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인의 얼굴에는 이 직업을 하면서 닳고 닳은 미소가 가면처럼 걸려 있었다.이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도 진심 어린 미소를 잃어버린 그녀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하현은 최문성과 임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왠지 지금 상황은 일부러 최문성을 난처하게 하려고 누군가 지시한 것 같았다.최 씨 집안 정도면 항성과 도성에서 최고 일류 가문은 아닐지라도 이런 곳에서 냉대 받을 가문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항성과 도성 사람들은 다 안다.최 씨 가문이 앞뒤 이익을 가리지 않고 오직 사람 하나만 보고 하현 편에 섰다는 것을 말이다.그래서 최문성을 난처하게 만드는 건 솔직히 말해 결국 자신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최문성이 화가 나서 손을 쓰려는 찰나 동리아가 담담하게 그를 말렸다.“최문성, 여기서 이럴 필요 없어. 당신과 나 둘이서 소란을 피운다면 우리가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히려 상대방이 걸고넘어질지도 몰라.”“회원 카드, 나 있어요. 최고 등급으로.”말을 하면서 동리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에르메스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이 회원 카드는 예전에 허민설이 준 것이었다.비록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들고만 다녔는데 오늘 뜻밖에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이 카드는 예전에 허민설이 나한테 직접 준 거예요. 만약 이것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금옥클럽이 날 일부러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문제없죠?”동리아는 차분한 얼굴로 야무지게 말했다.최문성은 속으로 고소해하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고 다행히 화가 가라앉았다.최문성도 태생이 부잣집 도련님인데 어떻게 이런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임세인은 동리아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동리아가 회원 카드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부잣집 도련님들이나 내로라하는 집 딸들은 평소에 자신의 얼굴만 들이밀고 이런 곳을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회원 카드 같은 걸 들고 다니지 않는다.하지만 동리아가 회원
허민설은 오늘도 몸매를 한껏 드러내는 옷을 입고 박꽃 같은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었다.혼을 쏙 빼놓을 만큼 매혹적인 자태였다.기품 있고 대담한 모습이 항도 하 씨 안주인이 될 만한 인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현에게 뺨을 맞고도 규방에 틀어박혀 자포자기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녀의 심성과 패기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 만했다.최문성은 허민설 옆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눈살을 찌푸렸다.“맹인호 저놈이 언제 항성으로 왔지? 난 왜 아무 소식도 못 들은 거야?”“이놈이 흑주에서 용병 놀이를 하면서 최근에는 금광을 몇 개 차지했다던데, 그렇죠?”“왜 갑자기 돌아왔을까요? 맹인호답지 않은데요!”최문성이 나직하게 입을 열자 하현의 시선이 까무잡잡한 살갗을 띤 남자에게 향했다.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전쟁터의 용맹한 용병처럼 살기를 띠고 있어 영 이런 자리엔 어울리지 않았다.다만 맹인호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어느 한 사람도 허투루 무시하는 눈빛이 없이 매우 고분고분한 눈빛이었다.허민설은 맹인호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와 술잔을 부딪히다가 귓속말을 하는 등 아주 사이가 좋아 보였다.하현은 맹인호를 바라보며 유유히 입을 열었다.“저놈이 인물은 인물인가 본데 무슨 이유라도 있어?”“항성 4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맹 씨 집안, 맹인호예요. 항성 S4 중 한 명이죠.”“하지만 맹인호는 다른 젊은 실세들과는 달리 정치하는 것도 사업하는 것도 싫어해요. 오직 칼끝에서 나는 피비린내에만 정신이 쏠려 있죠.”“그동안 흑주에 여러 용병대를 만들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최문성은 표정이 굳어졌다.부잣집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생각만해도 꺼림칙하고 소름이 돋았다.이때 잠자코 있던 동리아가 입을 열었다.“맹인호라는 사람은 항상 중립파였어요. 우리 같은 젊은 세대들과도 그럭저럭 지냈고요. 하구천이라고 덮어놓고 체면을 세워 주는 일도 없는 사
