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함이 박힌 그 말을 들은 설기웅은 꼼짝도 못 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그렇게 몇 분 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하늘은 우중충하게 변했다.사람의 감정은 날씨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던 설기웅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차가 멈춘 후 설우현이 모습을 드러냈고 곧이어 반승제와 성혜인도 함께 내려왔다.성혜인을 본 설기웅은 온몸의 가시를 곤두세웠다.“여기가 어디라고 와? 죽고 싶어?”성혜인은 반승제 옆에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반승제는 행여나 그녀가 비를 맞을까 봐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었다.“형!”설우현은 혼자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이대로 떠날까 봐 걱정하는 듯 안절부절못했다.“형, 제발 그만 좀 해요!”설기웅의 얼굴은 매우 싸늘했다.“우현아, 넌 도대체 왜 저런 여자를 설씨 가문에 데려온 거니? 우리 집이 더러워져도 된다는 거야?”설우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해다.“일단 아버지 만나러 올라가요. 형, 아무리 이 상황이 불편하더라도 제가 아버지한테 말하려는 게 뭔지 듣고 가세요.”설기웅은 온몸으로 화를 내뿜었다. 그는 성혜인뿐만 아니라 반승제마저 원망하고 있었다.바람둥이 반승제 때문에 설인아가 이렇게 비참한 처지가 됐으니까.‘인아가 설마 반승제를 만나려고 그레이 지대에 갔던 건가? 빌어먹을! 쟤네가 우리 인아를 망쳐버렸어.’“아무 말도 안 듣고 간다면 전 이제부터 형이랑 연을 끊을 거예요.”예상치 못한 협박에 잔뜩 긴장한 설기웅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억누르며 그들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성혜인도 설기웅이 짜증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반승제가 옆에 있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됐지만 설기웅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한 무리의 사람이 설의종 옆으로 다가가자, 도우미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반승제는 백발이 된 설의종을 보고 순간 깜짝 놀랐다.비록 설우현을 통해 들은 얘기였지만 직접 보니 더 충격적이었다.심지어 성혜인조차도 놀라서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은 설기웅을 상대하지 않고 조용히 나미선을 바라봤다.닮았다. 성격은 다른 것 같지만 너무 닮았다.하지만 임지연이라면 절대 이런 말투로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고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을 것이다.임지연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항상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인생을 살면서 성혜인은 자신을 바라봤던 임지연의 눈빛을 수없이 떠올리며 힘을 받았고 그 힘으로 버티면서 살아왔다.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자는 누구일까?왜 설씨 가문 사모님인 임지연과 똑같이 생겼을까?설기웅은 두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는 걸 보고선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여기! 들어와서 당장 저 두 사람 끌어내. 우현아,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소란 피우지 마.”참다못한 설우현은 옆에 있던 꽃병을 집어 들고 바닥으로 내리쳤다.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고,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소란 피우는 건 형이잖아요!”그는 성큼성큼 설기웅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설기웅, 너 지금 누굴 내쫓으려고 하는지 알아? 누구한테 독설을 퍼붓는지 알긴 하냐고! 어젯밤 누굴 때렸고 누굴 죽이려고 했는지 아냐고! 두 눈 뜨고 똑바로 봐. 이게 아버지랑 성혜인 씨 친자 확인서야. 설기웅, 정신 차려! 네가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게 누구인지 이제 알겠어?”설기웅은 머리에 친자 확인서를 맞고선 순간 넋을 잃었다.종이 쪼가리는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설우현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발로 걷어찼다.“혜인이가 살아온 인생은 임수랑 똑같았어.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임수아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고. 어차피 죽었다면 더 이상 안 찾을 거잖아. 혜인이가 우리의 여동생이야. 살아있었다고. 형이 우리 동생을 죽이려고 했어. 어젯밤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어떻게 혜인에게 이 진실을 털어놓을까, 어떻게 하면 상처를 받지 않을까 계속 고민했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차마 용기가 안 나
설기웅은 아직도 친자확인서를 보고 있었는데, 마치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설우현이 했던 모든 말이 귀에 박혔고 고막이 아팠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이는 설우현이 밤새 부탁하여 간신히 얻어낸 친자확인서일 뿐만 아니라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 눈 부릅뜨고 자리를 지켰던 터라 조작할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성혜인은 명실상부 설씨 가문의 아가씨이자 그들의 친동생이다.설기웅의 손끝은 마치 종이를 파고드는 것처럼 천천히 조여졌다.눈앞은 캄캄해졌고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설우현은 심호흡 하고선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래도 인아가 나쁜 짓하는 걸 감싸줄 생각이라면 더 이상 저도 할 말이 없네요. 이게 우리의 업보겠죠? 승제 씨랑 잘 만나고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망치려고 했었는데 참 아이러니하네요. 혜인이가 우리 동생이라는 게. 안 그래요?”설우현은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스스로를 억제했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제원에 있을 때 한 짓만으로도 충분히 어리석었는데, 설우현은 플로리아에 와서도 성혜인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미쳐있었다.