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뭐? 서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그러는 사람이 김 비서의 뺨을 두 대나 때리고 이시카와 도련님을 여기서 내쫓아?!”“그러고 이제 와서 무슨 돈을 어떻게 벌겠다는 거야?”“우리가 약속한 시간이 곧 다가와!”“이따가 이시카와 도련님한테 계약서에 사인해 달라고 애걸복걸이나 하지 마!”“하현이라고 했나?”하문성은 곁눈으로 하현을 힐끔 보면서 손에 든 자료를 뒤적거리며 하현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하현에 대해 소개한 글을 보며 그의 눈은 약간 찡그려졌고 눈동자에는 냉기가 가득했다.“인정, 인정하네. 인물은 인물이군. 요즘 항성과 도성을 떠들썩하게 했으니 유명 인사는 유명 인사군!”“한데 비즈니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당신이 아무리 주먹이 세고 유명 인사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당신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으면 돈 벌 기회가 없어.”“당신의 언행 때문에 우리 재단은 막대한 손해를 봤어. 그러니 당신들은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하문성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냉랭했다.“두 번 말하지 않겠어. 두 사람 모두 체면을 챙기고 그냥 여기서 사직할 텐가? 아니면 내가 당신들을 해고할 때까지 기다릴 텐가?”의심의 여지가 없었다.하문성이 항도 재단에서 하수진을 끌어내리려는 목적은 명확했다.하수진에게 집행총재 자리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하문성은 이 상황이 굉장히 언짢은 듯했다.하수진이 집행총재 자리에 있는 꼴을 더는 지켜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하문성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하수진과 하현을 끌어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하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문성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큰아버지. 제가 재단에 있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으십니까?”“제가 재단에서 집행총재를 하면서 무슨 손해를 그렇게 끼쳤다는 거예요?”하문성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저 냉담하게 하수진의 말에 대답했다.“난
하현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 뒤 입을 열었다.“고작 이시카와 그룹과의 계약이잖아요? 결국 일 년에 몇 천억밖에 안 되는 사업 때문에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싸워야 합니까?”맹효남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작?”“고작 몇 천억밖에 안 되는 사업이라고?”“하 씨, 당신 정말 낯짝 한 번 두껍군!”맹효남은 하현을 마음껏 비웃었다.몇몇 여성 임원들도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맹효남의 비웃음에 동참했다.그들의 눈에는 하현이 천지 분간도 못하는 바보나 다름없어 보였다.“하 씨. 당신 이 계약 건을 몇 천억 밖에라고 했어?”“그렇게 쉽고 편하게 말할 거면 어서 계약서 가져와 봐!”“난 그냥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당신이 계약서는 못 받고 변호사 소장이나 받을까 봐.”“이시카와 도련님이 당신한테 두들겨 맞았는데 그냥 넘어갈 리 만무하잖아.”임원들은 하나같이 하현을 향해 비웃음 섞인 시선을 던졌다.그들의 눈에는 하현이 객기나 부리는 철부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하현은 잠자코 롤렉스 손목시계를 힐끔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곧 열 시예요.”“이시카와 다이치가 계약서를 들고 나타날 때가 되었군.”맹효남은 코웃음을 치다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자신이 바보와 겨루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그는 하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껏 코웃음을 쳤다.“하 씨. 당신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야?”“필요하면 내가 좋은 병원 소개해 줄까?”“아, 걱정은 하지 마. 병원비는 공짜야.”“다시 말하지만 당신 꿈도 꾸지 마!”“어제 김 비서의 얼굴을 때렸어!”“게다가 이시카와 다이치를 내쫓았어!”“그런데 오늘 계약서를 들고 나타나기를 바라는 거야?”“제발 꿈 깨! 꿈 깨라구!”“그리고 당신, 이시카와 다이치의 정체를 알긴 아는 거야?”“그는 이시카와 가문의 직계야.”“그 집안은 체면도 없대?”“그런 사람들이 당신한테 와서 굽신거린다고?”“만약 그가 당신한
곧 이시카와 다이치가 항도 재단에 들이닥쳐 이런저런 요구를 해댈 것이 분명하다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얼굴을 맞은 이시카와 다이치가 이렇게 일찍 항도 재단에 올 수 있단 말인가?떠들썩한 가운데 하문성은 냉정을 되찾고 곧 들이닥칠 이시카와 다이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이시카와 다이치, 어서 오세요!”하문성이 일어나 이시카와 일행을 맞을 준비를 하던 그때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섬나라 사람 여남은 명을 데리고 회의실에 들어섰다.맨 앞에는 섬나라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세련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그녀는 진중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안내에 따라 들어왔다.그녀의 뒤에는 살짝 움츠린 이시카와 다이치가 있었다.이어 뺨을 맞은 김 비서를 비롯해 보좌관, 법무사, 경호원 등이 눈에 띄었다.하현은 사뭇 흥미진진한 시선을 이시카와 유키코에게 던졌다.보자마자 그녀가 대구에서 그에게 밟혔던 이시카와 유키코란 것을 알아차렸다.이번에 이런 우연한 기회로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잊힐 인물이었다.