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이 다가오자, 슬기는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침 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됐습니다."하현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슬기를 몇 번 훑어보았는데, 왜 그는 오늘 슬기가 자신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하현이 어젯밤에 아주 푹 자는 동안, 슬기가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이며, 만약 대표님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면 문을 열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나.그러나 하현은 목각인형과 같아 전혀 그런 뜻이 없어서, 슬기는 몹시 화가 나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았다.아침을 다 먹고 두 사람은 슬기의 집에 더 머물지 않았고, 슬기는 벤틀리를 몰고 하현을 하엔 그룹까지 태워다 줬다.이때 이미 아침 9시를 넘어섰는데, 이 상권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한편, 하엔 그룹 앞에는 웬일인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꽃집 직원들이 그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엔 그룹의 정문을 결혼식 현장과 똑같이 꾸몄다.원래 화가 나 있던 슬기는 차를 세우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경비원은요? 이게 무슨 난장판인가요, 우리 회사 이미지에 먹칠이나 하고. 얼른 치워요!"이 시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하현도 슬기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벤틀리 뒷좌석에서 내렸지만, 지금 모두의 시선이 회사 입구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오히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이 비서님, 아침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와서 그 집 도련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을 할 거라고 이곳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일이니 우리가 체면을 세워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저희 쪽에서도 딱히 막기가 쉽지 않은데…" 석진이 눈앞의 슬기를 바라보며 몸을 구부리고 말했다.비록 석진이 지금은 억울하게 경비원이 되었지만, 꿈은 크게 가지라고, 그는 지금 슬기를 보면서 남몰래 침을 삼켰다. 이 아름다운 여자는 권세가 대단했는데, 겨울보다 외모가 더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보다 더 큰 힘을 쥐고 있었는데,
“이 비서님, 당신이었군요.” 이때, 흰 수트를 입은 남자가 회사 안에서 걸어 나왔다. 아까 안에 있었는지,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달려 나왔다.슬기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 남자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어젯밤 겨울에게 프러포즈를 실패한 민혁이었다. 슬기는 민혁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 건지 대충 눈치채 무심하게 말했다. “설민혁 씨였군요. 하지만 여기는 일 하러 오는 곳이지, 낭만을 즐기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설민혁 씨께서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만 가주세요.”“급할 필요 없어요…” 민혁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가가 떨렸다.제기랄, 하현 저 머저리는 왜 온 거지? 어딜 가든 다 있잖아! 역겨운 놈!“하현 당신 무슨 병 있어? 나 미행하는 거 아니야! 이 변태 자식!” 민혁은 하현에게 입을 열 기회를 아예 주지 않았고, 삿대질하며 그를 꾸짖었다.소리 지름과 동시에, 민혁은 약간 걱정스럽기도 했다. 어젯밤 자신의 좋은 계획을 하현이 망쳤는데, 만약 이 자식이 또 와서 망친다면 끝장날 것이다.하현도 원래 민혁을 못 봤는데, 그를 본 순간 하현은 참지 못하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이 자식은 정말 짜증 나게 왜 또 하엔 그룹에 온 거지?“설민혁 씨, 여기는 하엔 그룹입니다, 당신네 SL 그룹이 아니라. 오만하고 건방지게 굴고 싶은 거면 장소를 잘못 찾으신 것 같은데요?” 민혁이 하현을 모욕하는 것을 보자, 슬기는 하현에게 아직 약간 화가 나 있었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와!”슬기의 말을 듣자, 많은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에 그녀와 하현에게 꽂혔다. 이 아름다운 여자와 딱 봐도 가난해 보이는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사이인가? 이 미녀가 남자를 두둔하고 있지 않나!민혁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났다. 슬기는 자기가 눈여겨보는 여자인데, 지금 어떤가? 하엔 그룹에서 청소나 하고 있는 하현이 슬기가 자신을 두둔하게 만들어?“설민혁 씨, 왜 또 오셨나요? 제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그런 말을 하니, 하현은 민혁을 신경 쓰기 싫어 곧장 뒤돌아서 하엔 그룹 회사 안으로 걸어갔다.