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비서는 울면서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마치 엄청난 손해를 입은 사람처럼 서러워했다.하지만 맞은편 상대에게 주소를 알려주고 난 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원래의 표독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두고 봐! 감히 날 때리다니!”“우리 소주가 오시면 당신들은 이제 죽은 목숨이야!”“내 말 잘 들어. 오늘 여기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어!”김 비서는 이시카와 다이치를 등에 업고 으름장을 놓았다.하현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장가연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나섰다.“거기, 오빠! 됐어요. 그만해요! 일이 더 이상 커지면 곤란하니 가만히 있어요!”“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다 잘릴 거라구요!”장가연은 이시카와 측이 부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항성과 도성 전역에서 ‘하 소주'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항도 하 씨 가문 사람밖에 없다는 걸 눈치챘다.항도 하 씨 가문 사람들이 온다면 분명 자신은 물론 하현도 끝장날 것이며 하수진조차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어찌 되었건 그녀도 항성 사람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파워가 있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이때 하수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다가와 맞은편 이시카와 다이치 일행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장가연은 하수진이 회사 고위층일 거라는 건 눈치챘지만 구체적인 신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사장님, 오늘 이 일은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원래 섬나라 사람들을 접객하는 것이 내 일인데 오늘 이렇게 되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회사에서 내리는 지침대로 따르겠습니다...”하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 없을 테니까.”“접객 업무를 맡은 건 맞지만 막무가내인 손님을 만나면 그렇게 하는 게 맞아요.”장가연을 비롯해 주변의 다른 여직원들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그녀들은 모두 하현이 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하, 정
하은수가 나타난 것을 보고 장가연은 얼굴색이 변했다.하은수는 때때로 연예주간지나 재경일보에 가끔 얼굴이 실리는 인물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 고위층들 중 장가연이 얼굴을 아는 몇몇 중의 하나였다.이시카와 다이치의 비서가 건 전화 한 통에 하은수 같은 거물급 인사가 나타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김 비서는 하은수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얼른 달려와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서 와서 내 얼굴 좀 보세요. 방금 맞아서 벌겋게 부어서 말도 아니라구요!”“항도 재단 사람들은 완전히 선을 넘었어요. 저들은 반드시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해요!”김 비서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데 열을 올렸다.하은수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항도 재단 사람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정말 대단들 하시군!”“설마 이시카와 도련님의 일행이 우리 하 소주의 귀빈이란 걸 모르시나?”“당신들은 하 소주의 귀빈들을 때린 거야? 보아하니 이번 일은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안 되겠어!”“누가 손모가지를 함부로 놀린 거야? 스스로 무릎 꿇고 어서 나오지 못해? 어서 이시카와 도련님에게 사과하고 스스로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그렇지 않으면 일은 더 커지게 될 거야!”장가연 등 여직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그때 하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 맞아. 오늘 이 일은 무릎 꿇고 사과하고 게다가 스스로 손목을 부러뜨리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을 거야!”하은수는 익숙한 목소리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누구야?”순간 그는 몸을 휙 돌렸다.하은수의 시선이 하현과 하수진에게 꽂히는 순간 그는 흠칫 놀라더니 눈가에 미친 듯이 경련이 일어났다.하현은 차가운 얼굴로 하은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앞으로 나와 오른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툭툭 건드린 후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은수, 당신이 상황을 점점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어, 알아?”