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두 장의 서류를 보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심지어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고 무의식적으로 반승제에게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설우현의 말을 듣는 순간 또다시 온몸이 얼어붙었다.“아버지가 곧 할아버지가 된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쁘실까? 손자를 위해 준비한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줘. 그래도 싫다면 우리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혼란스러워하며 말하는 설우현의 모습을 보고 성혜인이 따라서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너무 부담스럽네요.”설우현은 입술을 깨문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서류 두 장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갖고 있어. 이제부터 넌 설씨 가문의 가장이야. 형을 어떻게 처벌하든 가족들이 다 적극적으로 도와줄 거야.”불과 어젯밤에도 다시는 설기웅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며 반승제한테 얘기했는데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설기웅은 목소리를 잃게 만들었고 뺨을 때린 것도 모자라 목까지 졸랐다. 성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그녀는 서류를 한쪽에 놓고선 차분하게 말했다.“승제 씨, 우리 이만 가요.”보아하니 성혜인은 돈과 권력에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반승제는 급히 그녀를 안으며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감정 기복이 심하면 안 돼. 너 임신했잖아.”그는 마치 일부러 설기웅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말했다.“혜인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거 알지? 어젯밤처럼 잔인한 상황은 두 번 다시 경험하지 못하게 내가 지켜줄게.”설기웅은 넋을 잃었다. 입안은 피비린내로 가득했고 마치 누군가 칼로 살을 베는듯한 고통이 밀려와 두 눈마저 빨갛게 충혈되었다.그는 차마 시선을 들어 성혜인을 바라볼 수 없었다. 혐오의 눈빛과 마주치는 게 겁나는지 비겁하게 고개를 숙인 채 사인을 하고선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성혜인과 반승제가 마침 곁을 지났고 설기웅은 쳐다보기는커녕 되레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성혜인은 반승제의 품
설우현은 성혜인을 바라봤다.“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씨 가문의 권력으로 플로리아에서 내쫓아도 돼. 다른 나라로 보내서 몇 년간 고생하게 만들어도 상관없어.”성혜인은 자리에 서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설우현이 설기웅에게 이렇게 잔인할 줄 몰랐다.설씨 가문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일자리를 막아버리다니. 그 말인즉 설기웅은 앞으로 일자리를 찾고 싶어도 남들 보기 떳떳한 그런 직업을 찾지 못한다는 뜻이다.설우현은 비로소 명문가 도련님다운 행동을 했다.입만 벙끗할 뿐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한 성혜인은 반승제의 옷깃을 잡고선 한숨을 내쉬었다.“승제 씨, 가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널찍한 복도에 오직 설우현 혼자 남았다.그는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예전의 이곳을 떠올리며 잠시 슬픔을 느꼈다.현실을 부정하는 여동생과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형. 설씨 가문은 과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분명히 그는 모든 사람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잃었다. 이게 바로 욕심을 부린 대가인 걸까?설우현은 눈을 비비고 심호흡을 한 후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어머니, 하시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나미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묵을 지켰다.설우현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몸과 마음 전부 지친 것 같았다.그 시각 반승제에 이끌려 차에 올라탄 성혜인은 자신의 두 다리가 땅에 떠 있는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임수아가 설씨 가문의 아가씨가 아닐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음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음에도 결코 자신이 그 당사자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동안 설인아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진실은 설인아가 그녀의 자리에 앉아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다.참으로 아이러니하다.피곤함이 밀려온 성혜인은 차에 오른 후 천천히 반승제의 품에 안겼다.반승제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미안해. 어젯밤에 얘기 못 해서. 우현 씨가
순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설인아는 두 볼이 빨개졌다.‘설마 오빠가 나한테 설씨 가문의 주식을 주는 건가?’주식을 넘겨받는다면 설씨 가문에서 설인아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그런 걱정은 아예 안 해도 된다.“인아야, 옷 갈아입고 올게. 일단 경호원들이랑 같이 가.”“알겠어. 오빠도 빨리 와.”설인아는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저 배에 올라 편안한 의자에 앉는듯한 느낌을 받았다.이어 무언가가 다리를 묶이고서야 설인아는 순간적으로 불안함이 밀려왔다.“왜 발에 수갑을 채우는거죠?”“아가씨, 이건 수갑이 아니라 팔찌예요. 도련님이 준비한 선물인데 수십억이 넘어요. 아직은 보여드리지 말라고 하셨거든요.”설인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역시 날 예뻐하는 건 우리 오빠밖에 없다니까.”이 배는 어젯밤의 배보다 훨씬 컸다. 의자는 케이지 안에 고정되어 있었고 주위에는 꽃으로 꾸며졌다.