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오하윤의 눈가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공지민이 왜 펜션을 떠났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보낸 문자 때문이었다.오하윤은 공지민에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은우가 사실 너에게 편지를 썼어. 마침 수능이 끝날 무렵이었고 뭔가 바쁜 일이 있었던 건지 그 편지를 너에게 전달하라고 다른 친구에게 맡겼더라. 그런데 그 편지가 결국 나한테 왔어.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편지를 질투심에 선생님한테 넘겼거든.]그 시절, 반 친구들은 각자 서류가 담긴 파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 파일에 학생들의 자료를 보관했다. 졸업 후 몇 년이 지나더라도 누군가가 파일을 찾아가고 싶다면 선생님이 파일을 보관한 곳에서 찾아 줄 수 있었다.아마도 구은우가 쓴 편지는 선생님이 그 파일에 넣어두었을 가능성이 컸다.오하윤은 그 이야기를 공지민에게 전하며 살짝 도발했다.[네가 산 아래로 걸어서 내려간다면 구은우가 남긴 또 다른 물건이 뭔지 알려줄게.]하지만 사실 그 편지 외에 구은우가 남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오하윤은 공지민이 온시환을 붙잡고 살아가며 이미 구은우를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공지민은 구은우와 관련된 물건을 얻기 위해 정말 떠났다.‘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야?’오하윤은 속으로 흥분을 금치 못했다.‘이걸 온시환에게 말하면 분노하지 않을까? 그럼 공지민은 이제 끝장이겠지. 특히 스폰해 주는 사람들은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걸 가장 싫어하잖아.’그녀는 손에 들린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시환 씨, 제가 왜 지민이가 떠났는지 알아요. 아마도 지민이가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 남긴 편지를 찾으러 간 것 같아요. 어제 선생님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거든요. 우리 고등학교 졸업 파일이 아직 남아 있으니 필요한 사람이있으면 찾아가라고요. 거기에 지민이 첫사랑이 남긴 편지가 있다던데 아마 그것 때문일 거예요.”온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쥔 채 그 이야기를 듣고 단번에 부정했다.“지민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오랜 시간이 흐르며 편지지는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혹시라도 훼손될까 봐 공지민은 아주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편지의 내용은 사실 간단했다. 수능이 끝날 무렵 구은우는 밤에 할 말이 있다며 그녀에게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그날 밤 공지민은 집에서 기다렸지만 구은우는 오지 않았다.그리고 몇 달 후 구은우를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해외에 있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가 해외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도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구은우는 곁에서 아버지를 보살폈고 깜빡하고 휴대폰을 가져가지 않아 공지민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다시 만났을 때 구은우는 그동안의 일을 사과하며 그녀를 웃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지민도 별다른 말 없이 넘어갔다.그날 그녀는 약속을 지키며 정말 얌전히 기다렸지만 결국 구은우는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후에 둘은 연인 관계를 확실히 했다.편지의 첫 구절은 구은우가 자주 부르던 ‘지민아’였다.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맑았다. 그 첫 마디를 보는 순간 공지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편지의 내용은 다른 게 아니었다. 단지 그녀에게 ‘나의 여자 친구가 되어줄래?’라고 묻는 글이었다.대학교에 들어가 둘이 사귀게 되었을 때 구은우는 그녀에게 편지를 읽어봤는지 물었다. 공지민은 받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 그는 더 이상 편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손에 들어온 편지. 그 짧은 다섯 문장이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공지민은 편지를 몇 번이나 읽고서야 조심스레 접어 넣었다.일어서려는 찰나 뒤에서 온시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공지민?”온시환은 오늘 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여기서 공지민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이미 제원으로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다.‘허,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공지민이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그는 잠시 우쭐해졌다. 물론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