“예전에 좋은 시절에는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죽을 건지 아닌지는 하은수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아직도 허세를 부리는 거야?”김 비서가 냉소를 지으며 나섰다.“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르겠지만 감히 하구천의 이름 앞에서 허세를 부려? 당신 죽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지!”“맞아. 우리 하 소주의 귀빈을 건드렸으니 아무리 저놈이 허세를 부린다고 해도 한주먹거리밖에 안 될 거야!”“한 마디 충고하겠는데 얼른 가서 항도 재단 집행총재인지 뭔지 불러와!”“3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끝이라고 집행총재한테 전해줘!”“입 닥쳐!”이때 하은수가 결국 나섰다.그가 한바탕 고함을 지르자 바로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하은수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은수 도련님, 내가 먼저 저놈을 날려버릴까요? 안 그래도 최근에 손이 근질근질했는데 잘 됐죠 뭐. 내 저놈을 그냥...”“퍽!”하은수는 손바닥을 휘둘러 입을 함부로 놀리는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험한 얼굴로 말했다.“닥치라고 했잖아! 내 말 못 들었어?”“그리고 입만 열면 개자식, 개자식!”“누가 당신한테 하 세자를 함부로 모욕해도 된다고 했어?”“맞아 죽고 싶어? 아님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하은수는 조금도 봐줄 마음이 없는 표정이었다.그때 섬뜩한 소리가 울리더니 이 남자의 다리가 그 자리에서 부러졌다.하은수는 이마에 식은땀을 흠뻑 흘리며 난감한 기색을 한껏 드러낸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당신인지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하 소주의 명령이라 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퍽!”하현은 손바닥을 휘둘러 하은수를 바닥에 넘어뜨리며 냉랭하게 말했다.“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 그리고 한 손을 잘라. 그런 다음 내 눈앞에서 꺼져!”“네, 네. 알겠습니다. 하 세자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하은수는 더는 쓸데없는 말을 보태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이시카와 유키코는 이시카와 가문 직계로서 대구에 있는 섬나라 대사관 대표였다.이시카와 가문의 젊은이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었다.게다가 섬나라 대사관 대표라는 직함은 모든 사람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한 신분이었다.어쨌든 그녀에게 미움을 산 사람은 섬나라에 미움을 사는 꼴이 되는 것이다.자칫하다가는 외교적인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다.그래서 지금 전화를 거는 이시카와 다이치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득의양양한 것이다.그런데 하현은 이시카와 유키코의 이름을 듣자마자 왠지 낯이 익었다.순간 하현의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대구에 있을 때 자신이 그 여자의 뺨을 때린 것이 기억난 것이다.하지만 이시카와 다이치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영영 잊힐 이름이었다.하현은 막을 생각도 없이 덤덤한 표정으로 이시카와 다이치가 상대방의 목소리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전화는 곧 연결되었다.이시카와 다이치가 스피커폰으로 전환하자마자 전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이시카와 다이치는 흠칫 놀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유키코, 나야. 이시카와 다이치. 너한테는 먼 사촌 오빠잖아!”“내가 지금 이시카와 그룹을 대표해 항성에 와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아니 이상한 놈이 자꾸 날 모욕하고 괴롭히려고 하잖아!”“이놈이 우리 이시카와 가문한테 지나가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고 있어!”“어떻게 우리 가문의 체면을 이렇게 짓밟을 수 있냐고!”“유키코, 네가 와서 꼭 이 억울함을 되갚아 줘!”이시카와 다이치는 모든 잘못을 하현에게 뒤집어씌우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하현에게 단단히 죄를 뒤집어씌워야만 이시카와 유키코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일로 한 나라의 대사관 대표를 찾은 일이 되어 버려서 여간 창피해지는 게 아니었다.“이뿐만이 아니라 내 사람들이 이놈한테 뺨을 맞았어!”“이 사람들이 우리 섬나라 사람들을