이건 어젯밤 성혜인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인데 지금은 설인아가 그 자리에 앉았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설인아는 아직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두 다리가 의자에 묶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끝으로 풍겨오는 꽃향기에 설기웅이 준비한 서프라이즈라며 확신했다.별장의 2층에선 설기웅이 손에 위스키를 든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설인아는 아마 아예 모르고 있을 것이다.그는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시고선 큰 배가 천천히 강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콜록.”어찌나 독한 술인지 절로 기침이 나왔다.설씨 가문의 후계자로서 늘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하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특히나 비즈니스를 하는 만큼 칼 같은 결단력이 생명인데 항상 설인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그는 저도 모르게 여동생을 아끼려는 마음이 밀려오는 사람이었다.지금껏 연애조차 한번 해본 적 없었던 설기웅은 여동생이 늘 일 순위였고 절대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지만 경호원들은 그 말에 흔들릴 리가 없었고 설인아는 손이 빨개진 정도로 케이지를 내리쳤다.“그만해! 다치지 말라고! 오빠, 제발 나 좀 살려줘.”그러나 설인아가 아무리 소리질러도 설기웅은 이 배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케이지가 정말 물에 빠지려는 걸 본 그녀는 마침내 큰소리로 외쳤다.“설기웅한테 얘기해. 날 죽이면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아직도 화병으로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내가 독을 먹여서 그렇게 된 거야. 풉, 그러게 누가 날 설의종 옆으로 데려가래? 맞아, 나 그 사람 죽이려고 일부러 다가갔어. 물론 설우현 때문에 안타깝게도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 독약은 한 방울도 치명적이어서 평생 혼수상태로 살아갈 거야.”그 말을 들은 몇몇 경호원들은 순간 표정이 바뀌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설기웅과 통화를 하고 있었고 스피커폰으로 돌린 덕분에 설인아가 한 말들은 설기웅도 고스란히 듣게 되었다.한편 핸드폰 너머에 있던 설기웅은 취하고 싶은 마음에 독한 술 반병이나 마셨지만 그럴수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졌다.독약을 어떻게 성혜인의 목에 부었는지, 어떻게 그녀의 뺨을 때렸는지 잊으려고 할수록 생생하게 기억났다.기억의 파편들은 뇌리에 아른거려 점점 더 그의 숨을 조여왔다.게다가 설인아가 한 말을 듣자 마지막 연민의 감정까지 철저하게 사려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움켜쥔 채 스산함을 내뿜었다.“뭐라고?”경호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설인아 앞에 놓았다.설인아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설기웅이 죽이려고 작정한 마당에 무슨 짓을 하든 혐오할 게 분명하니 그저 자신의 생명이라도 지키고 싶을 뿐이다.“설기웅, 내 말 못 들었냐? 사실대로 말할게. 내가 미스터리한 조직에서 독약을 받았어. 아마 설의종은 평생 깨어나지 못할 거야. 머리가 있다면 생각 좀 해봐. 갑작스런 충격으로 쓰러진 거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있겠냐?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나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날 죽이는 순간 설의종은 평생 식물인간
설기웅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설우현에게 설인아가 했던 말들은 전했다.아니나 다를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설우현은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설인아를 찾아가 죽이고 싶었다.그와 달리 설기웅은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어떠한 조직이라고 했어. 반 대표가 알 수도 있으니까 네가 직접 물어봐봐.”설기웅은 이제 성혜인뿐만 아니라 반승제도 볼 자신이 없었다.그저 쥐구멍이라도 숨어들고 싶었지만 혼수상태의 아버지를 떠올린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장남으로서 이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다.하지만 그날 밤 봤던 사진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사진 속의 여자가 나미선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 어딘가 불안했다.만약 그 여자가 나미선이 아니라면 나하늘일 수밖에 없다.설의종은 의식을 찾지 못했을 때도 줄곧 ‘하늘’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어머니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걸까? 이때까지 나하늘이라는 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는 거네...’설기웅은 공허했다. 나미선의 아이로서 그는 이것이 좋은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나미선은 자격을 갖춘 어머니라고 할 수 없었다. 비록 설의종의 앞에서는 굽신거리며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지만 덕분에 집안 내부는 늘 질서정연하게 관리되었다.설기웅은 한숨을 내쉬며 설우현에게 계속 설명했다.“해독제 있는지도 알아봐 줘. 약을 탄 게 맞는지도 확인해 보고.”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설우현은 곧장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반승제는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성혜인에 입에 맞는 임산부 특식을 준비하기 위해 친히 셰프를 집으로 초대했다.그는 셰프가 어떻게 요리하는지 지켜보면서 입으로 임산부들이 금기시하는 음식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때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반승제는 둘만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은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성혜인과 함께 떠날 날이 점점 다가오니 반드시 설씨 가문의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통화버튼을 누르자마자 핸드폰 너머로 설우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
