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난 반승제는 성혜인이 오늘은 절대 연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도 세수하고 잠들었다.이튿날 아침, 반승제는 반승혜에게 전화를 걸어 겨울이를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자 반승혜는 깜짝 놀란 말투로 물었다.“무심한 척하더니 역시 내 문자가 신경 쓰였구나? 진짜 빨리 찾았네?”반승혜는 포레스트에 도착해서도 끝없이 재잘거렸다.“근데 왜 직접 돌려주지 않고 나를 불렀어? 오빠가 직접 가면 페니 씨가 더 좋아할 텐데.”출근 준비를 끝내고 현관에 선 반승제는 소매를 정리하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반승혜는 말문이 막혔다. 성혜인과 그런 일을 겪고서도 이렇게 무심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우리 오빠 은근히 나쁜 남자 스타일이네.’반승제가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 반승혜가 겨울이를 데리고 다가가서는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오빠, 나 좀 데려다줘. 겨울이를 뒤에 두고 혼자 운전 못 하겠어.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나 진짜 페니 씨 얼굴 못 봐.”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반승혜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나 개털 알레르기 있어.”반승혜는 당연히 반승제가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를 집안에 둔 것으로 봤을 때는 그래도 참을만해 보였다. 알레르기라는 것은 심리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고 말이다.“나 혼자 가면 페니 씨는 내가 찾은 줄 알 텐데. 오빠가 찾았다고 얘기해도 되지?”이 순간 반승혜는 큐피드의 화신이 되어 반승제와 성혜인을 잘되게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됐어.”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차 창문까지 올렸다. 그러자 반승혜는 머쓱한 듯 코를 만졌다. 그날 밤 들었던 소리가 환청은 아닌지 의심 가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난 반승혜는 곧바로 로즈가든으로 향했다. 집에서 대청소하고 있던 성혜인은 일찍이 아래로 내려가 겨울이를 기다렸다.성혜인과 다시 만난 겨울이는 신바람이 나서 꼬리를 흔들며 그녀를 향해 훌쩍
이제는 최효원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갑작스레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마치 뺨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대표님...”반승제는 최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조심해요.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이는 법이니까요.”최효원의 체면이라고는 한치도 봐주지 않은 말이었다.“대표님, 저는 경헌 씨의 여자친구예요. 그러니까...”반승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최효원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최효원은 몸을 흠칫 떨며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성혜인에게 돌렸다.반승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버렸다. 그리고 뒷일은 심인우가 남아서 마저 처리했다.“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범죄 행위이니 조심해요.”심인우의 경고에 다른 직원들은 잔뜩 겁먹은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인우가 멀어진 다음에야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퇴근이 이르시네...”점심시간에 워커홀릭 반승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반승제는 먼저 밖으로 나가서 차에 올라탔다. 뒤늦게 따라간 심인우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반씨 저택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가슴 졸이고 있던 백연서는 반승제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은 한숨 돌렸다.“네가 하도 안 오길래 잊은 줄 알았어. 준비는 다 됐으니 이만 출발하자.”반승제의 시선은 백연서가 들고 있는 하얀색 국화꽃으로 향했다.백연서는 보기 드물게 축 처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유난히 어두웠다.두 사람이 탄 차는 교외에 위치한 묘지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심인우는 차에서 기다리고 반승제와 백연서만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산 정상에 위치한 깔끔한 묘지 앞으로 걸어갔다. 백연서는 하얀색 국화꽃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반승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는 자신과 엇비슷한 얼굴을 바라봤다.“승제야, 옛날 일은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 다시 기회를...”“어머니, 인간의 목숨은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형한테 하던 짓을 저
얼마 후 성혜인은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성한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전화였다.의사는 성한의 최근 연락한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윤은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그녀는 성한의 핸드폰을 들고 그가 마지막으로 성혜인과 주고받은 문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미친년아! 이거 네가 꾸민 일이지? 너 이거 살인 미수야, 알아? 기다려,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소윤은 빠른 걸음으로 성혜인을 향해 걸어가더니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가볍게 소윤의 팔을 낚아채더니 힘껏 뿌리쳤다.“증거 있어요? 저는 회사 얘기를 하려고 연락했을 뿐이에요. 요즘 회사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모도 잘 알잖아요. 제가 문자를 보낸 적 있다고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게 말이나 돼요? 더구나 지금껏 수차례나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한 건 제가 아닌 이모 아들이에요.”자신의 유일한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은 소윤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성혜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성혜인은 벽에 심하게 부딪히고 헛구역질이 나왔다.