“민혁 씨가 저 사람이 자기 집안 데릴사위라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그냥 회사 정문으로 들어간 거지? 게다가 바로 회사 출입증을 찍었잖아?”“설마 이 자식이 무슨 높은 신분이라도 되는 건가?”적지 않은 구경꾼들의 의견이 분분했고 하현의 신분에 호기심을 가졌다.이 말을 듣자, 민혁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분은 무슨? 우리 집안 데릴사위는 하엔 그룹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어요!”“청소부였구나!” 많은 사람이 깨달았다. 이 거지가 어떻게 안으로 들어갔는지 얘기하더니, 그런 거였구나, 어쩐지.민혁이 말을 끝마치자 실실 웃으며 슬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슬기 씨, 저 머저리는 신경 쓰지 말고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저 자식이 우리의 행복한 시간을 망쳤으니, 오늘 밤에 다시 장소를 정해서 제대로 된 얘기를 해보는 게 어때요?”이 시각, 슬기는 어제 겨울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됐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설민혁 씨, 첫 번째로 저는 당신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두 번째, 저희는 친하지 않아요. 세 번째, 저희 회사 규정에 따르면 이런 물건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자, 경비를 불러서 당신을 데려가게 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요. 모두의 체면을 떨어뜨릴 거예요.”민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 비서님,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지금 서울 전체가 다 알아요. 어젯밤에 우리 설씨 집안 저녁 식사 자리에서 당신이 나 때문에 많이 질투했잖아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리 둘은 지금 모두가 인정하는 귀여운 한 쌍이에요. 쑥스러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나랑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당신…” 슬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녀는 민혁에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오히려 석진에게 달려가며 말했다. “이 물건들을 치우세요. 그리고 만약 이 사람이 안 간다면, 사람을 불러서 쫓아내세요. 한 번 쫓아낸 적 있으니 두 번도 가능하죠!”
아직 오전인데, 서울 전체에 이미 소식이 퍼졌다. 설민혁 이 멍청이는 슬기한테 가서 고백을 했는데 결국 하엔 그룹에서 쫓겨났고, 하엔 그룹과 SL 그룹의 협업은 민혁 때문에 수포가 되었다.......SL 빌라.설 씨 집안 사람 모두 빌라 홀에 모여 난장판이 되었다. 설 씨 어르신은 상석에 앉아 어두운 표정을 보였다.한편, 민혁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얼굴에 띠고 두 팔을 늘어뜨려 홀 가운데에 서 있었다.설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일그러진 얼굴로 민혁을 둘러싸 그를 비난하기 바빴다.“설민혁, 넌 정말 바보야!”“슬기 씨가 너한테 반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 결과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역시 넌 믿을 만한 놈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오늘 밤 어떻게든 우리한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 해. 너는 우리 SL 그룹의 사업을 망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 SL 그룹의 사업 평판도 망가뜨렸어!”사람들은 말할수록 화가 났다. 이 순간,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민혁을 잡아먹을 듯했다.“모두 조급해하지 마세요. 이 일은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냥 연인 사이에 일어난 말다툼일 수도 있죠. 다들 민혁이를 믿으세요!” 옆에서 동수는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금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있나? 어젯밤에 민혁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니, 겨우 오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이 이 모양이 됐다. 자칫하면 설씨 집안이 민혁 때문에 파산할지도 모른다.그러나, 동수가 평소에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해도 지금 사람들 본인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으니, 누가 저 부자에게 친절히 대하겠나?이 시각, 상석에 있던 설 씨 어르신은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혁아, 나는 네가 우리 설씨 집안의 아직 숨겨져 있는 영웅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 결과는? 너는 날 아주 실망하게 했어. 말해 봐봐,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건데?”민혁은 울상을 지었다. “할아버지, 이 여자가 책장을 넘기는 것보다도 태도를 빠르게 바꿀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