설의종의 흐릿한 두 눈은 그제야 의식을 찾은 듯 또렷해졌으나 그것도 잠깐일 뿐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답답함에 눈물 한 방울을 흘리고선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성혜인의 말투는 한결 더 단호해졌다.“제가 반드시 해독제를 구해올게요. 설기웅 씨가 없으니 설씨 가문의 물건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오빠는 설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여기를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맞는 말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이곳을 누군가는 지켜야만 한다.설우현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했으나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주춤했고 곧이어 경호원 한 명이 급히 올라와서 보고했다. “도련님, 그분들이 찾아왔습니다.”설우현이 혐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돌변한 순간 누군가 무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 사람은 설의종과 매우 닮아있었는데 설의종만큼의 아우라는 전혀 없었다.그는 설의종의 사촌 동생이다. 엄격한 가문 전통을 갖고 있는 설씨 가문은 가문 내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일찌감치 모든 후계자를 정해놓는다.그 말인즉 설의종은 후계자로 선정된 행운아였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탈락했다.당시 사촌 동생 설태진은 여러 번 사고를 치는 바람에 설씨 가문에서 소외되었다. 그런데 설의종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나타나다니.정장 차림의 설태진은 침대에 누워있는 백발의 설의종을 보고선 깜짝 놀라더니 괴로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형님 왜 이래? 너희들은 이렇게 큰일이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연락 한번 안하는 거니?”설태진의 시선은 설의종에게 향했고, 곧이어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웃음이 가득했다.“우현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설마 기웅이 그 자식이랑 싸웠어? 너희 형제 때문에 형님이 쓰러진 거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알고 있니?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이제 수련이 끝났으니까, 네가 오늘 밤에 직접 찾아뵙고 얘기해. 자초지종은 내가 얘기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어떻
설태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앞을 가로막는 그 여자가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는 걸 보고선 순간 흥미를 느꼈다.“우현아, 새로 사귄 여자 친구니? 얼른 꺼지라고 해. 설씨 가문이 제멋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인 줄 아나 봐?”성혜인은 설씨 가문이 결코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태진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역겨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 두 장을 꺼냈다.“이번에 새로 임명된 대표입니다. 그말은 제가 다시 돌려주죠. 여긴 그쪽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웃음기를 띄고 있던 설태진은 서류에 적힌 글자가 무엇인지 똑똑히 확인하고선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형제 쌍으로 미쳤구나? 설씨 가문의 주식을 감히 외부인에게 넘겨?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넌 끝장이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설마 기웅이를 부추겨서 주식 전부를 양도하게 만든 거야? 그것도 외부인에게?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성혜인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있던 경호원을 보며 말했다.“밖으로 끌어내요.”경호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봤으나 설씨 가문에서 수년간 일한 노하우로 단번에 상황을 판단한 후 눈치 있게 행동했다.설우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은 설태진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끌고 갔다.설태진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한참 동안 멍을 때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어딜 감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설의종도 나한테 굽신거리는데 네 까짓게 뭔데 이렇게 나대는 거지?”성혜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꺼져요.”분명히 말투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설태진은 그녀의 눈에서 살기를 보았다.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경호원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밀려났다.‘뭐 하는 X이지? 포스와 분위기는 설의종이랑 너무 닮았는데?’방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한숨을 돌린 뒤 눈시울을 붉히며 설의종의 곁으로 다
