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아는 이 두 남자의 행동이 설기웅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오로지 설기웅을 만나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오빠를 만나고 싶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성혜인을 괴롭힌 것도, 성혜인에게 독을 먹인 것도, 죽일 뻔한 것도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차라리 죽여줘요.”하지만 두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설인아는 크나큰 절망감에 빠졌다.눈물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 더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녀가 금방 이곳에 던져졌을 때 설기웅이 한 번 보러온 적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녀는 증오에 미쳐 있었다.“후회? 내가 왜 후회해. 설의종은 평생 그렇게 누워있어야 할 거야. 오빠, 나를 잘 살게 해주지 않으면 해독제를 넘겨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오빠 동생 성혜인도 오빠를 만나고 싶지 않겠지. 쌤통이야. 그러게, 누가 날 그렇게 믿으래?”매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설기웅의 심장을 미친 듯이 찔러댔다. 그때만 해도 설인아는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여전히 설기웅이 그녀에게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만 믿었다. 설기웅의 표정은 마치 그녀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차분했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그래, 내가 눈이 멀었지. 다신 보지 말자.”이 말에 설인아는 매우 당황했지만 여전히 설기웅이 자신을 무르게 대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설기웅이 그녀를 괴롭힌다니 참으로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때 그녀를 강물에 빠뜨리려고 할 때도 계속 스피커폰으로 경호원과 통화하지 않았던가? 그저 그녀의 반응을 떠보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사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성혜인이 설씨 가문으로 돌아온다고 한들 어차피 설기웅은 영원히 성혜인을 친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건데. 오로지 설인아만 신경 쓰고, 언제나 설인아만 예뻐할 거니까.이
성혜인과 반승제는 설씨 가문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우미가 들어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큰 사모님께서 서재로 오라고 하십니다.”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승제는 옷을 갈아입고 따라가려고 했지만 도우미에게 제지당했다.“큰 사모님께서 아가씨만 부르셨습니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서재 밖에서 기다릴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컵을 바닥에 던져. 그럼 내가 데리러 들어갈게.”“네.”그는 도우미를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서재 밖에 서 있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은 없겠죠?”도우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실제로 그런 규칙은 없었다. 성혜인은 서재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안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성혜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안문희만 있었고 설경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불렀다.“할머니.”안문희의 시선이 성혜인에게 머물렀다. 특히 그녀의 눈을 보았을 때 표정이 온화해졌다.“넌 하늘이 그 아이 눈과 아주 닮았구나.”설씨 가족의 입에서 나하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성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말을 이어갔다.“그때 점쟁이는 나하늘 그 아이가 많은 화를 불러올 거라고 말했어. 의종이가 그 아이를 멀리해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의종이가 나하늘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어.”성혜인은 안문희가 주동적으로 이 얘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안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곧 결과가 나올 거야. 오늘 아침 설씨 가문 사람들이 다 올 거야. 내가 왜 너만 불렀는지 궁금하지?”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아,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이 많았어.”성혜인은 그다지 감동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분명 자상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자상함에 절망적인
성혜인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설씨 가문 사람들은 의논이 분분했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하기 전 사주팔자를 보고 적합해야만 결혼했다.당시 설의종과 나하늘이 헤어진 것은 사주팔자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안문희는 두 손을 겹쳐 가슴에 얹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서 말인데, 혜인이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할 수 없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성혜인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단호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할머니, 전 불교를 믿지 않아요.”이 한마디에 모두가 조용해졌다. 설우현은 성혜인에게 눈짓을 하고 싶었지만 생각 끝에 포기했다. 그는 성혜인의 성격과 반승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함께한 사이였다. 몇 마디 말로 쉽게 헤어질 수 있는 사이가 절대 아니었다. 생각 끝에 설우현은 침묵을 택했다. 설경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설씨 가문 사람들은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해.”반승제는 이내 성혜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미소를 지었다.“혜인이가 설씨 가문 사람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그런가? 하지만 이 아이의 몸에는 설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설씨 가문의 피를 깨끗이 비워낸다면 이 문제를 추궁하지 않겠네.”이 말은 성혜인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반승제의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을 완전히 뒤에 가렸다.“어르신은 혜인이의 목숨을 원한다는 말씀이세요?”설경필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투를 누그러트렸다.“혜인이의 목숨을 원하는 사람은 자네야. 자네와 헤어지면 전체 설씨 가문이 혜인이 것이 될걸세. 물론 내가 가장 아끼는 손녀가 될 테고. 자네는 지금 곤경에 처해있지 않던가? 설씨 가문의 일까지 나서서 더럽히지 말게.”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옆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그럴 수 없어요. 이미 승제 씨의 아이를 임신했어요. 전 평생 이 사람과 함께할 거예요.”응접실 안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설씨 가문 사람들은