어젯밤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더라면 설기웅은 자기 여동생을 익사하게 만든 장본인이 된다. 즉 성혜인이 영원히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그가 한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가짜 여동생을 위한 일이라니 얼마나 우스운가.설우현은 심호흡하고 핸드폰을 꺼내 설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설인아는 설우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몇 초 동안 망설였지만, 끝내 전화를 받았다.“인아야, 너 도대체 형한테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거지?”설인아는 아직 그들이 성혜인의 신분을 알아냈는지 몰랐기에 말 한마디가 아주 조심스러웠다.“오빠, 사과하려고 연락한 거 아니야? 어젯밤에 오빠 때문에 하마터면 죽을뻔했는데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내가 그동안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는데...”“혜인의
몸을 돌린 설우현은 마침 넋을 잃은 성혜인과 눈이 마주쳤다.성혜인은 이제 방금 자신의 신분을 알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반승제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비록 손이 꽉 조여 아픈 느낌이 들었지만 반승제는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그녀를 품에 안고선 가볍게 등을 토닥여주었다.성혜인의 머릿속은 마치 온 세상이 뒤집어진 듯 뒤죽박죽이 되었다.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설우현은 잔뜩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혜인아, 이제야 말해줘서 미안해.”성혜인은 사실을 부정하며 저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 물러섰고 그 모습을 본 설우현은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아버지랑 몇 마디 얘기해. 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하룻밤 새에 백발이 되셨거든. 그리고 인아 일로 충격을 받아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성혜인의 발은 마치 무언가에 의해 바닥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그동안 설의종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기에 더군다나 ‘아버지’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하지만 백발이 가득한 설의종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혈연관계는 참 묘한 것이다. 순간 가슴에 불을 지른 듯 뜨거워진 성혜인은 다른 걸 고민할 겨를도 없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설의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놀랍게도 설의종은 이때 다시 눈을 떴다.설우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랴부랴 눈물을 닦고선 입을 열었다.“아버지, 임수아는 가짜였어요. 혜인이가 진짜 딸이에요. 진실을 밝혀냈고 드디어 여동생을 찾았어요.”설의종은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성혜인의 얼굴을 보려고 있는 힘껏 눈동자를 움직였다.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식이 남아있어 설우현이 하는 말을 똑똑히 듣기에 충분했다.딸, 그의 딸이 돌아왔다.설의종은 감격에 겨운지 안면근육이 덜덜 떨렸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한마디를 할 수 없었다.한때 수백 명을 휘두르던 사람이 오랫동안 찾고 있던 딸아이 앞에서 이렇게 무력하다니.설우현은 그
성혜인은 두 장의 서류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심지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고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에게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설우현의 말을 듣는 순간 또다시 온몸이 얼어붙었다.“아버지가 곧 할아버지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쁘실까? 손자를 위해 준비한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그래도 싫다면 우리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혼란스러워하며 말하는 설우현의 모습을 보고 성혜인이 따라서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너무 부담스럽네요.”설우현은 입술을 깨문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서류 두 장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갖고 있어. 이제부터 넌 설씨 가문의 가장이야. 형을 어떻게 처벌하든 가족들이 다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야.”불과 어젯밤에도 다시는 설기웅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며 반승제한테 얘기했는데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설기웅은 목소리를 잃게 만들었고 뺨을 때린 것도 모자라 목까지 졸랐다. 성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는 서류를 한쪽에 놓고선 차분하게 말했다.“승제 씨, 우리 이만 가요.”보아하니 성혜인은 돈과 권력에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반승제는 급히 그녀를 안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감정 기복이 심하면 안 돼. 너 임신했잖아.”그는 마치 일부러 설기웅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말했다.“혜인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알지? 어젯밤처럼 잔인한 상황은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하게 내가 지켜줄게.”설기웅은 넋을 잃었다. 입안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마치 누군가 칼로 살을 베는듯한 고통이 밀려와 두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그는 차마 시선을 들어 성혜인을 바라볼 수 없었다. 혐오의 눈빛과 마주치는 게 겁나는지 비겁하게 고개를 숙인 채 사인을 하고선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성혜인과 반승제가 마침 곁을 지났고 설기웅은 쳐다보기는커녕 되레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성혜인은 반승제의 품
