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농담이 아니에요. 아침에 할머니가 저를 서재로 불러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몇 마디도 못 하고 찻잔이 떨어지려는 걸 제가 도와주며 손을 만졌어요. 그분의 주름진 손등은 사람의 피부와 매우 흡사한 장갑이에요. 하지만 얼굴은 진짜였어요. 아마 할머니와 같은 얼굴을 만들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그러나 신체의 다른 부분은 따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은 주름진 피부와 매우 유사한 장갑으로 대체 했을 거예요. 승제 씨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 두 사람은 아마 나이가 50쯤 됐을 거예요. 50살과 70, 80살의 피부 상태는 완전히 달라요.”여기까지 말한 성혜인은 심장이 몹시 빨리 뛰었다. 당시 서재에 있을 때 그녀는 겨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그들은 아마도 두 노인을 대체하기 위해 아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그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에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설우현에게 물었다.“오빠, 나미선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죠?”설우현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는 완전히 포기한 듯 쓴미소를 지었다.“몰라.”성혜인은 반승제가 아직 설우현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하늘과 나미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자기가 발견한 사실들도 같이 알려주었다.“오빠의 기억 속에 있는 조부모님에 대해 말해 주실래요?”“매우 엄격한 분들이셨어. 설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분들의 말을 들어야 했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든 절대 용납하지 않고 벌을 내리셨어.”“그렇다면 그렇게 세심하고 엄격한 두 분이 설씨 가문에 시집온 사람이 나하늘이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요? 아침에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어요.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자신의 규칙을 어겼어요. 하지만 저와 마주했을 때 그들은 제 몸의 피를 바꾸라 하며 아이까지 지우라고 했죠. 오
설기웅은 그동안 플로리아 왕실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왕자와는 사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다.한편 설우현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큰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이제 안정을 찾은 성혜인은 조용히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저었다.“우현 씨, 기웅 씨를 믿어도 될까요?”설우현은 멈춰서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형이 비록 설인아의 일에서 큰 잘못을 했지만 이런 일은 절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어요. 아마 이틀 안에 소식이 있을 거예요.”안색이 어두워진 설우현은 짜증 나서 머리를 쥐어뜯었다.“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죠.”이 두 노인이 가짜라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으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반승제는 성혜인의 옆에 앉아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연구 기지의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그들은 야망이 크거든요. 아마 손꼽히는 재벌들을 통제하려고 했을 거예요. 설씨 일가와 같은 엄격한 가풍을 가진 가문이 가장 통제하기 쉬웠을 거예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두 사람만 교체하면 되니까요.”설우현은 믿을 수 없어 온몸이 격직된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 말은 이 연구 기지가 설씨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재벌 가문을 노린다는 건가요?”“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에요. 그들은 모든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하죠. 게다가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아주 은밀하고 강대한 조직이거든요. 한 사람을 위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예요. 만약 우리 형이 그 인체 실험에 대해 더 자세히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었겠죠.”지금 그들은 왕실이 설기웅과 협력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배를 어루만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기웅 씨, 쪽에서 소식이 오면 바로 그곳으로 가야 해요
성혜인이 들어왔을 때 매달려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입이 터져라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반승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빛이 흔들렸다.이상한 건 이런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 순간에도, 신분이 드러난 상황에도 그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설경필과 안문희와 매우 흡사했다.마치 두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성혜인은 단 한 번만 보고 그들이 깊은 최면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깊은 최면만으로는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이때 ‘안문희’가 입을 열었다.“우현아, 기웅아, 다 할머니가 너희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탓이야. 우리가 그때 나하늘 그 계집을 내버려뒀기 때문이야. 전부 우리 잘못이야. 이게 바로 설씨 가문의 재앙이야. 역시 대사님의 점괘가 틀리지 않았어.”이 시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반승제를 보았을 때만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그 대사님이라는 사람은 잡았어요?”그녀는 설기웅에게 물었지만 그는 등을 뻣뻣이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용호가 대답했다.“이미 도망쳤어요.”“그럼 이 두 사람을 검사해 봤어요? 최면당한 게 맞아요?”속을 헤아릴 수 없는 여우 같은 눈매를 가진 최용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최면으로는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어요.”방 안이 조용해지자 몇 초 후 반승제는 장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장미 누나, 주소 보내줄 테니까 배현우를 끌고 잠깐 여기로 와줘.”