성혜인은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자신조차 믿을 수 없었다.“농담이 아니에요. 아침에 할머니가 저를 서재로 불러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몇 마디도 못 하고 찻잔이 떨어지려는 걸 제가 도와주며 손을 만졌어요. 그분의 주름진 손등은 사람의 피부와 매우 흡사한 장갑이에요. 하지만 얼굴은 진짜였어요. 아마 할머니와 같은 얼굴을 만들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그러나 신체의 다른 부분은 따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은 주름진 피부와 매우 유사한 장갑으로 대체 했을 거예요. 승제 씨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이 두 사람은 아마 나이가 50쯤 됐을 거예요. 50살과 70, 80살의 피부 상태는 완전히 달라요.”여기까지 말한 성혜인은 심장이 몹시 빨리 뛰었다. 당시 서재에 있을 때 그녀는 겨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그들은 아마도 두 노인을 대체하기 위해 아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이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그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에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설우현에게 물었다.“오빠, 나미선이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죠?”설우현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는 완전히 포기한 듯 쓴미소를 지었다.“몰라.”성혜인은 반승제가 아직 설우현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하늘과 나미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자기가 발견한 사실들도 같이 알려주었다.“오빠의 기억 속에 있는 조부모님에 대해 말해 주실래요?”“매우 엄격한 분들이셨어. 설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분들의 말을 들어야 했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든 절대 용납하지 않고 벌을 내리셨어.”“그렇다면 그렇게 세심하고 엄격한 두 분이 설씨 가문에 시집온 사람이 나하늘이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요? 아침에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어요. 그들은 알고 있었지만 묵인하고 자신의 규칙을 어겼어요. 하지만 저와 마주했을 때 그들은 제 몸의 피를 바꾸라 하며 아이까지 지우라고 했죠. 오
설기웅은 그동안 플로리아 왕실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특히 왕자와는 사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다.한편 설우현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큰 비밀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당황할 것이다. 이제 안정을 찾은 성혜인은 조용히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저었다.“우현 씨, 기웅 씨를 믿어도 될까요?”설우현은 멈춰서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형이 비록 설인아의 일에서 큰 잘못을 했지만 이런 일은 절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어요. 아마 이틀 안에 소식이 있을 거예요.”안색이 어두워진 설우현은 짜증 나서 머리를 쥐어뜯었다.“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죠.”이 두 노인이 가짜라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으며,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반승제는 성혜인의 옆에 앉아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말을 이어갔다.“만약 연구 기지의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그들은 야망이 크거든요. 아마 손꼽히는 재벌들을 통제하려고 했을 거예요. 설씨 일가와 같은 엄격한 가풍을 가진 가문이 가장 통제하기 쉬웠을 거예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두 사람만 교체하면 되니까요.”설우현은 믿을 수 없어 온몸이 격직된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 말은 이 연구 기지가 설씨 가문뿐만 아니라 모든 재벌 가문을 노린다는 건가요?”“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이에요. 그들은 모든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하죠. 게다가 그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의료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아주 은밀하고 강대한 조직이거든요. 한 사람을 위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거예요. 만약 우리 형이 그 인체 실험에 대해 더 자세히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었겠죠.”지금 그들은 왕실이 설기웅과 협력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의 배를 어루만지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기웅 씨, 쪽에서 소식이 오면 바로 그곳으로 가야 해요
성혜인이 들어왔을 때 매달려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입이 터져라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지만 반승제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빛이 흔들렸다.이상한 건 이런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이 순간에도, 신분이 드러난 상황에도 그들의 분위기는 여전히 설경필과 안문희와 매우 흡사했다.마치 두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성혜인은 단 한 번만 보고 그들이 깊은 최면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깊은 최면만으로는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이때 ‘안문희’가 입을 열었다.“우현아, 기웅아, 다 할머니가 너희를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탓이야. 우리가 그때 나하늘 그 계집을 내버려뒀기 때문이야. 전부 우리 잘못이야. 이게 바로 설씨 가문의 재앙이야. 역시 대사님의 점괘가 틀리지 않았어.”