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이렇게 나왔으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지!”텐푸 쥬시로는 한숨을 내쉬었고 눈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그리고 나서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결연하게 말했다.“이 차를 술이라 생각하고 당신에게 최후의 잔을 올리겠어. 당신을 위해 건배하는 셈이지.”하현도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나도 당신에게 최후의 잔을 올리겠어. 당신을 위해 건배!”두 사람은 눈빛을 마주하며 서로의 살기 어린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마셨다.하현의 호쾌함을 본 텐푸 쥬시로는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당신은 들어올 때부터 바람처럼 평온한 기색으로 들어오더니 조금도 겁내지 않고 내가 따라준 차를 마셨어.”“내가 독이라도 넣었을까 봐 두렵지는 않은 거야?”하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을 열었다.“이미 독을 넣지 않았던가?”“한참을 쓸데없는 말로 나랑 지껄였잖아. 당신은 그저 내 몸속에서 독이 작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야.”“그런데 이거 어쩐다, 텐푸 쥬시로를 실망시켜서 미안하게 됐군그래.”하현은 전쟁터에 있을 때 어떤 음흉한 독약도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그의 말처럼 군대에서 몇 년 동안 그는 살인술을 너무도 많이 보아 왔고 그에 따라 독약에 대한 식견도 많이 쌓였기 때문에 일찍이 어떤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텐푸 쥬시로가 처음부터 자신의 잔에 독을 넣었다는 걸 하현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텐푸 쥬시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당신한테 준 것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새로운 독약이야. 잠을 잘 수 없는 독약이지.”“이 독에 중독된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온몸에 힘이 없어지고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지며 이때부터 잠을 잘 수 없게 돼.”“하지만 당신 상태를 보니 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군.”“내 독약만 낭비한 꼴이야! 흥!”“어떻게 독을 피할
”당신들 섬나라 천황은 신권과 황권이 하나라고 부르짖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한 천황의 아무 의미 없는 발악일 뿐이야!”“섬나라 권력은 막부와 내각에 집중되어 있어.”“꼭두각시도 당신처럼 머리 나쁜 소위 무사들을 속일 수단일 뿐이라고.”“내 말이 맞지?”하현은 대놓고 비아냥거리며 섬나라 사람들이 싫어할 말을 했다.이것은 그들의 무사가 모시는 군주가 수년 전에 실각했다는 것을 비꼰 것이다.텐푸 쥬시로의 눈에는 들개 같은 눈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애써 화를 누르고 천천히 말했다.“하 씨, 역사책 몇 권 뒤적였다고 우리 섬나라 일을 다 아는 척하지 마.”“위대한 천황, 그의 지위, 그의 역량, 그의 영광은 당신이 상상할 수 없는 거야!”“당신이 위대한 천황을 모욕했으니 오늘 우리는 천황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장례를 치러야겠어!”“어서 해치워!”텐푸 쥬시로의 명령에 여덟 명의 신당류 검객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였다.모두의 눈에선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살기가 이글거렸다.여덟 명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섬나라 장도를 번쩍이며 하현을 위협했다.칼날이 한꺼번에 하현을 향했고 칼날이 부딪히는 예리한 소리가 장내를 울렸다.마치 폭풍우가 지나가듯 하현이 있는 방향으로 칼날이 휘몰아쳤다.하현은 쓸데없는 말 대신 오른손으로 탁자를 힘껏 들어 던졌다.탁자가 공중에서 펄럭이더니 첫 번째 칼날과 부딪혀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하지만 하현은 여세를 몰아 선실을 뛰쳐나와 갑판의 뱃전에 나왔다.온통 피비린내가 진동하였고 탄피에는 핏물이 들어 처참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그러나 여덟 명의 섬나라 검객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은 갑판 위로 걸음을 옮겨와 손에 든 섬나라 장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촹!”여덟 명이 합세한 칼놀림에 마치 머리 위에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이들 섬나라 검객들의 몸놀림이 얼마나 거친지 갑판이 약간 내려앉은 듯 보였다.뒤쪽에서 텐푸 쥬시로는 여유롭게 찻잔을