이 두 가짜는 왜 반승제의 얼굴을 보고 잠시 동요했을까?연구 기지에서 반승우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뭔가 떠올린 것일까?배현우는 헬기로 이송되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두 가짜의 안색이 다시 바뀌었다.의미심장한 점은 배현우가 그들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는 것이다. 반응한 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두 사람은 누구야?”‘설경필’은 자기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흔들며 눈을 크게 뜨고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성혜인은 이 말에 이끌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최용호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썹을 치켜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설우현이 말하길 당신들 구금섬으로 간다면서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반승제가 그녀에게 준 주소였다. 최근 그녀도 정보를 찾고 있었지만 얻을 수 있는 소식이 너무나 적었다.최용호는 손끝으로 종이를 잡았다. 그의 자세는 대범하고 여유로웠다.“마침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조금 알고 있어요.”성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고마워요.”“고맙긴요. 기웅이 동생이면 당연히 제 동생이기도 하죠.”눈꼬리를 휘며 미소를 짓는 그는 설우현의 말대로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사람이었다.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종이에 적힌 몇 가지 단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정보가 여기에 몇 줄 나열된 것을 보니 최용호의 정보가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그 종이를 반승제에게 건넸다. 반승제의 시선이 최용호와 마주쳤다.분명히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아마도 플로리아에서 부딪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도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성혜인이 외쳤다.“승제 씨?”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이 막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벽에 매달려 있던 ‘설경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저 반승제를 바라보더니 다시 반승우를 바라보았다.“실험체, 실험체, 전부 실험체야.”“성공한 실험체, 버려진 실험체.”이 두 마디는 현장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이때 배현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닥쳐!”그의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머릿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울부짖으며 갑자기 어떤 장면이 스쳤지만 그는 그것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더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벽을 짚으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여기 머무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운 것처럼.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반승
지하 격투장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설우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혜인아, 설씨 가문 일은 다 해결됐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주식 양도 증서는 아직 유효해.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설씨 가문을 보고 있을게. 이제 일도 해결됐으니 형더러 떠나라고 했어.”설기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온 도구나 다름없었다.수화기 반대편에서 설우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펼쳐보며 설명했다.“회사 일은 내가 천천히 익히면 돼. 정 안 되면 형을 다시 불러오면 되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가서 해독제를 찾아. 기다리고 있을게.”성혜인은 안심이 됐다. 그녀는 설우현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매우 짧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설우현은 언제나 오빠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반대로 설기웅은 설인아를 극도로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그때 성혜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을 사람은 그녀였을 것이다.설기웅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아낌없는 사랑과 포용을 올바른 사람에게 하지 못했다는 거였다.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창가에 서 있는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두 가짜가 지껄인 인체 실험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설마 이 모든 것이 반승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성혜인은 뒤에서 천천히 반승제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손들을 덮었다.“혜인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깊게 생각하지 마.”그녀는 이마를 그의 등에 기댔다.“제가 어떻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반승제는 무력한 듯 돌아서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더러 설명하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조차도 너무 혼란스러워. 그래서 이번 여정에 배현우를 데려가야 해. 그라면 도중에 뭔가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라.”고개를 끄덕인 성혜인은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전폰을 꺼내 장하리에게 전화했다.성혜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리의 목소리가 약간 쉰 것 같았다. 왠지 아픈 것 같았다.“하리야