“저도 같이 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설우현과 반승제는 동시에 성혜인의 손목을 잡았다.“안돼.”설씨 가문에서 자라온 설우현은 누구보다도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설의종이 쓰러진 것도 모자라 주식 전부가 다른 사람에게 넘겼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욕을 먹는 게 확실하다. 진실을 알지 못한 두 어르신의 눈에 비친 성혜인은 그저 외부인에 불과하니까. 두 어르신은 설태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호락호락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단지 설태진이 워낙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허술할 뿐 그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설우현은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일단 승제 씨랑 같이 돌아가. 당분간은 설씨 가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비록 두 분 모두 현명하시고 합리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널 찾아다녔어. 아들인 나도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두 분을 아마 절대 모르실 거야. 이런 상황에 대뜸 주식 양도가 적힌 서류를 들고 나타나는 건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죄를 뒤짚어 쓰는 격이 되는 거야.”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설기웅과 설우현은 오늘 밤에 어떻게 될까? 그들은 사람들의 빈정거림을 피할 수 있을까?설우현은 그녀를 반승제 쪽으로 밀었다.“너한테 아직 더 중요한 일이 남았잖아. 난 아버지 얼른 의식을 되찾았으면 좋겠어. 해독제를 구하는 건 너한테 맡길게. 혜인아, 미안하다. 우리가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반승제는 성혜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탔으나 걱정 가득한 그 모습에 손 하나를 그녀의 배에 얹었다.“널 혼자 플로리아에 두고 가는 것도 걱정되지만, 그 자리에 네가 가는 게 더 걱정돼. 임신했는데 몸 생각해야지. 이제 그만하고 가자.”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만지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반승제가 막 운전하려고 할 때 성혜인의 핸드폰이 마침 울렸고 낯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우현이랑 같이 오거라. 직접 보고 싶구나.]추측할 필요도 없다. 이건 틀림없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진실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조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분명했다.원아정과 오예슬은 평소에도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서로의 사진을 SNS에 올리거나 함께 쇼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 오예슬이 갑자기 원아정을 배신하며 폭로한 것은 분명 현장의 분위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거짓일 리 없었다.더구나 안정숙이 진위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만약 공지민이 진짜 잃어버린 손녀라면 그녀가 이런 끔찍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정숙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안정숙은 지팡이를 단단히 쥐고 멀리 있는 원아정을 바라보았다.“아정아, 더 할 말 있어?”원아정은 속으로 오예슬을 한 대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현장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게다가 그때 저질렀던 괴롭힘은 숨기지도 못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조금만 학교에 조사를 요청하면 금방 드러날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부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녀는 공지민이 이런 순간에 왕따 사건을 폭로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안정숙이 마치 홀린 듯 공지민을 편드는 모습에 어리둥절했다.“할머니, 그땐 제가 너무 어렸어요. 제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한 행동들이었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안정숙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지난번 사찰에서 공지민과 원아정이 다투는 모습을 봤을 때는 공지민이 성격이 지나치게 급하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 공지민은 갑작스럽게 괴롭힘 가해자를 마주했기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원아정은 재빨리 다가가 안정숙의 손을 잡았다.“할머니, 용서해 주세요. 오늘은 제 결혼식이에요.”결혼식을 언급하며 그녀는 안정숙의 태도를 살폈다. 이 결혼식이 계속될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다.그러나 안정숙은 그녀의 손을 홱 뿌리치며 단호히 말했다.“이 일은 내가 철저히 조사할 거야. 아정아, 그때 네 나이가 어리지도 않았을 텐데, 네
공지민은 오예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커다란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공지민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고등학교 시절, 저는 심각한 괴롭힘을 당했어요. 저를 괴롭힌 사람은 바로 원아정이었고, 오예슬은 원아정의 부하였죠. 그들은 제 옷을 찢고 사진을 찍어 협박했어요. 저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였고, 부모님과 동생은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집에는 저 혼자만 남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어요. 화장실에 저를 가두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고, 낯선 남자와 억지로 키스하게 만들거나, 제가 문란하다는 소문을 퍼뜨렸어요. 어디를 가든 비난과 조롱이 따랐지만 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요. 한 번은 무릎을 꿇고 제발 그만하라고 빌었지만 원아정은 점점 더 악랄해졌어요. 심지어 어느 날은 제 얼굴을 칼로 그어버리려고 했어요. 다행히 그 순간 누군가가 제때 막아줘서 가까스로 무사할 수 있었어요.”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이어졌지만 특정 부분에선 잠시 멈추며 감정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현장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이런 일이 대가문에서 벌어졌다면 돈으로 해결하려 했을 테지만 결혼식 한가운데에서 이런 폭로가 터지니 마치 가문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었다.원아정은 즉각 흥분하며 외쳤다.“거짓말이에요! 할머니, 쟤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요!”공지민은 눈을 감은 채 온시환의 슈트 끝자락을 단단히 붙잡았다.“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가서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원아정은 그 당시 저를 괴롭히는 무리의 대장이었어요. 그 뒤에는 항상 졸개들이 있었고, 학교에서는 아무도 그 애들을 건드릴 수 없었죠. 모두 제가 괴롭힘당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어요. 선생님들조차 원아정 집안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침묵했으니까요. 한 번은 용기를 내서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결국 원