섬나라 민족은 특히 대하 문화를 숭상하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선호한다.섬나라 사람들은 그들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대하에서부터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대하의 일부라도 점령할 수만 있다면 섬나라는 진정으로 대륙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하현은 대구와 항성에서 잇달아 섬나라의 이런 시도를 뭉개버렸다.이것이 바로 미야타 신노스케와 텐푸 쥬시로 같은 검객들이 직접 하현을 죽이러 온 근본적인 이유였다.그들은 대하에 2대 총교관이 나타날까 봐 두려웠다.섬나라의 우두머리들을 무참히 뭉개버리는 전설의 2대 총교관.하현이 잠시 생각에 잠긴 틈을 타 여덟 명의 검객들은 얼굴빛이 차가워지며 천천히 하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그들은 천천히 숨을 조여오듯 하현을 에워싸기 시작했다.마치 천둥과 우레가 번갈아가며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텐푸 쥬시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바람과 천둥, 번개가 합쳐진 건곤 한 방!”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섬나라 검객들은 그 자리에서 한 발 살짝 물러섰다가 섬나라 장도를 들고 하현을 향해 매섭게 겨누었다.하현이 이를 보고 순간적으로 뛰어오르자 두 검객은 좌우로 흩어져 하현이 도망갈 퇴로를 봉쇄했다.뒤이어 두 검객은 뒤로 돌진해 하현이 움직일 공간을 미리 막아서며 동시에 칼을 빼들어 하현을 향해 내리쳤다.“흥! 제법이군!”하현은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역시 섬나라 6대 유파 중 하나야!”“음류보단 신당류가 한 수 위인 걸걸!”소위 말하는 풍뢰팔자의 위력은 섬나라 음류 고수보다는 훨씬 강하다고 인정받는다.이 여덟 명은 모두 최고의 병왕이고 여덟 명이 함께 모이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평범한 전신이었다면 벌써 포위당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칭찬과 동시에 하현은 이미 달려드는 섬나라 검객 한 명을 되받아쳐 저 멀리 날려버렸다.하현이 간단하고 수월하게 섬나라 검객을 물리치는
”어서 해치워!”하현이 다시 그들의 습격을 피하자 네 명의 섬나라 검객들은 다시 손을 잡고 동시에 전방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갑판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마치 검은 바다에 비추는 한 줄기 달빛처럼 칼날이 번쩍이며 허공을 갈랐다.텐푸 쥬시로는 이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갑자기 일그러졌다.“풍뢰화문! 절대로 우릴 침범할 수 없어!”순간 네 명의 섬나라 검객들이 들고 있던 장도가 겹쳐지며 동시에 앞을 막아섰다.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구도였다.텐푸 쥬시로가 고수라는 것은 가르친 솜씨를 보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창창창!”하현이 가지고 있던 검이 섬나라 장도에 부딪혀 떨어지며 불꽃이 튀었다.네 명의 공격을 깨뜨릴 방법이 없었다.그와 동시에 널브러져 있던 네 명의 섬나라 검객들도 비릿한 향이 나는 알약을 삼키고는 눈이 벌개져서 다시 죽일 듯한 눈빛으로 일어섰다.분명 이 알약은 부상을 지연시키고 순간적으로 온몸을 자극해 벌떡 일어서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바람과 천둥은 비로 변하고 천둥과 번개는 천지를 흔들지어다!”하현이 궁지에 몰린 듯하자 텐푸 쥬시로는 눈빛이 음흉하게 변하며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하현을 향한 살기가 텐푸 쥬시로의 눈에서 넘쳐흘렀다.여덟 명의 검객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고 그들의 손에 있던 섬나라 장도는 동시에 칼집으로 들어갔다가 동시에 칼집에서 튀어나왔다.“죽여!”섬나라 발도술!이것은 섬나라 검도술 중 가장 강력한 권법이라고 할 수 있다.여덟 명의 절정의 병왕들이 하현이 있는 곳을 향해 칼을 겨누었고 죽일 듯이 살기를 띠며 덤벼들었다.여덟 개의 칼이 하나로 합쳐져 어떤 전신도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전해졌다.누구도 쉽게 물리칠 수 없는 막강한 형세였다!이를 본 텐푸 쥬시로의 얼굴에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이런 묘수는 텐푸 쥬시로도 막을 수 없다.그러니 홀몸인 하현은 어떠랴?텐푸 쥬시로는 이 재미난 광경을 혼
하백진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비아냥거리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하현이 난도질당하는 장면을 놓칠까 봐 걱정일 지경이었다.텐푸 쥬시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백진, 내가 하현을 죽일 테니 똑똑히 봐. 그리도 당신과 하구천이 나와 약속한 거, 절대 잊지 마!”하백진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런 쓸데없는 말 할 필요 없어. 당신이 하현을 죽이기만 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특별 외교 신분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이제부터 당신들은 우리 항성에서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야!”“당신이 항성의 법을 어겨도 하구천이 도와줄 테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감히 왈가왈부하지 못할 거야!”“자, 이제 조용히 입 다물어.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방해하지 마!”텐푸 쥬시로는 흡족한 듯 소리 없이 웃었다.그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익을 팔 수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이 너무나 통쾌하고 즐거웠다.