의 실력을 본 적이 있었다.만약 여수혁 같은 사람 한 명도 수습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하현은 헛수고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퍽퍽퍽퍽!”여수형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온몸을 덜덜 떨며 비명을 질렀다.동시에 하현은 그의 두 손을 짓밟아 부러뜨렸다.“이럴 수가?!”여음채와 부일민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여수혁 주변에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 그리고 소위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도 지금은 눈가
그러자 여수혁의 옆에 있던 여음채가 얼굴을 가리고 노기를 띠며 말했다.“하 씨! 당신 뭐가 좋은지 나쁜지 몰라?”“양유훤의 체면을 봐서라도 당신과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살길을 마련해 준 거라고!”“좋게 끝났을 때 그만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나중에 얼굴이 찢겨 봐야 아는 거야?”여음채의 마음속에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올랐다.하현은 계속 자신의 뺨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이빨이 부러지도록 만신창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콧대 높은 여음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래서 하현이 도발하며 여수혁을 추궁하는 것을 보고 여음채는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그녀가 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남자가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쉽게 살려는 자들이다.양유훤을 믿고 호랑이처럼 위세를 부릴 뿐만 아니라 아주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라니!여음채의 상식으로 어떻게 하현 같은 사람을 여수혁과 동급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운이 좋아서 양유훤의 치마폭에 싸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하현은 벌써 수십 번은 죽었을 것이다.“좋은 게 좋은 거라고?”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잘난 척 기고만장한 여음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여음채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그렇지 않아? 똑똑히 들어. 양 씨 가문의 호가호위만 믿고 설치는 짓,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당신이 정말로 양유훤의 남자인 줄 알아? 당신이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도 된 줄 알아?”“당신이 정말로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해도 여자 치마폭에 싸인 남자가 얼마나 대단하겠어?”여음채는 엄청 호의를 베풀 듯이 호기롭게 훈계를 했다.“당신이 어떤 속셈이 있고 무슨 실력이 있든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하현은 여음채가 하는 말을 더는 듣기 귀찮아서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자, 닥쳐! 쓸데없는 소린 그만해!”“재잘재잘 너무 시끄럽군!”“뭐?!”여음채는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입에 차가운 재갈을 물리는 것 같은 수치스러움
남양 무맹 사람들이 나섰음에도 양유훤은 전혀 체면을 세워 주지 않자 여수혁의 안색이 일그러졌다.그는 자신이 오늘 하현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하 씨, 오늘은 내가 운이 나빴군. 하지만 아직 기회는 많아!”“능력이 있으면 어디 이 여자가 영원히 당신을 비호하도록 만들어 봐!”“이 여자가 당신을 얼마나 지켜줄 수 있는지 얼마나 당신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지켜보겠어!”그는 하현을 노려보다 냉소를 흘리며 돌아섰다.여음채도 한껏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지었다.외지인 남자가 여자한테 기대서 큰소리치는 꼴이라니!세상은 좁아서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만날 수 있는 법이다.이 남자가 괴로워할 때가 분명 올 것이다!“거기 서!”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하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순간 하현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아우라가 강하게 감돌았다.비록 양유훤이 나서서 자신을 비호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이긴 했지만 하현은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현재 양유훤의 처지를 거의 파악했기 때문에 모든 책임을 양유훤의 어깨에 올려놓을 수 없었다.하현이 한 걸음 내디디며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하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그들은 하현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했다.여수혁 같은 거물이 그를 벌하려는 걸 양유훤이 겨우 구해줬는데 뭘 또 바란단 말인가?죽고 싶어서 환장했나?여수혁은 발걸음을 뚝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하현을 쳐다보았다.“오늘은 운이 나쁜 걸로 친다고 했는데 뭘 또 바라는 거야?”하현은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은 정말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돈을 받고도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았어. 그리고 당신은 권세로 사람들을 자꾸만 괴롭히려고 해.”“날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내 다리를 부러뜨리고 무릎을 꿇게 만들려고 했어.”“이 모든 것에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