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규는 한 손에는 휴지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성혜인을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그늘을 만들어 주더니 휴지를 건넸다.“페니 씨, 무슨 일 있었어요?”서민규의 목소리를 듣고 성혜인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여기에서 다 만나요?”“저는 여동생 약을 받으러 왔어요. 제 여동생이 다리가 안 좋다고 말했던가요.”서민규는 우산을 든 채로 성혜인의 곁에 앉았다.“이렇게 뜨거운 철제 벤치에 어떻게 앉아 있었어요. 역시 무슨 일 있었죠? 제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성혜인의 입장에서 서민규는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집안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아니에요. 그냥 일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도치듯 북받치던 감정이 서민규와 마주친 순간 빠르게 식었다. 속상해하는 것도 오직 혼자 있을 때만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구기며 셔츠 단추를 푼 그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성혜인과 서민규를 바라봤다. 발걸음을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고 있던 여자가 지금은 활짝 웃고 있었다. 싸구려 우산이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반승제는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시선을 거뒀다. 조금 남았던 설렘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녀는 성휘와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반승제는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그렇게 한 100m 정도 멀어져갔을 때 반승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미러를 힐끗 봤다.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는 서서히 한데 겹치고 있었다.‘키스하나?”반승제는 핸들을 힘껏 꽉 잡았다. 다만 내정한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냉정하지는 못했는지 자칫 사고를 낼 뻔하고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윤단미는 그새를 참지
혜인이 재빨리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닫히는 차 창문에 머리카락이 끼울 뻔했다. 이미 멀리 사라져버린 자동차를 보자 그녀는 참으로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장님, 방금 대표님을 뵀었는데요, 저더러 자의식 과잉이래요. 아니면 단미 씨에게 연락을 해보는 건 어떠세요? 지금 대표님하고 같이 차에 타고 있으세요.」혜인의 말이 못 미더웠던 임경헌은 정말로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단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물어봐 주겠다고 대답했다.통화가 종료되고, 그녀는 승제를 바라보았다.“경헌 도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지금 여자친구를 굉장히 아끼시나 본데? 이번에는 진지하게 만나는 건가 봐. 승제야, 효원 씨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건 어때?”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웃지 않을 때, 승제의 눈빛은 매우 깊고 날카로워 보였다.한참 후, 승제가 가볍게 웃었다.“그냥 안내 데스크 직원 한 명 잘랐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어볼 일이야?”그 말을 들은 단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승제에게 말했다.“그래, 네 말대로 단지 안내 데스크 직원일 뿐인데, 도련님하고 꼭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게 만들어야 하냔 말이야. 도련님은 네 사촌 동생이잖아.”얇고 고운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승제의 먹구름 낀 듯 어두웠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그럼 돌아오라 하지.”단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조금 전 혜인을 대하던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황급히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소식을 들은 경헌이, 참지 못하고 혜인에게 또 한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페니 씨. 괜히 저 때문에 형한테 안 좋은 말이나 듣고… 역시 단미 씨가 하는 말이 형한테 먹히나 봐요. 2분도 안 돼서 바로 허락하더라고요.」혜인은 과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물론 아빠가 자신에게 한 말에 비해, 심한
이튿날, 혜인은 또다시 병원으로 향했다.소윤과 성혜인이 방 안에 전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성한의 병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어제 분명히 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만년필 녹음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이모랑 성혜원은 서로 싸우기 바빠 그 만년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을 텐데... 혹시 간호사가 가져간 걸까?’그녀는 다급히 밖으로 나가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뿐.혜인은 터벅터벅 걸어 어느새 성휘의 병실을 지나치게 됐고, 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성휘와 마주쳤다.그의 병실 안에는 소윤이 있었는데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성휘의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소윤은 혜인을 보자마자 화가 나 쏜살같이 달려들 기세였다.그런 소윤을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사 당직실로 향해 계속 만년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만 했다.하는 수 없이 다시 복도로 나온 그때, 저 맞은 편에서 민머리의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지난번 길에서 막무가내로 데이트 신청을 했던 남자인 것 같았다.“혜인아.”