하백진의 말이 떨어지자 장내의 풍뢰팔자의 칼날이 하현의 온몸을 에워쌌다.하현은 칼날 속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공세 속에서도 하현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텐푸 쥬시로가 풍뢰팔자를 가르치다니, 정말 대단하군.”“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신은 나 하현을 만났어.”“내 앞에서는 전신도 땅강아지처럼 맥을 못 추는데 하물며 가짜 전신이라, 흥!”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현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검객들 속으로 뛰어들어 손바닥을 마구 휘갈겼다.표정은 냉담하고 결연했지만 몸동작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다.풍뢰팔자의 눈에는 평범했던 하현이 갑자기 부채만 한 손바닥을 들고 자신을 향하는 것은 착각이 들었다.하현의 손바닥은 천지를 뒤흔들고 하늘을 뒤덮어 버리는 것 같았다.“어서 죽여 버려!”약을 먹은 섬나라 검객들은 순간적으로 손에 든 칼을 사정없이 휘둘렀다.“촥!”낭랑한 소리가 공중에서 울려 퍼졌다.풍뢰팔자는 하나같이 온몸을 흠칫했다.사람 그
텐푸 쥬시로는 하백진과 연결된 영상 통화를 꺼버렸다.그의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은 듯 허둥지둥거렸다.“이 정도면 거의 나의 실력에 많이 가까워진 것 같군.”“전신의 정점에 다가설 만한 실력이야.”“그 정도 실력이 아니라면 어찌 우리 풍뢰팔자를 해치울 수 있겠어?”텐푸 쥬시로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감탄하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하현, 당신은 정말 비밀스러운 사람이야. 젊은 나이에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젊은데 유능하기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해.”“당신 같은 사람이 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야?”“자랑을 하지 않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준비하기 어렵잖아!”“준비가 부족해서 아마 오늘 이렇게 당신한테 당한 거 같은데, 우리가 누굴 찾아가서 이 억울함을 따질 수 있겠어?”텐푸 쥬시로는 담담하게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다행히 내가 오랫동안 은거하면서 하늘과 사람이 하나 되는 도를 터득했지. 은거하기 전보다 훨씬 더 깊은 도를 터득하게 된 거야.”“그렇지 않았으면 이번에 정말 당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몰라.”“안타깝게도 오늘 대하에서는 군신 한 명을 또 잃게 될 운명이로군!”텐푸 쥬시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짐짓 안타깝다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섬나라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을 마주 보며 비아냥거렸다.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졌다고 생각했다.하현의 실력이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몰아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러나 텐푸 쥬시로가 직접 나서자 다시 기가 살아난 것이다.신당류 전설의 검객! 명불허전!지금 이 순간 섬나라 사람들은 전설이 되돌아온 것마냥 기고만장해졌다!“저놈을 죽여 버려! 우리 텐푸 쥬시로 전신이 하는 말 못 들었어?!”“자신이 전신이라도 된 줄 착각하겠지만 우리 텐푸 쥬시로 앞에서 감히 찍소리나 할 줄 알아?”“이 자식아! 젊은 놈이 어디 함부로 덤벼!”“네놈이 태어나서부터 무학을 수련했다고 해도 텐푸 쥬시로의 적수는 되지 못해!”“빨
텐푸 쥬시로는 신당류의 검객, 섬나라 전신, 황실 궁중 어의,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깨달은 도인으로 불리고 있었다.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런 추잡한 수를 쓰다니!그는 자신이 시대의 걸출이라고 불리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오늘 그는 많은 준비를 했었다.심지어 자신이 정성껏 훈련시킨 풍뢰팔자도 선보였다.그런데 결과는 무참했다.이런 상황에서 텐푸 쥬시로가 정말 용감하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어떻게 하현과 싸울 수 있겠는가?그래서 정의롭고 늠름한 척 아랫사람의 뺨을 때리고 닥치는 대로 아랫사람의 몸을 던져 요트 엔진을 부순 뒤 텐푸 쥬시로는 깔끔하게 달아난 것이다.게다가 그의 탈출 경험은 아주 풍부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빠른 속도로 해안가에 도달할 것이다.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서 요트에 남아 있는 섬나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까지의 신념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하현은 이 사람들과는 쓸데없이 뒤엉키고 싶지 않아서 얼른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 메시지를 보낸 후 스스로 바다속으로 뛰어들어 텐푸 쥬시로가 도망치는 방향으로 쫓아갔다.텐푸 쥬시로는 어쨌든 전신이었고 검객이었다.아무리 실력이 찌질하기로서니 그래도 전신의 위엄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하현은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보고 싶었다.