“해결? 뭘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이번에는 누구한테 프러포즈할 건데? 남의 대표님? 문제는 남의 대표님은 남자잖아!”사람들 중에서 누군가 이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이런 말이 나오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혁을 비난했다. 본래 은아가 계약을 성사시켰을 때, 적은 금액일지라도 모두 이득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녀석이 뛰쳐나와서 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다들 궁지에 빠졌고 언제든지 파산할 위기에 처했다. 만약 어르신이 자리에 없었다면 민혁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맞아! 은아가 따낸 계약만도 못하잖아!”“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나불거리더니, 결국은? 쓰레기 자식!”“설민혁! 너 설마 다른 집안이 우리 설씨 집안에 보낸 스파이는 아닐 거 아니야!”민혁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 전에는 저한테 이렇게 말하지 않고 모두 저를 지지했잖아요. 그리고 저는 이 사건의 피해자예요… 다들 안심하세요. 제가 있는 한, 이 일을 반드시 해결할 거예요!”“무슨 재주로 해결할 건데?”“이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만 믿고 나선다고?!”사람들은 민혁의 체면 따위 신경 안 쓰고 오히려 말을 할수록 흥분해 손찌검할 뻔했다.이때, 황급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어르신, 큰일 났어요. 우씨 집안의 우만식 어르신께서 오셨어요. 게다가 저희랑 협업 중인 다른 고객들도 전부 왔어요!”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세가 드높은, 딱 봐도 비즈니스계의 거물인 사람 몇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우씨 집안의 어르신 우만식이었다.“설 회장, 우리 두 집안이 어젯밤에 결정한 협업은 아무래도 취소해야겠어요!” 만식은 앞으로 걸어 나와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친절하게 굴 생각이 없었다.안색이 살짝 어두워진 설 씨 어르신이 말했다. “우 회장, 이 협업은 어젯밤 당신이 나한테 부탁한 거예요. 어찌 그리 갑자기 취소해요?”이 순간, 백씨 집안의 백영길 어르신도 걸어 나와
“우 씨 어르신, 이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격이죠!”“맞아요! 그렇게 사업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어젯밤에는 어르신들께서 초대도 없이 오시더니 이것저것 선물하시고는 본인이 직접 협업을 제안하셨잖아요. 근데 지금 하루 만에 마음 바꾸시다니! 정말 옹졸하시네요!”설 씨들의 질책을 받자, 만식과 다른 사람들은 약한 모습 보이지 않고 그에 맞섰다.설 씨 어르신은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화가 나 테이블을 한번 세게 내리치더니 소리쳤다. “됐어요, 그만 싸워요!”양쪽 사람들 모두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그는 만식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 회장, 백 회장, 이런 말까지 나왔으니 더는 뭐라 말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오랜 세월의 우정이 있으니 내 체면 살려주는 셈 치고 사흘의 시간을 주세요. 사흘 내로 내가 하엔 그룹과의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협업을 취소하는 걸로 하죠, 어때요?”만식 무리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오랜 친구이니 당신들에게 사흘의 시간을 드릴게요. 그렇지만 사흘 후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 땅을 주세요!”“당신들…” 설 씨 어르신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분노를 느꼈다. 이 인간들은 그 땅만 바라보고 있다.설 씨 어르신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민혁이 이런 큰일을 저질렀으니 사흘 내로 하엔 그룹의 투자를 받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하지만 그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설씨 집안은 사흘의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사람들이 웃으며 속속히 떠나는 모습을 보니, 설 씨 어르신의 눈에 이들은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아 보였다!이때, 구석에서 두 손을 늘어뜨리고 서 있던 민혁은 갑자기 뭔가 문득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망설이더니 말했다. “할아버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누구?” 설 씨 어르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민혁은 음흉한 눈빛으로 사