남성의 태도가 몹시 친절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혜인이네 집 별장이 꽤 비싸다는 말을 들어 그녀를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늘 그가 들고 온 꽃은 진짜 꽃이었다. 하지만 단 한 송이 뿐.“저번에 내가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그날은 우리 둘 다 많이 화가 났었던 것 같아. 오늘은 진짜 꽃을 갖고 왔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이 광경을 목격한 성휘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혜인아, 이 사람은 누구냐?”대산은 성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곧 돌아가실 것처럼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웬 남자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저는 앞으로 혜인이와 함께 살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나셨나, 어디 우리 혜인이 이름을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던 소윤의 귀에 이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성휘의 머릿속에는 “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깨질듯한 고통과 함께 그날의 두 빌어먹을 남녀가 떠올랐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덤덤한 것은 혜인이였다.그러나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게 됐는데, 그건 다름 아닌 허진과 소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당황한 혜인은 입술을 뜯었다.“아빠, 잘 보세요. 이게 바로 아빠가 말하던 좋은 아내, 좋은 딸이에요. 제 말은 단 한 번도 믿지 않으시더니, 이모의 매 한 마디는 아빠가 저를 때리는 데 있어 충분한 이유였어요. 여기 누워 있는 이 남자,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근데 이모가 저랑 불륜한 남자라니까, 아빠는 저한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셨고요. 몇 년 동안 내내 이렇다 보니 저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요.”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덤덤한 말투로 말하며 녹음기를 성휘의 손에 쥐여주었다.“허 비서님이 PW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반년이 지나면 자그마치 2조 원이나 배상해야 한대요. 지금은 어디로 도망가셨는지도 모르고요. 허 비서님이 어떻게 해서 그런 큰 권리를 가지고 이사회와도 말이 다 통했는지 줄곧 궁금했었는데 인제 보니 이모랑 관계가 있던 거였군요? 아빠, 저 사람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아세요? 전에 제가 한밤중에 자료 드리러 집에 간 날, 어쩐지 이모가 뭘 감추는 것 같았는데, 그때 역시 별장 안에 허 비서님이 계셔서 그랬나 봐요.”더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혜인은 녹음기를 건네주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그제야 모든 사실을 안 성휘는 충격에 넋이 나가 있었다.땅에 앉아 통곡하던 소윤은 얼른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손에 들려 있는 녹음기를 바라보며 성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탄, 고통,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결국, 그는 힘없이 녹음기를 쥐고는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윽고 경찰들이
혜인은 아무런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그대로 한 쪽에 놓아두었다.피곤했던 그녀는 바로 씻고 휴식을 취했다.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에는 세 통의 메시지가 더 와있었고 말이다.「내 나이 쉰셋, 갑자기 모든 걸 잃게 되었구나. 네 엄마를 볼 면목이 없어, 나를 욕할까 두려워.」「PW사와의 계약 건은 내가 살펴보았다. 허 비서가 그쪽 사람하고 부가적인 협의를 더 맺었는데 반년이라는 시간이 한 달로 줄어들었더구나... PW사에서 벌써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오고 있어. 우리가 2조를 배상해야 하는데 문제는 SY그룹에 그만한 돈이 없어.」「SY그룹은 거액의 빚을 지게 될 거야. 지금 너에게 지분을 나눠준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너한테 아무것도 없는 게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야. 혜인아, 아빠가 정말 미안하구나.」마지막 메시지를 읽자 혜인은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다급히 성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은 건 그가 아닌 간호사였다.“아가씨, 환자분이 어젯밤 갑자기 쇼크를 일으키셨어요. 저희더러 절대 아가씨께 말하지 말아달라 하셔서…. 지금 환자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적으신 것 같아요.”그 소식을 들은 혜인은 입이 떡 벌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회사의 일로 성휘는 분명 많은 타격을 받았다.회사는 그에게 있어서 심장과도 같았다. 그의 손으로 직접 가장 밑에서부터 한땀 한땀 일궈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50세에 들어선 지금, 그는 쉽게 사람을 믿은 대가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실패했다.성휘가 가까이 두었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배신했다.심지어 그의 가장 친한 벗의 죽음 역시 이 일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이런 실패를 참을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없다.혜인은 손을 들어 눈썹을 긁적였다. PW사와의 계약서는 허진이 회사를 대표로 정식 도장을 갖고 체결해 법적 효력이 있었다. 게다가 전체 이사회의 동의도 다 거치고 진행된 사안이라 현재 회사 내부는 엉망
