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주시하며 물었다.“누구랑 만나는데?”‘누구랑 만나냐고?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분명 그때는 이렇게 묻지 않았다.“... 친구요.”송이안은 엄마가 주선한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박도준이 화를 낼까 봐 거짓말을 했다.“그래, 가봐.”박도준은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뿐, 굳이 성별까지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네.”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들고 나갔다.영업팀 팀장에게 서류를 건넨 뒤 비서실로 돌아온 송이안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제우 호텔.송이안이 동창 모임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와 이제 막 씻으려고 하는데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문을 열자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고귀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순간 송이안은 가슴이 움찔거렸다.“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편 박도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차갑게 노려봤다.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도준은 다짜고짜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고 오른발로 문을 쾅 닫았다.두 눈은 빨갛게 충혈됐고 온몸에 배인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한없이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마치 표적을 노리는 야수
이번 회의는 두 시간 동안 지속했다.회의를 마치고 나서 송이안은 박도준을 따라 문밖을 나섰다.10층에 도착하고 박도준은 대표이사실로, 그녀는 비서실로 돌아갔다.한창 바삐 돌아친 후, 행정팀 한성훈 팀장이 그녀 앞으로 다가와 서류를 쓱 건넸다.“이건 대표님이 요구하신 신우 그룹 칩 관련 서류예요. 송 비서가 대신 전해주세요.”“...”회의 때 분명 그에게 분부한 일인데 왜 송이안더러 대신 전해주라는 걸까?혹시 대표님이 두려워서 감히 찾아가지 못하는 걸까?송이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한 팀장님, 이건 방금 대표님께서 한
송이안은 실사 서류를 들고 대표이사실로 향했다.그녀는 책상 앞에 서서 양손으로 깍듯이 서류를 건넸다.“대표님, 차현 그룹 실사입니다.”박도준은 그녀를 힐긋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받을 뿐 나가보란 말은 없었다.차현 그룹 실사를 쭉 훑어보더니 그제야 송이안에게 질문을 건넸다.“이거 너도 다 봤어?”“아니요. 재무팀에서 보내왔어요.”송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한편 박도준은 그 서류를 다시 송이안에게 건네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차현 그룹은 분명 갚지 못한 빚이 400억 있는데 만약 내가 그대로 인수합병한다
아직 퇴근 전인 박도준은 그녀를 보더니 한결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차갑고 싸늘했다.“대표님.”송이안이 사무실 책상 앞에 서서 그에게 말했다.“말해.”이 남자의 눈빛에서 아득한 소외감이 느껴졌다.“법무팀 장서우 팀장이 차현 그룹 실사를 두 번이나 확인해봤는데 채무가 있다는 내용은 본 적이 없다네요. 회계도 똑같은 말을 했고요.”“하지만 서류에 분명 채무가 있다고 적혔고 이 실사는 재무팀 성 팀장님 어시가 보내온 거니 나중에 이 문구를 보태 넣은 거로 의심이 됩니다.”송이안은 행여나 그가 화를 낼까 봐
마음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뒷모습인지라 그녀를 한눈에 알아챘다.그런데 병원에는 갑자기 무슨 일일까? 몸이 불편해서? 아니면 누구 병문안을 온 걸까?박도준은 더 생각하지 않고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갔다.다만 엘리베이터가 6층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송이안의 뒷모습이 보였다.그는 송이안을 따라 7번 병실까지 왔지만 함께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병실에서 송이안은 마음을 가다듬고 활짝 웃으면서 송이준에게 말했다.“이준이 오늘은 좀 어때?”송이준도 웃으며 누나를 반겨주었다.“아주 좋아. 나 괜찮으니
다음날, 대정 그룹 대표이사실.송이안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서야 용기 내어 노크했다.“들어와.”안에서 감미로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다소 싸늘한 기운도 느껴졌다.송이안은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의자에 앉아있는 박도준은 검은색 정장 차림에 조각 같은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강렬한 포스를 내뿜고 있으니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압박감을 주었다.그는 짙은 눈길로 송이안을 쳐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무슨 일이야?”“서류 검토 부탁드립니다.”그녀는 어젯밤에 배
박도준은 심장이 쿵쾅대고 눈가에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토록 놀란 적이 또 있을까?그날 송이안이 왜 약속을 어겼는지 그제야 알게 됐다.동생이 제때 밀쳐내지 않았다면 그녀는...그 당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예기치 못했다.“그래서 네 동생은 그때 어떻게 됐어?”“교통사고를 당해서 갈비뼈가 두 대 부러지고 왼쪽 다리는 골절되었어요. 세 번의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으니 저는 누가 뭐래도 이준이만큼은 끝까지 책임져야 해요. 걔한테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아야죠.”박도준은 전에 항상 그녀가 매정한 사람이
