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업무를 처리하고 난 반승제는 성혜인이 오늘은 절대 연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도 세수하고 잠들었다.이튿날 아침, 반승제는 반승혜에게 전화를 걸어 겨울이를 데려가라고 했다. 그러자 반승혜는 깜짝 놀란 말투로 물었다.“무심한 척하더니 역시 내 문자가 신경 쓰였구나? 진짜 빨리 찾았네?”반승혜는 포레스트에 도착해서도 끝없이 재잘거렸다.“근데 왜 직접 돌려주지 않고 나를 불렀어? 오빠가 직접 가면 페니 씨가 더 좋아할 텐데.”출근 준비를 끝내고 현관에 선 반승제는 소매를 정리하며 차갑게 말했다.“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반승혜는 말문이 막혔다. 성혜인과 그런 일을 겪고서도 이렇게 무심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우리 오빠 은근히 나쁜 남자 스타일이네.’반승제가 밖으로 나가 차에 올라타려고 할 때, 반승혜가 겨울이를 데리고 다가가서는 그를 따라가려고 했다.“오빠, 나 좀 데려다줘. 겨울이를 뒤에 두고 혼자 운전 못 하겠어.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나 진짜 페니 씨 얼굴 못 봐.”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반승혜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나 개털 알레르기 있어.”반승혜는 당연히 반승제가 개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를 집안에 둔 것으로 봤을 때는 그래도 참을만해 보였다. 알레르기라는 것은 심리적인 작용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고 말이다.“나 혼자 가면 페니 씨는 내가 찾은 줄 알 텐데. 오빠가 찾았다고 얘기해도 되지?”이 순간 반승혜는 큐피드의 화신이 되어 반승제와 성혜인을 잘되게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됐어.”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차 창문까지 올렸다. 그러자 반승혜는 머쓱한 듯 코를 만졌다. 그날 밤 들었던 소리가 환청은 아닌지 의심 가는 순간이었다.성혜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난 반승혜는 곧바로 로즈가든으로 향했다. 집에서 대청소하고 있던 성혜인은 일찍이 아래로 내려가 겨울이를 기다렸다.성혜인과 다시 만난 겨울이는 신바람이 나서 꼬리를 흔들며 그녀를 향해 훌쩍
이제는 최효원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갑작스레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에 마치 뺨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대표님...”반승제는 최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조심해요.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이는 법이니까요.”최효원의 체면이라고는 한치도 봐주지 않은 말이었다.“대표님, 저는 경헌 씨의 여자친구예요. 그러니까...”반승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최효원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최효원은 몸을 흠칫 떨며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성혜인에게 돌렸다.반승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버렸다. 그리고 뒷일은 심인우가 남아서 마저 처리했다.“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범죄 행위이니 조심해요.”심인우의 경고에 다른 직원들은 잔뜩 겁먹은 채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인우가 멀어진 다음에야 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대표님 오늘 퇴근이 이르시네...”점심시간에 워커홀릭 반승제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반승제는 먼저 밖으로 나가서 차에 올라탔다. 뒤늦게 따라간 심인우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차는 반씨 저택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가슴 졸이고 있던 백연서는 반승제가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시름을 놓은 한숨 돌렸다.“네가 하도 안 오길래 잊은 줄 알았어. 준비는 다 됐으니 이만 출발하자.”반승제의 시선은 백연서가 들고 있는 하얀색 국화꽃으로 향했다.백연서는 보기 드물게 축 처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유난히 어두웠다.두 사람이 탄 차는 교외에 위치한 묘지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 심인우는 차에서 기다리고 반승제와 백연서만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은 산 정상에 위치한 깔끔한 묘지 앞으로 걸어갔다. 백연서는 하얀색 국화꽃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반승제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비석에 새겨져 있는 자신과 엇비슷한 얼굴을 바라봤다.“승제야, 옛날 일은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 다시 기회를...”“어머니, 인간의 목숨은 하나뿐이에요. 그러니 형한테 하던 짓을 저