“이시카와 대표님이 이리 오셨는데 멀리 영접도 못 갔습니다.”“항도 하 씨 가문과 항도 재단을 대표해 이렇게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정말 영광입니다!”하문성도 이시카와 유키코를 알아본 모양이었다.그녀가 나타나자 하문성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이시카와 유키코를 맞았다.재단의 또 다른 이사와 여성 임원들도 모두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나누었다.맹효남은 이시카와 유키코를 알지 못했지만 이시카와 유키코의 기세나 하문성의 태도를 보고 바로 보통 인물이 아님을 눈치챘다.이시카와 유키코의 뒤편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한 채 개처럼 벌벌 떨고 있는 이시카와 다이치가 서 있었다.이 여자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히 짐작할 만했다!절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순간 맹효남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그는 자
하문성은 열정이 가득 넘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이시카와 대표님의 일이라면 항도 재단이 능력이 있든 없든 다 해결해 드려야죠.”“항성과 도성에서 제가 해결 못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하!”“아마 우리 항도 재단 사람들이 실수로 이시카와 가문의 심기를 건드렸나 본데 이시카와 대표가 말씀만 하시면 내가 만족할 만한 보답을 드리겠습니다.”하문성은 오늘 이시카와 유키코가 사람들을 동원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어제 일에 대해 단단히 해명을 듣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이시카와 유키코가 대구에서부터 친히 이 먼 길을 올 리가 있겠는가?게다가 이렇게 급하게 오다니!어찌 보면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시하라 유키코 측이 아직까진 예의 바르게 자신을 대하는 것도 다 일리가 있다고 하문성은 생각했다.어찌 되었건 먼저 인사를 나눈 후에 후일을 도모해도 도모해야 하는 것 아닌가?섬나라는 예의가 바른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나더라도 공손히 인사를 한 후에 칼을 뽑는다 하지 않던가!그러니 지금 그들이 예의를 차려 미소를 띠는 것도 정상인 것이다.하문성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맹효남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함박미소로 입을 열었다.“우리 회장님은 항상 공명정대하시죠. 절대 사사로운 정을 위해 법을 어기실 분이 아니거든요.”“이시카와 대표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말을 마치며 맹효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하수진과 하현에게 시선을 던졌다.맹효남의 생각으로는 이제 이시카와 유키코가 나섰으니 하현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제가 볼일이 좀 있어서 오늘 여기 왔어요.”이시카와 유키코의 표정이 엄숙해졌다.“전 오늘 이시카와 가문을 대표해서 사죄하러 왔습니다.”맹효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 사죄하러 왔다고요?”“무릎 꿇어!”이시카와 유키코는 아직 하현을 보진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그녀는 얼굴
하문성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이시카와 유키코, 사람을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의 소주는 하구천이지 하현이 아닙니다.”이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하현은 항도 하 씨 사람이 아니니 이렇게 공손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하문성은 이시카와 다이치의 곁으로 다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이시카와 다이치, 어제 일 나도 들었어요.”“별일도 아니고 이미 다 지난 일이니 이제 일어나세요.”말을 하면서 그는 손을 뻗어 이시카와 다이치를 부축해 일으키려고 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시카와 다이치는 그를 무시한 채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자신의 뺨을 계속 때렸다.“하 회장님의 배려에 감사하지만 우리 이시카와 가문에서는 자신이 잘못했다면 인정해야 하는 규율이 있습니다.”“저는 오늘 하현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왔습니다.”이시카와 유키코는 하문성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현을 향해 몸을 숙였다.그녀는 말로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보여준 셈이었다.이를 본 하문성의 얼굴에 약간 언짢은 빛이 스쳤다.이시카와 유키코가 하현에게 이렇게 고개를 숙일 정도로 큰일이 일어난 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이시카와 유키코의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는 않았다.그러자 하문성은 하수진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수진아, 오해가 있으면 풀어야 해. 맺힌 채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옛말이 있어.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 해.”“이시카와 대표가 굉장히 성의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됐다고 말씀드려.”하문성의 입장에서는 이시카와 유키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현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을 오래 보이는 것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그는 의도적으로 이런 국면을 전환해 보려고 애를 썼다.하수진은 하문성의 말을 무시한 채 하현을 보고만 있었다.오늘 이 일은 하현이 결정해야만 하는 일인 것 같았다.“이시카와 다이치 도련님이 어떻게 무릎을 다
