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준의 큰형 박태오는 그보다 두 살 많은데 이미 유부남이다.아직 미혼인 여동생 한 명, 남동생 한 명이 있긴 한데 나이가 어리다 보니 재촉하지 않고 결국 모든 화살은 그에게 돌아왔다.박도준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할아버지, 이런 거로 저한테 협박 안 돼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전화를 꺼버렸다.할아버지께 혼인 신고한 사실은 끝내 알리지도 않았다.하긴, 그는 단지 배 속의 아기만 원할 뿐, 그녀의 존재를 밝힐 리가 없다.박도준은 그녀가 신은 하이힐을 힐긋 내려다봤다.
차가 곧장 케이 레스토랑에 도착했다.주단우가 차 문을 열어주었고 박도준이 먼저 내린 후 송이안도 뒤따라 내렸다.잠시 후 주단우는 두 사람을 모시고 레스토랑 8층 룸으로 향했다.그는 조심스럽게 노크한 후에야 문을 열었다.커다란 한옥 인테리어 룸에 둥그런 박달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딥블루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았고 양옆에 여자 두 명,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다.주단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박 대표님 오셨습니다.”그가 말한 대표님은 바로 한주 그룹 서지민 대표였다. 서지민은 재빨리
그의 단호한 태도에 송이안은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말을 마친 박도준은 욕실로 씻으러 들어갔고 이때 마침 송이안의 휴대폰이 울렸다.엄마한테서 걸려온 전화에 그녀는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네, 엄마.”“너 지금 어디야? 저녁에 왜 이준이 보러 안 왔어?”“지금 출장 중이에요. 내일 오후쯤에 돌아갈 거예요. 오전에는 또 경주에 한 번 다녀와야 하거든요.”박도준의 비서로서 하루가 멀다 하게 출장을 다니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그녀도 이제 이런 업무 모드에 적응할 대로 적응했다.“그래? 다름이 아니라 엄마 친구 주경미
손에 든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고,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박도준의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그날 밤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가 한창 엉뚱한 상상에 잠겼을 때 소파에 누워 있던 박도준이 눈을 번쩍 떴다.곧이어 볼이 빨갛게 물든 채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송이안을 발견했다.이번 달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이미 깨어났는데도 발견하지 못하고 푹 빠진 모습이라니.순간, 배 위에 포갠 양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하지만 송이안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정말
옷방으로 걸어가 안을 들여다보니 행거에 여러 가지 옷이 가득 걸려 있었다.심지어 임부복도 적지 않았다.주영철에게 물어보자 주수 별로 장만했다고 했다.그리고 신발도 굽이 없는 걸로 통일했다.이내 안에 들어서서 옷과 신발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전부 명품밖에 없었다.20년을 살아오면서 감히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송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영철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이 왜 저한테 옷이랑 신발을 이렇게나 많이 사주신 거죠?”게다가 세계 최고의 의사를 모셔 남동생을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뿐만 아니라 수술비마저
“그럼 언제까지 일할 건데? 너도 본인이 임신한 거 알잖아. 매일 일에 치이다가 태아한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해?”송이안과 그의 아이인 만큼 배 속에 살아 있어야만 두 사람 사이에 연결 고리가 생긴 셈이다.아이를 잃게 되는 순간 이혼을 제기할 게 뻔했고, 나중에는 그녀를 곁에 붙잡아두기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이한테 영향이 없도록 너무 무리하지 않을게요.”“그래. 만약 더는 버티기 힘들다면 바로 얘기해.”“알았어요.”박도준이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쳐다보자 벌써 12시 30분이 되었다.“좀
정주시 청명고등학교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강주희의 머릿속에 그 사건이 떠올랐다.이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고 인자한 눈빛에 웃음기가 묻어났다.“역시 인연인가 봐.”“웬 인연이요?”박하린은 무슨 뜻인지 당최 이해가 안 갔다.“그거 알아? 네 오빠랑 송이안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어. 당시 옆 반에 있었거든.”“네? 진짜요?”박하린이 깜짝 놀랐다. 송이안과 박도준이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어쩐지 송이안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다고 했어. 청명고등학교를 언급한 덕분에 생각이 났어.”“그렇다면 고등학
송이안은 차에 올라탔다. 오진서가 출발하고 나서야 가방에서 혼전 계약서를 꺼내 박도진에게 건네주었다.“대표님, 확인 한번 부탁드립니다.”“그래.”박도진은 뼈마디가 선명한 손을 뻗어 그녀가 건네준 서류를 펼치더니 훑어보기 시작했다.내용이 구구절절 가득했지만 12번째 조항에 시선이 단번에 빼앗겼다.[아이를 낳고 즉시 이혼할 것.]혼인 신고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혼할 생각하는 거지?설마 진짜 남동생을 치료해준다고 해서 대답한 건 아니겠지?무려 친자식한테 어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단 말이지?부모로서 이유 불문하고
박도준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주시하며 물었다.“누구랑 만나는데?”‘누구랑 만나냐고?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전에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분명 그때는 이렇게 묻지 않았다.“... 친구요.”송이안은 엄마가 주선한 맞선 상대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박도준이 화를 낼까 봐 거짓말을 했다.“그래, 가봐.”박도준은 상대가 누구인지 물을 뿐, 굳이 성별까지 알려고 하지는 않았다.“네.”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들고 나갔다.영업팀 팀장에게 서류를 건넨 뒤 비서실로 돌아온 송이안은 책상 위를 정리하고 컴퓨터를
