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오늘 밤 김성진도 이 술집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인들과 나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졸업한 김성진은 집에서 경영하는 회사를 이어받을 예정이었고 자연스레 경영진들과 술자리를 함께해야 했다.이 사람들은 모두 여자 파트너를 데리고 왔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계속 여자의 옷에 손을 넣고는 했다.김성진은 이 모습을 보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중 한 사람이 여자 파트너를 데리고 화장실을 가겠다면서 떠났다. 정말 화장실로 가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몇 분 후, 밖에서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려왔다.“미친년, 너 이게 무슨 뜻이야? 내가 늙었다고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고등학생한테 번호를 물어봐? 젠장, 내가 너를 너무 봐줬지?”“이거 놔요! 이 손 놔요!”“미친년, 저 자식을 보는 네 눈에 빛이 도는 걸 봐서는 네가 뒤에서 얼마나 더럽게 노는지 다 알 텐데, 번호를 물어보러 가? 내가 너 때려죽일 거야!”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김성진은 방금 나간 자신의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얼른 일어서서 나왔다.이때,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진을 보게 되었다. 원진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김성진은 발걸음을 멈추었고 분노가 또다시 타올랐다. 저번 학기에 원진에게 저격당한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한 학기를 못 봤는데 키가 더 크고 더 품격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치 당시연이 한번 다시 키운 듯했다.김성진은 마음이 아주 불편했다. 그는 이미 소유진을 명확히 거절했고 그렇게 하면 당시연이 언젠가는 마음이 돌아지리라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나고 두 사람이 각자 졸업을 한 마당에도 당시연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예전에도 김성진은 당시연과 싸움을 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매번 당시연은 스스로 돌아왔었다.하여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김성진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의 원진을 본 그는 갑자기 두려움이 생겼다. 그제야 그는 무언가가 자신의 인지를 벗어
원진은 남자의 주먹을 놓아주고 시선은 멀지 않는 곳에 있는 김성진에게로 향했다. 김성진은 여유만만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가난에 찌들어있던 절박함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당시연이 사람을 참 잘 키웠다. 기품이 있고 반듯했다.생각하면 할수록 김성진은 더 질투가 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는 다른 사람을 질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에야 질투의 쓴맛을 보게 되었다.김성진의 질투는 남김없이 원진에게로 직접 표출되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리고 마치 불꽃이 일 것 같았다.원진은 손에 들렸던 과일 맛 술을 내려놓았다. 이런 종류의 술은 맥주랑 비슷해서 몇 병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김성진은 차갑게 웃었다.“역시 어린 애야.”원진은 똑같이 비아냥거렸다.“그렇죠. 당신 같은 어른들처럼 느끼하지는 않죠.”젊음은 자산이지 비웃음을 받을 이유는 아니다. 김성진은 마음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술을 두 잔 정도 마신 것 때문에 후끈해지는 것 같았다.“시연이가 너를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아? 반년이 더 지나면 나랑 결혼할 거야. 그때가 되면 너는 네가 살던 데로 돌아가야 할 거야.”“그래요? 누나가 요즘 형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번에 따귀를 맞은 후부터 두 사람 완전히 헤어진 거 아니에요?”원진은 따귀를 맞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 김성진은 더 체면을 구겼다.김성진은 왜 매번 원진을 마주칠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는데 몇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아마도 서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제일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고 제일 소중한 것을 빼앗기리라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원진,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현재 누나가 제일 신경 쓰는 사람이죠. 오늘은 저의 17살 생일이에요. 누나가 특별히 외국에서 돌아온다고 하죠. 이따가 데리러 가야 해요.”원진의 곁에 있던 친구들도 그제야 원진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시연 누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소란이 끝나고 나니 원진이 있는 이곳의 분위기도 조금 이상해졌다. 원진에게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계속해서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진이를 찾은 사람들로 축구팀 하나는 충분히 꾸리겠는데?”“이게 어른들의 세계인가? 이렇게 직설적이라니. 인정, 인정.”그 친구의 발언이 너무 웃겨서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하지만 원진은 눈에 띄게 기운이 빠져 보였다. 조금 전 그가 김성진을 속이기 위해 당시연이 귀국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당시연이 오랫동안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마치 자신이 버려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시연 누가 이제 나를 정말로 버리려는 걸까?’원진은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손에 쥔 잔을 더 세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눈가가 뜨거워졌다.한 시간 후 모임이 끝났다.원진은 택시를 타고 살고 있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멀리서 당시연의 모습이 보였고 그의 눈이 순간 환해졌다. 막 달려가려던 순간 당시연의 곁에 중년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당시연, 내가 김성진의 회사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너희가 이렇게 오래 전부터 헤어졌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네가 정말 원진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어?”당시연은 원진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서둘러 해외에서 돌아왔다. 아직 집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는데 당지석이 그녀를 막아섰다.그녀는 피곤함을 느꼈다.“아빠, 원진은 학교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제 반에서 1등도 했고 이수희 선생님도 그 아이는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제원대에도 충분히 갈 수 있을 거라고요. 제발 그 아이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말아주세요.”“그만해! 그 아이 때문에 너와 성진이가 헤어진 거잖아. 내가 성진이의 회사에서 나간 후에도 성진이는 계속 너에게 연락하려고 시도했어. 성진이가 아직 너를 놓지 못한 건 분명해. 성진이와 대화를 잘 나눠서, 6개월 안에 너희 결혼 문제를 확정 짓도록 해.”당시연은 손에 작은 여