설우현은 성혜인을 바라봤다.“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씨 가문의 권력으로 플로리아에서 내쫓아도 돼. 다른 나라로 보내서 몇 년간 고생하게 만들어도 상관없어.”성혜인은 자리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설우현이 설기웅에게 이렇게 잔인할 줄 몰랐다.설씨 가문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일자리를 막아버리다니. 그 말인즉 설기웅은 앞으로 일자리를 찾고 싶어도 남들 보기 떳떳한 그런 직업을 찾지 못한다는 뜻이다.설우현은 비로소 명문가 도련님다운 행동을 했다.입만 벙끗할 뿐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한 성혜인은 반승제의 옷깃을 잡고선 한숨을 내쉬었다.“승제 씨, 가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널찍한 복도에 오직 설우현 혼자 남았다.그는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예전의 이곳을 떠올리며 잠시 슬픔을 느꼈다.현실을 부정하는 여동생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형. 설씨 가문은 과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분명히 그는 모든 사람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잃었다. 이게 바로 욕심을 부린 대가인 걸까?설우현은 눈을 비비고 심호흡을 한 후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하시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나미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묵을 지켰다.설우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몸과 마음 전부 지친 것 같았다.그 시각 반승제에 이끌려 차에 올라탄 성혜인은 자신의 두 다리가 땅에 떠 있는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임수아가 설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닐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음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음에도 결코 자신이 그 당사자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동안 설인아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진실은 설인아가 그녀의 자리에 앉아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참으로 아이러니하다.피곤함이 밀려온 성혜인은 차에 오른 후 천천히 반승제의 품에 안겼다.반승제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미안해. 어젯밤에 얘기 못 해서. 우현 씨가
순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설인아는 두 볼이 빨개졌다.‘설마 오빠가 나한테 설씨 가문의 주식을 주는 건가?’주식을 넘겨받는다면 설씨 가문에서 설인아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그런 걱정은 아예 안 해도 된다.“인아야, 옷 갈아입고 올게. 일단 경호원들이랑 같이 가.”“알겠어. 오빠도 빨리 와.”설인아는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저 배에 올라 편안한 의자에 앉는듯한 느낌을 받았다.이어 무언가가 다리를 묶이고서야 설인아는 순간적으로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발에 수갑을 채우는거죠?”“아가씨, 이건 수갑이 아니라 팔찌예요. 도련님이 준비한 선물인데 수십억이 넘어요. 아직은 보여드리지 말라고 하셨거든요.”설인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역시 날 예뻐하는 건 우리 오빠밖에 없다니까.”이 배는 어젯밤의 배보다 훨씬 컸다. 의자는 케이지 안에 고정되어 있었고 주위에는 꽃으로 꾸며졌다.이건 어젯밤 성혜인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인데 지금은 설인아가 그 자리에 앉았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설인아는 아직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두 다리가 의자에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끝으로 풍겨오는 꽃향기에 설기웅이 준비한 서프라이즈라며 확신했다.별장의 2층에선 설기웅이 손에 위스키를 든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설인아는 아마 아예 모르고 있을 것이다.그는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시고선 큰 배가 천천히 강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콜록.”어찌나 독한 술인지 절로 기침이 나왔다.설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나 비즈니스를 하는 만큼 칼 같은 결단력이 생명인데 항상 설인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그는 저도 모르게 여동생을 아끼려는 마음이 밀려오는 사람이었다.지금껏 연애조차 한번 해본 적 없었던 설기웅은 여동생이 늘 일 순위였고 절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지만 경호원들은 그 말에 흔들릴 리가 없었고 설인아는 손이 빨개진 정도로 케이지를 내리쳤다.“그만해! 다치지 말라고! 오빠, 제발 나 좀 살려줘.”그러나 설인아가 아무리 소리질러도 설기웅은 이 배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케이지가 정말 물에 빠지려는 걸 본 그녀는 마침내 큰소리로 외쳤다.“설기웅한테 얘기해. 날 죽이면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아직도 화병으로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내가 독을 먹여서 그렇게 된 거야. 풉, 그러게 누가 날 설의종 옆으로 데려가래? 맞아, 나 그 사람 죽이려고 일부러 다가갔어. 물론 설우현 때문에 안타깝게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 독약은 한 방울도 치명적이어서 평생 혼수상태로 살아갈 거야.”그 말을 들은 몇몇 경호원들은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설기웅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스피커폰으로 돌린 덕분에 설인아가 한 말들은 설기웅도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한편 핸드폰 너머에 있던 설기웅은 취하고 싶은 마음에 독한 술 반병이나 마셨지만 그럴수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독약을 어떻게 성혜인의 목에 부었는지, 어떻게 그녀의 뺨을 때렸는지 잊으려고 할수록 생생하게 기억났다.