“전에 하라고 했던 시장 조사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조현민을 바라보며 말하는 박도준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상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게 했다.조현민은 정중한 표정으로 박도준을 바라보았다.“대표님, 부탁하신 시장 조사는 다 끝났는데 아직 컴퓨터로 출력하지 못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가져다드릴게요.”박도준이 짧게 대꾸하며 물었다.“헤드헌터 쪽에서 사람은 찾았어요?”조현민이 답했다. “찾긴 했는데 상대가 제시한 연봉이 너무 높습니다.”박도준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는데, 깊은 눈빛 속에는 냉
요즘은 사진으로 사기를 치는 게 대다수다.사진만 보면 강영 어촌이 어느 곳이나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실상은 어떨지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다.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서라도.박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 말대로 현장에 가서 그쪽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알아봐야겠어.”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공 팀장님께 강영 어촌 담당자에게 연락해서 방문 시간을 잡으라고 하겠습니다.”“그래.”박도준의 대답을 들은 송이안이 밖으로 나가고 남자는 계속해서 서류를 살펴보며 사인하기 바빴다....송이안은 비서실로
방은영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그녀는 박도준을 바라보며 말했다.“대표님은 모르시겠지만 송 비서님께서 대표님 행정 비서라는 이유로 매일 비서실에서 저희를 따돌리고 인신공격해요.”방은영의 말에 하유영도 맞장구를 쳤다.“대표님, 송 비서님께서 가끔 횡포를 부리실 때가 있어요.”“...”이게 바로 사무실 동료들에게 밉보인 대가다.누구 한 명 나서서 그녀를 저격하기 시작하면 잇따라 다른 사람들도 속속 거들기 바빴다.송이안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질 뻔했고 박도준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들 셋, 이번 달 월급
“...”주나연이 다가와서 욕을 했다.“송이안 씨, 누구한테 수준 운운해요? 당신이야말로 수준 참 저급해!”송이안은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아무리 저급해도 당신들만 하겠어요? 이젠 선배도 가리지 않고 막 달려드는데. 그래도 조심해요. 그쪽 친구 눈이 뒤집혀서 뵈는 게 없는 것 같으니까 언제 그쪽도 당할지 몰라요.”방은영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렸다.“송이안, 이 나쁜 년, 죽여 버릴 거야!”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방은영이 정말로 때리려 하자 송이안은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배를 쑥 내밀며 말했다.“내가 권혁진
우현서는 소심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선배님께서 바쁘셔서 저보고 서류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송이안에게 전달받는 것이 익숙했던 박도준은 개발 건을 가져온 사람이 우현서이기에 그저 물어본 것이었다.“그래.”박도준은 얇은 입술로 무심하게 몇 글자를 뱉어냈다.“가봐.”“네, 대표님.”우현서는 마치 사면받은 듯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을 나가려고 돌아섰다.비서실로 돌아온 우현서는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송이안에게 다가가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말했다.“선배님.”고개를 든 송이안이 불쌍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
그 말을 듣자마자 송이안은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그 여리고 예쁜 얼굴에 감격의 미소가 금세 번졌다.“잘됐네요. 대표님, 감사합니다.”박도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송이안을 불쾌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월급 깎이고 싶어?”송이안은 문득 어젯밤 일이 생각나 잠시 멈칫했다.밖에서는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이름을 불러야만 했다.하지만 오진서가 눈앞에 있고 여긴 집도 아닌데 어떻게 그의 이름을 부르겠나.“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송이안은 그가 화를 낼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다.박도준도 그녀를 난처하게 만
병실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자 송이준은 이런 답답함이 싫어서 송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누나, 엄마가 군인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준다는데 한번 만나볼래?”송이안의 가는 눈썹에 주름이 잡히며 서연진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몇 년 더 지나서 재촉한다면서요. 왜 약속 안 지켜요?”“이번에는 미화 이모 아들이야. 군대에서 막 제대했는데 엄청나게 잘생기고 양돈장을 차려서 장사도 아주 잘하고 있어. 걔랑 만나면 넌 사모님이 되어서 나중에 돈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 애가 책임감이 있고 남자다워서 너랑 잘 어울릴
“네.” 송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시간이 꽤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식사하는 게 어때요?”“네가 원하는 대로 해.”“네.”송이안과 박도준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박도준의 시선이 송이안의 얼굴에 고정되었다.고등학교 시절, 박도준은 송이안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데 정의감도 남달라서 무척 좋아했다.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했고 이제 겨우 힘들게 그녀를 만났는데, 사고 때문에 여자는 그와 함께했던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비록 기억은 없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부하 직원이자 아내가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