원진은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냉장고에서 얼음팩도 꺼냈다.하지만 당시연은 너무 피곤했다.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얼굴에 차가운 감촉이 닿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원진의 진지한 표정을 마주했다.그의 눈에는 걱정, 아쉬움, 그리고 무언가 깊숙이 감춰진 감정이 담겨 있었다.당시연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원진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원진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순간 더 진지하게 변한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얼마간 당시연의 얼굴에 얼음을 대고 있던 원진이 물었다.“시연 누나, 정말 저를 돌려보내실 건가요?”당시연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았다.원진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후로 그는 수없이 그녀와 가족들 간의 다툼을 목격해왔다. 아마 그는 늘 불안 속에서 지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다.당시연이 눈을 뜨자 그녀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원진의 손이 점점 더 불안하게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소년의 눈가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꼬리를 흔들며 애원하는 강아지 같았다.당시연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늘 원진의 성적만 신경 썼지 그의 마음 상태는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한 번도 도시의 높은 빌딩을 본 적 없는 산골 소년이, 갑자기 낯선 세상으로 끌려왔다면 얼마나 무서웠을까?그제야 당시연은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그녀는 원진을 끌어안았다.원진은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이 순간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어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당시연은 위로하듯이 그의 등을 토닥였다.원진을 안고 있는 동안 당시연은 그가 꽤나 건장해졌다는 걸 느꼈다. 처음 산속에서 그를 봤을 때에도 그를 안아본 적이 있지만 그때는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사람을 밀어냈었다.그때 당시연은 이 아이가 너무 말라서 마음이 아팠다.이제 원진의
당시연은 원진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의 얼굴을 보다가 원진이 정말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웃음이 나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뚝, 그만 울어. 열일곱 살이나 먹고 우는 게 말이 돼. 누나가 생일 선물 사왔어.”당시연은 원진을 살짝 밀어내고 발치에 놓여 있던 가방을 열었다.가방 안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있었다.당시연은 선물 상자를 원진 앞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열어봐.”원진은 눈가가 아직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차분히 소파에 앉아 선물 상자를 받았다.“고마워요, 누나.”그 말이 끝나자마자 당시연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케이크가 도착했다는 택배 기사의 전화였다.당시연은 집 안에서 문을 열어 두고 택배 기사가 그 층으로 올라오자 밖으로 나가 케이크를 받아왔다.1호 사이즈의 작은 케이크였지만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그때 원진은 이미 선물 상자를 열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한정판 농구화가 들어 있었다.당시연은 설명을 덧붙였다.“이수희 선생님께서 네가 체육 시간에 농구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너한테 신발을 사줬어. 이걸 신고 농구하러 가.”원진은 이제 브랜드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어 이 신발이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소리가 잠기며 짧게 대답했다.“네.”당시연은 케이크를 탁자 위에 놓고 숫자 1과7 모형의 초를 꽂은 후 불을 붙였다.“소원 빌어봐. 지금 좀 늦었지만 그래도 의식은 치러야지.”원진은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일 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자 당시연은 웃음이 나왔다.“소원이 그렇게 많아?”“제가 너무 욕심이 많은 건가요?”“괜찮아. 내가 사준 케이크니까, 네가 원하는 만큼 소원 빌어도 돼.”원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네.”두 사람은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당시연은 너무 피곤해서 지금까지 겨우 버티고 있었다.“누나, 가서 좀 자요. 내가 다 정리할게요.”“그래. 나 진짜