”하현?!”전화기 맞은편에서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이시카와 유키코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하 지회장?”하현이 짧게 대답했다.“맞아.”전화기 건너편에선 고요함만이 흘렀다.이시카와 유키코가 얼마나 충격을 받은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섬나라 대사관 대표인 그녀는 누구보다 정보에 빨랐다.예를 들어 음류 검객 미야타 신노스케가 항성에서 하현에게 발에 걷어차 죽임을 당한 사실이라든가 신당류 검객 텐푸 쥬시로가 하현에게 쫓겨났다든가 하는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이시카와 유키코는 대구에 있을 때부터 하현을 아주 끔찍스럽게 두려워했다.게다가 이런 소식까지 들으니 하현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던 터였다.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하현을 건드리지 말라고 섬나라 측에 신신당부했던 그녀였다.섬나라 측에서는 아직 하현을 상대할 만한 완벽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이유 없이 하현을 건드리면 더 치명적인 손해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순간 이시카와 유키코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냉랭함과 거만함이 사라지고 비위를 맞추려는 듯 나긋나긋 부드러운 기운이 물씬 풍겼다.“하 지회장님, 죄송합니다. 아랫사람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회장님의 비위를 거슬렀습니다. 이 모든 게 이시카와 가문의 잘못입니다!”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시카와 유키코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가득 묻어났다.이시카와 다이치 일행은 넋이 나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어떻게 이시카와 유키코가 하현에게 고개를 숙이는가?비굴하기까지 한 저 자세는 또 뭔가?하 씨 성을 가진 이놈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하현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이시카와 가문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어쨌든 당신들도 대단해. 대리점 계약에 하는 데 늦게 나타나서는 감 놔라 배 놔라 하다니 말이야!”“왜? 우리 대하 사람들이 겁먹을 줄 알았어?”“오늘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내일 직접 이시카와 가문
이튿날 아침.가든 별장에서 막 잠에서 깬 하현은 항도 재단에서 회의 통지를 받았다.하수진이 그를 데리고 항도 재단 회의실로 왔을 때 회의실 전체가 사람들로 꽉 찬 것을 보았다.어제 만난 임원들 외에 몇 명이 더 나와 있었다.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항도 하 씨 가문 큰아들이자 항도 재단의 회장인 하문성이었다!하구천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전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하문성이 앉아 있는 모습에 하수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문성에게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적개심이 느껴졌다.하지만 하현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며 인사를 했다.“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왜 이렇게 많이들 오신 겁니까? 누구 손목이라도 절단되는 거 구경이라도 하러 오신 건가요?”“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바로 고문으로 온 하현입니다!”하문성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맹효남이 먼저 일어나 기세등등하게 하현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하수진이 집행총재 자리에 앉는 바람에 내가 이시카와 그룹과 맺은 계약이 깨졌어요.”“어제 하현은 마구 생트집을 잡아 날 몰아붙였구요. 내가 일을 잘 못한다며 항도 재단에서 내쫓으려 했어요!”“난 승복하지 않고 재단의 이익을 위해 하현과 내기를 했어요. 하현이 이시카와 그룹과 계약 건에 대해 담판을 짓게 했죠.”“오늘까지 이시카와 그룹과의 계약을 따내면 내가 진 걸로 하기로 약속했어요.”“저도 원래는 재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요.”“하지만 어제 오후 이곳에서 이시카와 다이치를 만난 하현은 제멋대로 오만방자하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이시카와 다이치의 비서를 때렸어요. 결국 빈손으로 이시카와 다이치를 돌려보냈죠.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요. 이시카와 다이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우리 항도 재단이랑 협력하려고 하겠냐고요?”“그 계약 건은 분명 우리 경쟁자에게 돌아갈 거예요!”“그래서 저는 감
”콜록콜록.”오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쓰고 온몸에는 고위층의 기품을 한껏 뿜어내는 하문성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그리고 그는 똑바로 앉아 잠시 눈앞의 자료를 훑어본 후에야 눈을 가늘게 뜨고 하수진을 바라보았다.“수진아, 맹 부장이 방금 말한 것이 모두 사실이냐?”“해명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해 봐.”그는 하현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왜냐하면 이 회의장에서 당장 스포트라이트를 주기에는 하현의 위치가 약간 어정쩡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하문성은 일부러 하수진에게 물은 것이다.“맹 부장이 말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입니다.”하수진은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하현이 그렇게 한 이유를 간과했어요.”“그것은 이시카와 다이치 일행이 우리 지역에서 우리 재단의 직원을 때렸다는 거예요.”