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윤은 오늘 캠핑을 나가는 김에 공지민을 제대로 비꼬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시환 씨, 지민이 번호 좀 알려주실래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맡겼는데, 그동안 지민이가 연락을 끊고 사라진 것처럼 지내서 아직도 전달을 못 했거든요.”온시환은 별생각 없이 바로 번호를 불러줬다.오하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캠핑을 떠났고 추지성도 합류했다. 펜션에는 온시환과 공지민만 남게 되었다.원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온시환은 두 시간쯤 지나자 슬슬 밀려오는 지루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함께 남겠다고 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공지민이 가기 싫다면 그냥 그녀를 혼자 두고 자신은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온시환은 답답한 마음을 안고 한 시간을 더 아래층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공지민이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공지민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아직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또 나가려 하는 그녀를 보자 온시환은 화가 치밀었다.“너 또 뭘 하려는 건데? 제발 좀 위층에서 얌전히 쉬면 안 돼?”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처럼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그녀는 온시환의 차를 두고 걸어서 산길을 내려가려는 듯했다.“공지민!”온시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또 혼자 산 아래로 내려가려고? 정말 내가 끝까지 참아줄 줄 알아?”공지민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온시환은 그녀의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평소의 그녀는 항상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가 없으면 마치 살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너...”온시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지민은 그를 밀쳐냈다.“좀 귀찮게 굴지 말고 나한테 신경 꺼.”온시환은 원래 여자에게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편 오하윤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공지민이 왜 펜션을 떠났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오하윤은 공지민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은우가 사실 너에게 편지를 썼어. 마침 수능이 끝날 무렵이었고 뭔가 바쁜 일이 있었던 건지 그 편지를 너에게 전달하라고 다른 친구에게 맡겼더라. 그런데 그 편지가 결국 나한테 왔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편지를 질투심에 선생님한테 넘겼거든.]그 시절, 반 친구들은 각자 서류가 담긴 파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파일에 학생들의 자료를 보관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더라도 누군가가 파일을 찾아가고 싶다면 선생님이 파일을 보관한 곳에서 찾아 줄 수 있었다.아마도 구은우가 쓴 편지는 선생님이 그 파일에 넣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오하윤은 그 이야기를 공지민에게 전하며 살짝 도발했다.[네가 산 아래로 걸어서 내려간다면 구은우가 남긴 또 다른 물건이 뭔지 알려줄게.]하지만 사실 그 편지 외에 구은우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오하윤은 공지민이 온시환을 붙잡고 살아가며 이미 구은우를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공지민은 구은우와 관련된 물건을 얻기 위해 정말 떠났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오하윤은 속으로 흥분을 금치 못했다.‘이걸 온시환에게 말하면 분노하지 않을까? 그럼 공지민은 이제 끝장이겠지. 특히 스폰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걸 가장 싫어하잖아.’그녀는 손에 들린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시환 씨, 제가 왜 지민이가 떠났는지 알아요. 아마도 지민이가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 남긴 편지를 찾으러 간 것 같아요. 어제 선생님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거든요. 우리 고등학교 졸업 파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필요한 사람이있으면 찾아가라고요. 거기에 지민이 첫사랑이 남긴 편지가 있다던데 아마 그것 때문일 거예요.”온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쥔 채 그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부정했다.“지민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오랜 시간이 흐르며 편지지는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혹시라도 훼손될까 봐 공지민은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편지의 내용은 사실 간단했다. 수능이 끝날 무렵 구은우는 밤에 할 말이 있다며 그녀에게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그날 밤 공지민은 집에서 기다렸지만 구은우는 오지 않았다.그리고 몇 달 후 구은우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해외에 있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해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구은우는 곁에서 아버지를 보살폈고 깜빡하고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아 공지민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다시 만났을 때 구은우는 그동안의 일을 사과하며 그녀를 웃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지민도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그날 그녀는 약속을 지키며 정말 얌전히 기다렸지만 결국 구은우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후에 둘은 연인 관계를 확실히 했다.편지의 첫 구절은 구은우가 자주 부르던 ‘지민아’였다.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맑았다. 그 첫 마디를 보는 순간 공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편지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다. 단지 그녀에게 ‘나의 여자 친구가 되어줄래?’라고 묻는 글이었다.대학교에 들어가 둘이 사귀게 되었을 때 구은우는 그녀에게 편지를 읽어봤는지 물었다. 공지민은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편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손에 들어온 편지. 그 짧은 다섯 문장이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공지민은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서야 조심스레 접어 넣었다.