기억의 파편들은 뇌리에 아른거려 점점 더 그의 숨을 조여왔다.게다가 설인아가 한 말을 듣자 마지막 연민의 감정까지 철저하게 사려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움켜쥔 채 스산함을 내뿜었다.“뭐라고?”경호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설인아 앞에 놓았다.설인아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설기웅이 죽이려고 작정한 마당에 무슨 짓을 하든 혐오할 게 분명하니 그저 자신의 생명이라도 지키고 싶을 뿐이다.“설기웅, 내 말 못 들었냐? 사실대로 말할게. 내가 미스터리한 조직에서 독약을 받았어. 아마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 좀 해봐. 갑작스런 충격으로 쓰러진 거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있겠냐?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나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날 죽이는 순간 설의종은 평생 식물인간
공지민은 여전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온시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밀어 눕히며 말했다.“너는 침대에 있을 때만 겨우 말을 좀 듣더라.”공지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야?’그녀의 반응에 온시환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는 그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바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고급 디저트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거실 테이블은 한쪽으로 넘어가 엉망이었다.온시환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몰려왔다. 반승제가 이 집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했기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사 온 건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공지민은 정말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아무 말 없이 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표정만 봐도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제야 숨어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나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공지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지민 씨, 사실 시환 씨가 당신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조금만 부드럽게 대처하면 덜 힘들 텐데요.”공지민의 턱에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온시환이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공지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차에 올라 고등학교로 향했다.그곳은 제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염정아의 집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 속의 작은 틈에서 모든 걸 끄집어내는 듯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염정아가 바로 허벅지 안 쪽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독특했기에 그
구은우처럼 좋은 사람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했을까?공지민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수심으로 가득 찼고 구은우를 해친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서두를 수 없었고 우선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사찰을 떠난 순간 온시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어디야?”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퍽 다정했다. 아마 어젯밤의 만족감 때문인지 약간의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공지민의 입술이 떨렸다.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그때의 거래는 여전히 유효한 건지, 구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언제쯤 말해줄 건지.그러나 연씨 가문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할 수 없었다.“곧 돌아갈게요.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러야 할 일이 있어요. 친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해서요, 한번 가서 보려고요.”“그래?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아니요, 이건 제 일이에요. 시환 씨는 그냥 은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조사해주시면 돼요.”온시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공지민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공지민이 찾아가려던 고등학교 친구는 그녀와 함께 괴롭힘을 당했던 사람이었다. 그 친구는 원아정 일당이 공지민을 표적으로 삼기 전까지 주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말하자면 공지민이 그녀를 구한 셈이었지만 그녀의 정신 상태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다.친구의 이름은 염정아였고 삶은 공지민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가족은 극단적으로 남아선호 사상을 따랐고 그녀는 언제나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양보해야 했다.염정아의 남동생은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항상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키는 187cm나 되는 거구의 남자였지만 하루 종일 입을 비죽이며 웅얼거리는 모습이었다.