장하리는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그냥 무시해요. 제가 안 내려가면 그만이에요.”다행히도 회사 사람들은 매우 단결하고 있었다. 예전 장하리가 어머니로부터 심한 욕설을 들었을 때도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이것 또한 성혜인이 모두에게 가르친 것이기도 했다.장하리는 성혜인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다른 회사였다면 사장의 비서가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는 일찌감치 권위를 잃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S.M 사람들은 전부 서수연의 욕을 흘려들으며 장하리에게 협조했다. 회사가 단결할수록 장하리는 더욱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곳은 대가족과 같았다. 모두가 성혜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해은은 가방에서 영양제 몇 박스를 꺼냈다.“전 분명 알려줬어요. 하리 씨 지금 안색이 말이 아니에요. 사장님 휴게실에 가서 반 시간이라도 자요. 조금 있으면 또 파티에 참석해야 하잖아요.”장하리는 손끝을 움찔했다. 그녀는 마음이 뭉클해졌다.“전 괜찮아요.”유해은은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유해은이 나가려고 돌아서자 장하리가 물었다.“백현문 씨랑 요즘 친해지지 않았어요?”지금 백현문이 유해은을 쫓아다닌다는 소문은 업계에 쭉 퍼졌다. 모두가 백현문이 유해은의 뒤를 봐준다고 생각했다. 성 상납을 요구하는 투자자들은 감히 유해인을 건드리지 못했다. 감독들도 그녀에게 예의를 갖췄다.“친해지진 않았지만 매일 우리 촬영장에 와서 죽치고 있어요.”눈살을 찌푸린 유해은은 백현문이 낯선 사람인 것처럼 말투가 평온했다.“하리 씨, 만약 힘든 일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야 해요. 백현문을 이용하면 되거든요. 이것도 사장님이 저에게 가르쳐 준 거예요. 필요할 때는 실컷 이용해야죠. 백현문이 저에게 빚진 거니까요.”장하리는 서수연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백현문이 나서면 서수연이 다시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일은 없
장하리의 시선은 다시 서주혁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는 담담하게 잔을 들고 마시지 않았지만 술을 권한 사람들은 마지못해 잔을 비웠다.서주혁은 어디서든 빛나는 금수저였지만 그녀는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흙수저였다. 역시나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 자신만 인연이라고 우길 뿐이었다.조현은 장하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를 떠났다. 장하리는 몇 분 동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때 서수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X년이 왜 또 여기 있어! 우리 오빠 뒷조사를 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서수연은 오늘 밤 분홍색 롱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분명 부드러운 이미지였지만, 입으로 내뱉는 말은 마치 길거리의 불량소녀 같았다.“장하리 맞지? 그 미천한 여자.”서수연의 주변에는 여전히 거짓된 친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장하리는 그녀들 중 몇 명을 알아볼 수 있었는데, 지난 몇 번의 파티에서 이 몇 명은 계속 장하리를 괴롭혔다. 다만 장하리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그녀의 신분으로 어떻게 이 부잣집 아가씨들에게 강력히 맞설 수 있겠는가. 게다가 회사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서수연은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장하리, 따라 와!”그녀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크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서수연은 여전히 걱정하고 있었다. 어쨌든 서주혁이 예전 장하리에게 꽤 관심이 많았는데 혹시라도 그녀가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갑자기 없던 정이라도 살아난다면 큰일이었다.그래서 장하리를 괴롭힐 때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조용히 괴롭혔다. 장하리는 물러터져서 그녀들이 마음껏 괴롭힐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그녀들은 장하리를 여자 화장실에 데려와서 미친 듯이 뺨을 때렸다.“X년! 앞으로 우리 오빠한테 접근하지 마!” “수연아, 너 왜 힘없이 때려. 내가 때리는 거 봐.”짝! 짝!쉴 새 없이 뺨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마치 학창 시절
서주혁은 담배 절반을 피우고 꽁초를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계속 보고 있을 거야?”그는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모퉁이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장하리는 자리에 얼어붙은 채 뺨에 있는 마스크를 만지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서주혁은 성냥갑을 들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장하리는 전에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본 적이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인터넷에서도 매점에서도 판매하지 않았다. 이것은 특별히 주문 제작한 성냥갑인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라이터를 사용하고, 때로는 이런 종류의 성냥갑을 사용했다.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입안 가득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를 바라보던 장하리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그녀는 마스크를 내리고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듯 조용히 돌아섰다.지금 상태로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일에 관한 협상 건은 유해은과 송아현이 실수 없이 처리할 것이니 장하리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서주혁은 떠나는 발소리가 들리자 속눈섭이 떨렸다. 복도의 등도 꺼지고 그의 입에 물고 있는 담배만 미약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한참 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성냥에 불을 붙이고 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짜증이 치밀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서주혁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다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때 온시환도 담배를 피우러 다가왔다.“냄새가 왜 이렇게 심해? 몇 대나 피운 거야?”온시환은 반대편 벽에 기대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오늘 저녁 장하리를 봤는데 두 연예인과 함께 왔더라. 성혜인이 떠난 후 장하리가 회사를 관리하는 것 같던데.” “응.”서주혁은 그녀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시환은 계속 그 이야기를 꺼냈다.“너 기억 상실했을 때, 맨날 저 여자를 덮쳤잖아.”모두가 서주혁이 기억상실을 했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온시환이 누구인가? 서주혁이 깨어난 첫날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