그렇지 않으면 은신해 있던 전신이 언제 또다시 나타나 자신의 목에 칼끝을 들이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하현에게 칼날 정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문제였다.하현이 자신을 놓치지 않고 쫓아온다는 것을 눈치챈 텐푸 쥬시로는 뭍에 오른 후 빠른 속도로 해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항성 태평산의 뒤쪽 기슭으로 상류층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함부로 개발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다.이 숲에는 새와 짐승도 많다고 전해지며 항성에서 보기 힘든 청정 장소였다.안타깝
’헉'하는 소리와 함께 피를 토해내던 텐푸 쥬시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하현, 역시 대단하군.”“젊은 나이에 전신에까지 오르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야.”“이런 인제가 우리 섬나라 귀족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텐푸 쥬시로,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아무리 그래도 당신을 구해 줄 순 없어.”“요트에서 이미 이 지역 통신을 다 차단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어.”“말하자면 당신이 나를 따돌린 뒤 방금 보낸 메시지는 영원히 아무도 받지 못할 거라는 거야.”텐푸 쥬시로는 얼굴빛이 흐려지며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십여 분 전에 도움 요청을 보낸 메시지 앞에 아직도 빨간 느낌표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았다!“이 빌어먹을 놈이!”텐푸 쥬시로는 버럭 화를 냈다.“젊은 놈이 섬나라 검객을 뭘로 보는 거야?! 진정 내 칼에 죽고 싶은 거야?!”“내가 오늘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텐푸 쥬시로가 포효하며 양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앞으로 힘껏 내질렀다.칼날이 시리도록 날카로웠다.귀신이 곡하고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주먹을 불끈 움켜쥔 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하현은 텐푸 쥬시로가 자신을 향해 돌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텐푸 쥬시로는 하현의 곁을 지나쳐 산꼭대기 쪽으로 계속 달려갔다.하현은 눈앞에 벌어진 일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섬나라 전신이 이 지경이 되어도 뻔뻔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칼을 내리치는 시늉으로 눈을 속이며 도망치다니!“텐푸 쥬시로! 자꾸 도망쳐 봐야 소용없어!”하현이 냉랭하게 소리쳤다.“하현, 제발 쫓아오지 마!”텐푸 쥬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숲으로 달리며 하현을 따돌리려고 했다.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텐푸 쥬시로를 노려보았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십여 미터 정도로 유지하며 사냥감과 사냥꾼처럼 빠르게 쫓고 쫓겼다.머지않아 두 사람은 산꼭대기 가까이 있는
30분 후, 하현의 일행과 양호남의 일행이 양 씨 가문 장원의 대청에 모였다.양 씨 가문 장원은 산과 물을 따라 지어져 있었으며 남양 지역 특색의 건축 양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대하의 강남 스타일과 북유럽의 건축양식이 잘 어우러져 건축가의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엿볼 수 있었다.안타깝게도 지금 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은 이미 위태로워져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대청홀은 200평방미터 가까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귀한 침향목 의자가 놓여 있었다.양옆에는 황화목으로 만든 의자가 늘어져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하현 일행이 자리를 잡자마자 뒤쪽에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대여섯 명의 남녀가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을 둘러싸고 걸어 나왔다.이 노부인은 몸집이 약간 작고 등이 구부러져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전체적으로 매우 야윈 모습이었지만 눈빛만은 꼿꼿하게 날이 서 있었다.그녀의 시선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외부인인 하현에게 떨어졌다.마치 예리한 침으로 정곡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라 하현의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람은 양 씨 가문 안주인이자 양제명의 아내였다.곧이어 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자손들이 나타났다.그들은 모두 구석에 서서 기웃거렸다.