어느 날 그녀의 부모는 염정아에게 충격적인 요구를 했다. 동생의 아이를 가지라는 것이었다.그 충격적인 요청에 염정아은 공지민에게 전화했지만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 전까지는 휘말리고 싶지않았지만 구은우의 유골을 돼지에게 먹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공지민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고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공지민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자 원아정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당시 구은우의 유골함이 해외로 옮겨졌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은 그 남자가 구은우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결국 그건 아내가 자기를 배신한 증거였으니까. 내가 돈 몇 푼 쥐여주니까 곧바로 나한테 유골을 팔더라.”공지민의 입술이 떨리며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원아정의 손목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그대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원아정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뺨을 맞았다. 그녀는 분노와 충격으로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너 따위가 감히 날 때려?”고등학교 때 그녀 앞에서 무릎 꿇고 빌었던 걸 벌써 잊은 걸까?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지민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퍼부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사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정숙도 현장에 도착했다.안정숙은 두 사람을 쏘아보며 차갑게 물었다.“여기서 무슨 짓들을 하는 거야?”원아정은 마치 피해자인 양 금세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고등학교 동창이랑 조금 오해가 있었어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저를 때리고 발길질을 했어요.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요.”원아정의 뺨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반면 공지민은 겉보기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상황은 자연스레 원아정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안정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공지민을 바라봤다. 더 이상 이전의 인자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공지민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원아정을 노려보았다. 원아정의 눈빛에는 조소와 함께 승리의 기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찰을 떠났다.차에 올라서도 원아정이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
공지민은 온시환과 함께 차에 올랐다. 의자에 기대앉은 그녀는 머릿속에 온통 연승혁의 실종된 누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그 누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만약 그녀를 찾아낸다면 연씨 가문에 접근할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온시환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너 요즘 뭔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아니에요.”온시환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아니라고? 그냥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은 거 아니야? 네가 파티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려갔고,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줬어. 그런데 내가 얼마나 더 비참하게 굴어야 해? 나한테도 좀 웃어주면 안 돼?”그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손아귀의 힘이 점점 강해졌다.눈살을 찌푸린 공지민은 그를 달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온시환은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깊은 키스를 이어갔다.둘은 몇 분간 키스한 뒤에야 숨을 고르며 멈췄다.밤이 되자 두 사람은 씻고 난 뒤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다. 공지민은 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온시환의 눈빛에 담긴 진심 어린 애정을 보면서도 그녀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연승혁에 대한 일을 속이며 자신을 기만했던 이 남자를 왜 동정해야 할까?무엇보다 온시환이 동정이 필요한 사람인가? 예전에 그를 위해 눈물 흘렸던 여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이건 단지 그의 업보일 뿐이었다.다음 날 아침,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온시환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옆에 남겨진 메모에는 그녀에게 푹 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곧바로 씻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목적은 연씨 가문의 노부인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었다.전날 밤, 그녀는 안정숙이 최근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근교의 사찰에 들러 기도를 드린다는 정보를 얻어냈다.공지민은 차를 몰고 산길을 따라 사찰에 도착했다. 일부러 안정숙보다
