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구은우를 짝사랑하던 여학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 뿐이었다.그런데 이제 공지민이 타락하여 누군가의 개처럼 살고 있다니 오하윤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오하윤은 단톡방에서 대화를 이어갔다.[지민이 걔 요즘 돈 많은 사람 따라다녀. 은우랑은 벌써 오래전에 끝난 거 같더라. 연예계 들어가더니 결국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설마 은우가 차였다고? 은우 같은 사람이? 은우 제원대 합격했잖아. 제원대 나오면 월급도 꽤 높을 텐데?]오하윤은 속이 쓰리고 시큰거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구은우를 잊을 수 없었다.수능이 끝난 이후로 구은우는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가 대학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상을 받았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는 공지민과 함께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라졌다.지금 공지민은 나타났지만 구은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혹시 공지민의 배신 때문에 구은우가 해외로 떠난 건 아닐까?’오하윤은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공지민이 미워졌다.마침 온시환이 물었다.“지민이는 고등학교 때 연애한 적 있어요?”공지민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하고 얌전한 듯했지만 가끔은 뾰족한 가시를 세우기도 했다.온시환은 애인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지민의 고등학교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싶었다.오하윤은 구은우 얘기를 꺼낼까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했다. 구은우처럼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공지민 같은 하찮은 사람을 빛나게 만들 뿐이었다.그렇게 잘난 남자가 고백했으니 공지민이 분명 우쭐해할 거라 생각했다.“연애한 적 없어요. 누가 걔를 좋아하겠어요. 맨날 조용히 있고 사람들한테 말도 잘 안 걸었어요.”온시환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정말 아무도 지민이 좋아하지 않았어요?”공지민의 외모는 꽤 괜찮았다. 이런 외모라면 고등학교 때 인기가 많았어야 정상이었다.“없어요. 성격이 별로라 사람들이 안 좋아했어요.”옆에 있던 남자가 오하윤을 안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침대에 눕더니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고집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입에서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좋아요.”사실 공지민도 더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오하윤을 본 순간 오래된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녀를 괴롭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온시환은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산 아래까지 걸어가려면 날이 밝아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데려다줄 사람도 없었고 가는 길에 멧돼지를 마주칠 위험이 있었다.이곳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녀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걸 누가 막겠는가.온시환은 방 안의 불을 끄고 눈을 감아버렸다.한편 공지민은 옷을 챙겨 입고 이미 1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여전히 즐기고 있었는데 추지성과 오하윤은 이미 서로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분명 오하윤은 추지성의 파트너가 아니었는데 이미 교체된 모양이었다.공지민이 내려오는 걸 본 추지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어, 지민 씨 내려왔네요? 좀 나아졌어요?”공지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오하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공지민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공지민!”정원에 도착했을 때 오하윤이 마침내 그녀를 붙잡았다.“너 이제 온시환한테 꼬리 치고 다니는 거야? 그럼 은우는? 몇 년 동안 은우는 단 한 번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네가 차버린 뒤에 해외로 나간 거 맞지? 공지민, 너 어쩜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어. 은우 같은 남자를 두고 온시환한테 붙어먹다니, 어떻게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냐고? 은우도 참 눈이 멀었나 봐. 너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니!”오하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오하윤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온시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는 이 남자와 친구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소재가 같아 경쟁 관계에 있었다.평소에는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대충 넘어갔으나 지금처럼 체면 문제가 얽히면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온시환의 시선이 다시 공지민을 향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공지민, 사과하지 않을 거면 혼자 걸어가.”방금 방에서 공지민이 나가려 했을 때는 온시환은 그녀가 허세를 부린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가라고 한 것은 진심으로 내쫓는 말이었다.공지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은 누구의 얼굴에도 머물지 않았다.“좋아요,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평소에는 얌전하더니 이번엔 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 그런데 지민 씨가 진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려고?”온시환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게 더 화가 났다.“헤어진다고? 원래 사귄 적도 없는데, 뭘 헤어져. 내가 그동안 너무 봐준 거지.”그의 시선이 오하윤의 발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목은 확실히 부어 있었다.“일단 의사 불러서 하윤 씨 발목 좀 봐야겠어요.”