다만 하현과 양유훤 두 사람을 바라볼 때는 눈에서 혐오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특히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들 몇 명은 양유훤이 머리가 나쁘거나 안목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입을 삐죽거렸다.하현처럼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을 데려오다니!그녀들은 양 씨 가문은 절대 양유훤이 데려온 저 남자를 데릴사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녀들의 고귀한 가풍이 더럽혀지면 안 될 일이다!“할머니!”양호남, 양신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나와 인사를 했다.노부인은 이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의자에 가서 앉았다.그런 다음
하현은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성격상 이런 굴욕적인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양유훤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들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날 위협하고 있어.”하현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양호남 일행에게 차가운 눈빛을 떨어뜨렸다.양 씨 가문 사람들이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만약 자신이 떠났더라면 양유훤 혼자 저들에게 마음대로 휘둘렸을지도 모른다.하현의 눈빛을 본 양호남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뭘 봐? 우리 집안의 손해가 이렇게 막대한데 대가를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건 당연한 거야!”“양호남의 수법이 다소 과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잘못은 양유훤이 한 거야!”염소 수염을 한 양 씨 가문 어른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우리 양 씨 가문의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어렵게 페낭 무맹과의 협력을 이뤄냈는데 양유훤 때문에 망치게 생겼어!”“난 방금 전까지도 양유훤을 살짝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어!”“하지만 그 결과 어떻게 되었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남자는 거리낌 없이 사람을 때렸어!”“이런 남자를 선택하다니 앞으로 양유훤이 어떻게 되겠어?”“아주 개념 없는 연놈들이야!”“우리는 어서 양유훤을 양 씨 가문에서 출가시켜 다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못하게 해야 해!”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양유훤은 눈살을 찌푸렸다.자신 때문에 페낭 무맹의 납품권이 사라지게 된 것에는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여수혁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고 양제명을 독살하려 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양호남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수백억의 납품권을 위해서.”“집안사람을 강제로 시집보내고.”“그것도 모자라 할아버지까지 독살하려 했어.”“양 씨 가문은 정말 단결력이 강하고 우애도 깊군.”“뭐라고!”양호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흠칫했다.“할아버지를 독살하려 했다니?!”“우린 사람을 보내 할아버지를 돌보게 했을 뿐이
양유훤을 다독인 후 하현은 양호남에게 냉담한 시선을 떨어뜨렸다.이제야 하현은 양유훤이 왜 자신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안사람들의 천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라도 하현이 위험에 빠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개자식! 어디서 튀어나온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우릴 때려?”이때 양신이가 정신을 차리며 얼굴을 가린 채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죽여버릴 거야!”“당신 같은 연놈들은 칠흑 같은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스럽게 썩어야 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구!”“아하, 당신이 양유훤이 말한 그 남자 맞지?”양호남도 역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감싸쥐고 일어나 이를 갈며 울부짖었다.“이 개자식아! 여자는 수치도 모르고 남자는 제멋대로구만! 짐승만도 못한 것들!”양호남은 하현을 죽이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었지만 하현의 행동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하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됐어! 이 개 같은 연놈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해 봐야 소용없어. 관청에 보고하고 그들을 끌어내면 돼!”머리를 풀어헤친 양신이도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질렀다.“내가 저 연놈들을 가만히 두면 성을 갈겠어!”