하문성과 이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누가 봐도 하현이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광경이었다.하수진이 데려온 고문이란 작자가 이시카와 집안사람들을 개처럼 취급하며 무릎을 꿇리고 짓밟아 버렸다.이 광경을 보고 앞으로 항도 재단에서 누가 감히 하수진에게 반항하겠는가?앞으로 하수진이 집행총재로서 자리를 굳건히 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당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사람답게 살게.”이시카와 다이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이시카와 유키코가 그에게 슬쩍 눈길을 던지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하현이 오빠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바다에 물고기 밥이 되었을 거야.”“고맙게 생각해!”이시카와 유키코가 단호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적잖이 실망한 얼굴이었다.섬나라 사람들은 정말 잔인하다.적에게 잔인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잔인했다.하현은 옅은 미소와 함께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시카와 유키코를 쳐다보았다.동시에 섬나라 사람들에게는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만약 자신이 이시카와 유키코를 제압하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여기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손목이 부러진 사람은 이시카와 다이치가 아니라 자신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꽤나 먼 길을 온 이시카와 유키코가 이렇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니 앞으로 이시카와 가문을 괴롭힐 명분은 사라지게 되었다.말하자면 이시카와 유키코가 보인 이 수법은 두 발 전진을 위한 한 발 후퇴와도 같은 것이었다.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은 그녀가 마음먹은 대로 순조롭게 진행된 셈이었다.그래서 지금 공손해 보이는 이시카와 유키코를 눈앞에 두고도 하현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결국 섬나라 민족이 이렇다.굽신거리고 찌질할 때는 한없이 굽신거리고 찌질해 보인다.하지만 그들은 독사 같아서 어두운 구석이 조금이라도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어나와 딩신을 모질게 물어뜯을지도 모른다.“하현, 이건 대하 권역에서 우리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계약서에 딸려 오는 이익만 눈에 보였겠지만 하현은 지금 이시카와 유키코가 계약서 이면에 숨겨 놓은 음흉한 속셈을 간파한 것이다.말인즉슨 하현이 대리점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그는 항도 재단, 나아가서는 항도 하 씨 가문의 눈엣가시로 전락할 것임이 틀림없다.그다음의 일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자신을 죽이기 전까진 끝나지 않을 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이시카와 유키코는 하현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마찬가지로 항도 하 씨 가문은 5대 문벌 중 하나로서 실로 어마어마한, 감히 예측할 수도 없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이런 양측이 정말 쉬지 않고 싸우면 그 싸움은 양측 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하 상류층에까지 번질 것이다.3년 동안 독점 계약이라는 미끼를 던져 놓고 하현과 항도 하 씨 가문 둘 다 죽여 버리려는 속셈이었다.대하를 혼란에 빠뜨리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섬나라 사람들에게 이것은 손해 볼 것 없는 안정적인 거래였다.잠시 생각에 잠겼던 하현은 손을 내밀어 이시카와 유키코의 옥같이 아름다운 턱을 치켜올리고는 입을 열었다.“이시카와 아가씨, 3년 독점 계약으로는 부족해.”“두 가지 조건이 더 있어.”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이시카와 유키코는 이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요구하는 건 뭐든지 우리 이시카와 가문에서 들어줄게요.”“그래, 좋아.”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첫째, 3년 동안 대하 지역의 독점 계약으로는 부족해. 난 당신네 섬나라 본토를 포함한 극동 지역의 독점 계약도 원해.”이시카와 유키코는 흠칫 놀랐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좋아요. 들어드리죠.”“둘째, 3년 동안 극동 지역을 제외한 전 세계 각지에서 우리도 이시카와 그룹의 모든 물건을 팔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공정하게 경쟁하자는 거지.”이시카와 유키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이시카와 유키코는 원하는 바를 얻기
하수진이 독점 판권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음으로써 이시카와 그룹 사태가 일단락되었다.또한 이것은 하수진이 항도 재단에서, 심지어 항도 하 씨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상위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했다.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를 내빼는 이시카와 유키코 일행을 지켜보던 하현은 냉랭한 표정으로 맹효남에게 시선을 돌렸다.맹효남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쳤고 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맹 부장님, 어제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하시죠?”“내가 오늘 이시카와 그룹과의 계약을 따내면 당신은 당장 짐을 싸서 물러나야 한다는 약속 말이에요.”