오예슬은 온몸이 굳어지며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역시나 바로 다음 순간 공지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등학교 때 괴롭히는 게 부족했나 봐? 이런 자리에서도 나를 가만두지 않다니. 혹시 또 원아정이 무슨 말을 했어?”‘원아정? 오늘 결혼식을 올릴 신부 아닌가? 신부와 이 사건이 무슨 관계라는 거지?’처음에는 단순한 해프닝이라 여겼던 사람들도 원아정의 이름이 언급되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멀리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 있는 원아정을 향했다.원아정은 공지민이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자신을 끌어들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공지민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야!’“공지민!”원아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공지민은 마치 놀란 듯 온시환의 품 안에서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 모습은 그녀가 원아정을 몹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원아정은 가슴을 들썩이며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공지민, 오늘은 내 결혼식이야. 일부러 방해하려고 온 거라면 내가 경호원들을 불러 너를 쫓아내도록 할 거야!”공지민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온시환의 품에 기댔다.온시환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공지민은 목소리가 떨리며 말했다.“말해도 소용없을 거예요.”안정숙은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나섰다.“네가 어떻게 알아 소용없다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지금 말해봐. 내가 너를 위해 나서줄 수도 있잖니.”안정숙의 이 한마디에 현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미묘해졌다. 그녀는 평소 원아정을 아낀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공지민의 편을 드는 듯했다.원아정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할머니, 저 여자는 속셈이 뻔해요. 제 결혼식을 일부러 망치려고 하는 거라고요. 결혼식을 계속 진행할 수 없을까요? 쟤가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따로 대화하면 될 거예요.”그러나 안정숙은 단호했다.“지민이 맞지? 네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해. 난 듣고 싶구나
신부가 이제 막 신부 대 앞에 다가가려는 순간,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지며 결혼식이 그대로 중단되었다.안정숙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다들 멍하니 뭐 하고 있어? 어서 빨리 내려가서 사람을 구해!”온시환이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방금 누군가의 시선이 그의 주의를 끌어, 물에 빠진 사람이 공지민이라는 사실을 놓쳤다.공지민을 물 밖으로 끌어 올리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의 드레스가 위로 말려 올라가며 허벅지 윗부분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반점이 드러났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꼭 쥐었다. 그녀는 공지민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그 반점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평소 자애로운 미소를 짓던 안정숙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격동에 휩싸였다. 그녀는 공지민을 살피러 다가가 그 반점을 확인하자마자 마음속에 놀라움과 희망이 떠올랐다.‘이 아이는 사찰에서 봤던 아이잖아?’안정숙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오랜 세월 동안 가문의 실종된 딸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허벅지에 꽃 모양의 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녀뿐이었기에 사칭자들은 그 반점을 흉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 반점이 분명히 있었다.안정숙의 입술이 떨렸고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스쳤다.“이보게, 온씨 가문 젊은이. 어서 이 아가씨를 안게!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야겠어.”공지민은 몇 모금 물을 뱉고 나서야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녀는 안색이 창백했고 온시환의 품에 힘없이 기대 있었다.온시환은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일단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그러나 안정숙은 공지민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 찾아 헤맨 사람을 겨우 발견했으니 그녀는 즉시 친자 확인을 하고 싶었다.안정숙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눈에 공지민의 목걸이에 엉킨 한 가닥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는 척하며 그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이 아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공지민입니다.”온시환이 대답하며 그녀