공지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무슨 일이시죠? 시환 씨를 찾으러 오셨다면 오늘 집에 없어요.”아침 일찍부터 온시환은 외출한 상태였다. 어디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난 누나를 만나러 온 거예요. 누나, 정말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할머니가 오늘 아침 너무 상심하셔서 거의 쓰러질 뻔하셨어요.”연승혁은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입에 붙은 듯 자연스럽게 누나라고 부르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반면 공지민은 그 호칭이 불편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그 호칭 좀 하지 마요.”연승혁은 근처 의자에 털썩 앉아 정원에 활짝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지민과 그 꽃들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문득 과거에 자신이 창피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그럼 뭐라고 부르죠?”연승혁은 깔끔한 외모와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가의 십자 흉터는 그의 인상에 강인하고 냉혹한 분위기를 더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는 그를 이국적인 매력으로 감싸고 있었다.“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돼요.”“하지만 할머니가 그러지 말라시던데.”그의 시선은 계속 공지민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누나, 원아정 때문이에요? 그래서 연씨 가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공식적으로 발표했어요. 앞으로 원아정과는 더 이상 어떤 관계도 없을 거라고.”공지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그게 이유 중 하나긴 해요.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다른 이유라니? 설마 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이 누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문제는 내가 다 처리할게요.”공지민은 앞에 핀 꽃 한 송이를 만지며 차갑게 말했다.“승혁 씨, 당신은 나를 연씨 가문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를 시험하거나, 관찰
마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이미 온시환에게 약간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자 그 감정이 더욱 커졌다.사실 온시환의 말은 맞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앉아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속이려는 의도만 가득했다.온시환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차는 두 사람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집에 도착했을 때 온시환은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공지민은 그를 바라보더니 양손으로 그의 목을 감쌌다.그는 그 순간 얼어붙었다. 공지민이 먼저 다가온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언제나 자신을 대체품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면 지금은?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 있는 걸까?온시환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대신 그녀를 안아 올려 2층으로 올라갔다.그 뒤의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는 그녀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모든 것이 끝난 후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잠들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 풀리면서 묵었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지민아,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어?”“연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나를 의심하고 있어요. 당장 들뜬 표정으로 연씨 가문에 들어갈 순 없어요. 그 사람들과 조금 더 연극을 해야 해요.”처음으로 공지민은 온시환 앞에서 자신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면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에는 단지 부드러운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그래서 너 처음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이걸 준비하기 위해서였어?”공지민은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분하게 보냈다.반면 연승혁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그녀가 연기한 것이었다.“맞아요. 그렇다고 봐도 돼요. 언젠가 연기가 필요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공지민이 수년간 연기를 했음에도 여전히 조연 배우에 머무른 것도 바로 이 이유였다. 그녀는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이 한마디의 여파는 매우 컸다. 온시환은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공지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오직 구은우를 위한 복수라는 목적뿐이었다. 그녀는 그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목숨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럼 온시환은 대체 뭘까?그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녀의 눈에 광대짓에 불과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공지민 역시 침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시환은 마침내 자신이 최근 느꼈던 불안의 근원을 깨달았다. 그는 공지민이 절대로 평범하게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것임을 예감했었다. 단지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을 뿐이다.그는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이제 공지민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면 연승혁과 안정숙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략임을 알아챌 것이고 그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공지민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두 사람을 무사히 속여 넘기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핸들을 꽉 쥐고 있던 온시환은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이번에는 공지민이 저항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질문이 들려왔다.