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차갑고 도도하던 공지민이 지금은 다른 남자에게 매달리는 모습이라니.구은우가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본다면 과거에 그렇게 잘해줬던 걸 후회하지 않을까?오하윤은 속으로 쾌감을 느꼈다. 공지민은 몇 년 동안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매년 누군가는 공지만과 구은우가 결혼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오하윤은 즉시 휴대폰을 꺼내 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나 공지민 만났어. 정말 우연히.]단톡방은 순식간에 활기를 띠었다. 공지민의 학창 시절 성적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구은우가 그녀에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공지민이 구은우의 고백을 거절했지만 구은우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지민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네가 왜 거절했는지 알아. 오늘 내가 너무 서두른 것 같아. 공부 가르쳐줄까? 저녁에 너희 집에 갈게.”공지민은 공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대신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한 번은 부모님에게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집안의 체면이 구겨질 거라며 극구 반대했다. 하물며 옆집에는 전교 1등인 구은우가 살고 있었으니.구은우는 공지민이 만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탄했다.“지민아, 너 정말 요리사로서의 재능이 있어. 공부는 너랑 안 맞는 것 같아.”공지민은 요리 레시피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선해 더욱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가족들은 요리사를 하겠다는 그녀의 꿈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특히 여자로서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 결과 공지민은 집에서 요리할 수 없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구은우의 집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의 부모님은 구은우를 무척 좋아했고 딸이 구은우와 더 가까워져서 두 사람이 이어지기를 바랐다.어차피 구은우는 한눈에 봐도 훌륭한 사람이었으니 공지민이 구은우의 집에 가서 늦게 돌아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하지만
학교 다닐 때 구은우를 짝사랑하던 여학생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의 눈에는 오직 공지민 뿐이었다.그런데 이제 공지민이 타락하여 누군가의 개처럼 살고 있다니 오하윤은 그야말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오하윤은 단톡방에서 대화를 이어갔다.[지민이 걔 요즘 돈 많은 사람 따라다녀. 은우랑은 벌써 오래전에 끝난 거 같더라. 연예계 들어가더니 결국 돈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설마 은우가 차였다고? 은우 같은 사람이? 은우 제원대 합격했잖아. 제원대 나오면 월급도 꽤 높을 텐데?]오하윤은 속이 쓰리고 시큰거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구은우를 잊을 수 없었다.수능이 끝난 이후로 구은우는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다. 그가 대학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상을 받았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는 공지민과 함께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라졌다.지금 공지민은 나타났지만 구은우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혹시 공지민의 배신 때문에 구은우가 해외로 떠난 건 아닐까?’오하윤은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공지민이 미워졌다.마침 온시환이 물었다.“지민이는 고등학교 때 연애한 적 있어요?”공지민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하고 얌전한 듯했지만 가끔은 뾰족한 가시를 세우기도 했다.온시환은 애인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지민의 고등학교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싶었다.오하윤은 구은우 얘기를 꺼낼까 망설이다가 결국 말하지 않기로 했다. 구은우처럼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공지민 같은 하찮은 사람을 빛나게 만들 뿐이었다.그렇게 잘난 남자가 고백했으니 공지민이 분명 우쭐해할 거라 생각했다.“연애한 적 없어요. 누가 걔를 좋아하겠어요. 맨날 조용히 있고 사람들한테 말도 잘 안 걸었어요.”온시환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담배를 하나 물었다.“정말 아무도 지민이 좋아하지 않았어요?”공지민의 외모는 꽤 괜찮았다. 이런 외모라면 고등학교 때 인기가 많았어야 정상이었다.“없어요. 성격이 별로라 사람들이 안 좋아했어요.”옆에 있던 남자가 오하윤을 안
온시환은 말을 마치고 침대에 눕더니 그녀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공지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고집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입에서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좋아요.”사실 공지민도 더는 여기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오하윤을 본 순간 오래된 혼란스러운 기억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어 그녀를 괴롭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온시환은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산 아래까지 걸어가려면 날이 밝아야 겨우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데려다줄 사람도 없었고 가는 길에 멧돼지를 마주칠 위험이 있었다.이곳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어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얘기가 많았다. 그녀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걸 누가 막겠는가.온시환은 방 안의 불을 끄고 눈을 감아버렸다.한편 공지민은 옷을 챙겨 입고 이미 1층으로 내려왔다. 아래층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여전히 즐기고 있었는데 추지성과 오하윤은 이미 서로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분명 오하윤은 추지성의 파트너가 아니었는데 이미 교체된 모양이었다.공지민이 내려오는 걸 본 추지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어, 지민 씨 내려왔네요? 좀 나아졌어요?”공지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자 오하윤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나섰다. 공지민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공지민!”정원에 도착했을 때 오하윤이 마침내 그녀를 붙잡았다.“너 이제 온시환한테 꼬리 치고 다니는 거야? 그럼 은우는? 몇 년 동안 은우는 단 한 번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았어.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네가 차버린 뒤에 해외로 나간 거 맞지? 공지민, 너 어쩜 이렇게 비열할 수가 있어. 은우 같은 남자를 두고 온시환한테 붙어먹다니, 어떻게 이 정도로 타락할 수 있냐고? 은우도 참 눈이 멀었나 봐. 너 같은 여자를 좋아했다니!”오하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오하윤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