“이제 계약은 성사되었는데 부장님은 언제 짐을 싸실 생각입니까?”하현의 말을 들은 임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현의 시선을 피하듯 서로를 쳐다보았다.이 시점에서 하현이 그 일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맹효남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신음하듯 더듬거렸다.“나, 내, 내가...”“나 뭐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순간 하문성이 세상 정의롭고 늠름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맹효남, 하 고문과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어서 나가.”“여러 해 동안 우리 항도 재단을 위해 일해 온 노고를 생각해 퇴직금으로 1년 치 연봉을 줄 테니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여기 어서 돈 줘서 보내!”하문성은 정의롭고 호방한 듯이 행동했지만 사실은 은밀히 맹효남을 감싸 준 것이었다.어찌 되었건 하수진과 하현이 이시카와 그룹의 대리점 계약을 손에 넣었다.게다가 조금 이익이 남는 게 아닌 막대한 이윤을 볼 수 있는 계약이었다.이런 상황에서 하문성도 함부로 하수진의 미움을 사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쓸데없이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하문성의 말이 떨어지자 비서가 맹효남을 데려가려고 다가왔다.하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하현이 앞으로 나서며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잠깐만요, 하 회장님.”“회장님이 회장님의 오랜 최측근의 아들
30분 후, 하현의 일행과 양호남의 일행이 양 씨 가문 장원의 대청에 모였다.양 씨 가문 장원은 산과 물을 따라 지어져 있었으며 남양 지역 특색의 건축 양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하의 강남 스타일과 북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져 건축가의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 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은 이미 위태로워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대청홀은 200평방미터 가까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귀한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었다.양옆에는 황화목으로 만든 의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하현 일행이 자리를 잡자마자 뒤쪽에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이 노부인은 몸집이 약간 작고 등이 구부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전체적으로 매우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꼿꼿하게 날이 서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외부인인 하현에게 떨어졌다.마치 예리한 침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라 하현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은 양 씨 가문 안주인이자 양제명의 아내였다.곧이어 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자손들이 나타났다.그들은 모두 구석에 서서 기웃거렸다.다만 하현과 양유훤 두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서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 몇 명은 양유훤이 머리가 나쁘거나 안목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입을 삐죽거렸다.하현처럼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다니!그녀들은 양 씨 가문은 절대 양유훤이 데려온 저 남자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들의 고귀한 가풍이 더럽혀지면 안 될 일이다!“할머니!”양호남, 양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노부인은 이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의자에 가서 앉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성격상 이런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양유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하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호남 일행에게 차가운 눈빛을 떨어뜨렸다.양 씨 가문 사람들이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약 자신이 떠났더라면 양유훤 혼자 저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렸을지도 모른다.하현의 눈빛을 본 양호남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뭘 봐? 우리 집안의 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 대가를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연한 거야!”“양호남의 수법이 다소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잘못은 양유훤이 한 거야!”염소 수염을 한 양 씨 가문 어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우리 양 씨 가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어렵게 페낭 무맹과의 협력을 이뤄냈는데 양유훤 때문에 망치게 생겼어!”“난 방금 전까지도 양유훤을 살짝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어!”“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렸어!”“이런 남자를 선택하다니 앞으로 양유훤이 어떻게 되겠어?”