공지민은 그를 한 번 흘깃 보더니 천천히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그날 밤, 온시환은 평소와 달리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 함께 있는 여자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고 처음인 데다 그저 작은 배역 하나만 약속했을 뿐인데도 바로 따라왔다. 평소라면 아침까지 그녀와 즐겼을 테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자꾸만 시선이 공지민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정말 잠든 것을 확인하자 그는 마치 정성껏 준비한 연극에 관객이 한 명도 없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허무하고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온시환은 대충 일을 마치고 여자에게 감독을 소개해 준 뒤 옆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처음에는 공지민이 자는 척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담배를 반쯤 태우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확인해 보니 진짜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왜 혼자만 초조해하고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나는 이렇게 속이 뒤집히는데, 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 잘도 잘 수 있지?’온시환은 참지 못하고 공지민을 흔들어 깨웠다.“공지민! 일어나!”공지민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왜 그러는데요?”그 말에 온시환은 잠시 멍해졌다.‘왜 그러냐고?’방금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던 걸 보고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다른 여자들처럼 화를 내며 소리치고 자신이 제일 소중한 사람인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지민은 한 번도 질투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이런 장면을 마주해도 그녀는 늘 침착하고 조용했다.‘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나를 좋아한다면서?’그의 마음 한편에서 이상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온시환은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를 꺼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배고파. 네가 만든 음식 먹고 싶어. 근처에 24시간 마트 있으니까 가서 재료 좀 사 와서 만들어 줘.”원래라면 거절할 줄 알았지만 공지민은 이미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온시환은 안도하는 동시
온시환은 마지막 말을 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조용히 태우고 있었다.한편 공지민은 장을 보고 돌아와 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온시환은 주방 문가에 서서 그녀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응시했다.꽤 오랜 시간 그녀의 등을 향해 시선이 꽂혀 있었다. 공지민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눈길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때쯤 온시환이 드디어 움직였다.그는 몇 걸음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진짜 이런 늦은 시간에 날 위해 요리를 하겠다는 거야? 안 졸려?”온시환은 원래 그렇게 난잡한 사람은 아니었다. 과거에 큰 수술을 받은 뒤 그는 굳게 다짐했다. 이번 생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자고, 어떤 일에도 얽매이지 말자고.그래서 가족이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의 눈에는 모두 한순간 스쳐 가는 것들일 뿐이었다.그저 오늘 하루를 즐겁게 살면 된다고 여겼다.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라면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방금 반승제와의 대화 이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을 좋아했다. 그 마음이 깊진 않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 정도로도 몹시 소중한 감정이었다.어쩐지 공지민에게 자주 화가 났던 이유는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마침 공지민도 그를 좋아하니 한번 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조금이라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언제든 끝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세상에는 여자가 많으니 굳이 한 사람에게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공지민은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온시환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입을 맞췄다.“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결국 내가 너를 신경 쓰게 만들고 싶어서 아니야? 이제 내가 조금 신경 쓰이는 것 같은데 기분 좋지 않아?”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공지민이 감동할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좋아요.”온시환의 얼굴에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하윤은 평생 누구를 질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공지민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공지민을 뼈에 사무치도록 질투했고 그 이유는 단순히 구은우 때문만은 아니었다.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만약 공지민을 자신의 처지로 끌어내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구은우를 위해 복수한 셈이라고 여겼다.무엇보다도 공지민의 아리따운 외모가 눈에 거슬렸다. ‘만약 공지민도 나처럼 계부에게 갇혀 지하실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다면 어떨까?’오하윤은 그 기억을 떠올리면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천천히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실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한편 자동차에 탄 공지민은 그런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녀는 단지 차창 밖으로 물러나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오하윤의 고향은 작은 군청 소재지에 있는 낡은 동네였다. 