온시환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는 이 남자와 친구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쓰는 글의 소재가 같아 경쟁 관계에 있었다.평소에는 함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대충 넘어갔으나 지금처럼 체면 문제가 얽히면 누구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온시환의 시선이 다시 공지민을 향했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공지민, 사과하지 않을 거면 혼자 걸어가.”방금 방에서 공지민이 나가려 했을 때는 온시환은 그녀가 허세를 부린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가라고 한 것은 진심으로 내쫓는 말이었다.공지민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시선은 누구의 얼굴에도 머물지 않았다.“좋아요,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추지성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평소에는 얌전하더니 이번엔 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네. 그런데 지민 씨가 진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려고?”온시환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게 더 화가 났다.“헤어진다고? 원래 사귄 적도 없는데, 뭘 헤어져. 내가 그동안 너무 봐준 거지.”그의 시선이 오하윤의 발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발목은 확실히 부어 있었다.“일단 의사 불러서 하윤 씨 발목 좀 봐야겠어요.”오하윤은 대범한 척하며 말했다.“괜찮아요. 지민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저런 성격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도 지민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온시환은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비벼 끄며 더욱 짜증이 밀려왔다.지금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겼고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지민은 달랑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나갔다. 정말 혼자 산길을 내려갈 생각일까?공지민이 설마 그 정도로 어리석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기껏해야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겠지.’온시환은 더 이상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몇백 미터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산길은 끝이 없을 만큼 길고도 길었다. 공지민은 한 시간 넘게 걷다가 아무 데나 자리를 찾아 앉았
뒤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빵빵빵.하지만 공지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온시환은 원래부터 화가 나 있었는데 지금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공지민!”그는 버럭 소리치며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너 일부러 이러는 거지?”휴대폰은 꺼져 있고 혼자 산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그녀가 정말 죽을 작정인지 의심스러웠다.공지민도 화가 나서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내 일에 참견하지 마.”평소 순종적이던 그녀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을 부리니 온시환은 무척 당황스러웠다.“그래, 내가 너한테 신경 쓰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그는 분을 삭이며 차로 돌아가려다 여전히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공지민을 보자 갑자기 마음속의 분노가 깨끗이 사라져갔다.“하, 오늘 왜 그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공지민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구은우와 관련된 기억만 떠오르면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구은우 앞에서는 모든 것이 뒤로 밀려났다.온시환은 차에 올라 헤드라이트를 켜고 조용히 그녀를 따라갔다. 가끔 차를 그녀 옆에 바짝 붙이며 말을 걸었다.“너 고집 좀 버려. 내가 고집 센 여자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공지민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코끝에 있는 점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부드럽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녀는 열린 창문 너머로 손가락을 뻗어 그의 점을 살짝 따라 그렸다.온시환은 순간 자신감이 차올랐다. 역시 그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투정 부리고 차에 올라타. 돌아가자. 다른 사람들한테 웃음거리 되기 전에.”“돌아가고 싶지 않아.”온시환은 오늘 밤 이미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공지민,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어.”“그럼 참지 마.”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말을 마치자마자 온시환은 추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추지성은 그가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을 직접 봤기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조금 신경 쓰이고 있었다.“시환아?”“지성아, 밧줄 좀 가져와. 지민이가 떨어졌어.”“얼마나 긴 줄이 필요해?”“5미터쯤 되는 걸로. 될 수 있으면 좀 더 긴 게 좋겠어.”온시환은 전화를 끊고 다시 공지민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직접 뛰어내렸다.3미터 높이의 절벽은 꽤 위협적으로 보였다. 