”맹인호, 너무 하는 거 아니야?”동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우리 모두 아는 처지에 오자마자 총을 들이대는 건 아니지 않아?”“한 판 해 보자는 거야?”최문성도 싸늘한 기색으로 맹인호를 쏘아보며 말했다.“맹인호, 너 머리에 총 맞았어? 총으로 날 협박하고 있는 거야, 지금?”“재주가 있으면 어디 한번 쏴 보든가!”“네가 안 죽이면 내가 널 죽여 버릴 거야!”역시 당도대를 나온 병왕급 인물은 달랐다.맹인호가 흑주에서 맹위를 떨쳤다고 해도 최문성 역시 이에 뒤질 사람이 아니었다.남들이 맹인호 앞에서 찍소리도 못 내고 있었지만 최문성은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오늘 밤은 조용히 평화적으로 담판을 하러 온 것이었다.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최문성이 아마도 먼저 맹인호를 어떻게 했을지도 모른다.최문성의 곁에는 오직 한 명의 수하뿐이었고 맹인호가 도발하자 그 수하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쓰려고 했다.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허리춤에 총기를 지닌 예닐곱 명의 검은 가죽을 입은 남자들을 보고 머뭇거렸다.이 남자들은 분명 맹인호가 흑주에서 데려온 용병들일 것이다.그들은 모두 피에 굶주린 흡혈귀 같았다.허리춤에 둘러찬 총은 전장에 나가는 용사의 훈장처럼 위용을 드러내었다.살기 어린 기운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다른 경호원들도 얼른 태세를 갖추며 하현 일행을 빈틈없이 살벌하게 에워쌌다.이 모든 사람들의 주인인 듯한 허민설은 팽팽한 긴장감을 즐기는 듯 유유히 샴페인 잔을 입에 갖다 대었다.그녀가 원하던 장면인 듯 아주 흡족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최문성, 정말 내가 당신 하나 못 죽일 것 같아?”이때 장내의 모든 무력을 장악하고 있던 맹인호가 비아냥거리며 웃었다.“아버지가 도성 일인자라고 해서 감히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 아버지, 누나 할 것 없이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어!”“우리 구역 사람이 뜻밖에 내륙에서
애써 화를 참고 있는 최문성을 보며 맹인호는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자, 최문성. 내 앞에서 감히 건방지게 굴지 못하겠지? 내가 다시 한번 물을게.”“무릎 꿇고 말해, 싫어?”맹인호의 말을 들은 동리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버럭했다.“맹인호, 사람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마!”“뭐? 사람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말라고?”맹인호는 동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동리아, 네 아버지가 항성 최고 책임자라서 내가 너한테 함부로 못 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당신이 내 일을 방해하면 당신까지도 당장 없애버릴 수가 있어! 알겠어?”말을 하면서도 맹인호는 왼손을 뻗어 동리아의 얼굴을 꼬집으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다.그러다가 그는 최문성에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셋을 셀 테니 무릎 꿇어. 그러면 허민설과 이야기할 기회를 주겠어.”“무릎 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물론 당신이 반항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디 그랬다가는 당신들 모두 깡그리 저세상으로 갈 줄 알아!”말을 마친 맹인호는 더없이 득의양양하게 웃었다.“셋, 둘, 하나...”맹인호가 살기를 띠며 숫자를 세자 최문성은 이를 악물고 무릎을 꿇었다.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최문성이 원래의 성격대로 했다면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밤 여기에 온 목적을 생각하며 그는 꾹 참았다.동리아는 최문성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최문성?”최문성의 행동에 놀라기는 하현도 마찬가지였다.놀랄 뿐만 아니라 감탄에 마지않는 눈빛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다.최문성이 목적 달성을 위해 얼마든지 비굴한 모습을 각오했다는 것이 하현에게는 뜻밖이었다.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그런 기색을 감추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아이고, 최문성. 어떻게 이렇게 무릎을 꿇었어?”“방금까지만 해도