도시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오하윤이 알려준 주소를 따라 오래된 주택가로 들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며 라면을 한 그릇 먹는 동안 그 주택가가 이미 사람들이 거의 떠나간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래전 그 건물에서 두 여성이 죽음을 맞이했다고 했다. 한 명은 투신했고 다른 한 명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었다. 문제는 그 사건의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공지민은 주변 가게에서 오하윤에 대해 물어봤고 분식집 주인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다.“오하윤이요? 걔 엄마가 스스로 뛰어내린 사람이잖아요. 엄마가 결혼을 세 번이나 했는데, 마지막 남편이 가정폭력이 심했대요. 결국 더는 못 견디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때 열네 살이던 하윤이만 남겨두고요. 그 동안 하윤이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 몇 년 전에 잠깐 왔던 게 전부예요. 그때도 계부가 걔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하윤이가 경찰을 불러 간신히 빠져나갔어요. 그 이후로는 고향에 발길도 안 했어요.”공지민은 하루 종일 분식집에 앉아 주변을 지켜봤다. 그러다 건물 밖으로 나오는 오하윤의 계부를 발견했다. 그는 체구가 크고
시간은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공지민은 핸드폰을 켜고 나서야 문보영이 남긴 수많은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시환 쪽은 여전히 조용했다.그동안 공지민의 눈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작은 숙박업소에서 머물며 지낸 일주일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문보영의 메시지를 읽어도 답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세수를 했다. 얼굴을 닦고 나가자마자 문보영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민아!”수화기 너머로 문보영이 다급하게 외쳤다.“너 대체 지난 일주일 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계속 전화 안 받으면 신고하려고 했어!”공지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대답했다.“왜 그래?”“왜 그래라니, 너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온시환이 너 찾는다고 나한테 전화만 수십 통을 했어. 나보고 너 숨겨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아? 이제 핸드폰 켰으니까 위치 추적해서 곧 너한테 갈 거야.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봐.”공지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온시환에게 무슨 설명이 필요하다는 건가?그는 평소에도 자주 잠수를 탔고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비밀이 있기 마련이니.그러나 그녀가 사진첩을 가방에 넣고 제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 순간 온시환이 나타났다. 문보영과 통화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온시환이 헬기를 타고 온 건가 싶을 만큼 빠른 등장에 놀랐지만 그를 본 순간 더욱 놀랐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야위어 있었다. 공지민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온시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턱을 그러잡았다.“공지민, 네가 이겼어. 이제 나랑 같이 돌아가자.”그의 말에 공지민은 당황했다. 도대체 이겼다는 게 무슨 뜻일까? 둘 사이에 내기를 한 적도 없는데.온시환은 가슴속에 쌓인 답답함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주일 전 둘이 헤어진 날 언쟁이 심했지만 공지민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다.게다가 작은 시골 마을에 숨다니, 그가 걱정하도록 일부러 이런 짓을 한 건가?처음
공지민은 좌석에 기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공지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는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그만 화 풀어. 그날은 내가 잘못했어. 어차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동안 하루하루 대충 즐기며 살자는 주의였거든. 이제 돌아가면 다른 여자들은 다 정리할게. 그러니까 더 이상 화내지 마.”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생각했다. 앞으로 다시 다른 여자와 얽힐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지민이 싫증 나기 전까지는 아닐 거라고.그는 그녀를 끌어당겨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내가 운전할 테니 좀 자, 자기야.”공지민은 눈을 한 번도 뜨지 않았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중간에 비행기를 탔던 것 같았다.제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가장 먼저 가방부터 찾았다. 하지만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며 온시환을 바라봤다.“내 가방 어디 있어요?”온시환은 여자와 함께 멀리 다녀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가방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아마 비행기에 두고 내린 것 같아.”공지민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공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지민아, 됐어. 그냥 가방 하나잖아? 나 지금 좀 피곤한 데 빨리 가자. 네가 원하는 가방은 몇 개든 사줄게.”하지만 공지민은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온시환은 화가 났지만 그녀를 뒤따라갔다.공지민은 공항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직원은 가방을 곧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녀는 한쪽에 앉아 기다렸다. 온시환은 점점 지쳐갔다. 오늘 밤에는 술자리도 예정되어 있었다.공지민이 참여한 드라마가 오늘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시청률이 기록을 깼다. 그녀가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중도 하차했지만 드라마는 여전히 대성공이었다.온시환은 이 드라마의 작가로서 축하 자리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하지만 약속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고 가방이 그 안에 도착할 가능성