얼마 후 성혜인은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 성한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전화였다.의사는 성한의 최근 연락한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다.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소윤은 이미 목 놓아 울고 있었다. 그녀는 성한의 핸드폰을 들고 그가 마지막으로 성혜인과 주고받은 문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미친년아! 이거 네가 꾸민 일이지? 너 이거 살인 미수야, 알아? 기다려,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니까!”소윤은 빠른 걸음으로 성혜인을 향해 걸어가더니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가볍게 소윤의 팔을 낚아채더니 힘껏 뿌리쳤다.“증거 있어요? 저는 회사 얘기를 하려고 연락했을 뿐이에요. 요즘 회사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이모도 잘 알잖아요. 제가 문자를 보낸 적 있다고 범인으로 몰고 가는 게 말이나 돼요? 더구나 지금껏 수차례나 범죄에 가까운 행위를 한 건 제가 아닌 이모 아들이에요.”자신의 유일한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은 소윤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성혜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성혜인은 벽에 심하게 부딪히고 헛구역질이 나왔다.소윤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성혜인을 향해 주먹질하기 시작했다.“죽여버릴 거야! 내가 너를 꼭 죽여버리고 말 거야!”허진은 실종되고 성한은 식물인간이 되고 나자, 소윤은 완전히 폭발해 버렸다.광기에 서려 손톱을 세운 소윤을 밀어낼 수 없었던 성혜인은 최대한 손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자 소윤은 무려 그녀의 눈알을 파내려고 손을 들이밀었다.“죽어!!!”간호사들이 달려가서 소윤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했다. 그래서 다급한 말투로 말했다.“보안팀! 보안팀 어디에 있어요!”곧이어 건장한 보안팀 직원들이 와서 소윤을 떼어냈다.성혜인의 손은 손톱에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고 피가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했다. 반대로 소윤의 손톱에는 떨어져 나간 살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소윤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성혜인을 향해 발길질하려고 하며 소리를 질렀다.“너 같은 년은 진작
“여보, 우리 한이가 식물인간이 됐대요. 제발 저 좀 도와줘요. 이거 다 혜인이가 한 짓이란 말이에요. 흑흑흑... 우리 불쌍한 한이가... 이건 한이 핸드폰이에요. 혜인이가 보낸 문자 좀 봐봐요. 우리 한이를 이상한 곳으로 유인한 게 분명해요.”소윤은 눈물을 훔치면서 성휘의 반응을 살폈다. 성휘가 질책의 표정 하나 없는 것을 보고서는 가면 속의 입꼬리가 귀 끝까지 찢어졌다.‘하늘이 날 돕는구나!’“여보, 저한테 아들이라고는 한이 한 명밖에 없는 거 알잖아요. 저 이제 못 살아요! 저도 한이를 따라갈 거예요!”소윤은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가짜 동작을 했다. 그러자 성휘는 빠르게 달려가서 막아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인해 상처가 벌어진 탓에 본인은 기절할 뻔했으면서도 말이다.다행히 간호사들이 도와준 덕분에 상황은 금세 진정되었다.소윤은 병실 한쪽에 자리 잡고 목 놓아 울었다. 성휘는 피를 토할 기세로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성혜인이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성휘의 등을 토닥일 때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었다.“네 오빠가 진짜 식물인간이 됐니?”“네.”곧이어 짝 소리와 함께 성혜인의 얼굴이 돌아갔다.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성휘의 손에 힘이 없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혜인의 마음은 완전히 깔아뭉개져 버린 것만 같았다.“네가 한 짓이니?”“성한이 회사에서 저를 강간하려고 했던 일... 아직 모르시죠? 그리고 성한이 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저를 쫓아가려고 했는지도 모르시죠? 성한은 저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살고 싶어서 도망갔을 뿐이고요. 저를 쫓기를 포기하고 돌아갔으면 이번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이 말을 들은 소윤은 귀를 찢는 비명과 함께 성혜인을 향해 덮쳤다.“변명하지 마, 이 년아! 너도 네 어미도 똑같은 쓰레기일 뿐이야!”성혜인과 성휘의 안색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소윤은 성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여보, 혜인이 말을 믿지 말아요. 한이가 얼마나 다정한 오빠였는데요.