“구은우를 위해 어떻게 복수할 생각인데? 연승혁을 죽일 거야?”공지민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가능하다면 죽이는 게 제일 좋겠지.”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지금 네가 연승혁의 명목상 누나가 됐다고 해서, 연승혁이 너를 경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공지민, 넌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공지민은 그의 품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있어.”온시환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내일이면 더는 그녀를 안을 수 없을 것처럼.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했었다. 더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겠다고. 그런
공지민은 온시환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의견도 내비치지 않을 줄은 몰랐다.안정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지민을 따라가며 외쳤다.“지민아, 정말 의논할 여지가 조금도 없는 거니? 우리 다 같은 가족인데, 대화를 통해 풀 수 있잖아.”연승혁이 안정숙을 부축하며 부드럽게 웃었다.“맞아요, 누나. 그냥 남아서 얘기 좀 해요. 할머니께서 누나 일로 오랫동안 신경을 많이 쓰셨어요. 연씨 가문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할머니 생각해서라도 우리랑 잘 얘기해 보는 게 좋잖아요.”공지민의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온시환이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아챘다.그의 힘은 너무 강해서 손가락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리지 않았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온시환은 위험했다.안정숙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민아, 우리가 잘못했어. 네 정체만 밝히면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어. 네가 겪은 일이 많아서 이미 마음이 많이 변했을 거란 걸 잊었어. 하지만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줘. 앞으로는 승혁이가 널 잘 보호하게 할게. 너희 남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 좀 해봐.”공지민은 돌아서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죄송하지만 오늘 들은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라 조금 쉬고 싶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그래, 그래. 아직 상처도 채 회복되지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쉬어.”온시환은 그녀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오르자마자 온시환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공지민은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온시환은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공지민은 알고 있었다. 온시환은 이미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그녀는 연승혁에게 접근하여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감수했다.“공지민! 너 정말 미쳤어?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 이렇게
온시환은 연씨 가문으로 가는 길 내내 불편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안정숙의 공지민에 대한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하지만 연씨 가문 내부의 사정을 뚜렷이 알 방법이 없었고 오늘 밤 직접 들어봐야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안정숙이 이유를 밝힐 것이다.차가 연씨 가문 저택 앞에 멈췄다. 한때 치열했던 상속권 싸움의 흔적이 떠올랐다. 연씨 가문의 다툼은 유독 잔혹했고 연승혁의 사촌 형제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몇 년 전 연씨 가문의 사건은 거의 ‘피바다’로 묘사될 정도였다.그 이야기를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때 온시환은 연승혁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잔혹함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연승혁이 현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수한 사람들의 시체 위를 딛고 올라섰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공지민을 부축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날 연씨 가문에 모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가장 가까운 혈족은 이미 연승혁에 의해 정리된 상태였다.안정숙은 주석 자리에 앉아 있었고 몇몇 남은 연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긴 테이블 양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연승혁은 안정숙 옆에 앉아 있었는데, 공지민이 들어서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안정숙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지민아, 온시환, 둘 다 왔구나. 어서 앉아. 오늘은 그냥 가족끼리의 식사 자리야.”‘가족끼리의 식사?’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 없이 참고 있었다.그 대신 공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 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죠?”안정숙은 잠시 연승혁을 쳐다보고 나서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20여 년 전, 연씨 가문에서 아이 하나를 잃어버렸어. 그 아이는 내 손녀이자, 승혁이의 친누나였단다. 그 사건 이후 승혁이의 어머니는 깊은 상심에 빠져 세상을 떠났어. 내 남은 평생의 소원은 그 아이를 다시 찾는 것이었단다.”그 말이 떨어지자 온시환은