최대한 다치지 않으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며 뛰어내렸지만 결국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그러나 그는 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절뚝거리며 공지민에게 다가갔다.“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공지민의 뺨은 긁힌 상처가 있었고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화가 가라앉으며 그녀의 턱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여기서 기다려. 지성이가 금방 올 거야.”공지민은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온시환은 남아 있던 화마저 사라졌지만 입을 떼며 말했다.“너 평소에 이렇게 고집부리진 않았잖아. 오늘은 대체 왜 그래? 정말 혼자 밤새 걸어가려고 했어?”“시환 씨는 나한테 잘해주지 않잖아.”“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른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신경도 안 썼을 거야.”사실 온시환은 어떻게 누군가에게 잘해줘야 하는지 몰랐다. 특히 상대가 여자라면 더더욱 그랬다.그의 세계관에서 사람과의 관계란 우정이 전부였고 남녀 간의 감정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꿔 그의 품에 기대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생각에 잠겼다.자신이 여자를 대할 때 느꼈던 무관심이 지금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왠지 낯설었다.한 시간 후, 추지성이 도착했다. 온시환의 차를 보며 그는 긴 밧줄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공지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이 그녀를 부축해 차에서 내리고 방까지 데려가는 동안 공지민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온시환은 의사를 불러 외상을 치료하게 한 후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발을 닦아주려고 무릎을 꿇었다.공지민은 오늘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의 손바닥이 발바닥을 감쌀 때 뜨거운 온기에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발을 빼내려 했지만 온시환이 단단히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지금 몸 상태로는 씻을 수 없으니까, 그냥 발 닦고 푹 쉬어.”공지민은 그를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그녀의 느닷없는 정중함에 온시환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발을 다 닦아준 뒤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온시환의 발목 부상은 심하지 않았기에 간단히 샤워만 마치고 침대로 돌아왔다.공지민은 이미 누워 있었다. 온시환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무언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는 묻는 걸 멈췄다. 대신 그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그날 밤 공지민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꿈을 꾸었다. 시간을 거슬러 나타난 소년, 농구장을 누비며 주위의 함성을 한몸에 받았던 그 생생한 모습이 눈앞에 아련히 펼쳐졌다.눈을 떴을 때 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아마도 오하윤을 보고 나서 감정이 크게 요동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방을 나가고 싶지 않았다.한편 아래층에서는 오하윤이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하윤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오늘 온시환 앞에서 공지민이 과거 첫사랑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생각이었다.구은우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공지민 따위에게 가당키나 할까?그녀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오하윤은 초조한 듯 자꾸만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온시환이 내려온 지 한참이 지나도 공지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결국 참지 못한 오하윤이 물었다.“시환 씨, 지민이는 아직 자는 건가요?”모두 준비
오하윤은 오늘 캠핑을 나가는 김에 공지민을 제대로 비꼬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시환 씨, 지민이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맡겼는데, 그동안 지민이가 연락을 끊고 사라진 것처럼 지내서 아직도 전달을 못 했거든요.”온시환은 별생각 없이 바로 번호를 불러줬다.오하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캠핑을 떠났고 추지성도 합류했다. 펜션에는 온시환과 공지민만 남게 되었다.원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온시환은 두 시간쯤 지나자 슬슬 밀려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함께 남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공지민이 가기 싫다면 그냥 그녀를 혼자 두고 자신은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온시환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한 시간을 더 아래층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공지민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공지민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아직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또 나가려 하는 그녀를 보자 온시환은 화가 치밀었다.“너 또 뭘 하려는 건데? 제발 좀 위층에서 얌전히 쉬면 안 돼?”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처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온시환의 차를 두고 걸어서 산길을 내려가려는 듯했다.“공지민!”온시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또 혼자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정말 내가 끝까지 참아줄 줄 알아?”공지민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온시환은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평소의 그녀는 항상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가 없으면 마치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너...”온시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지민은 그를 밀쳐냈다.“좀 귀찮게 굴지 말고 나한테 신경 꺼.”온시환은 원래 여자에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