이 시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페르소나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반승제를 보았을 때만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그 대사님이라는 사람은 잡았어요?”그녀는 설기웅에게 물었지만 그는 등을 뻣뻣이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용호가 대답했다.“이미 도망쳤어요.”“그럼 이 두 사람을 검사해 봤어요? 최면당한 게 맞아요?”속을 헤아릴 수 없는 여우 같은 눈매를 가진 최용호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최면으로는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어요.”방 안이 조용해지자 몇 초 후 반승제는 장미에게 전화를 걸었다.“장미 누나, 주소 보내줄 테니까 배현우를 끌고 잠깐 여기로 와줘.”이 두 가짜는 왜 반승제의 얼굴을 보고 잠시 동요했을까?연구 기지에서 반승우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뭔가 떠올린 것일까?배현우는 헬기로 이송되었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두 가짜의 안색이 다시 바뀌었다.의미심장한 점은 배현우가 그들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는 것이다. 반응한 후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 두 사람은 누구야?”‘설경필’은 자기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흔들며 눈을 크게 뜨고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성혜인은 이 말에 이끌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최용호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썹을 치켜올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설우현이 말하길 당신들 구금섬으로 간다면서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반승제가 그녀에게 준 주소였다. 최근 그녀도 정보를 찾고 있었지만 얻을 수 있는 소식이 너무나 적었다.최용호는 손끝으로 종이를 잡았다. 그의 자세는 대범하고 여유로웠다.“마침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조금 알고 있어요.”성혜인의 눈빛이 반짝였다.“고마워요.”“고맙긴요. 기웅이 동생이면 당연히 제 동생이기도 하죠.”눈꼬리를 휘며 미소를 짓는 그는 설우현의 말대로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사람이었다.그녀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종이에 적힌 몇 가지 단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정보가 여기에 몇 줄 나열된 것을 보니 최용호의 정보가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그 종이를 반승제에게 건넸다. 반승제의 시선이 최용호와 마주쳤다.분명히 두 사람은 서로를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아마도 플로리아에서 부딪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도 친구는 아닌 것 같았다.성혜인이 외쳤다.“승제 씨?”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이 막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벽에 매달려 있던 ‘설경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저 반승제를 바라보더니 다시 반승우를 바라보았다.“실험체, 실험체, 전부 실험체야.”“성공한 실험체, 버려진 실험체.”이 두 마디는 현장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이때 배현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닥쳐!”그의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머릿속에서 수많은 목소리가 울부짖으며 갑자기 어떤 장면이 스쳤지만 그는 그것을 잡을 수 없었다. 그는 더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벽을 짚으며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치 여기 머무는 것이 몹시 고통스러운 것처럼.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반승
지하 격투장으로 돌아온 성혜인은 설우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혜인아, 설씨 가문 일은 다 해결됐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주식 양도 증서는 아직 유효해.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설씨 가문을 보고 있을게. 이제 일도 해결됐으니 형더러 떠나라고 했어.”설기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온 도구나 다름없었다.수화기 반대편에서 설우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펼쳐보며 설명했다.“회사 일은 내가 천천히 익히면 돼. 정 안 되면 형을 다시 불러오면 되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가서 해독제를 찾아. 기다리고 있을게.”성혜인은 안심이 됐다. 그녀는 설우현과 함께 보낸 시간이 매우 짧았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설우현은 언제나 오빠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반대로 설기웅은 설인아를 극도로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그때 성혜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을 사람은 그녀였을 것이다.설기웅에게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그 아낌없는 사랑과 포용을 올바른 사람에게 하지 못했다는 거였다.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창가에 서 있는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두 가짜가 지껄인 인체 실험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설마 이 모든 것이 반승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성혜인은 뒤에서 천천히 반승제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손들을 덮었다.“혜인아,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깊게 생각하지 마.”그녀는 이마를 그의 등에 기댔다.“제가 어떻게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반승제는 무력한 듯 돌아서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나더러 설명하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조차도 너무 혼란스러워. 그래서 이번 여정에 배현우를 데려가야 해. 그라면 도중에 뭔가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라.”고개를 끄덕인 성혜인은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전폰을 꺼내 장하리에게 전화했다.성혜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하리의 목소리가 약간 쉰 것 같았다. 왠지 아픈 것 같았다.“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