일어서려는 찰나 뒤에서 온시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공지민?”온시환은 오늘 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공지민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이미 제원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다.‘허,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공지민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그는 잠시 우쭐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공지민은 그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천천히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날 밤, 온시환은 평소와 달리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 함께 있는 여자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처음인 데다 그저 작은 배역 하나만 약속했을 뿐인데도 바로 따라왔다. 평소라면 아침까지 그녀와 즐겼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자꾸만 시선이 공지민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정말 잠든 것을 확인하자 그는 마치 정성껏 준비한 연극에 관객이 한 명도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허무하고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온시환은 대충 일을 마치고 여자에게 감독을 소개해 준 뒤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공지민이 자는 척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담배를 반쯤 태우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확인해 보니 진짜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왜 혼자만 초조해하고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나는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데, 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 잘도 잘 수 있지?’온시환은 참지 못하고 공지민을 흔들어 깨웠다.“공지민! 일어나!”공지민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러는데요?”그 말에 온시환은 잠시 멍해졌다.‘왜 그러냐고?’방금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걸 보고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다른 여자들처럼 화를 내며 소리치고 자신이 제일 소중한 사람인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지민은 한 번도 질투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이런 장면을 마주해도 그녀는 늘 침착하고 조용했다.‘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나를 좋아한다면서?’그의 마음 한편에서 이상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온시환은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를 꺼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배고파. 네가 만든 음식 먹고 싶어. 근처에 24시간 마트 있으니까 가서 재료 좀 사 와서 만들어 줘.”원래라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공지민은 이미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온시환은 안도하는 동시
온시환은 마지막 말을 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조용히 태우고 있었다.한편 공지민은 장을 보고 돌아와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주방 문가에 서서 그녀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꽤 오랜 시간 그녀의 등을 향해 시선이 꽂혀 있었다. 공지민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눈길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때쯤 온시환이 드디어 움직였다.그는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진짜 이런 늦은 시간에 날 위해 요리를 하겠다는 거야? 안 졸려?”온시환은 원래 그렇게 난잡한 사람은 아니었다. 과거에 큰 수술을 받은 뒤 그는 굳게 다짐했다. 이번 생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자고,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말자고.그래서 가족이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의 눈에는 모두 한순간 스쳐 가는 것들일 뿐이었다.그저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면 된다고 여겼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라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방금 반승제와의 대화 이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을 좋아했다. 그 마음이 깊진 않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 정도로도 몹시 소중한 감정이었다.어쩐지 공지민에게 자주 화가 났던 이유는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마침 공지민도 그를 좋아하니 한번 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조금이라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든 끝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세상에는 여자가 많으니 굳이 한 사람에게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공지민은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온시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결국 내가 너를 신경 쓰게 만들고 싶어서 아니야? 이제 내가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은데 기분 좋지 않아?”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공지민이 감동할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좋아요.”온시환의 얼굴에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하윤은 평생 누구를 질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지민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공지민을 뼈에 사무치도록 질투했고 그 이유는 단순히 구은우 때문만은 아니었다.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만약 공지민을 자신의 처지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구은우를 위해 복수한 셈이라고 여겼다.무엇보다도 공지민의 아리따운 외모가 눈에 거슬렸다. ‘만약 공지민도 나처럼 계부에게 갇혀 지하실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어떨까?’