소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성혜인을 향해 주먹질하기 시작했다.“죽여버릴 거야! 내가 너를 꼭 죽여버리고 말 거야!”허진은 실종되고 성한은 식물인간이 되고 나자, 소윤은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광기에 서려 손톱을 세운 소윤을 밀어낼 수 없었던 성혜인은 최대한 손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자 소윤은 무려 그녀의 눈알을 파내려고 손을 들이밀었다.“죽어!!!”간호사들이 달려가서 소윤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보안팀! 보안팀 어디에 있어요!”곧이어 건장한 보안팀 직원들이 와서 소윤을 떼어냈다.성혜인의 손은 손톱에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고 피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반대로 소윤의 손톱에는 떨어져 나간 살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소윤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성혜인을 향해 발길질하려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너 같은 년은 진작
“여보, 우리 한이가 식물인간이 됐대요. 제발 저 좀 도와줘요. 이거 다 혜인이가 한 짓이란 말이에요. 흑흑흑... 우리 불쌍한 한이가... 이건 한이 핸드폰이에요. 혜인이가 보낸 문자 좀 봐봐요. 우리 한이를 이상한 곳으로 유인한 게 분명해요.”소윤은 눈물을 훔치면서 성휘의 반응을 살폈다. 성휘가 질책의 표정 하나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가면 속의 입꼬리가 귀 끝까지 찢어졌다.‘하늘이 날 돕는구나!’“여보, 저한테 아들이라고는 한이 한 명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저 이제 못 살아요! 저도 한이를 따라갈 거예요!”소윤은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가짜 동작을 했다. 그러자 성휘는 빠르게 달려가서 막아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상처가 벌어진 탓에 본인은 기절할 뻔했으면서도 말이다.다행히 간호사들이 도와준 덕분에 상황은 금세 진정되었다.소윤은 병실 한쪽에 자리 잡고 목 놓아 울었다. 성휘는 피를 토할 기세로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성혜인이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성휘의 등을 토닥일 때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오빠가 진짜 식물인간이 됐니?”“네.”곧이어 짝 소리와 함께 성혜인의 얼굴이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성휘의 손에 힘이 없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혜인의 마음은 완전히 깔아뭉개져 버린 것만 같았다.“네가 한 짓이니?”“성한이 회사에서 저를 강간하려고 했던 일... 아직 모르시죠? 그리고 성한이 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저를 쫓아가려고 했는지도 모르시죠? 성한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살고 싶어서 도망갔을 뿐이고요. 저를 쫓기를 포기하고 돌아갔으면 이번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말을 들은 소윤은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성혜인을 향해 덮쳤다.“변명하지 마, 이 년아! 너도 네 어미도 똑같은 쓰레기일 뿐이야!”성혜인과 성휘의 안색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소윤은 성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여보, 혜인이 말을 믿지 말아요. 한이가 얼마나 다정한 오빠였는데요.
서민규는 한 손에는 휴지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성혜인을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그늘을 만들어 주더니 휴지를 건넸다.“페니 씨, 무슨 일 있었어요?”서민규의 목소리를 듣고 성혜인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여기에서 다 만나요?”“저는 여동생 약을 받으러 왔어요. 제 여동생이 다리가 안 좋다고 말했던가요.”서민규는 우산을 든 채로 성혜인의 곁에 앉았다.“이렇게 뜨거운 철제 벤치에 어떻게 앉아 있었어요. 역시 무슨 일 있었죠? 제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성혜인의 입장에서 서민규는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집안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아니에요. 그냥 일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도치듯 북받치던 감정이 서민규와 마주친 순간 빠르게 식었다. 속상해하는 것도 오직 혼자 있을 때만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구기며 셔츠 단추를 푼 그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성혜인과 서민규를 바라봤다. 발걸음을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고 있던 여자가 지금은 활짝 웃고 있었다. 싸구려 우산이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반승제는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시선을 거뒀다. 조금 남았던 설렘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녀는 성휘와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반승제는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그렇게 한 100m 정도 멀어져갔을 때 반승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미러를 힐끗 봤다.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는 서서히 한데 겹치고 있었다.‘키스하나?”반승제는 핸들을 힘껏 꽉 잡았다. 다만 내정한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냉정하지는 못했는지 자칫 사고를 낼 뻔하고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윤단미는 그새를 참지