‘엄마는 모두 알고 계셨던 건가? 아빠가 외로워할 것도, 내가 시집을 잘 못 갈 것도, 전부 다 맞았잖아...”곁에 아무도 없어 외로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한쪽엔 피를 팔아먹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부모님, 또 한쪽에는 PW사에 거액의 빚을 안게 된 자신의 회사... 이 모든 것 때문에 아주 가능하게 성휘는 오히려 죽음으로서 빚을 청산하고,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성휘가 이대로 죽게 놔둔다면 앞으로 그녀의 인생은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할지 몰라도 이 순간의 후회와 한은 영원히 풀지 못할 것이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혜인은 민지에게 전화를 걸어 장석호에 대한 일을 물었다.하지만 현재 강씨 집안의 모든 경제 대권은 아버지가 쥐고 있었기에, 상업적인 일에 대해서 민지는 잘 알지 못했다.혜인은 여러 곳에 전화를 돌리다 결국 신이한에게 다시 걸어보았다.그 시각, 이한은 저녁에 있을 비즈니스 파티가 열리는 레스토랑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이런 레스토랑의 메뉴 가격은 상당히 비쌌는데 소위 말해 돈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파는 것이었다.혜인에게 전화가 온 것을 본 이한의 눈이 잠시 반짝이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페니 씨, 저희 아버지와 장석호 씨의 관계가 괜찮은 건 맞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페니 씨에게 정보를 넘기면 저희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고 마실 거예요. 그러면 이 불효자를 때려죽이러 아버지는 분명히 다시 나오실 거고요.”그러더니 이한은 이내 말을 돌렸다.“음... 하지만 오늘 밤 제 파트너가 되어주신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혜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 레스토랑의 위치를 물어보았다.그녀가 한바탕 꾸미고 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저녁 7시가 다 되어갔다.레스토랑의 입구는 굉장히 화려했고 오고 가는 사람들은 전부 제원에서 이름 좀 날린 사람들이었다.곧이어 이한을 태운 차가 도착했다. 그는 혜원의 차림새를 보자마자 눈빛이 번쩍거렸다.혜인은 옅은 화장이나 진한 화장이나 모두 잘 어울리는
서민규는 오랫동안 전 부서에서 상사의 압박에 시달리며 일해오다 최근 드디어 승진했다.그는 능력이 꽤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학력이 부족한 게 늘 흠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회사에 큰 공을 세워 BK사 대표의 눈에 들 수 있었고, 그가 일도 잘하고 다루기에 편하다는 걸 발견한 대표가 그를 곁에 두고 직접 키워보기로 했다.반승제가 룸에 들어섰을 때, BK사 대표 이선과 서민규가 이미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곁에는 몇 명의 BK사 임원들도 있었다.이선은 벌떡 일어나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주었다.“반 대표님, 바쁘실 텐데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반승제의 시선이 여러 사람을 지나 서민규에게 향했다.눈치가 빠른 이선은 반승제가 서민규에게 흥미를 보인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빠르게 민규를 내밀어 보였다.“제가 이번에 새로 발탁한 사람입니다. 서민규 씨, 어서 반 대표님께 인사드려.”서민규는 인물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 섞어 놓으면 절대 뽑히지 않을 그런 유형이었다.“안녕하십니까, 반 대표님. 명성이 자자하시다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사실 그들은 전에 이미 여러 번 마주쳤었고 이한은 그를 참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는 잘 설명할 수 없었다.일행이 모두 자리에 앉자, 이선은 틈틈이 기회를 잡아 승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이곳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것들로만 골라 주문을 했다.이런 비즈니스 파티가 많은 레스토랑은 전문적으로 보스들을 대접하는데 한 테이블에 올라가는 메뉴들만 해도 자그마치 4000만을 호가했다.반승제의 태도는 아주 담담했는데 식사 내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눈썹을 꿈틀거렸다.곁에 있던 윤단미는 그의 시선이 줄곧 서민규에게 멈춰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술이 세 바퀴 정도 돌자, 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민규 씨는 아마 이미 결혼하셨겠죠?”승제는 손가락으로 계속 술잔 옆을 빙빙 돌며 마치 아무 생각 없이 묻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BK사는 인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반승제와 BK사 대표, 거기에 서민규까지 있었고, 그들을 본 혜인은 순식간에 눈살을 찌푸렸다.진짜 남편과 가짜 남편 모두가 이곳 룸 안에 있었다.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 났다.그러나 신이한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곧장 이선의 곁으로 걸어갔다.“이 대표님, 맞은 켠 룸에 대표님이 계신 걸 미리 알았다면 더 일찍 뵈러 왔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길 잘했네요.”이선은 서민규가 반승제의 물건을 잃어버린 일로 초조해했지만, 이한이 오는 바람에 얼굴색이 많이 좋아졌다.“신 대표님, 페니 씨, 여기 앉아서 같이 술 한잔하실래요?”이한은 반승제를 바라보았다.“반 대표님과 단미 씨도 여기 계셨네요. 두 분 정말 애정이 깊으신 것 같아요.”이한과 혜인이 같이 들어오는 것을 본 단미의 눈에 어두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신 대표님은 정말 주위에 여자가 많으신가 보네요. 며칠 전에 곁에 계셨던 파트너분은 이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신이한에게 있어 이 말은 그저 가벼운 농담에 불과했다.하지만 혜인에게는 달랐다. 그 말인즉슨, 이 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한의 파트너 자리가 언제든지 혜인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꼴이기 때문이었다.오랫동안 이 부류 사람들과 지낸 이한 역시 단미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챘고 그는 난처해진 혜인을 위해 변호했다.“단미 씨,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페니 씨는 제 파트너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적 협력 파트너지요. 실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서 나중에 반드시 우리 회사와 많은 협력 기회가 있을 겁니다.”반박을 받은 윤단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옅은 웃음만 지었다.혜인에게로 향한 반승제의 시선은 음침하고 차가웠지만, 어딘가 모를 그녀에 대한 호기심도 섞여 있는 듯 보였다.서민규는 성혜인의 곁에 있었지만, 여전히 고개 숙여 물건을 찾기만 했다.이한은 혜인을 끌어당겨 앉히려 했다. 하지만 혜인은 이한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한 뒤 머리를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