강민지와 대화를 마친 후, 공지민은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온시환은 이미 누군가에게 끌려가 술을 마시고 있었고 떠나기 전 공지민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며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했다.소파에 앉아 있던 공지민의 시야에 원아정과 몇몇 여성이 들어왔다. 원아정은 마치 공지민을 못 본 척 지나치려는 듯했지만 그녀 옆의 몇몇 여자는 공지민이 낯설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원아정의 곁을 맴돌던 오예슬이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오예슬은 공지민이 온시환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공지민을 보자마자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어머나, 아정아, 저기 좀 봐. 저 사람 우리 고등학교 때 제일 인기 많았던 공지민 아니야?”오예슬은 거의 뛰다시피 공지민 앞으로 다가가선 위압적인 태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공지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설마 여기 직원으로 지원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공지민의 옷차림을 보면 그런 말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오예슬은 그녀를 비하하고 싶어 일부러 그런 말을 내뱉었다.공지민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예슬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공지민을 괴롭히며 쾌감을 느껴왔고 지금의 무시당하는 태도는 그녀에게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과거 공지민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술을 공지민에게 그대로 부어버렸다.공지민은 피할 새도 없이 머리에 술을 뒤집어썼다.“어머, 미안해. 내가 잔을 제대로 못 들었나 봐.”오예슬은 원아정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에 이런 행동을 했고 이는 과거에도 그녀가 원아정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주 하던 짓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지민을 굴욕 주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원아정에게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려 돌아섰다.하지만 공지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오예슬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발
원아정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마치 친한 친구인 양 공지민의 팔짱을 끼었다.“그럼 다행이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것도 내 생일 파티에서라니 정말 놀랍다. 앞으로 자주 보자. 나도 제원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잖아.”“좋아.” 공지민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온시환은 공지민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가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가 구은우의 일은 조금이라도 덜 떠올릴 테니 말이다.구은우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건 연승혁이 배후라는 것뿐이었다. 연승혁은 현재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었고 그를 건드린다면 필연적으로 원씨 가문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터였다. 두 가문이 힘을 합친다면 온시환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민이 잠시라도 구은우를 내려놓고 평온히 지내기를 바랄 뿐이었다.원아정은 고개를 숙여 공지민의 귀에 속삭였다.“몇 년 못 봤는데, 그새 너 남자 꼬시는 재주가 이렇게 늘었을 줄은 몰랐네. 죽어서 바다에 가라앉은 은우가 이 꼴을 보면 편히 눈을 감을 수나 있을까?”가볍게 상처를 후벼 파는 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너도 이제 곧 결혼하잖아. 과거의 남자에게 얽매이는 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 것 같은데?”원아정의 얼굴에 미소가 굳고 입술이 살짝 일그러졌다.공지민은 손에 든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승혁 씨 같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자꾸 떠올리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야. 넌 원씨 가문에서도 딱히 기댈 곳이 없어 보이던데. 원진 씨가 너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더라고.”이 일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원진은 철저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원진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도 많았다.원아정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대신 네가 시환 씨랑 이혼하고 나서 어떻게 살지나 잘 고민해.”그녀는 그
온시환은 단지 그녀가 식견을 넓히려 한다고만 생각할 뿐,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밤이 되어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 때, 온시환은 그녀를 품에 안고 천천히 그녀의 옷 끈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지민은 몸을 돌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은 싫어요.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온시환의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서두를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짧게 대답했다.“알았어.”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에 들었다.원아정의 생일 파티는 초대받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공지민은 몇몇 스타일리스트에게 둘러싸여 오늘 밤을 위한 스타일링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면 상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일 파티인 만큼 원아정이 직접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원진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공지민은 이 며칠 동안 온시환에게 원진에 대해 물어보며 정보를 얻어냈다. 