”더구나 지금 최문성의 누나는 용전 항도 지부를 장악하고 있어!”“최 씨 가문은 지금 항성과 도성에서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있다고. 그 집안에 미움을 사서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후환이 두렵지 않는다 쳐도 만약 최문성을 죽이면 최영하가 용전 항도 지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금옥클럽을 건드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구?”허민설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오늘 밤 최문성이 여기까지 와서 사과하고 나랑 말로 잘 해결해 보려고 하잖아. 그런데 당신이 총을 들이대고 무릎을 꿇게 했어. 사람이 어떻게 더 성의를 보일 수 있겠어?”허민설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말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어제 일어난 일이 아직도 허민설의 마음속에 불쾌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최문성이 하현의 사람이니 최문성을 밟아 무릎을 꿇리게 하는 것에는 그녀도 개의치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최문성을 짓밟아 죽이기 전에 최문성이 무슨 말을 할 건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좋아, 허민설 당신 얼굴을 봐서 오늘 밤은 이 정도로 하지!”맹인호가 손짓을 하자 부하들은 깍듯이 다가와 삼페인 한 잔을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맹인호는 삼페인 잔을 손에 들고 그대로 최문성의 머리에 부어 버렸다.“그래, 잘 사과해야지. 무릎을 꿇어야 하면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고 하면 조아려야지.”“그렇게 하지 않고 버티다가 우리 허민설 심기 불편하게 만들면 내가 제일 먼저 당신을 죽여 버릴 거야!”말을 하면서 맹인호는 소파에 털썩 앉았지만 검은 가죽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싸늘한 표정으로 최문성과 하현 일행을 노려보았다.그 자리에 있던 화려한 옷차림의 남녀들은 모두 비아냥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난무했다.최 씨 가문이 하현의 편에 섰다는 건 이미 모두가 다 알고 있다.이런 마당에 최문성이 허민설에게 화해를 청하러 왔다고?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게다가 하현을 대신해서 화해
”화해?”“그게 가당키나 해?”맹인호는 최문성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한껏 비꼬다가 갑자기 수류탄을 꺼내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당신이 이걸 삼켜 버리면 허민설을 대신해 내가 약속하지. 당신이랑 화해한다고!”막무가내인 맹인호의 행동을 지켜보던 하현의 눈 밑이 소리 없이 파동을 일으켰다.이어 그의 시선은 포도송이처럼 수류탄이 매달려 있는 맹인호의 허리춤에 떨어졌다.흑주에서 돌아왔으니 맹인호의 몸에 이런 물건이 달려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긴 했다.맹인호는 모든 사람들을 화염 속에 빠뜨리는 것도 모자라 자신도 그 불구덩이 속에 허우적거릴 것이 정녕 두렵지도 않는 것인가?화려한 옷차림을 한 남녀들도 이런 맹인호의 행동에 놀라 얼굴빛이 사색이 되었다.몇 명 아리따운 여자들은 핏기를 잃은 얼굴로 맹인호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다.살기를 띠고 있는 이런 남자는 아무 생각 없는 여자들에게는 몹시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모양이다.여자는 항상 강한 남자에게 끌리게 마련이다.최문성은 맹인호가 그런 행동을 보이건 말건 무시하며 시선을 허민설에게 던졌다.“내가 말했잖아. 화해를 청하러 왔다고.”“듣자 하니까 강옥연을 납치했다던데. 그래서 내가 그녀를 구하러 온 거야.”“내 체면을 봐서 강옥연을 좀 풀어줬으면 좋겠어.”“뭐? 강옥연?”“지금 당신 강 씨 집안의 그 강옥연 말하는 거야?”허민설이 냉랭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제 발로 돌아다니는 강옥연이 어떻게 나한테 있을 수 있겠어?”“게다가 뭐? 강옥연을 풀어줘?”“최문성. 말을 할 때는 머리를 잘 써서 해야 해. 먹는 음식은 함부로 먹어도 되지만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거야.”“허민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알 거야.”최문성은 물러서지 않고 밀어붙였다.“고아신은 이미 우리 손에 넘어왔어. 우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고 왔다고...”허민설의 눈동자에 매서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고아신이