오하윤은 대범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지민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저런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도 지민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온시환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비벼 끄며 더욱 짜증이 밀려왔다.지금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겼고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지민은 달랑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나갔다. 정말 혼자 산길을 내려갈 생각일까?공지민이 설마 그 정도로 어리석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기껏해야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지.’온시환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몇백 미터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산길은 끝이 없을 만큼 길고도 길었다. 공지민은 한 시간 넘게 걷다가 아무 데나 자리를 찾아 앉았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빵빵빵.하지만 공지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온시환은 원래부터 화가 나 있었는데 지금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공지민!”그는 버럭 소리치며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휴대폰은 꺼져 있고 혼자 산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그녀가 정말 죽을 작정인지 의심스러웠다.공지민도 화가 나서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내 일에 참견하지 마.”평소 순종적이던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온시환은 무척 당황스러웠다.“그래, 내가 너한테 신경 쓰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그는 분을 삭이며 차로 돌아가려다 여전히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공지민을 보자 갑자기 마음속의 분노가 깨끗이 사라져갔다.“하, 오늘 왜 그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공지민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구은우와 관련된 기억만 떠오르면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구은우 앞에서는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났다.온시환은 차에 올라 헤드라이트를 켜고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가끔 차를 그녀 옆에 바짝 붙이며 말을 걸었다.“너 고집 좀 버려. 내가 고집 센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공지민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코끝에 있는 점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부드럽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녀는 열린 창문 너머로 손가락을 뻗어 그의 점을 살짝 따라 그렸다.온시환은 순간 자신감이 차올랐다. 역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투정 부리고 차에 올라타. 돌아가자. 다른 사람들한테 웃음거리 되기 전에.”“돌아가고 싶지 않아.”온시환은 오늘 밤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공지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그럼 참지 마.”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말을 마치자마자 온시환은 추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추지성은 그가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을 직접 봤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조금 신경 쓰이고 있었다.“시환아?”“지성아, 밧줄 좀 가져와. 지민이가 떨어졌어.”“얼마나 긴 줄이 필요해?”“5미터쯤 되는 걸로. 될 수 있으면 좀 더 긴 게 좋겠어.”온시환은 전화를 끊고 다시 공지민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직접 뛰어내렸다.3미터 높이의 절벽은 꽤 위협적으로 보였다.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며 뛰어내렸지만 결국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그러나 그는 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절뚝거리며 공지민에게 다가갔다.“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공지민의 뺨은 긁힌 상처가 있었고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화가 가라앉으며 그녀의 턱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여기서 기다려. 지성이가 금방 올 거야.”공지민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온시환은 남아 있던 화마저 사라졌지만 입을 떼며 말했다.“너 평소에 이렇게 고집부리진 않았잖아. 오늘은 대체 왜 그래? 정말 혼자 밤새 걸어가려고 했어?”“시환 씨는 나한테 잘해주지 않잖아.”“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신경도 안 썼을 거야.”사실 온시환은 어떻게 누군가에게 잘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특히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그의 세계관에서 사람과의 관계란 우정이 전부였고 남녀 간의 감정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꿔 그의 품에 기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자신이 여자를 대할 때 느꼈던 무관심이 지금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낯설었다.한 시간 후, 추지성이 도착했다. 온시환의 차를 보며 그는 긴 밧줄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공지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이 그녀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고 방까지 데려가는 동안 공지민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온시환은 의사를 불러 외상을 치료하게 한 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닦아주려고 무릎을 꿇었다.공지민은 오늘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의 손바닥이 발바닥을 감쌀 때 뜨거운 온기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발을 빼내려 했지만 온시환이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지금 몸 상태로는 씻을 수 없으니까, 그냥 발 닦고 푹 쉬어.”