다음 날 아침, 염정아는 어제 포장해 온 음식을 데워 동생에게 새로 산 옷을 입혀주었다.솔직히 말해 동생은 잘생긴 편이었다.염정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깨달은 건 그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이제 갈게. 아이들 잘 돌봐줘.”“누나...”동생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치 과거 그녀가 수없이 일하러 나갈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따라오는 모습이었다.염정아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닫은 뒤, 공지민의 팔을 붙잡았다.“가자.”공지민은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정아야, 두 달은 제원에 있어야 할 텐데, 집에 더 할 말은 없어?”염정아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너도 보다 시피 동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걱정 마. 큰애는 요리도 할 줄 알아. 동생이 못하면 애들이라도 버텨줄 거야.”그렇지 않다면 이 집이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공지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제원으로 향했다.그들은 이번 여정으로 3일을 보냈다. 출발 전, 공지민이 온시환과 크게 다툰 후 3일 동안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 사이 공지민은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허벅지에 염정아와 같은 모양의 빨간 반점을 새겼다. 그뿐만 아니라 염정아 몸의 모든 점 위치를 기억해 자신의 몸에도 똑같이 재현했다.염정아는 소심하고 큰 도시에 익숙하지 않아 직접 연씨 가문에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연승혁을 만나게 된다면 금방 모든 것을 들킬 것이 뻔했다.그래서 공지민은 다른 계획을 세웠다.그녀는 실종된 연씨 가문의 딸인 척하며 가문에 들어가 연승혁의 누나가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 위치에서 복수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공지민은 온시환의 별장 근처에 염정아를 위한 집을 임대했다. 그리고 염정아의 머리카락과 혈액 샘플을 채취해 필요시 친자 확인에 대비했다.모든 준비를 끝낸 뒤, 공지민은 기회를 기다리며 조용히 움직였다.염정아는
공지민은 염정아가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염정아는 이런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제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명을 손쉽게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공지민 자신도 이런 선택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정아야, 내가 카드를 줄게. 하지만 네가 나랑 제원에 가면, 너희 아이들은 누가 돌보지?”“동생이 돌볼 거야. 가끔 아래층 슈퍼 사장님도 와서 봐주실 거고. 슈퍼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다 있으니까 걱정 없어. 내가 매일 일하러 나갈 때도 동생이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거든.”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염정아를 데리고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계절 옷들을 한꺼번에 샀다. 아이들이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입을 수 있을 만큼 넉넉히 준비했다.그녀는 염정아와 남동생에게도 새 옷을 사주었다. 동생은 옷을 입고 거울을 보며 신나게 웃음을 터뜨리며 염정아를 연신 불렀다.염정아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지민에게 물었다.“우리 내일 제원으로 출발해도 될까? 집에서 몇 가지 정리할 게 있거든.”“그래.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이건 내 카드야. 비밀번호는 네 휴대폰으로 보낼게. 필요한 돈은 언제든지 써.”“고마워.”염정아는 곧바로 동생을 옆으로 데리고 가서 세세히 일러주기 시작했다.동생은 비록 지적 장애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생활은 할 수 있었다. 다만 집 밖으로 나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잘 들어. 내가 몇 달 동안 집을 비울 거야. 아이들은 네게 맡길게. 아래층 미숙 이모가 정기적으로 먹을 걸 가져다줄 거야. 분유 타는 법은 이미 두 달 동안 가르쳤고, 기저귀 갈아주는 법도 배웠으니까 잘할 수 있지? 간단한 반찬 만드는 법도 알잖아. 아이들을 잘 돌봐줘.”동생은 순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입을 떼며 말했다.“누나가 너무 보고 싶을 것 같아.”“금방 돌아올 거야. 걱정하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성의 몸에 큰 상처를 남긴다. 염정아의 배가 어떤 상태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마자 염정아의 남동생은 옆에서 토하고 말았다. 너무 많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댄 탓이었다.염정아 역시 속이 더부룩해 고생했지만 토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남동생은 토한 뒤에도 후회로 가득한 얼굴이었다.염정아는 그의 입가를 천천히 닦아주며 말했다.“그만 먹어, 안 그러면 내일은 아무것도 먹을 게 없을지도 몰라.”남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을 바라봤다.공지민은 계산을 마치고 포장한 음식을 들고 그들과 함께 염정아의 집으로 돌아갔다.집에는 아직 어린 다섯 아이들이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내인 쌍둥이는 아직 품에 안겨 있어야 했고 제일 큰 아이도 겨우 일곱 살이었다.염정아는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며 막내들에게 줄 분유를 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반면 남동생은 몇몇 아이를 달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공지민은 그녀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모든 일이 끝났을 때 염정아의 얼굴은 이미 피곤함으로 가득했다.“지민아, 네가 여기에 찾아온 건 무슨 일 때문이지?”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이었지만 공지민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염정아의 삶이 이미 이렇게 힘겨운데, 연씨 가문으로 엮이는 것이 옳은 일일까?염정아는 그녀의 망설임을 알아차린 듯 부드럽게 말했다.“그냥 말해. 지금 내가 돈이 절실하다는 건 너도 알잖아. 지민아, 나는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야. 네가 돈을 조금이라도 준다면 뭐든지 도와줄게. 아이들이 굶는 것만은 막아야 하니까. 집에 분유도 떨어졌고, 언제 또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 몸 상태도 별로라 공사판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불안해. 내가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동생과 다섯 아이들은 온전히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정아야, 네 허벅지 근처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이 있지