공지민은 온시환의 변화를 눈치챘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이라도 온시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그는 억울한 듯 내가 너한테 빚진 거라도 있냐고 따져 물었을 텐데, 오늘 하루는 놀랍도록 순순히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러니 공지민도 일부러 심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예상외로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이틀 뒤, 공지민은 퇴원했고 다친 다리는 이제 집에서 요양하면 되는 상태였다. 온시환은 완전히 그녀의 전담 간호사가 되어 온종일 그녀를 보살폈다.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다른 사람 손 하나 빌리지 않았다.심지어 공지민이 목욕할 때조차 온시환이 직접 그녀를 안아 욕조에 옮겼다.처음에는 이런 극진한 보살핌이 익숙지 않아 공지민도 어색해했지만 온시환이 마치 그 일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다만 온시환이 그녀를 씻기다 말고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자 공지민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며 미간을 찌푸렸다.“나 아직 다쳤거든요.”온시환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서 다친 네 근육을 풀어주려고 마사지해 주는 거잖아.”“근데 시환 씨 손이 지금 내 가슴 위에 있잖아요.”“가슴도 마사지해야지.”온시환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투는 전혀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결국 공지민은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지쳐,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었으니까.결국 온시환은 자신의 바람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일을 끝냈다. 공지민이 다쳤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히지도 않았다.온시환은 살며시 키스를 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우리 아이 하나 낳을까?”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욕실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온시환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본능적으로 알았다. 두 사람은 곧 또다시 다툴 것이다.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지난번에 너한테 사준 선물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연승혁 앞에서 자신의 연기가 통했을지 고민했다. 그녀가 그 당시 연예계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앞으로 연기를 해야 할 상황이 많을 테니까.적어도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그 후로 온시환은 공지민을 정성껏 돌봐주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연씨 가문의 안정숙 어르신이 병문안을 왔다.온시환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안정숙이 병상 옆에 앉아 공지민의 안부를 묻고 다정한 말투로 챙기는 모습을 보자 온시환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은 어색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할머니,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예요?”그녀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안정숙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냥 너와 특별히 인연이 깊은 것 같아서 그래. 지민아, 네가 몸이 좀 회복되면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오면 좋겠어.”온시환의 눈매가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의 마음속에 위기감이 엄습했다.“어르신, 설마 승혁이가 지금 여자가 없다고 제 아내를 노리려는 건 아니죠? 참고로 저랑 지민이는 이미 혼인신고까지 한 사이랍니다. 승혁이가 저한테 전화했을 때부터 좀 이상하더라니까요. 언제부터 제 아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죠?”안정숙은 살짝 입꼬리를 떨며 공지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그녀는 연승혁과 약속한 대로 아직 진실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연승혁은 이번 주 동안 좀 더 조사하겠다고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었다.“자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내가 그런 사람이겠어? 난 그저 지민이가 순수한 아이 같아서 자네가 더 잘 대해줬으면 해서 그러는 거야.”온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건 굳이 말 안 해도 알죠. 제 아내는 제가 알아서 잘 챙깁니다.”그는 공지민 옆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라주며 말했다.“자, 여보. 물 좀 마셔.”온시환이 처음으로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는 얼굴이 잔뜩 붉어졌지만, 안정숙이 진짜 공지민과 연승혁을 이어주려는 건 아닌
남자는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수치심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공지민이 냉큼 2층 난간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뭐 하는 거야?!”공지민은 난간에서 몸을 날리며 도발하듯 한마디를 던졌다.“오빠 바지 내가 벗겨버렸네. 근데 정말 별로다.”남자는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공지민은 1층으로 떨어지며 다리에 피가 맺힐 정도로 다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부리나케 폐공장을 빠져나갔다. 근처에 도로가 보이자 지나가던 차를 세워 타고 그 자리를 떠났다.폐공장 2층. 연승혁은 머리에 쓰고 있던 가발을 벗어 던졌다. 천천히 얼굴에 바른 까무잡잡한 분장을 휴지로 닦아내고 붙였던 눈썹과 수염도 떼어냈다. 그러고 나서 벗겨진 바지를 내려다보았다.‘좋아, 공지민. 제대로 기억해 두겠어.’연승혁은 바지를 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주변에 몸을 숨기고 있던 경호원은 그 모습을 보자 속이 서늘해졌다.방금 그의 바지가 벗겨지는 것을 봤을 때 경호원은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다. 그 여자가 정말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연승혁이 멍해진 틈을 타 2층에서 뛰어내렸다.경호원은 이 여자가 대담한 건지,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형님...”연승혁은 가발을 휙 던지며 말했다.“돌아가자.”그는 공지민의 허벅지에 있는 꽃 모양 반점을 자세히 확인했다. 문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할머니의 말이 맞을 터였다. 그녀는 연씨 가문에서 잃어버린 딸, 그의 친누나일 가능성이 높았다.연승혁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공지민의 피부에서 느껴졌던 부드러운 감촉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운전 중인 남자가 백미러로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형님, 어떻게 보십니까? 정말 누님이 맞을까요?”연승혁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내려놓았다.“그럴 가능성이 높지.”그런데 그녀의 성격이 꽤 거칠다고 생각했다.그는 공지민의 과거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연예계에 들어온 후로는 아주 조용히 지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