이 술자리는 밤늦게까지 이어졌지만 공지민에게선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답답한 마음이 들며 온시환은 문득 의아해졌다.‘얘 대체 나랑 연애를 할 생각은 있는 건가? 나를 좋아한다며?’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다가 마침 추지성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그는 추지성에게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한 뒤 2차를 가기로 했다.2차는 바로 근처의 바였다. 온시환은 이미 술에 취해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코끝에 있는 작은 점은 더욱 요염하게 보였다.추지성 역시 꽤 많이 취해 있었고 주변 사람들과 허풍 섞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너희들 시환이 얼굴 좀 봐. 얘가 직접 드라마 주인공으로 나서면 다른 사람은 전혀 기회가 없을 거야.”“하하하.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시환이랑 같이 해외에 아이디어 얻으러 간 적 있었거든. 교회에 갔을 때,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 시환이를 캐스팅하려고 했다니까? 그냥 지나가던 일반인인 줄 알고 명함을 건넸다니까. 그 영화가 바로 「블랙 해커」야. 동양 배우들이 단역 하나 얻으려고 서로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던 작품인데, 감독은 시환이를 보고 바로 초대했어.”온시환이야 외모보다 그의 여러 논란 때문에 유명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드는 이유는 그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남자 배우들조차 고백할 정도였으니.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추지성이 떠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온시환과 추지성은 같은 연예계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고 연예계 밖에서는 반승제와 서주혁과도 가까웠다. 하지만 이 둘은 연예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바쁘게 지냈기에 온시환이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추지성이었다.추지성은 그가 오늘 유독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시환아, 너 원래 술 잘 마시잖아? 오늘은 왜 그래? 한마디도 안 하고. 이번에 드라마 기록도 깨졌는데 이 형이랑 한 잔 안 할 거야?”온시환은 이미 짜증이 가득했는데 그 말에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옆에
아니나 다를까 공지민은 무언가에 찔린 듯 온시환을 올려다보며 매섭게 노려보았다.온시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몇 장만 훑어봐도 이것이 전형적인 불평등 계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공지민은 자리를 뜨려 했지만 온시환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공지민, 난 저 남자가 왜 너랑 자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안 가. 너 침대에서 꼭 통나무 같은데, 누가 통나무에 흥미를 느낄 수 있겠어?”공지민은 순간 발걸음이 멈칫했지만 그런 말은 전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온시환은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흘렸다.말로 그녀를 상처 주는 건 소용없었다.하지만 구은우를 건드리는 말은 달랐다.대체 얼마나 좋아했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여전히 잊지 못한단 말인가.그 이후로 공지민은 어디를 가든 온시환과 마주쳤다.한두 번은 우연이라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곱 번, 여덟 번이 되니 명백히 의도적인 것이었다.온시환은 예전처럼 가벼운 태도로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공지민을 따라다녔다.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그의 곁에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이다.공지민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촬영이 끝났기 때문이다. 원래 짧게 등장하다 사라지는 조연이라 비중도 크지 않았다. 오늘의 자리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모두가 남자 주인공을 둘러싸고 아부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다.그런 남자 주인공은 또 온시환에게 다가가 비위를 맞추려 애썼지만 온시환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해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공지민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취해 옆 사람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때 우리 엄마가 내 동생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어. 어디로 갔는지 몰라. 그 대신 한 생명이 대신 희생됐지. 내 동생은 원래 수영할 줄 알았는데, 일부러 못 하는 척했던 거야.