공지민은 염정아를 품에 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운명은 어쩜 이렇게 잔인하고 불공평할 수 있을까.염정아도, 구은우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두 사람을 철저히 망가트린 현실이 너무도 가혹했다.염정아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녀의 눈에 식은 차가 보였다. 공지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밖에서 뭐라도 먹자. 그리고 아이들한테 줄 것도 좀 사자.”염정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지민아, 네가 우리 집 주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한 번도 잊은 적 없어.”공지민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는 염정아를 이용해 연씨 가문에 접근하고 연승혁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나 망가진 염정아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품에서 흐느껴 우는 친구를 보니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가 너무도 비열해 보였다. 복수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사람의 고통을 이용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염정아는 외출할 만한 옷 한 벌조차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은 군데군데 헝겊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그녀가 옷을 챙기는 동안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순수한 눈빛으로 다가와 물었다.“누나, 어디 가?”“밥 먹으러 나가.”“나도 데려가 줄 수 있어?”늘 침을 흘리던 그는 지금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아마 염정아가 그의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는 걸 알기에 조심하고 있는 듯했다. 염정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같이 가자.”그녀는 이 동생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적 장애를 가진 그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부모가 약을 먹이고 강제로 그와 염정아를 함께 있게 했을 때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자발적으로 건드리지 않았고 단지 그녀 곁에서 잠을 잤다.염정아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돌보고 막내에게 분유를 타 먹이며 남편과 같은 동생을 데리고 공지민과 함께 집을 나섰
공지민은 여전히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감정의 흔들림조차 없는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더 사람을 화나게 했다.온시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소파에 밀어 눕히며 말했다.“너는 침대에 있을 때만 겨우 말을 좀 듣더라.”공지민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입가에 조소를 띄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네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 정도야?’그녀의 반응에 온시환의 자존심은 철저히 짓밟혔다. 그는 그녀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서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바닥에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고급 디저트가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거실 테이블은 한쪽으로 넘어가 엉망이었다.온시환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몰려왔다. 반승제가 이 집 디저트가 아주 맛있다고 추천했기에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자 사 온 건데, 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공지민은 정말 마음이 없는 걸까.그는 아무 말 없이 큰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 표정만 봐도 오늘 밤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제야 숨어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나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을 움직이며 공지민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지민 씨, 사실 시환 씨가 당신한테 잘하려고 애쓰는 거예요. 조금만 부드럽게 대처하면 덜 힘들 텐데요.”공지민의 턱에는 손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금 온시환이 얼마나 강하게 그녀를 잡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하지만 공지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정부에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차에 올라 고등학교로 향했다.그곳은 제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녀는 염정아의 집 앞에 서서, 과거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어둠 속의 작은 틈에서 모든 걸 끄집어내는 듯했다.깊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문을 두드렸다.염정아가 바로 허벅지 안 쪽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번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 묵었을 때 우연히 보게 되었다. 너무나 독특했기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