“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하현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손을 뻗어 양유훤의 몸에 몇 개의 혈을 짚으며 그녀의 상처와 통증을 완화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유훤은 잠시 망설였지만 그동안의 일들을 사실대로 말했다.그녀는 원래 하현이 이 일에 개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하지만 하현이 이미 이곳에 나타났으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이렇게 된 이상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하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어젯밤에 양유훤이 당신 같은 뻔뻔한 남자를 위해 여수혁을 다치게 했어!”“오늘 아침, 여수혁의 아버지이자 페낭 무맹의 부맹주이신 여영창 어르신이 우리 양 씨 가문을 찾
”개자식!”자신의 여동생이 뺨을 맞고 날아가는 것을 본 양호남은 욕설을 퍼부으며 반사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매서운 표정으로 양호남의 목을 조른 뒤 그의 머리를 눌러 가장자리에 있던 대리석 테이블 위에 찧어 버렸다.양호남은 저절로 절을 하는 꼴이 되었고 ‘퍽'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의 찻잔이 그대로 으스러졌다.양호남의 머리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하현은 이에 그치지 않고 양호남을 발로 차 내동댕이쳐서 날려버렸다.한쪽에 서 있던 양 씨 가족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이때 그중 한 명이 의자를 들쳐업고 하현을 향해 돌진했다.하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손바닥을 날려 그를 내동댕이쳤고 뒤이어 달려오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손바닥을 날려 쓰러뜨렸다.이 모든 것이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수십 명의 양 씨 가문 사람들과 그들의 경호원들이 얼굴이 붓고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어이, 젊은이, 당신이 어떤 경력이 있든 어떤 묘수가 있든 간에!”“이곳은 양 씨 가문 땅이야!”“남양 3대 가문 중 하나인 양 씨 가문이라구!”“개나 소나 다 마음대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전통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셋째 집안 어른이 나서서 의젓한 표정으로 하현을 호통쳤다.“우리 사람을 때리고 다치게 하다니! 도대체 당신 눈엔 법도 뭣도 안 보이는 거야?”“이 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당신...”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하현은 셋째 집안 어른의 잔소리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손바닥을 휘갈겼다.“양호남 무리들이 손찌검을 할 때는 왜 제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나한테는 법 운운하시겠다?”“지금 뛰쳐나와서 그런 얘기하는 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하현의 말에 이번에는 수염을 기다랗게 기른 또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양호남은 뻔뻔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집안사람들을 혼내려 했을 뿐, 그 방법이 좀 과격하다고
”빨리 대답해!”양신이가 또 채찍을 휘둘러 양유훤을 때렸다.양신이의 눈에는 질투와 원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뛰어나고 예쁜 양유훤을 미워했다.오늘 이렇게 양유훤을 혼내줄 기회를 잡았으니 양신이가 어찌 사정을 봐주겠는가?“어서!”또 한 번 채찍에 맞아 비틀거리던 양유훤은 거의 똑바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또박또박 대꾸했다.“난 여수혁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뒤뜰을 둘러보았다.양제명이 뒤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양제명의 회복을 방해라도 한다면 결과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게 된다.“왜? 아직도 저 늙은이 걱정할 시간이 있어? 그럴 시간에 당신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양신이는 양유훤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고 냉소를 흘렸다.그리고 양유훤에게 다가가 간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곧 누군가가 노인네한테 약을 먹일 거야.”“늙은이가 죽은 뒤 우린 그 누명을 당신한테 뒤집어씌우면 돼. 하하하!”양신이가 악마처럼 웃어젖혔다.“네가 승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인네의 말로가 그렇게 되는 거야. 이게 다 너, 양유훤 너 때문이라고!”양유훤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함부로 행동하지 마. 당신들 할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야!”“할아버지?”양호남은 코웃음을 지으며 포악한 얼굴로 양유훤을 향해 또 한 번 채찍을 휘둘렀다.“노인네가 이미 폐인이 되었는데 무슨 자격으로 할아버지가 된단 말이야?”“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전신이지 폐인이 아니야!”“우리 양 씨 가문은 당신을 포함해 폐인은 다 버릴 수밖에 없어!”“자, 승낙을 할 거야? 말 거야? 승낙하지 않는다면 노인네는 이대로 죽을 거야!”말을 하면서 양호남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전