구은우는 대학교 1학년 때 공지민과 사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다로 놀러 갔다가 구은우가 파도에 휩쓸린 아이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아이는 무사했지만 구은우는 구조된 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진짜 죽었네.’온시환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내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는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었지만 추지성이 그의 손 가까이에 있던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또 피우려고? 오늘 하루에 대체 몇 대나 피운 거야? 게다가 여긴 병원이잖아. 금연 구역이라고.”온시환은 갑자기 흥미를 잃은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한편 추지성은 서류를 한 번 살펴본 뒤 감탄을 내뱉었다.“와, 운명도 참 잔인하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 같이 놀러 갔는데, 결국 한 사람이 사고로 떠나버리다니. 남겨진 사람은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지. 아마 끊임없이 생각할 거야. 그날 바다에 가지 않았더라면, 다른 곳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데 말이야, 구은우는 공지민이 가장 사랑했던 해에 떠났어. 그리고 그해는 구은우가 공지민을 가장 사랑했던 해이기도 했지.”구은우는 열여덟 살 공지민의 삶에서 서서히 퇴장했다. 이후로 누가 나타나더라도 구은우를 대신할 순 없었다.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이었다.추지성은 이제는 공지민에 대해 별다른 비난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온시환 자신도 말하지 않았던가. 공지민에게 그저 장난이었다고. 결국 장난이 과해져 자신은 벗어나지 못하고 그녀는 가볍게 떠난 것뿐이었다.“그런데 시환아, 너 눈치챘어?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해가 네가 수술을 받았던 해랑 딱 겹쳐. 뭔가 운명 같지 않아?”온시환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적으로 웃었다.“남을 구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내버려두고 자기희생을 포장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결국 구해줬다는 그 아이는 당일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 뒤로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이게 무슨 소용이야? 차라리 짐승을 구하는 게
온시환은 그대로 계단 위에 앉아 있었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정장에 먼지가 묻어 뿌옇게 됐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일 꼭대기 계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이 그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자 온시환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지민아, 오늘 밤의 달 좀 봐.”공지민은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오늘 달은 분명 아름다웠고 내일 날씨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며 신중하게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지민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공지민이 떠나는 것을 본 온시환은 당황해 급히 뒤쫓으려다 그만 술에 취한 상태로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진 모습으로 본 적이 없었다.그는 흙투성이가 된 정장차림으로 그녀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다리가 심하게 다친 듯 몇 번을 시도해도 실패하고 말았다.강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어느 정도 맑게 해주었고 그제야 그는 현실을 자각했다.‘이건 꿈이 아니야. 지민이가 정말 나를 보러 온 거야.’공지민은 그의 모습을 보며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다쳤다면 걱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병원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온시환은 아무 말 없이 그녀가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다.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온시환은 공지민의 손목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손을 뿌리치고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 같았다.공지민은 옆에 있던 의사에게 물었다.“얼마나 쉬어야 하나요?”“2주 정도는 안정이 필요해요. 당분간은 목발을 써야 할 거예요.”공지민은 병원 매점에서 목발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에 들어섰을 때 온시환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모습은 그녀가 알고 있던 온시환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공지민은 목발을
온시환이 집에 돌착했을 때도 서주혁의 팔을 붙잡고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서주혁이 그를 떼어내면 온시환은 다시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지민아...”“난 정말 모르겠어. 왜 날 대체품으로 삼았어? 그렇게 구은우가 좋으면 그냥 그 사람 찾아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건데.”“내가 네 장난감이냐, 나는 당해도 싸다 이거야?”서주혁은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창피해서 버리고 가버리고 싶었다.온시환이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한동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서주혁은 가정부에게 그를 잘 돌봐달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온시환의 집을 나섰다. 취한 사람과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서주혁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시환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공지민이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황당했다. 경찰은 온시환이 음주 운전을 하다 적발되었으니 와서 그를 데려가 달라고 요청했다.“공지민 씨 맞으시죠? 죄송하지만, 친구분을 데려가 주실 수 있을까요? 음주 운전은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다른 사람에게 연락하면 안 될까요?”“그분께서는 당신에게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도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했고요.”공지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밀려왔지만 결국 경찰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잠든 그의 모습은 차분해 보였고 평소의 산만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공지민은 경찰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온시환이 다시는 음주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다는 보증을 하고 나서야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그의 소매를 잡아 살짝 당겼다.온시환은 희미하게 눈을 뜨더니 그녀를 보고 꿈을 꾸는 줄 알았다.갑자기 꿈속 공지민의 얼굴이 사라질까 봐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지민아?”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그러나 공지민은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차가운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대체 원하는 게