서민규는 한 손에는 휴지를, 다른 한 손에는 일반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는 먼저 성혜인을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그늘을 만들어 주더니 휴지를 건넸다.“페니 씨, 무슨 일 있었어요?”서민규의 목소리를 듣고 성혜인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눈물을 닦으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여기에서 다 만나요?”“저는 여동생 약을 받으러 왔어요. 제 여동생이 다리가 안 좋다고 말했던가요.”서민규는 우산을 든 채로 성혜인의 곁에 앉았다.“이렇게 뜨거운 철제 벤치에 어떻게 앉아 있었어요. 역시 무슨 일 있었죠? 제가 도와줄 수 있을까요?”성혜인의 입장에서 서민규는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집안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아니에요. 그냥 일에 문제가 좀 생겨서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도치듯 북받치던 감정이 서민규와 마주친 순간 빠르게 식었다. 속상해하는 것도 오직 혼자 있을 때만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언짢은 듯 미간을 구기며 셔츠 단추를 푼 그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는 성혜인과 서민규를 바라봤다. 발걸음을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고 있던 여자가 지금은 활짝 웃고 있었다. 싸구려 우산이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반승제는 차마 계속 보지 못하고 시선을 거뒀다. 조금 남았던 설렘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이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보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그녀는 성휘와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만 반승제는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그렇게 한 100m 정도 멀어져갔을 때 반승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미러를 힐끗 봤다. 두 개의 흐릿한 그림자는 서서히 한데 겹치고 있었다.‘키스하나?”반승제는 핸들을 힘껏 꽉 잡았다. 다만 내정한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하지만 마음속까지 냉정하지는 못했는지 자칫 사고를 낼 뻔하고 결국 길가에 차를 세웠다.윤단미는 그새를 참지
혜인이 재빨리 피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닫히는 차 창문에 머리카락이 끼울 뻔했다. 이미 멀리 사라져버린 자동차를 보자 그녀는 참으로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장님, 방금 대표님을 뵀었는데요, 저더러 자의식 과잉이래요. 아니면 단미 씨에게 연락을 해보는 건 어떠세요? 지금 대표님하고 같이 차에 타고 있으세요.」혜인의 말이 못 미더웠던 임경헌은 정말로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고, 단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가 물어봐 주겠다고 대답했다.통화가 종료되고, 그녀는 승제를 바라보았다.“경헌 도련님한테서 전화가 왔어. 지금 여자친구를 굉장히 아끼시나 본데? 이번에는 진지하게 만나는 건가 봐. 승제야, 효원 씨 다시 돌아오게 하는 건 어때?”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웃지 않을 때, 승제의 눈빛은 매우 깊고 날카로워 보였다.한참 후, 승제가 가볍게 웃었다.“그냥 안내 데스크 직원 한 명 잘랐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어볼 일이야?”그 말을 들은 단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사랑스러운 표정을 하고 승제에게 말했다.“그래, 네 말대로 단지 안내 데스크 직원일 뿐인데, 도련님하고 꼭 그렇게 사이가 틀어지게 만들어야 하냔 말이야. 도련님은 네 사촌 동생이잖아.”얇고 고운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승제의 먹구름 낀 듯 어두웠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그럼 돌아오라 하지.”단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조금 전 혜인을 대하던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놓였다.그녀는 황급히 임경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소식을 들은 경헌이, 참지 못하고 혜인에게 또 한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죄송해요, 페니 씨. 괜히 저 때문에 형한테 안 좋은 말이나 듣고… 역시 단미 씨가 하는 말이 형한테 먹히나 봐요. 2분도 안 돼서 바로 허락하더라고요.」혜인은 과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물론 아빠가 자신에게 한 말에 비해, 심한