“하현이 보기에 그 행동은 분명 부적절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시카와 다이치 일행에게 훈계의 일환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예요.”“이 일은 하현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하현이 이 일에 책임이 있다고 회장님께서 생각하신다면 저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책임지겠습니다.”“어쨌든 그의 말은 저의 말을 대변하는 것이고 그의 행동은 저의 행동을 대변하는 거라고 제가 말했으니까요.”“제가 한 말은 책임져야죠.”하현은 흥미로운 듯 하수진을 쳐다보았다.이 여자에게 이런 박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이때 맹효남이 끼어들었다.“하 총재, 이시카와 도련님 같은 재벌 2세는 원래 제멋대로예요.”“내가 몇 번이나 그에게 뺨을 맞았는데 한 번이라도 뭐라고 했겠습니까? 직원 한둘이 뺨을 좀 맞은 걸 가지고 뭘 그래요? 그들이 나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면 뭐 그 직원들에겐 영광이지요!”“이시카와 도련님이 계약만 해 준다면 내 뺨이 문제겠습니까? 날 밟아버린다고 해도 재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는 문제지요!”“어쨌든 당신도 장사꾼인데 이런 도리도 몰라요?”“이까짓 것 하
”게다가 기분 좀 나쁘고 체면 좀 구겼다고 김 비서의 얼굴을 때려?”“내가 듣기론 그 김 비서가 이시카와 다이치의 최측근이라고 하던데.”“너희들이 김 비서를 때려서 좋은 일이 뭐가 있어?”“이시카와 가문과의 계약을 성사시키는 것이 올해 우리 재단의 가장 주요한 업무야.”“가만히 있으면 재단의 주가는 최소 50%는 오를 수 있는 일이라고.”“하지만 너 때문에 이렇게 중요한 사업이 엎어졌어.”하문성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네가 취임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상당히 실망스럽구나!”“이 일은 내가 직접 넷째를 찾아가 얘기해 봐야겠어.”“아무리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이렇게 사람을 기용해서는 안 되지.”“그러니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넌 어서 사직서를 써. 그러면 더 이상 네 잘못에 대해선 추궁하지 않겠다.”“그리고 네 아비에게 가서 전해라. 앞으로 내가 여기 있는 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항도 재단은 항도 하 씨 가문의 돈줄이다.”“다른 외부인이 손댈 곳이 아니란 말이다!”하수진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하문성이 자신만을 노린 것이라면 그녀도 참을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 보니 하문성은 순전히 하문준을 겨냥하고 있었다.하수진이 불쾌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하현이 한발 앞서 먼저 입을 열었다.“하 회장님 맞으시죠?”“일류 그룹도 아닌 일개 섬나라 그룹과의 계약건 아닙니까?”“섬나라 사람의 뺨을 때린 거잖습니까?”“이게 그렇게 심각할 일입니까?”무덤덤한 하현의 얼굴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당신들이 비즈니스에서 이익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거 잘 압니다.”“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로 하수진을 집행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사소한 일?!”“일개 섬나라 그룹?!”하현의 말에 맹효남은 코웃음을 쳤다.“하 씨. 당신이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당신이 말한 그 일류도 아닌 일개 그
진홍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눈꺼풀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르르 떨렸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자신이 한없이 무시했던 데릴사위가 이렇게 강한 자였다니?!그리고 자신이 의지했었던 남자가 이렇게 나약하게 무릎을 꿇고 얼굴이 부어터지도록 만신창이가 되다니!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복잡한 생각에 머릿속이 혼란스럽던 진홍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그럴 리가 없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일어나!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장천중과 장용호의 태도를 보고 잠자코 있던 하현이 결국 나서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다만 앞으로는 꼭 기억해야 해. 우리가 풍수술을 배우는 것은 겉치레를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허세를 부리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만약 오늘 자신이 마침 이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장용호의 서툰 솜씨에 황보정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장용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꼭 명심할게요! 우리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지금부터 그 말을 꼭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겠습니다!”