한편, 반승제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온시환과 공지민 사이의 일을 알아내기 시작했다.하지만 지금 온시환은 공지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과민 반응을 보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면서 자꾸 대체품 어쩌고 하는 말을 내뱉었다.반승제는 한쪽 무릎을 굽히며 과일주스를 건네주었다.“무슨 대체품이야? 설마 네가 지민 씨한테 대체품으로 이용당했다는 거야?”‘와, 이렇게 자극적인 일이 벌어지다니.’“맞아! 지민이는 정말, 정말 나쁜 여자야.”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온시환이 떠올릴 수 있는 비난은 고작 이 정도였다.정신이 온전할 때는 입에 담기 힘든 독설도 가능했지만 술에 취한 지금은 속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했다. 공지민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굴고 있든지 간에.결국 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예전에 공지민에게 좀 더 잘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어쩌면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그랬다면 지금처럼 그에게 이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을 것이다.온시환은 계속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승제는 그의 말을 들으며 꽤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그는 모은 정보를 모두 성혜인에게 보냈다.[시환이가 대체품이었대.]성혜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온시환이 대체품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더욱 경악했다.한참 후에야 그녀는 단 세 글자로 답장을 보냈다.[꼴좋네.]누구나 알다시피 온시환은 바람둥이였다. 과거 여러 모임에서 그는 여자를 농락하는 말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그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여자를 상처 입혔는지 밤마다 잠 못 들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제는 그가 상처받고 잠 못 이루는 날이 오는 것도 당연했다.성혜인은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온시환은 술에 취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주혁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지인이는 대체 무슨 생각이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서주혁은
온시환은 천천히 손을 놓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래, 알았어.”아무렇지 않은 척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지만 온시환의 눈가는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러나 공지민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온시환이 또 심심풀이로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했다.차인 걸 인정하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고 여겼다.온시환 같은 남자가 진심일 리 없었다. 설령 진심이라 해도, 공지민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그는 식당 밖에 홀로 서 있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공지민이 택시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잠시 후, 그는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오늘 한 잔 하자.”반승제는 흔쾌히 응했다.이상하게 오늘 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는 서주혁까지 불렀다.두 사람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이미 여러 병의 술을 비운 상태였다.“시환아, 너 대체 왜 이래?”온시환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이미 취기가 가득했다.“뭐 하는 거야? 얼른 앉아. 오늘은 취하지 않으면 못 가!”혼자서 술을 퍼마신 온시환을 보며 반승제는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너 혹시 무슨 고민 있냐?”“고민은 무슨... 그냥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하.”서주혁은 말없이 나무토막처럼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그는 분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을 모두 치우고 온시환 앞에 과일주스를 내밀었다.“솔직하게 얘기해. 무슨 일이야?”그 말을 듣자마자 온시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그가 웃는 줄 알았다. 웃을 때도 어깨가 들썩이긴 마찬가지니까.“뭐야, 웃긴 얘기라도 있어?”그는 온시환의 몸을 돌려보았고 그제야 그의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야, 주혁아! 이거 봐. 시환이가 울고 있어!”온시환은 그 말을 듣고 얼른 눈물을 훔치며 소리쳤다.“꺼져!”반승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동차가 레스토랑 앞에 멈춰서자 공지민이 먼저 내려서 안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온시환도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자리를 예약 해둔 터라 직원이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공지민은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푸른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하지만 온시환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왜, 내가 이제 그 점이 없으니까 나를 쳐다볼 생각도 없어진 거야?”공지민은 그가 귀찮을 뿐이었다. 이미 진실을 알았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지, 굳이 이런 말로 둘 다 어색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그러나 온시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네가 다니던 고등학교 가서 구은우 사진 봤어. 