설 씨 어르신의 눈이 반짝이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은아야, 할아버지는 네가 삐졌다는 걸 알아. 할아버지가 전에 너를 충분히 믿지 못했으니 여기서 너한테 사과할게. 그리고 동수랑 민혁이, 너희 둘도 얼른 은아한테 사과해!”동수와 민혁이는 서로를 힐끗 쳐다보며 어색한 기색을 띠었다. 그들은 평소에 우위에 있는 것에 익숙했으니, 은아같이 겉도는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하지만 문제는 지금 달리할 방법이 없었다. 민혁은 깊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천천히 은아가 있는 방향으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은아 누나,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줘요.”고개를 숙인 순간, 민혁의 얼굴은 음흉한 기색을 띠었는데 찰나였을 뿐이라 아주 잘 감췄다.반면, 동수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은아야, 민혁이가 너에게 사과했으니, 큰 아빠도 이 자리를 빌려서 너에게 사과할게.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할게. 큰 아빠 체면을 살려서 하엔 그룹에 한번 가볼 수 있을까?“그 놈의 체면! 당신 부자한테 무슨 체면이 있다고? 툭 하면 은아를 찾고, 툭 하면 우리 집 은아를 걷어차고, 당신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람들 속에 있던 희정이 갑자기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희정은 본래 우위에 있었기에, 이번에 은아의 투자가 빼앗겨서 그녀 역시 화를 낼 엄두만 없었을 뿐이지, 분노가 잔뜩 차올라 있었다. 하지만 지금 기회를 손에 넣었으니 자연스럽게 희정은 폭발했다.“제수씨, 이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어찌 됐든 다 설씨 집안에 관한 일인데, 설마 이 작은 일 하나 때문에 설씨 집안이 파산했다고 제수씨가 잘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수가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파산 두 글자를 듣자, 희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아왔는데, 거지가 될 바에 그녀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다.그러자, 희정도 태도를 바꾸고 머뭇거리면서 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은아야, 아니면 억지로라도 제안을 받아들
“대표님, 사모님께서 또 하엔 그룹 투자 안건에 관해 얘기하러 오셨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은 지금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만약 민혁이 왔다면 가라고 소리쳤을 텐데 은아의 신분은 특별하다 보니 막 대할 수가 없었다.“어? 또 은아가 왔다고?” 하현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설 씨 어르신은 늙은 여우 한 마리라 분명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만약 하엔 그룹과 협력할 수 없다면 설씨 집안은 망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하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은아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약해져 말했다. “이번만큼은 500억을 투자해주자…”“네?” 겨울은 깜짝 놀랐다.“계약서는 저번이랑 똑같이 해요. 설씨 집안 쪽에서 막 나간다면 우리는 바로 이 자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하현은 한마디 보탰다.겨울은 확신에 찬 얼굴을 보였다. 역시 대표님은 대단하시다. 당근과 채찍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설씨 집안 사람들을 갖고 놀지를 않나.“대표님, 그럼 저는 계약을 하러 가볼까요?” 겨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하현은 덤덤하게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줘야 해? 일단 거절하고 튕기다가 마지막 날에 마지못해 계약서에 서명하는 걸로 해…”“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재빨리 물러났다. 그녀는 은아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엄두가 없었다.“설은아 씨였군요, 이번에는 어쩐 일로 오셨을까요?” 응접실에 들어가자, 겨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은아는 이렇게나 빨리 겨울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냉큼 일어서며 말했다. “김 부장님, 이번에도 투자에 관한 일이에요. 저번에 저희 SL 그룹 쇼핑몰 협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 생각에는…”겨울은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설은아 씨, 제가 돕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당신네 설씨 집안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텐데… 그쪽 설씨 집안 도련님이 저희 프런트 여직원을 희롱했습니다. 저를 희