하현은 무릎을 꿇고 있는 장용호에겐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장천중을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화자결은 확실히 황보정의 체내에 있는 나쁜 기운과 사악한 기운을 없앨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은 될지 모르나 그녀의 두 눈을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작은 배가 안정적으로 항해할 수 있게 하려면 파도도 바람도 잔잔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작은 배의 능력이 충분히 좋아야 멀리 항해할 수 있는 이치와 똑같습니다.”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하현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그래서 화자결은 황보정의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아! 화자결로도 해결 못 하는 건가?”장천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난 하 대사의 방법으로 하면 황보정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순간 장천중의 얼굴엔 제대로 영글지 못한 모자란 손자를 향한 한탄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그 후로도 그는 장용호의 얼굴을 계속 때렸다.어느새 장용호은 피범벅이 된 채 얼굴이 볼썽사납게 부풀어 올랐다.장촌중은 장용호의 멱살을 잡고 바로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무릎을 꿇었다.“대사, 용서해 주게.”“내가 잘못 가르쳤네.”“내가 이놈에게 화자결을 알려줬어!”“배움이 부족한 이놈이 자네 앞에서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용서해 주게.”“제발 한 번만 봐줘!”대사?!황보동이든 장용호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장천중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진홍민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금정 제일 풍수지리사라 불리며 대하 풍수계에서 지위가 상당한 만세당 장천중이 하현을 대사라 칭하며 무릎을 꿇을 줄은!이 소식이 금정 전체에 퍼진다면 아마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이놈아, 잘 들어!”“화자결은 하 대사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주신 거야!”이때 장천중은 손을 들어 또다시 장용호의 얼굴을 내리쳤다.장용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하현은 내 스승일 뿐만 아니라 네 조상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야!”“넌 지금 조상님에게 대드는 하극상을 보인 거야!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거라고! 얼른 용서를 빌어!”장천중은 배움이 모자란 손자가 황보정의 몸을 살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손자가 목숨을 잃을까 봐 얼른 달려온 것이다.역시나 모자란 자신의 손자는 잘난 척 기고만장해서는 도리어 하현에게 비법을 도둑질했다고 뒤집어 씌우고 있었던 것이다.이 광경을 본 장천중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안하무인한 짓을 할 수 있는가?이런 행동을 하면 만세당의 그 수많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거라는 걸 모르
황보정은 온몸이 약간 회복된 듯 보였으나 갑자기 오돌오돌 떨기 시작했다.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용호는 이를 보고 매우 흡족해하며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어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자세를 보였다.“자,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쓰겠습니다.”“화자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거기, 당신은 좀 나가주지. 내가 하는 방법을 몰래 훔쳐볼 생각하지 말고!”“이건 우리 만세당의 독점술이나 마찬가지니까!”“검은 속내를 가진 사람들이 이런 걸 배우면 곤란하지!”말을 마친 뒤 장용호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자세를 보였다.하현이 떠나지 않으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독점술?”하현은 이 말을 듣고 냉소를 흘렸다.“장천중이 알려줬어?”“개자식! 어디서 함부로 내 할아버지 함자를 입에 올리는 거야?”“게다가 우리 독점술을 누가 알려줬건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장용호는 하현과 실랑이를 벌였다.“아무튼 간에 난 당신 같은 나쁜 놈은 보고 싶지 않아!”“여기서 당장 꺼져 주지 않으면 난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야!”옆에 있던 진홍민도 나서서 장용호의 말을 거들었다.“하현, 당신은 그냥 나쁜 사기꾼일 뿐이야!”“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면 장용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거야!”“왜냐하면 당신이 몰래 촬영해서 그 영상을 누구한테 팔지 모르는 일이니까!”“당신 같은 사람이 못 할 짓이 뭐야?”간민효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하현이 손을 가로저으며 그녀를 만류했고 이어 장용호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따가 기운을 풀어주려고 마지막 한 수로 침을 놓을 때 꼭 명심해. 반드시 주사 광물을 찍어야 해.”“풀어진 기운은 몸 안에 유입되어야 해. 공중에 함부로 흩어져서는 안 돼.”“그렇지 않으면 황보정은 숨이 막혀서 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그렇게 되면 당신은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오