오하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천천히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한편 자동차에 탄 공지민은 그런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녀는 단지 차창 밖으로 물러나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오하윤의 고향은 작은 군청 소재지에 있는 낡은 동네였다. 도시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오하윤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 오래된 주택가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며 라면을 한 그릇 먹는 동안 그 주택가가 이미 사람들이 거의 떠나간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래전 그 건물에서 두 여성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한 명은 투신했고 다른 한 명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었다. 문제는 그 사건의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공지민은 주변 가게에서 오하윤에 대해 물어봤고 분식집 주인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오하윤이요? 걔 엄마가 스스로 뛰어내린 사람이잖아요. 엄마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는데, 마지막 남편이 가정폭력이 심했대요. 결국 더는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때 열네 살이던 하윤이만 남겨두고요. 그 동안 하윤이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몇 년 전에 잠깐 왔던 게 전부예요. 그때도 계부가 걔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하윤이가 경찰을 불러 간신히 빠져나갔어요. 그 이후로는 고향에 발길도 안 했어요.”공지민은 하루 종일 분식집에 앉아 주변을 지켜봤다. 그러다 건물 밖으로 나오는 오하윤의 계부를 발견했다. 그는 체구가 크고
시간은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공지민은 핸드폰을 켜고 나서야 문보영이 남긴 수많은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시환 쪽은 여전히 조용했다.그동안 공지민의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작은 숙박업소에서 머물며 지낸 일주일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문보영의 메시지를 읽어도 답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세수를 했다. 얼굴을 닦고 나가자마자 문보영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민아!”수화기 너머로 문보영이 다급하게 외쳤다.“너 대체 지난 일주일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계속 전화 안 받으면 신고하려고 했어!”공지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대답했다.“왜 그래?”“왜 그래라니,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온시환이 너 찾는다고 나한테 전화만 수십 통을 했어. 나보고 너 숨겨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아? 이제 핸드폰 켰으니까 위치 추적해서 곧 너한테 갈 거야.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봐.”공지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온시환에게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건가?그는 평소에도 자주 잠수를 탔고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니.그러나 그녀가 사진첩을 가방에 넣고 제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 순간 온시환이 나타났다. 문보영과 통화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온시환이 헬기를 타고 온 건가 싶을 만큼 빠른 등장에 놀랐지만 그를 본 순간 더욱 놀랐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야위어 있었다. 공지민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온시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그러잡았다.“공지민, 네가 이겼어. 이제 나랑 같이 돌아가자.”그의 말에 공지민은 당황했다. 도대체 이겼다는 게 무슨 뜻일까? 둘 사이에 내기를 한 적도 없는데.온시환은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주일 전 둘이 헤어진 날 언쟁이 심했지만 공지민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게다가 작은 시골 마을에 숨다니, 그가 걱정하도록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건가?처음
공지민은 좌석에 기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공지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그만 화 풀어.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어차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동안 하루하루 대충 즐기며 살자는 주의였거든. 이제 돌아가면 다른 여자들은 다 정리할게. 그러니까 더 이상 화내지 마.”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 다른 여자와 얽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지민이 싫증 나기 전까지는 아닐 거라고.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내가 운전할 테니 좀 자, 자기야.”공지민은 눈을 한 번도 뜨지 않았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중간에 비행기를 탔던 것 같았다.제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가장 먼저 가방부터 찾았다. 하지만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며 온시환을 바라봤다.“내 가방 어디 있어요?”온시환은 여자와 함께 멀리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아마 비행기에 두고 내린 것 같아.”공지민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공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지민아, 됐어. 그냥 가방 하나잖아? 나 지금 좀 피곤한 데 빨리 가자. 네가 원하는 가방은 몇 개든 사줄게.”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온시환은 화가 났지만 그녀를 뒤따라갔다.공지민은 공항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직원은 가방을 곧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녀는 한쪽에 앉아 기다렸다. 온시환은 점점 지쳐갔다. 오늘 밤에는 술자리도 예정되어 있었다.공지민이 참여한 드라마가 오늘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시청률이 기록을 깼다. 그녀가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했지만 드라마는 여전히 대성공이었다.온시환은 이 드라마의 작가로서 축하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하지만 약속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고 가방이 그 안에 도착할 가능성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