최문성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허민설에게 뺨을 맞았다.찰진 소리가 귓전에서 쟁쟁거렸다.그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떠올랐고 이를 악물고 참아왔던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허민설!”최문성은 분노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때 갑자기 사방팔방에서 십여 명의 허 씨 가문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경호원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총기가 들려 있었고 모두 최문성의 이마를 가리키고 있었다.그가 경거망동하는 순간 이 경호원들은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하현과 동리아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다.“내 이름, 당신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야!”“가당키나 해?”허민설이 마뜩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당신네 최 씨 집안은 단지 평범한 상류층 가문에 불과해. 당신 누나가 용전 항도 지부를 장악하고 있다고 세상을 다 가진 줄 아는 모양이지?”“당신네 최 씨 가문은 화 씨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니야. 분수를 알아야지!”“예전에는 화 씨 가문을 등에 없고 기고만장하더니 이제는 하현이야? 하현이 뒤에 딱 있다 생각하니까 없던 용기도 생기고 그래?”“최 씨 집안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이 난리야?”“잘 들어. 예전에 당신 집안과의 정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봐 주는 거야. 안 그랬으면 벌써 당신은 총 맞아 죽었어!”“아직도 내가 당신 체면을 세워 주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야 해?”“말 같지도 않은 소리!”어젯밤 하현에게 뺨을 맞은 후 허민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오늘 허지강과 함께 이런 판을 벌인 건 하현을 수세로 몰아넣어 어떻게든 칠 기회를 찾기 위해서였다.그런데 하현은 뒷전에 있고 최문성이 쓸데없이 나서서 이런 소란을 피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허민설의 마음속엔 분노로 가득 찼다.만약 뒷일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최문성을 죽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얼굴을 찡그리며 옆에 서 있던 동리아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허민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모두
지척에서 허민설을 바라보는 최문성의 눈꺼풀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그의 오른손이 움찔움찔했지만 끝내 손을 쓰지는 않았다.그는 어떻게 해서든 감정을 억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찰싹!”최문성이 손을 쓰지 않고 화를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허민설은 다시 손바닥을 휘둘러 이번에는 최문성의 다른 쪽 뺨을 때렸다.“쓰레기 같은 놈! 천하의 쓸모없는 놈! 당신은 전설의 병왕이 아니라 그냥 종이호랑이일 뿐이야!”“여자한테 맞아도 아무것도 못하면서!”“감히 체면은 무슨 체면?”“체면이란 게 당신한테 있기나 해?”허민설은 눈앞에 있는 최문성을 향해 극도로 경멸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항성과 도성을 이끄는 젊은 세대 중 한 명이었지만 자신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것이었다.이런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여야 속이 시원할까?죽어야 이 분통이 사그라질까?최문성은 입가에 흐르는 핏자국을 무심히 닦으며 얼굴을 가렸다.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참한지 얼마나 낭패스러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현장에 있던 남녀들은 이 장면을 보며 깔깔대며 웃었고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술잔을 마주치며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 흥미로워했다.일부는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기도 했다.누군가 처참히 당하는 꼴은 인터넷에 올라오기만 하면 바로 핫이슈감이었다.화가 치밀어 오른 동리아가 입을 열었다.“허민설, 너무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허민설의 횡포와 맹인호의 세력을 보니 도저히 자신이 가진 힘과 인맥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진정 허민설의 기세는 대단했다.그녀의 세력과 역량이 대단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최문성도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온전히 당하고만 있는 것이다.“허민설, 우리 말로 풀어 보자고.”“당신은 항성 4대 최고 가문 중 하나인 허 씨 집안 아가씨이자 미래에 항도 하 씨 가문의 안주인이 될 사람이잖아?”“나 최문성이 배짱을 부리는 날이 있긴 했지만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