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태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앞을 가로막는 그 여자가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는 걸 보고선 순간 흥미를 느꼈다.“우현아, 새로 사귄 여자 친구니? 얼른 꺼지라고 해. 설씨 가문이 제멋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인 줄 아나 봐?”성혜인은 설씨 가문이 결코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설태진이라는 인간이 이렇게 역겨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서류 두 장을 꺼냈다.“이번에 새로 임명된 대표입니다. 그말은 제가 다시 돌려주죠. 여긴 그쪽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려도 되는 곳이 아닙니다.”웃음기를 띄고 있던 설태진은 서류에 적힌 글자가 무엇인지 똑똑히 확인하고선 표정이 싸늘하게 돌변했다.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심장이 마구 날뛰었다.“형제 쌍으로 미쳤구나? 설씨 가문의 주식을 감히 외부인에게 넘겨?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넌 끝장이야.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설마 기웅이를 부추겨서 주식 전부를 양도하게 만든 거야? 그것도 외부인에게?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성혜인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있던 경호원을 보며 말했다.“밖으로 끌어내요.”경호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봤으나 설씨 가문에서 수년간 일한 노하우로 단번에 상황을 판단한 후 눈치 있게 행동했다.설우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은 설태진을 양쪽에서 잡고 밖으로 끌고 갔다.설태진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한참 동안 멍을 때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어딜 감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설의종도 나한테 굽신거리는데 네 까짓게 뭔데 이렇게 나대는 거지?”성혜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꺼져요.”분명히 말투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설태진은 그녀의 눈에서 살기를 보았다.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경호원들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밀려났다.‘뭐 하는 X이지? 포스와 분위기는 설의종이랑 너무 닮았는데?’방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설우현은 한숨을 돌린 뒤 눈시울을 붉히며 설의종의 곁으로 다
“저도 같이 갈게요.”말이 끝나자마자 설우현과 반승제는 동시에 성혜인의 손목을 잡았다.“안돼.”설씨 가문에서 자라온 설우현은 누구보다도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설의종이 쓰러진 것도 모자라 주식 전부가 다른 사람에게 넘겼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욕을 먹는 게 확실하다. 진실을 알지 못한 두 어르신의 눈에 비친 성혜인은 그저 외부인에 불과하니까. 두 어르신은 설태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호락호락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단지 설태진이 워낙 생각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허술할 뿐 그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설우현은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일단 승제 씨랑 같이 돌아가. 당분간은 설씨 가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비록 두 분 모두 현명하시고 합리적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널 찾아다녔어. 아들인 나도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두 분을 아마 절대 모르실 거야. 이런 상황에 대뜸 주식 양도가 적힌 서류를 들고 나타나는 건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죄를 뒤짚어 쓰는 격이 되는 거야.”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설기웅과 설우현은 오늘 밤에 어떻게 될까? 그들은 사람들의 빈정거림을 피할 수 있을까?설우현은 그녀를 반승제 쪽으로 밀었다.“너한테 아직 더 중요한 일이 남았잖아. 난 아버지 얼른 의식을 되찾았으면 좋겠어. 해독제를 구하는 건 너한테 맡길게. 혜인아, 미안하다. 우리가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서.”반승제는 성혜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탔으나 걱정 가득한 그 모습에 손 하나를 그녀의 배에 얹었다.“널 혼자 플로리아에 두고 가는 것도 걱정되지만, 그 자리에 네가 가는 게 더 걱정돼. 임신했는데 몸 생각해야지. 이제 그만하고 가자.”성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배를 만지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반승제가 막 운전하려고 할 때 성혜인의 핸드폰이 마침 울렸고 낯선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우현이랑 같이 오거라. 직접 보고 싶구나.]추측할 필요도 없다. 이건 틀림없이
설경필은 고개를 들어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옆에 있는 반승제에게 시선을 옮겼고,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귀신이라도 본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마침 옆에 있던 안문희도 고개를 들었고 그녀 역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동안에 쌓아왔던 노련함으로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설경필이 입을 열었다.“네가 혜인이니?”그래도 무안하지 않게 먼저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에 성혜인도 꼬리를 내리고 온화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할아버지. 할머니.”설씨 가문은 겉보기에 가풍이 매우 좋았다. 비록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식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집안의 연장자가 입을 열기 전까지 그 어떤 불만도 드러내지 않았다.설태진도 그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성혜인을 째려볼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두 어르신의 아우라는 모두를 숨 막히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설경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는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또래보다 열살은 젊어 보인다. “설씨 가문을 의종이한테 넘길 때, 후계자는 주식을 포함한 그 어떤 일까지 처리할 권한이 있다고 말했었지.”설태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저 계집애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넘겨받죠?”“닥쳐!”안문희의 목소리다.위엄 넘치는 강력한 호통에 설태진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덜덜 떨었다.성혜인은 그제야 설씨 가문에는 내부 분열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설우현의 말을 깨달았다.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들은 설우현을 자기 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망나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에 비해 설기웅은 최적화된 후계자였다.가문을 이끄는 사람의 권위는 절대 침범해서는 안 된다.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설태진은 괘씸한지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감히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곧이어 설경필이 말을 이었다.“혜인아, 넌 이제 설