이튿날, 혜인은 또다시 병원으로 향했다.소윤과 성혜인이 방 안에 전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성한의 병실로 들어갔다.하지만 어제 분명히 이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만년필 녹음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이모랑 성혜원은 서로 싸우기 바빠 그 만년필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을 텐데... 혹시 간호사가 가져간 걸까?’그녀는 다급히 밖으로 나가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뿐.혜인은 터벅터벅 걸어 어느새 성휘의 병실을 지나치게 됐고, 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성휘와 마주쳤다.그의 병실 안에는 소윤이 있었는데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성휘의 상태를 감시하고 있었다. 소윤은 혜인을 보자마자 화가 나 쏜살같이 달려들 기세였다.그런 소윤을 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간호사 당직실로 향해 계속 만년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만 했다.하는 수 없이 다시 복도로 나온 그때, 저 맞은 편에서 민머리의 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지난번 길에서 막무가내로 데이트 신청을 했던 남자인 것 같았다.“혜인아.”남성의 태도가 몹시 친절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혜인이네 집 별장이 꽤 비싸다는 말을 들어 그녀를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오늘 그가 들고 온 꽃은 진짜 꽃이었다. 하지만 단 한 송이 뿐.“저번에 내가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그날은 우리 둘 다 많이 화가 났었던 것 같아. 오늘은 진짜 꽃을 갖고 왔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우리.”이 광경을 목격한 성휘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혜인아, 이 사람은 누구냐?”대산은 성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곧 돌아가실 것처럼 몸이 편치 않아 보이는 웬 남자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 기분이 나빠졌다.“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저는 앞으로 혜인이와 함께 살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나셨나, 어디 우리 혜인이 이름을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던 소윤의 귀에 이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성휘의 머릿속에는 “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깨질듯한 고통과 함께 그날의 두 빌어먹을 남녀가 떠올랐다.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덤덤한 것은 혜인이였다.그러나 그녀 역시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게 됐는데, 그건 다름 아닌 허진과 소윤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당황한 혜인은 입술을 뜯었다.“아빠, 잘 보세요. 이게 바로 아빠가 말하던 좋은 아내, 좋은 딸이에요. 제 말은 단 한 번도 믿지 않으시더니, 이모의 매 한 마디는 아빠가 저를 때리는 데 있어 충분한 이유였어요. 여기 누워 있는 이 남자,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요! 근데 이모가 저랑 불륜한 남자라니까, 아빠는 저한테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으셨고요. 몇 년 동안 내내 이렇다 보니 저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요.”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덤덤한 말투로 말하며 녹음기를 성휘의 손에 쥐여주었다.“허 비서님이 PW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반년이 지나면 자그마치 2조 원이나 배상해야 한대요. 지금은 어디로 도망가셨는지도 모르고요. 허 비서님이 어떻게 해서 그런 큰 권리를 가지고 이사회와도 말이 다 통했는지 줄곧 궁금했었는데 인제 보니 이모랑 관계가 있던 거였군요? 아빠, 저 사람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아세요? 전에 제가 한밤중에 자료 드리러 집에 간 날, 어쩐지 이모가 뭘 감추는 것 같았는데, 그때 역시 별장 안에 허 비서님이 계셔서 그랬나 봐요.”더는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혜인은 녹음기를 건네주고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그제야 모든 사실을 안 성휘는 충격에 넋이 나가 있었다.땅에 앉아 통곡하던 소윤은 얼른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손에 들려 있는 녹음기를 바라보며 성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탄, 고통, 분노,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결국, 그는 힘없이 녹음기를 쥐고는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윽고 경찰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