박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주시하며 물었다.“누구랑 만나는데?”‘누구랑 만나냐고?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분명 그때는 이렇게 묻지 않았다.“... 친구요.”송이안은 엄마가 주선한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박도준이 화를 낼까 봐 거짓말을 했다.“그래, 가봐.”박도준은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뿐, 굳이 성별까지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네.”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들고 나갔다.영업팀 팀장에게 서류를 건넨 뒤 비서실로 돌아온 송이안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전에 하라고 했던 시장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조현민을 바라보며 말하는 박도준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상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했다.조현민은 정중한 표정으로 박도준을 바라보았다.“대표님, 부탁하신 시장 조사는 다 끝났는데 아직 컴퓨터로 출력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가져다드릴게요.”박도준이 짧게 대꾸하며 물었다.“헤드헌터 쪽에서 사람은 찾았어요?”조현민이 답했다. “찾긴 했는데 상대가 제시한 연봉이 너무 높습니다.”박도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는데, 깊은 눈빛 속에는 냉
요즘은 사진으로 사기를 치는 게 대다수다.사진만 보면 강영 어촌이 어느 곳이나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실상은 어떨지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다.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박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현장에 가서 그쪽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알아봐야겠어.”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공 팀장님께 강영 어촌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방문 시간을 잡으라고 하겠습니다.”“그래.”박도준의 대답을 들은 송이안이 밖으로 나가고 남자는 계속해서 서류를 살펴보며 사인하기 바빴다....송이안은 비서실로
방은영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그녀는 박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은 모르시겠지만 송 비서님께서 대표님 행정 비서라는 이유로 매일 비서실에서 저희를 따돌리고 인신공격해요.”방은영의 말에 하유영도 맞장구를 쳤다.“대표님, 송 비서님께서 가끔 횡포를 부리실 때가 있어요.”“...”이게 바로 사무실 동료들에게 밉보인 대가다.누구 한 명 나서서 그녀를 저격하기 시작하면 잇따라 다른 사람들도 속속 거들기 바빴다.송이안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질 뻔했고 박도준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셋, 이번 달 월급
“...”주나연이 다가와서 욕을 했다.“송이안 씨, 누구한테 수준 운운해요? 당신이야말로 수준 참 저급해!”송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아무리 저급해도 당신들만 하겠어요? 이젠 선배도 가리지 않고 막 달려드는데. 그래도 조심해요. 그쪽 친구 눈이 뒤집혀서 뵈는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언제 그쪽도 당할지 몰라요.”방은영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렸다.“송이안, 이 나쁜 년, 죽여 버릴 거야!”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방은영이 정말로 때리려 하자 송이안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배를 쑥 내밀며 말했다.“내가 권혁진
우현서는 소심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선배님께서 바쁘셔서 저보고 서류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송이안에게 전달받는 것이 익숙했던 박도준은 개발 건을 가져온 사람이 우현서이기에 그저 물어본 것이었다.“그래.”박도준은 얇은 입술로 무심하게 몇 글자를 뱉어냈다.“가봐.”“네, 대표님.”우현서는 마치 사면받은 듯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가려고 돌아섰다.비서실로 돌아온 우현서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송이안에게 다가가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말했다.“선배님.”고개를 든 송이안이 불쌍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
그 말을 듣자마자 송이안은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그 여리고 예쁜 얼굴에 감격의 미소가 금세 번졌다.“잘됐네요. 대표님, 감사합니다.”박도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송이안을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월급 깎이고 싶어?”송이안은 문득 어젯밤 일이 생각나 잠시 멈칫했다.밖에서는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하지만 오진서가 눈앞에 있고 여긴 집도 아닌데 어떻게 그의 이름을 부르겠나.“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송이안은 그가 화를 낼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박도준도 그녀를 난처하게 만
병실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자 송이준은 이런 답답함이 싫어서 송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누나, 엄마가 군인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준다는데 한번 만나볼래?”송이안의 가는 눈썹에 주름이 잡히며 서연진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몇 년 더 지나서 재촉한다면서요. 왜 약속 안 지켜요?”“이번에는 미화 이모 아들이야. 군대에서 막 제대했는데 엄청나게 잘생기고 양돈장을 차려서 장사도 아주 잘하고 있어. 걔랑 만나면 넌 사모님이 되어서 나중에 돈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애가 책임감이 있고 남자다워서 너랑 잘 어울릴
“네.” 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꽤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식사하는 게 어때요?”“네가 원하는 대로 해.”“네.”송이안과 박도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박도준의 시선이 송이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고등학교 시절, 박도준은 송이안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데 정의감도 남달라서 무척 좋아했다.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했고 이제 겨우 힘들게 그녀를 만났는데, 사고 때문에 여자는 그와 함께했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비록 기억은 없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부하 직원이자 아내가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