솔직히, 별로 잘생긴 것도 아니던데.”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온시환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지만 오히려 더 그녀를 찌르는 말을 꺼냈다.“그렇게 좋으면 왜 안 찾아가? 아니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거야? 네가 이러거 있는 거 보면, 그 자식도 너를 기다리지 않은 모양이지? 참 안 됐네.”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말없이 잔을 들어 올린 공지민은 그대로 커피를 온시환에게 끼얹었다.온시환은 이전에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이 반갑기까지 했다.마치 나무토막처럼 감정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공지민은 얼굴을 잔뜩 굳히고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정신이 좀 들었어?”온시환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있는 냅킨을 집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어쩌지? 평생 정신 못 차릴 것 같아. 공지민, 난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왜 날 대체품으로 썼는지. 진짜 그 점 하나 때문이야?”그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을 터였다.그래서 그는 더더욱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심지어 그
온시환은 공지민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을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왜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고 그에게 와서 상처를 남겼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더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대체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몰래 보러 온 자신이 더 우스웠다.온시환의 차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주차돼 있었다. 연예계에서 그의 영향력 덕분에 차를 촬영장 근처에 세워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그는 창문 너머로 공지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문 장면 촬영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아픈 손목을 문지르는 모습, 옆에 있던 낯선 여성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별다른 장면도 아닌데 온시환은 끝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공지민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때 문보영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공지민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쪽으로는 그날 밤 목격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다른 한쪽으로는 문보영이 여전히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둘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문보영은 공지민이 그날 밤의 일을 봤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밝고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걱정했다.“지민아, 요즘 다시 촬영 시작했어? 혹시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어? 내가 대표님께 한 번 말씀드릴 수 있어. 사실 대표님도 꽤 후회되시는 것 같더라. 요즘 네 인지도도 높잖아.”“아니, 괜찮아.”“그런데 너랑 시환 씨... 지민아, 너희 두 사람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파티에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연락도 안 한다고 하던데.”예전 같았으면 공지민은 문보영의 말을 진심 어린 걱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문보영이 정말 궁금한 건 온시환이 여자 친구가 있는지 여부라는 걸.“헤어졌어. 이번에는 정말 끝이야.”문보영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넌 괜찮아? 너 시환 씨 정말 좋아했잖아. 혹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너를 상처 준 거야?
당연히 취했다. 취하지 않았으면 온시환의 성격상 추지성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추지성은 온시환에게 다시 술병을 열어주며 말했다.“아직 덜 취한 것 같으니 더 마셔.”온시환은 희미하게 뜬 눈으로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지성아, 나 지민이 고등학교에 가봤어. 그리고 지민이 첫사랑을 알게 됐지. 꽤 괜찮게 생겼더라. 그런데 제일 중요한 건 뭔지 알아?”“뭔데?”“내 코끝 여기.”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가리켰다. 여전히 흐릿한 눈빛이었다.“여기에 구은우랑 똑같은 점이 있었잖아. 공지민은 아마 그 점 때문에 나에게 잘해줬던 거야. 너도 우습지 않냐?”그는 입으로 우습다고 말했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넘칠 듯 담겨 있었다.추지성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가지고 놀고 싶을 뿐이었고 막상 손에 넣으면 금세 흥미를 잃었다.“못 가지는 게 가장 좋은 거지. 손에 넣으면 금방 싫증 나는 법이거든.”“지성아, 나 여기가... 정말 아프다.”추지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야, 네가 진짜 내 친구 아니었으면 벌써 널 집어 수영장에 던져 넣어버렸을 거다. 여자를 두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술 더 마셔야겠어.”“안 마셔. 마시면 더 괴로워질 뿐이야.”온시환은 그 말을 끝으로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추지성은 옆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려다 그의 축축한 속눈썹을 보고 멈칫했다.‘설마 또 울었어? 요즘 완전 여자 같아. 조금만 힘들어도 시도 때도 없이 우네.’온시환은 원래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특히 수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의사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로 그는 늘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그가 쓰는 드라마 대본들도 대부분 막장극이었고 그는 막장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막장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돌아와 부메랑처럼 자신을 찌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밤중에 온시환은 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