당시연은 업무에서 문제를 겪고 있었지만 원진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손에 든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학교에 친구는 있어?”“있어요, 제 짝이요.”“그럼 다행이네. 너 학교에 적응 못 할까 봐 걱정했는데 반 애들이랑은 잘 지내?”당시연은 원진과 이런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예전엔 그저 그에게 충분한 돈을 주는 것만으로도 잘 챙겨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마음이 이렇게 여리다는 걸 알고 난 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네, 다들 잘해줘요.”당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로 기댔다.이곳은 그녀가 가장 자주 찾는 술집이었다. 오늘도 술을 두 잔 더 마셨다.“예전에 오산 마을에서 너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말랐었지. 하지만 눈빛은 강렬했어. 나를 경계하는 그 모습이 꼭 작은 늑대 새끼 같았어. 그런데 해가 될 것 같진 않더라. 그래서 내가 너를 후원하겠다고 한 건 네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야. 솔직히 나도 학생이었으니까 먼 미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진아, 하지만 나는 시작한 건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네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널 버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 넌 나를 믿으면 돼, 알겠지? 지금 내 일도 바빠서,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해. 아직 해외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거든. 사실 네가 보낸 메시지를 못 본 게 아니야. 단지 시차가 너무 커서 네가 밤에 잘 때 내가 연락하면 방해될까 봐 조심했던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서 즐겁게 지내. 이제 네가 공부 잘하는 것도 안 바랄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만 하면 돼.”“이번 학기도 곧 끝나잖아. 내가 다시 돌아오면 아마 너 고3 생활도 한 달은 지났을 거야. 생각해 보면 너랑 오래 같이 있어 주지 못한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에 돌아오면 다시는 떠나지 않을 거야. 네가 고3 졸업할 때쯤 나도 지도 교수님과의 연구 과정이 끝날 거니까, 그때부터는 학교에 남아서 강의할 수 있을 거야.”당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당시연은 턱을 괴고 멀리 보이는 녹색 식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진아, 나중에 나는 정원이 있는 집을 사고 싶어. 사계절 내내 꽃이 피는 식물들을 많이 심어놓고.”원진은 손바닥이 여전히 간질거려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때도 누나랑 저랑 같이 살아요?”“물론이지. 내가 지금 교수님이랑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꽤 수익성이 좋아. 비록 조금 힘들긴 해도 프로젝트 하나당 보너스가 크거든. 2년만 지나면 집 살 수 있을 거야. 그때쯤이면 넌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했을 텐데.”당시연의 눈은 약간 술에 취한 듯 반짝였지만 말할수록 더 큰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원진도 기분이 좋아졌다. 적어도 당시연의 짧은 계획 속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게다가 그가 대학을 졸업하려면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다.원진은 안도하며 테이블에 놓인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그런데 그때 당시연이 살짝 몸을 기울이며 그에게 기대왔다.원진의 손이 떨리며 들고 있던 컵을 놓칠 뻔했다.당시연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고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까 먹은 과일 조각이 살짝 묻어 있었다.그는 몸을 기울여 손가락으로 그 과일 조각을 살짝 떼어냈다.그러나 멀리서 본 김성진의 눈에는 원진이 당시연을 몰래 키스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더는 참을 수 없었던 김성진은 큰 걸음으로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원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에게 술을 퍼부었다.차가운 술이 온몸에 번지자 당시연도 깜짝 놀라 깨어나 김성진을 바라보았다.김성진은 가슴이 심하게 들썩이며 분노에 차 있었다. 심지어 원진의 옷깃을 잡고는 주먹을 들어 그를 치려 했다.그러나 원진은 그를 잡아채어 곧바로 테이블 위로 넘겨버렸다.허리가 부딪친 김성진은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가 힘겹게 일어서려 하자 이번에는 당시연이 원진의 앞에서 그를 막아섰다.“그만해!”김성진은 화가 나서 거의 피를 토할 것 같았다.“이 더러운 것들!”당시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원진이 주눅 들수록 당시연은 점점 더 화가 났다.김성진은 원래 사과할 성격이 아니었고 애초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떳떳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에 더욱 그럴 리 없었다.술집 직원이 CCTV 영상을 가져와 천천히 재생했다. 방금 전 장면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니 당시연과 원진의 행동은 너무도 평범했다. 최소한 영상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김성진이 왜곡해서 본 장면도 CCTV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그 순간 김성진의 눈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고 그는 곁눈으로 당시연의 반응을 살폈다.당시연은 영상에 별다른 게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비웃음을 지었다.김성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깔더니 말했다.“시연아, 이제 그만하고 우리 다시 시작해.”두 사람은 여러 차례 헤어지고 다시 만났지만 이번 이별이 가장 길었다.그의 말이 끝나자 원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이 굳어지며 당시연을 바라보았다. 당시연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면 그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김성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많이 생각해봤어. 나 소유진의 고백도 받아준 적 없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진심이야. 우리 이제 그만 싸우고 다시 만나자. 너랑 다시 시작하면 바로 결혼할게.”당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김성진, 네 머리 좀 제대로 검사받아봐.”김성진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우리 고등학교 때 기억나? 네가 수업 중에 질문에 답하려고 일어섰을 때 반 친구들이 다 떠들었잖아. 우리 둘이 서로 좋아한다고 말이야. 그런데 우리는 그때까지 서로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어. 대학 때 내가 정말 헤어지려고 했던 건 맞아.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쉽게 끝낼 수가 없었어. 그건 우리가 함께한 진짜 추억이잖아. 네가 다른 사람과 함께할 거라는 생각만 해도 견딜 수가 없어. 나도 유치하고 성숙하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불편했을 거 알아.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라는 게 원래 서로 맞춰가며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