장용호는 진홍민의 눈빛을 알아듣고 헛기침을 하며 희미한 미소를 보이다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확실히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요즘 그런 소문이 들리더라고요.”“누군가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이 집복당을 무료로 준다고요, 사실입니까?”황보동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진홍민을 쳐다본 뒤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당신이 내 손녀를 구해 줄 수만 있다면 이 집복당을 가져도 돼.”“게다가 우리 황보 집안을 잇게 되는 거야.”황보동의 말을 듣고 진홍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장용호, 걱정하지 마. 우리 이모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지키는 사람이야!”“그래도 당신이 안심을 못 하겠다면 내가 나서서 보증할게!”“퍽!”황보동은 다른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귀찮아 서가에서 계약서 한 장을 꺼내 장용호 앞에 내던지듯 내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난 이미 계약서까지 다 준비해 두고 있었어.”“누구라도 내 손녀를 구해 낸다면 바로 이 계약서를 가져갈 수 있어.”진홍민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약서를 얼른 낚아채 눈을 반짝이며 살펴보았다.“맞아. 이 계약서는 원본이고 유효해. 양측이 여기 서명만 하면 돼.”“좋아요. 황보대사님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니 저도 모든 걸 다 쏟아 보겠습니다!”“여러분들에게 주역에서 가장 뛰어난 풍수술과 화자결을 보여드리죠!”말을 마치며 장용호는 호탕한 웃음을 보인 뒤 들고 있던 꾸러미에서 은침 한 개와 붉은 주사 광물을 꺼냈다.“우선 황보정의 온몸에 가득 찬 살기를 제거하여 그녀의 몸을 회복시킨 다음 기력을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하현은 장용호의 말을 듣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장용호는 바로 은침을 쥐고 소독한 후 약간의 주사 광물을 묻힌 후 천천히 황보정의 눈썹 위에 찍었다.이를 지켜보던 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시작부터 틀렸어.”장용호는 이 말을 듣고 미간
서류 뭉치에는 하현의 사진과 철인도 완벽하게 찍혀 있었다.진홍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허! 가짜 증명서인 게 틀림없어!”그녀는 냉소를 연발했다.“이모할아버지, 정말로 이 사기꾼을 믿기로 하신 건 아니죠?”“야! 사기 치려고 별짓을 다하는구나!”진홍민의 비아냥거림에 줄곧 입을 열지 않았던 장용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이며 앞으로 나왔다.“황보대사님, 어디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요.”“왜 이런 사기꾼을 믿게 된 거예요? 도저히 모르겠어요.”“전 단지 지금 황보정의 상황은 우리 만세당 말고는 절대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실히 말해 두고 싶어요.”황보동은 자신감 넘치는 장용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이유가 뭔가?”“이유요?”장용호는 팔짱을 진 채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난 주역의 ‘화자결’을 전수받았기 때문이죠.”“세상의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요!”‘화자결’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 황보동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주역?”“그럴 리가 없는데. 주역은 오래전에 전수가 끊겼는데.”“자네 날 속일 셈인가?”황보동이 의아한 눈빛으로 몰아붙이자 장용호는 더욱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는 얼마 전 진정한 고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으셨죠. 쉬쉬하며 음성적으로 전해지던 주역의 ‘화자결’을 몽땅 전수해 받았다고요!”“이걸 전수받은 풍수지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가 있어요!”여기까지 말한 장용호는 세상을 발아래 둔 사람처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었다.“내가 보기엔 황보정은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런 벌을 받은 거예요!”“내가 그녀를 그 업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입니다.”이 말을 듣고 진홍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이모할아버지, 어서 장 대사님을 오라고 하세요!”“그는 명문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주역의 화자결?하현은 이를 듣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