원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원진을 두려워했고 원아정도 예외는 아니었다.원진이 있는 한 원아정이 함부로 굴 수는 없을 터였다. 게다가 오늘 밤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자리라 원진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했다.먼저 스타일링을 마친 온시환은 공지민이 몸에 꼭 맞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자 순간 눈빛이 반짝이며 숨소리마저 떨렸다. 매끈한 허리선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지민아, 오늘 정말 아름다워.”온시환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공지민은 말없이 그와 함께 차에 올랐다.원씨 가문의 저택은 제원에 위치해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구매한 곳이라고 했다. 오늘 밤의 파티는 바로 그 저택에서 열리고 있었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에 주차된 화려한 차들을 보니 이 파티의 주최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린 공지민은 온시환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한 홀 안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가
오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지민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야. 은우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나도 알아. 사실 난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오늘 밤 원아정을 만나고 은우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그런데 넌 이런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을까? 너라는 애는 참으로 밉지만 그래도 넌 진심으로 은우를 좋아했잖아. 은우는 한때 네 사람이었고, 넌 나보다 천 배는 더 괴로웠겠지... 미안해.”그 말을 끝으로 오하윤은 자리를 떠났다. 가슴은 여전히 저릿저릿했다.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절망 속에 빠졌을 것이다.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오하윤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느꼈다. 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걸까...한편, 공지민은 자리에 앉아 말없이 주스가 담긴 컵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공지민은 입술을 감쳐물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온시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지금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온시환과 연승혁이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공지민은 그가 왜 진실을 알려주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그의 친구에게 복수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겠는가.‘남자는 결국 믿을 게 못 돼.’가슴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다시는 온시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공지민은 끝내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온시환은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나 화나게 하지 마. 구은우의 일은 아직 조사 중이니까, 너도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그 메시지를 읽은 공지민은 어이가 없었다. 온시환은 분명 누가 구은우를 해쳤는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녀를 계속 속이려는 것이 뻔했다.공지민은 속눈썹을 지그시
반승제는 순간 멍해졌다. 예전 일을 떠올리려 했지만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은 성혜인을 선택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뿐이었다.“시환아, 내 충고를 하나 하자면, 진심으로 지민 씨를 감동시키는 데 집중해. 억지로 잡으려고 하다간 너도 서주혁처럼 될 거야.”온시환은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도 두려웠다.하지만 공지민은 죽은 사람에게 마음이 묶여 있는 데다 자신의 진심 따윈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전화를 끊자 온시환은 한숨을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그렇게 공지민은 바로 오하윤을 만나러 갔다.오하윤은 그녀에게 과일 주스를 따라 주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나 오늘 원아정 만났어. 너도 기억하지? 고등학교 때 널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을 끼얹으라고 시킨 애 말이야.”공지민이 원아정을 잊을 리 없었다. 원아정은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다.그때 원아정은 화장실로 그녀를 몰아넣고 옷을 벗기라고 명령했으며 사진을 찍어 협박했다. 그 이후 괴롭힘은 점점 더 악랄해졌다.공지민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저 묵묵히 참으면 지나갈 거라 믿었지만 어느 날 원아정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공지민, 너랑 은우가 원래 아는 사이라며? 지금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네 사진을 모두에게 뿌려서 네가 어떤 년인지 보여줄 거야.”그녀는 그런 고등학생은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한 척하면서도 잔인했고 사람을 완전히 조롱거리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원아정은 재벌가 출신으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항상 고급 외제차가 그녀를 데리러 왔고 때로는 경호원까지 동원되었다.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친구들조차 그녀의 괴롭힘을 부추겼다.만약 구은우가 없었다면 공지민은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그때 원아정 앞에 무릎을 꿇고 개처럼 용서를 구했다.이후 구은우가 원아정에게서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