양유훤의 얼굴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그 이후에도 양호남은 손바닥을 몇 번이고 휘날렸다.이 광경을 보고 양호남이 데리고 온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다.“양유훤은 정말 남한테 피해를 입힌다니까. 이전에도 시집가기 싫어 멀리 항성과 도성에 가서 우리 양 씨 가문을 곤란하게 했지!”“이제 와서 또 우리 가문을 죽이려 하다니! 절대 가만둘 수 없지!”“여영창 어르신도 이번엔 단단히 화가 나셨어. 만약 그가 우리 가문과 페낭 무맹의 모든 거래를 끊는다면 우리 집안의 손실은 어마어마할 거야!”“양유훤이 이 일을 다 책임질 수 있겠어?”“집안 큰집이라고 아주 떠받들어 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결국 이렇게 우리 집안을 함정에 빠뜨리고 말았어!”양 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비난했다.가문의 권력을 대표하는 몇몇 장로들은 양유훤의 행동에 단단히 실망한 듯 차디찬 눈빛을 보냈다.양유훤은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양호남, 납품권은 내가 해결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줘.”“당신이?”“어떻게 해결한다는 거야? 당신 얼굴로? 아니면 몸으로?”양유훤이 두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양호남은 아주 기고만장해진 모양이었다.그는 양유훤의 머리채를 덥석 잡았고 옥처럼 고운 양유훤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절대 가져서는 안 될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결국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입을 열었다.“이번에 당신이 남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양 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매우 기뻐했어. 당신이 큰집을 대표하여 우리 가문의 권세를 되찾고 다시 남양 3대 가문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어!”“우리 양 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 가문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어!”“이 일에 대한 해결책은 내가 이미 다 생각해 뒀어!”“당신이 여수혁한테 시집가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여 씨 가문은
”야비한 남자 때문에 여수혁에게 미움을 사다니!”“야비한 놈을 우리 양 씨 가문 데릴사위라고 감히 말하고 다녀?!”“당신 부끄러움도 몰라?!”“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양호남이 함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당신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페낭의 웃음거리가 된 걸 알기나 해?!”여기까지 말하며 양호남은 더는 못 참겠는지 양유훤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뺨을 때렸다.양호남의 말에 당황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양유훤은 갑자기 뺨까지 맞게 되었다.조각처럼 정교한 그녀의 얼굴에 금세 손바닥 자국이 크게 생기더니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이를 본 양신이와 몇몇 그의 사람들은 말리기는커녕 한결같이 통쾌해하는 표정이었다.“양호남,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책임질 거니까 당신이 일부러 나서서 날 가르칠 필요는 없어.”양유훤은 밀려오는 고통과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비록 그녀는 자신이 어젯밤에 한 일이 분명 양 씨 가문 둘째와 셋째에게 비난의 빌미를 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양호남이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우리는 당신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양호남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잘 들어. 오늘 아침 여 씨 집안사람이 우릴 찾아왔어!”“페낭 무맹 부맹주 여영창 어르신이 직접 사랍들을 이끌고 우리 양 씨 가문을 찾아와 해명을 하라고 했어!”“똑똑히 들어. 이 일은 네가 우리 양 씨 가문을 대표해 반드시 여 씨 가문에 해명을 해야 해!”“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양유훤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순전히 나를 노리고 한 일이니 여 씨 가문은 나를 직접 찾아와 결판내면 될 일이야.”“셋째 집안과는 무슨 상관있어?”“뭐 더 할 말 있어?”양호남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여 씨 가문은 이 일 때문에 우리 양 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페낭 무맹 납품권을 끊어버리려고 한다고!