이산들은 하현에게 코웃음을 치면서 얇은 입술을 치켜들어 연신 냉소를 흘렸다.“당신도 나박하랑 똑같아. 아무것도 없으면서 허세나 잔뜩 부리는 쓰레기들이야!”임수범도 비아냥거리는 얼굴로 말을 보태었다.“야, 당신이 정말로 나와 금정개발의 협력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 내가 당장이라도 여기서 당신한테 무릎 꿇고 아버지라 부를게!”주변에 있던 예쁘장한 여자들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키득키득 웃으며 임수범의 말에 동조했다.하현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경멸과 멸시로 가득 차 있었다.그녀들은 하현이 허무맹랑한 말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하현은 임수범을 힐끔 쳐다보며 냉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어디 내 아들이 되어 볼 테야?”“흥! 가당치도 않지!”“뭐? 너...”하현에게 잔뜩 화가 난 임수범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이산들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그녀는 곁눈으로 슬쩍 핸드폰을 본 뒤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그러자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벌벌 떨기 시작했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핏기를 잃어갔다.화를 내던 임수범은 당혹스러워하는 이산들의 표정을 보고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이산들, 무슨 일이야? 왜? 무슨 일이냐고?”이산들은 얼이 나간 모습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금정개발 고위층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당신과의 계약에 문제가 있어서 날 해고하기로 결정했대...”“그리고 경찰서 사람들이 내가 구매한 건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입하겠다고 했대!”“뭐라도 하나 꼬투리가 잡히면 난 끝장이야!”“임수범, 나 좀 도와줘! 제발 나 좀 도와줘!”“난 당신 여자잖아!”이 말을 들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졌다.도무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녀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하현에게로 넘어갔다.이산들도 그제야 이 모든 게 하현이 한 짓이라는 걸 눈치채고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개자식! 감히 날 이렇게 만들어?!”“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현은 임수범 일행들이 호들갑을 떨든 뭘 하든 내버려두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저 술잔을 빙글빙글 흔들며 몇 모금 음미하고만 있었다.나박하는 하현이 겁을 먹은 줄 알고 얼른 일어나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임수범, 오해야. 이 모든 게 다 오해라고!”“내가 당신을 오해한 거라고?”임수범은 손을 뻗어 나박하의 얼굴을 툭툭 건드리며 거리낌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당신이 뭔데?”“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오해네 어쩌네 그러는 거야?”말을 마치며 임수범의 시선이 하현에게로 향했다.임수범은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마음씨가 착해서 함부로 손을 쓰지 않아! 내 사람들이 손을 쓰게 하지도 않아!”“어쨌든 때리고 죽이는 일은 우리 같은 고귀한 도련님한테는 안 어울리는 일이거든. 너무 저급하잖아!”“너무 무능한 짓거리고!”“하지만 당신 가족이 직접 나서서 당신의 이 보잘것없는 놈을 죽이게 만들 거야!”“그리고 난 뒤 난 그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예쁜 마누라를 얻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만약 그렇지 않고 예쁜 마누라를 얻는다면 결국 나 좋은 일만 되는 거지!”험악한 말을 내뱉은 임수범은 오만하게 웃었다.“앉아요.”하현은 저자세를 보인 나박하를 끌어당겼고 무덤덤한 얼굴로 임수범을 쳐다보았다.“임수범?”“건축자재업을 한다지?”“맞아. 내가 바로 임수범이야!”“내가 뭘 하는지는 왜 말하는 건데? 용서라도 빌려고? 아니면 나한테 덤비겠다는 거야?”“그런데 당신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난 당신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감히 나한테 덤벼들다니!”“내가 매달 몇 번씩이나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들을 짓밟긴 하지만 당신처럼 이렇게 당돌한 사람은 처음이야.”“자자, 그래 내 이름 내 배경, 내 회사 다 알려 줄게. 어디 능력 있으면 마음대로 날 건드려 봐!”잠시 후 임수범은 명함 한 장을 꺼내 하현 앞에 내동댕이치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이산들은 이 광경을
왕인걸의 안내를 따라 하현과 나박하는 자리에 앉았다.하지만 나박하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현은 룸에 들어가는 것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그는 세트 메뉴를 주문하고 레드 와인 한 병을 개봉하여 마시기 시작했다.“하현, 우리 여기서 나가는 게 어때요?”나박하가 망설이는 얼굴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내가 당신 실력을 믿지 않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비록 이산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나박하의 원한이 조금은 풀리긴 했지만 그녀 뒤에 있는 임수범을 떠올리자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지금의 그는 누굴 건드리고 말고 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무슨 말이에요?”하현은 똑바로 앉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은 이제 나의 형제이자 친구입니다.”“당신한테 미움을 산 사람은 나한테도 미움을 산 것입니다.”“당신 체면이 서지 않으면 내 체면도 서지 않는 거죠!”“지금은 떨어진 당신의 자존심을 조금 들쳐 세웠을 뿐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예요?”