혜인이 재빨리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닫히는 차 창문에 머리카락이 끼울 뻔했다. 이미 멀리 사라져버린 자동차를 보자 그녀는 참으로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장님, 방금 대표님을 뵀었는데요, 저더러 자의식 과잉이래요. 아니면 단미 씨에게 연락을 해보는 건 어떠세요? 지금 대표님하고 같이 차에 타고 있으세요.」혜인의 말이 못 미더웠던 임경헌은 정말로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단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물어봐 주겠다고 대답했다.통화가 종료되고, 그녀는 승제를 바라보았다.“경헌 도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지금 여자친구를 굉장히 아끼시나 본데? 이번에는 진지하게 만나는 건가 봐. 승제야, 효원 씨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건 어때?”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웃지 않을 때, 승제의 눈빛은 매우 깊고 날카로워 보였다.한참 후, 승제가 가볍게 웃었다.“그냥 안내 데스크 직원 한 명 잘랐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어볼 일이야?”그 말을 들은 단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승제에게 말했다.“그래, 네 말대로 단지 안내 데스크 직원일 뿐인데, 도련님하고 꼭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게 만들어야 하냔 말이야. 도련님은 네 사촌 동생이잖아.”얇고 고운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승제의 먹구름 낀 듯 어두웠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그럼 돌아오라 하지.”단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조금 전 혜인을 대하던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황급히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소식을 들은 경헌이, 참지 못하고 혜인에게 또 한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페니 씨. 괜히 저 때문에 형한테 안 좋은 말이나 듣고… 역시 단미 씨가 하는 말이 형한테 먹히나 봐요. 2분도 안 돼서 바로 허락하더라고요.」혜인은 과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물론 아빠가 자신에게 한 말에 비해, 심한
이튿날, 혜인은 또다시 병원으로 향했다.소윤과 성혜인이 방 안에 전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성한의 병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어제 분명히 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만년필 녹음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이모랑 성혜원은 서로 싸우기 바빠 그 만년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을 텐데... 혹시 간호사가 가져간 걸까?’그녀는 다급히 밖으로 나가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뿐.혜인은 터벅터벅 걸어 어느새 성휘의 병실을 지나치게 됐고, 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성휘와 마주쳤다.그의 병실 안에는 소윤이 있었는데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성휘의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소윤은 혜인을 보자마자 화가 나 쏜살같이 달려들 기세였다.그런 소윤을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사 당직실로 향해 계속 만년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만 했다.하는 수 없이 다시 복도로 나온 그때, 저 맞은 편에서 민머리의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지난번 길에서 막무가내로 데이트 신청을 했던 남자인 것 같았다.“혜인아.”남성의 태도가 몹시 친절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혜인이네 집 별장이 꽤 비싸다는 말을 들어 그녀를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늘 그가 들고 온 꽃은 진짜 꽃이었다. 하지만 단 한 송이 뿐.“저번에 내가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그날은 우리 둘 다 많이 화가 났었던 것 같아. 오늘은 진짜 꽃을 갖고 왔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이 광경을 목격한 성휘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혜인아, 이 사람은 누구냐?”대산은 성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곧 돌아가실 것처럼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웬 남자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저는 앞으로 혜인이와 함께 살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나셨나, 어디 우리 혜인이 이름을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던 소윤의 귀에 이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성휘의 머릿속에는 “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깨질듯한 고통과 함께 그날의 두 빌어먹을 남녀가 떠올랐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덤덤한 것은 혜인이였다.그러나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게 됐는데, 그건 다름 아닌 허진과 소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당황한 혜인은 입술을 뜯었다.“아빠, 잘 보세요. 이게 바로 아빠가 말하던 좋은 아내, 좋은 딸이에요. 제 말은 단 한 번도 믿지 않으시더니, 이모의 매 한 마디는 아빠가 저를 때리는 데 있어 충분한 이유였어요. 여기 누워 있는 이 남자,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근데 이모가 저랑 불륜한 남자라니까, 아빠는 저한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셨고요. 몇 년 동안 내내 이렇다 보니 저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요.”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덤덤한 말투로 말하며 녹음기를 성휘의 손에 쥐여주었다.“허 비서님이 PW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반년이 지나면 자그마치 2조 원이나 배상해야 한대요. 지금은 어디로 도망가셨는지도 모르고요. 허 비서님이 어떻게 해서 그런 큰 권리를 가지고 이사회와도 말이 다 통했는지 줄곧 궁금했었는데 인제 보니 이모랑 관계가 있던 거였군요? 아빠, 저 사람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아세요? 전에 제가 한밤중에 자료 드리러 집에 간 날, 어쩐지 이모가 뭘 감추는 것 같았는데, 그때 역시 별장 안에 허 비서님이 계셔서 그랬나 봐요.”더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혜인은 녹음기를 건네주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그제야 모든 사실을 안 성휘는 충격에 넋이 나가 있었다.땅에 앉아 통곡하던 소윤은 얼른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손에 들려 있는 녹음기를 바라보며 성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탄, 고통,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결국, 그는 힘없이 녹음기를 쥐고는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윽고 경찰들이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