공지민은 그를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그녀의 느닷없는 정중함에 온시환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발을 다 닦아준 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온시환의 발목 부상은 심하지 않았기에 간단히 샤워만 마치고 침대로 돌아왔다.공지민은 이미 누워 있었다. 온시환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무언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는 묻는 걸 멈췄다. 대신 그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그날 밤 공지민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 시간을 거슬러 나타난 소년, 농구장을 누비며 주위의 함성을 한몸에 받았던 그 생생한 모습이 눈앞에 아련히 펼쳐졌다.눈을 떴을 때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아마도 오하윤을 보고 나서 감정이 크게 요동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방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한편 아래층에서는 오하윤이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윤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오늘 온시환 앞에서 공지민이 과거 첫사랑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생각이었다.구은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공지민 따위에게 가당키나 할까?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오하윤은 초조한 듯 자꾸만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온시환이 내려온 지 한참이 지나도 공지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결국 참지 못한 오하윤이 물었다.“시환 씨, 지민이는 아직 자는 건가요?”모두 준비
오하윤은 오늘 캠핑을 나가는 김에 공지민을 제대로 비꼬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시환 씨, 지민이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맡겼는데, 그동안 지민이가 연락을 끊고 사라진 것처럼 지내서 아직도 전달을 못 했거든요.”온시환은 별생각 없이 바로 번호를 불러줬다.오하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캠핑을 떠났고 추지성도 합류했다. 펜션에는 온시환과 공지민만 남게 되었다.원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온시환은 두 시간쯤 지나자 슬슬 밀려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함께 남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공지민이 가기 싫다면 그냥 그녀를 혼자 두고 자신은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온시환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한 시간을 더 아래층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공지민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공지민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아직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또 나가려 하는 그녀를 보자 온시환은 화가 치밀었다.“너 또 뭘 하려는 건데? 제발 좀 위층에서 얌전히 쉬면 안 돼?”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처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온시환의 차를 두고 걸어서 산길을 내려가려는 듯했다.“공지민!”온시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또 혼자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정말 내가 끝까지 참아줄 줄 알아?”공지민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온시환은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평소의 그녀는 항상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가 없으면 마치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너...”온시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지민은 그를 밀쳐냈다.“좀 귀찮게 굴지 말고 나한테 신경 꺼.”온시환은 원래 여자에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편 오하윤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공지민이 왜 펜션을 떠났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오하윤은 공지민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은우가 사실 너에게 편지를 썼어. 마침 수능이 끝날 무렵이었고 뭔가 바쁜 일이 있었던 건지 그 편지를 너에게 전달하라고 다른 친구에게 맡겼더라. 그런데 그 편지가 결국 나한테 왔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편지를 질투심에 선생님한테 넘겼거든.]그 시절, 반 친구들은 각자 서류가 담긴 파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파일에 학생들의 자료를 보관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더라도 누군가가 파일을 찾아가고 싶다면 선생님이 파일을 보관한 곳에서 찾아 줄 수 있었다.아마도 구은우가 쓴 편지는 선생님이 그 파일에 넣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오하윤은 그 이야기를 공지민에게 전하며 살짝 도발했다.[네가 산 아래로 걸어서 내려간다면 구은우가 남긴 또 다른 물건이 뭔지 알려줄게.]하지만 사실 그 편지 외에 구은우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오하윤은 공지민이 온시환을 붙잡고 살아가며 이미 구은우를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공지민은 구은우와 관련된 물건을 얻기 위해 정말 떠났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오하윤은 속으로 흥분을 금치 못했다.‘이걸 온시환에게 말하면 분노하지 않을까? 그럼 공지민은 이제 끝장이겠지. 특히 스폰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걸 가장 싫어하잖아.’그녀는 손에 들린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시환 씨, 제가 왜 지민이가 떠났는지 알아요. 아마도 지민이가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 남긴 편지를 찾으러 간 것 같아요. 어제 선생님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거든요. 우리 고등학교 졸업 파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필요한 사람이있으면 찾아가라고요. 거기에 지민이 첫사랑이 남긴 편지가 있다던데 아마 그것 때문일 거예요.”온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쥔 채 그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부정했다.“지민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