“아주 개념 없는 연놈들이야!”“우리는 어서 양유훤을 양 씨 가문에서 출가시켜 다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못하게 해야 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양유훤은 눈살을 찌푸렸다.자신 때문에 페낭 무맹의 납품권이 사라지게 된 것에는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수혁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고 양제명을 독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호남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수백억의 납품권을 위해서.”“집안사람을 강제로 시집보내고.”“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독살하려 했어.”“양 씨 가문은 정말 단결력이 강하고 우애도 깊군.”“뭐라고!”양호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흠칫했다.“할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니?!”“우린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를 돌보게 했을 뿐이
양유훤을 다독인 후 하현은 양호남에게 냉담한 시선을 떨어뜨렸다.이제야 하현은 양유훤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천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라도 하현이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개자식! 어디서 튀어나온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우릴 때려?”이때 양신이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죽여버릴 거야!”“당신 같은 연놈들은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스럽게 썩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구!”“아하, 당신이 양유훤이 말한 그 남자 맞지?”양호남도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나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이 개자식아! 여자는 수치도 모르고 남자는 제멋대로구만! 짐승만도 못한 것들!”양호남은 하현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하현의 행동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이 개 같은 연놈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관청에 보고하고 그들을 끌어내면 돼!”머리를 풀어헤친 양신이도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다.“내가 저 연놈들을 가만히 두면 성을 갈겠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양유훤의 몸에 몇 개의 혈을 짚으며 그녀의 상처와 통증을 완화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유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그녀는 원래 하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어젯밤에 양유훤이 당신 같은 뻔뻔한 남자를 위해 여수혁을 다치게 했어!”“오늘 아침, 여수혁의 아버지이자 페낭 무맹의 부맹주이신 여영창 어르신이 우리 양 씨 가문을 찾
”개자식!”자신의 여동생이 뺨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본 양호남은 욕설을 퍼부으며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매서운 표정으로 양호남의 목을 조른 뒤 그의 머리를 눌러 가장자리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찧어 버렸다.양호남은 저절로 절을 하는 꼴이 되었고 ‘퍽'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찻잔이 그대로 으스러졌다.양호남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하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호남을 발로 차 내동댕이쳐서 날려버렸다.한쪽에 서 있던 양 씨 가족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그중 한 명이 의자를 들쳐업고 하현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날려 그를 내동댕이쳤고 뒤이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손바닥을 날려 쓰러뜨렸다.이 모든 것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들이 얼굴이 붓고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어이, 젊은이, 당신이 어떤 경력이 있든 어떤 묘수가 있든 간에!”“이곳은 양 씨 가문 땅이야!”“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이라구!”“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전통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셋째 집안 어른이 나서서 의젓한 표정으로 하현을 호통쳤다.“우리 사람을 때리고 다치게 하다니! 도대체 당신 눈엔 법도 뭣도 안 보이는 거야?”“이 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셋째 집안 어른의 잔소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갈겼다.“양호남 무리들이 손찌검을 할 때는 왜 제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는 법 운운하시겠다?”“지금 뛰쳐나와서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의 말에 이번에는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양호남은 뻔뻔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안사람들을 혼내려 했을 뿐, 그 방법이 좀 과격하다고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