하현은 그윽한 눈동자로 양유훤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돌아가는 정세가 그렇게 복잡해? 복잡해서 날 지킬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서 날 내쫓으려는 거고?”“아니면 내가 페낭에 남아서 당신 밥그릇이라도 한몫 챙길까 봐 그러는 거야?”양유훤은 하현을 바라보고 잠시 후 담담하게 말했다.“상황이 복잡한 게 아니라 당신이 복잡한 일에 얽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할아버지를 이 정도로 회복시켜 준 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너무 감사할 따름이야.”“다른 소소한 일은 더 이상 당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일등석 세 장이야. 내일 아침 8시 비행기.”“내가 일을 다 처리한 후 당신한테 페낭에 한 번 더 오라고 초대하면 그때 반드시 이 은혜를 다 갚을게.”말을 하면서 양유훤은 하현 앞에 봉투를 놓으며 깊은 시선으로 하현을 바라보다 돌아섰다.양유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현은 손을 뻗어 봉투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보아하니 당신이 날 여기 두고 싶지 않은가 봐. 정말 재미있군. 내일 아침에 우리 같이 어르신 뵈러 가자구. 그때 모든 게 다 정상이라면 돌아갈게.”말이 끝나자마자 하현도 돌아서서 성큼성큼 병원을 나섰다....다음날 정오, 양 씨 가문 별채.별채 입구에 선 양유훤은 페낭 국제공항 쪽을 희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수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렸다.수없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가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바로 그때 양 씨 가문 별채 정문 앞에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굳게 닫혀 있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이어 짙은 녹색 랜드로버 오프로드 차량이 선두에 섰고 뒤따라온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정문 앞으로 무작정 돌진해 와 정성껏 가꾸어 놓았던 화단을 으스러뜨렸다.그러자 수십 명의 건장한 남자가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나왔다.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양유훤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선두에 선 남자
양유훤의 눈동자에 희미한 실망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꾸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남들은 당신을 쓰레기네 뭐네 하지만 난 원래부터 믿지 않았어.”“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사람을 꼬시고는 이내 도망쳐 버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군!”하현은 입가를 쌜쭉거리며 양유훤을 힐끔 쳐다보았다.양유훤의 놀림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모두들 아름다운 여자의 친절함과 관심에는 참아낼 재간이 없다고 말한다.양유훤같이 싫고 좋음이 분명한 타입은 하현이 절대 함부로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자 하현은 애써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방금 여수혁과 당신이 하는 대화를 대충 들었는데 양 씨 가문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남양지역에서 페낭을 중심으로 양 씨 가문은 남양국 황실 다음으로 가장 뿌리가 깊은 3대 가문이야.”양유훤도 더는 숨길 뜻이 없었다.“이 씨 가문, 원 씨 가문 그리고 우리 양 씨 가문.”“이 외에도 무맹과 수많은 일류 가문들, 그리고 기타 중소 세력들이 남양에서 혼란스러운 국면을 형성하고 있어.”“수십 년 전에는 우리 양 씨 가문과 이 씨 가문, 원 씨 가문의 3파전으로 남양국은 확고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어.”“각 세력도 이 세 가문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각축을 벌였지.”“고고한 황실은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고.”“우리 세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황실도 무너지지 않고 공고하게 군림할 수 있었던 거지.”“우리 세 가문이 계속 각축을 벌이는 한 황실의 막대한 이익을 누가 건드리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이 모든 게 우리 할아버지가 전신이 되고 나서 달라졌어.”하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양 씨 가문이 치고 나왔군, 그렇지?”양유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비슷해.”“하지만 그때 우리 집안은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고 양 씨 가문에서 전신이 나왔으니 당연히 이 씨 가문과 원 씨 가문을 제압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