나박하는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하현, 당신이 날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하지만 난 정말로 당신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가 당신을 형제라고 여긴 이상 다른 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하현은 나박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어서 식사를 계속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당신한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금정 바닥에서 내가 당신을 보호하는 한, 천왕 노자가 와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요.”“날 믿어 보세요!”“퍽!”하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식당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누군가가 발로 문을 걷어차며 기세등등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선두에 선 남자는 아르마니 정장 차림이었고 걸리는 건 다 부숴버릴 것처럼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이산들의 인솔 하에 그는 나박하와 하현이 있는 곳
이산들은 지지 않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당신들 여기 설거지 알바하러 온 거지? 분명해! 그렇지?”“그런데 뭐? 누구? 어디 아파?”왕인걸이 앞으로 나가 그녀의 뺨을 때리려 하자 하현은 손을 흔들며 제제하고 나섰고 눈을 가늘게 뜨고 이산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 혹시 몸에 병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이산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당신이야말로 몹쓸 병균 덩어리야! 당신 가족 모두가 병균 덩어리들이라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만약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당신은 아무 일이 없어도 자주 딸꾹질을 했을 것이고 게다가 입안이 쓰다고 느꼈을 거야.”“심지어 말할 때 스스로도 입냄새가 난다고 느꼈을 거고.”“그래서 당신은 입냄새를 감추려 자꾸 껌을 씹었을 거야.”하현의 말에 이산들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당신이 어떻게 그걸 알아?”하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의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무술을 배운 적은 있어.”“동양의학에서는 의술과 무술을 동시에 중시하기 때문에 난 의학에 대한 지식도 좀 있지.”“그리고 보아하니 당신은 잠을 깊이 못 자고 자꾸 잡다한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얼음을 조금만 먹어도 위가 쓰리고 아프다고 느꼈을 거고...”하현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이대로 가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암에 걸릴 거야.”“무슨 헛소리하는 거야?!”하현이 이산들의 증상에 관해서 막힘없이 술술 늘어놓았지만 그녀는 그의 능력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운전이나 하면서 먹고사는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의술을 알 수 있겠어?”“경고하는데 자꾸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여자들도 못마땅한 눈초리로 하현을 노려보았다.하현 따위가 한눈에 이산들의 증상을 간파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못 믿겠으면 단전 아래를 눌러 봐. 배꼽 아래 한 치 정도 되는 곳 말
나박하는 약간 어리둥절해다가 이내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그는 이곳의 멤버십 카드가 매년 수천만 원의 회원비를 낸다는 것을 떠올렸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산이 동결된 이후 소위 회원비를 낼 돈이 없었다.비꼬는 어조가 다분히 담긴 직원의 말에 이산들 일행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뭐? 카드가 만료되었다고?”“나박하,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된 거야?”“이런 꼴로 밥을 먹으러 오다니! 부끄럽지도 않아?!”“이 뚱보야. 들어가지도 못할 걸 왜 와서 이 창피를 당하는 거야? 하하!”“파산한 뚱보가 밖에서 밥을 빌어먹을 것이지 뭐 하러 여긴 와서 재벌 2세인 척하는 거야! 당신 여전히 그 허영심은 못 버렸구나!”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던 나박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와 슬픔을 삭혔다.호랑이가 평양에 가면 개한테 속고, 초라한 봉황은 닭보다 못하다고 했던가!나박하는 오늘 진정으로 그런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그는 이산들 일행에게는 눈길도 주지 못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며 말했다.“하현,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요.”“좋은 곳에서 맛있는 밥을 사 주려고 했어요.”“그런데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나박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다른 데로 가시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식당일 뿐인데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못 들어가겠어요?”손님을 맞이하던 직원 두 사람은 피식하고 코웃음을 쳤다.하현의 허풍이 너무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저런 사람 따위가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하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블랙골드 카드를 꺼냈다.그의 블랙골드 카드는 전 세계적으로 특권이 있었다.이런 곳에서도 당연히 최고 등급 멤버십의 효력이 있었다.두 직원은 아무 생각 없이 카드를 받아들었지만 그가 건넨 카드가 블랙골드 카드인 것을 본 순간 갑자기 온몸을 덜덜 떨었다.멤버십 카드가 없어도 블랙골드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게다가 블랙골드
오랫동안 사귄 전 여친과 그녀의 친구들에게 한껏 조롱을 당한 나박하는 자신이 아무리 심성이 좋아도 이 순간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그는 이산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산들,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내가 전에 당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당신 잘 알 거야. 지금 당신이 이런 날 어떻게 대하든 난 상관없어.”“그렇지만 더 이상은 안 참아...”“뭐? 뭐라고?!”이산들의 얼굴은 비아냥거리는 기색으로 가득했다.“이 거지 같은 쓰레기가 뭐라는 거야? 당신이 과거에 정말로 대단한 사업가인 줄 알아?”“아무런 역량도 재주도 없으면서 그래도 존심은 남아서 남자라는 거야, 지금?”“뭐?!”나박하는 이산들의 말에 말문이 막혀서 뭐라고 반박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하현은 나박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나박하, 됐어요. 이런 천박한 여자들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어서 밥이나 먹으러 가요!”“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천박한 여자?!”“똑똑히 들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거야? 우리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이산들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게다가 뭐?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서 밥을 먹겠다고?”“헛! 지금 농담하는 거야?”“여기 잔심부름하러 온 거 아니야?”“이곳 금정호텔은 회원제야!”“멤버십 카드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야?”여자들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하현과 나박하를 쳐다보았다.얼마나 더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야 알아먹는 거야?“헛소리 그만해! 당신들 이러는 거 정말 역겨워!”이산들은 흰색 멤버십 카드를 꺼내 살짝 흔든 다음 눈초리를 매섭게 치켜뜨며 말했다.“얘들아, 어서 들어가자.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서 얼뜨기들하고 말 섞을 시간이 어디 있어? 한 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당신들 둘은 밖에서 기다려. 이따가 우리가 다 먹고 남은 음식이 있으면 자비를 베
”저 뚱보는 누구야? 여자 처음 봐? 왜 우릴 자꾸 쳐다보는 거야?”“변태가 틀림없어. 봐 봐. 아직도 내 다리만 쳐다보잖아!”“정말 재수없어! 오늘 우리가 스타킹도 안 신고 나온 건 어떻게 알고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아 짜증나!”“저런 남자는 부끄러움도 몰라. 아마 우리가 꽃다운 처녀란 걸 모르나?”“저렇게 빤히 쳐다보면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좋은 자리에 시집갈 수 있겠어?”“아 정말!”“변태 같은 놈!”“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단 말도 모르나?!”“주제도 모르고 넘보다니!”여자들은 서로 재잘거리며 떠들었다.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이산들도 이때 고개를 살짝 들었다.나박하에게 시선을 던진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어머? 나박하? 나박하잖아!”이산들은 한눈에 나박하를 알아보았다.꽤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순간 지난 일을 떠올리던 이산들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그녀는 아리따운 얼굴에 조롱하는 기색을 떠올렸다.“너네들 저 사람 몰라? 우리 금정에서 분리수거 사업을 하던 사람이잖아! 예전엔 내 꽁무니를 따라다녔지만 지금은 완전 파산한 빈털터리!”“그가 고급차를 몰고 있긴 하지만 사실 운전해서 버는 돈은 한 달 고작 벌어 봐야 얼마 되지도 않아!”처음에 나박하를 쫓아다닐 때만 해도 이산들은 자신이 부잣집에 시집가는 줄 알았다.하지만 나박하가 별 볼 일 없어지자 도저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얼른 임수범에게로 환승했다.나박하가 몰락한 뒤 그녀는 그를 한없이 원망했다.자신의 청춘을 엄한 놈에게 바쳤다고 생각하니 눈앞에서 그를 짓밟아 죽여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어머? 정말이야? 이산들, 정말이냐고?”“저런 사람이 네 꽁무니를 따라다녀?”여자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들썩거렸다.“집에 거울도 없대? 자기가 어떤 몰골인지도 모르나 봐!”“얼굴도 별 볼 일 없고 가난한 주제에 무슨 자신감이래?”“혹시 뭘 잘못 먹은 거
”전 여자친구예요. 이산들.”“그녀는 수년 동안 날 따라다녔고 결국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죠.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어요.”“그런데 뜻밖에도 형제와도 다름없는 그와 함께하고 있었죠!”“내가 관청에서 자산을 동결당해 일을 멈추었을 때 그녀는 내 마지막 남은 현금을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꼬임에 내 도장으로 함부로 보증도 서서 결국 많은 빚을 떠안았어요...”“하지만 다행히 운이 좋았어요. 그때 형수님이 도와주셔서 너무 고마웠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지난 일을 떠올리자 나박하는 다시 그 감정에 휩싸인 듯 마음 깊이 고마움을 표했다.하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가 원망스러워요?”“원망스럽지만... 요 며칠 동안 깨달았어요.”나박하의 얼굴엔 당당한 기색이 떠올랐다.“한 여자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만큼 미련한 짓이 없죠.”“정말 능력이 있으면 직접 복수하면 되는 거예요.”“안타깝게도 지금 난 능력이 별로 없어요.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만 해도 벅차죠.”“복수할 자격도 능력도 없어요.”“그녀는 여러모로 나보다 훌륭해요.”“지금은 금정개발 구매 담당자로 연봉에 상여금까지 합하면 1년에 몇억은 벌 거예요.”“그리고 형제와도 같았던 임수범은 건축 자재업을 전문으로 하고 있어요. 지위가 나랑 비교가 안 되죠. 그래서 날 함부로 짓밟을 수 있는 거고요!”“임수범은 금정개발 사장인 임단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어요.”“지금의 난 더더욱 그들을 건드릴 수 없어요!”나박하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그러나 그는 두 사람이 마치 버려진 개를 짓밟듯 자신을 대했다는 것만큼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입에 올릴 수 없었다.그저 속으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금정개발이 그렇게 대단해요?”하현이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시총 이천억도 안 되는 이제 막 시작한 회사라고 들었는데.”“하고 많은 부동산 개발 회사 중에 보잘것없는 정도 아니에요?”
나박하는 한숨을 내쉬었고 하현은 한 남자의 삶의 고된 무게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하현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누가 당신 일을 방해했죠?”“과거의 라이벌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렇게 비겁한 짓을 할 수가 있어요?”나박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한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형제 같은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였어요...”“내가 초라해지자 두 사람은 완전히 얼굴을 돌리고 모른 척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날 짓밟았어요!”“그가 몇 년 동안 내 사업에서 많은 돈을 몰래 빼돌렸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내통하고 있었고요...”“난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그래서 그들은 내가 재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거예요. 기를 쓰고 날 짓밟았죠.”“내가 재기하면 가장 먼저 그들을 죽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난 이제 사업 같은 거 안 할 거예요. 나한테 차가 있으니 이걸로 차량 운전이나 하면서 살래요.”“그러면 그 사람들도 나한테서 마음을 놓을 것이고 나도 자유로워지겠죠.”“분리수거 사업이 다 정리되면 그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노후를 보낼 생각이에요.”그동안의 일들을 쭉 늘어놓은 나박하는 후련한 듯 소탈한 미소를 보였다.하지만 하현은 그의 강인함 뒤에 못내 내려놓을 수 없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한때 승승장구하던 분리수거 업자가 정부 정책의 변화 때문에 한순간에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나박하 정도의 능력이라면 재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과거에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짓밟힌 쓰라린 기억은 결국 그를 무너뜨리고 말았다.그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도록 아플까?그 슬픔이 얼마나 그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냈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그는 닥쳐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받아들일 수밖에.하현은 짐짓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뻗어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