홀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분위기가 엄숙했다.설경필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의종이랑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구나.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가러라. 결과 나오면 너랑 저 사람...”그는 반승제를 모르는 사람처럼 잠깐 주춤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결과 나오면 알려줄 테니까 남자 친구랑 하룻밤 자고 가도 괜찮을 것 같구나.”성혜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할아버지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안문희는 저도 모르게 반승제의 얼굴에 시선이 향했으나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경필은 걸음을 옮기며 집사에게 신신당부했다.“혜인이랑 남자 친구분 위층까지 모셔가. 다른 사람들이랑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고.”마침 성혜인은 자리에 있는 이 사람들한테서 벗어날 핑계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0여 명이 넘는 가족들은 설경필이 자리를 뜬 순간 미쳐 날뛸 게 분명 했으니까.성혜인은 반승제 손을 꼭 붙잡은 채 집사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다.“이쪽에서 지내면 됩니다.”문을 열어보니 방안은 아주 널찍했다.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곳이라 해도 돈을 흥청망청 쓰는 지하 격투장의 모습이 눈에 익었는지 그 어떤 감정 기복도 없었다.문이 닫히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cctv가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눈살을 찌푸렸다.“왜 두 분을 보면 이렇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거죠?”성혜인은 세상만사를 다 겪었을 사람들이 반승제의 얼굴을 본 순간 충격받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반승제는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두 사람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고 반승제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이 어두웠다.이런 신분과 지위를 갖고 여자 친구의 가족들에게 미움받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만약 궁합이 안 맞는다고 밝혀지면 성혜인은 누구와 결혼하게 될까?성혜인은 반승제의 걱정을 눈치챈 듯 손을 들어 그의 팔목을 잡았다.“궁합이 안 맞더라도 우린 함께할 거예요.”그녀
이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두 노인과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충고였다. 고개를 끄덕인 성혜인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집사를 발견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설우현이 집사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걸까?손을 들어 미간을 문지르는 설우현의 모습에서 걱정 어린 마음이 엿보였다.“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섭지 않아. 나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지내본 적이 없지만 그분들은 아랫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분들이 아니야. 그분들은 그저 불교를 너무 믿어서 그래. 그렇지 않으면 예전에 설씨 가문을 떠나 바로 작은 섬으로 가지 않았을 거야.”설우현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문 앞으로 걸어가 한마디를 건넸다.“타협점이 있다면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 최선이야.”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타협점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우현은 두 노인이 있는 서재로 걸어갔다. 설경필은 책상에 앉아 붓으로 먹물을 찍어 종이에 글을 쓰고 있었다. 반면에 그의 부인 안문희는 옆에 서서 먹을 갈며 가끔 몇 초간 머뭇거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에는 한숨만 내쉬었다. 설경핀은 몇 글자를 쓰고 나서 입을 열었다.“아들이 걱정돼서 그래?”설의종은 그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후계자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니 아무리 강인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태연할 수 없었다.“아들이 아니면 누구를 걱정하겠어요. 의종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식인데.”설경필은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몇 초간 생각에 잠겼다.“그 아이는 반승제라고 했던가. 정보를 보니 괜찮아 보이던데 문제는 지금 수배 중이니, 수배가 풀리기 전까지는 도망자일 뿐이란 말이지. 게다가 당신도 알고...”두 사람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손에 든 염주를 세면서 중얼중얼 염불을 외웠다.서재 문을 두드린 설우현은 허락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할아버지, 할머니.”설경필은 고개도 들지 않았고 안문희는 여전히 염불을 외우고 있었다. 서재에는 먹물 냄새가 진동했다.“성혜인
설씨 일가 한 회사의 지분을 성혜인에게 줬지만 이런 거대한 회사가 한 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설씨 일가 사람들은 각자 여러 개의 회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중 어느 한 회사라도 상장 대기업이었다.그 때문에 응접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두 노인을 노하게 했다가 손에 있는 회사를 몰수당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았다.오늘 밤 성혜인을 본 모든 사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문제를 일으킬 엄두는 내지 못했다. 설우현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몇몇이 다가가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우현아, 정말 손에 있는 모든 주식을 내놓았어? 걔는 여자야. 여자는 감성적인 동물이라 언젠가는 그 반씨 성을 가진 자식에게 모든 지분을 빼앗길 거야. 그때가 되면 설씨 가문은 성을 바꿔야 할지도 몰라.”“그래. 네 형도 그 여자 때문에 설씨 가문에서 쫓겨났잖아. 기웅이는 최근 몇 년간 회사를 잘 경영해 왔어. 모두한테도 잘했고. 내가 볼 때 그 여자가 문제야.”“네 조부모님 말씀이 맞아. 그건 그 여자의 운명이야. 설씨 가문 큰아가씨로 살 명이 아니었던 거지. 그냥 내보내고 지분을 돌려받아야 해.”설우현은 웃어른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어르신들, 괜한 걱정하지 마세요. 혜인이는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있어요. 형보다 더 잘할 거예요.”게다가 이 사람들은 아직 지하 격투장이 반승제의 구역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한때 모든 가문이 탐내던 곳으로 하루에 수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완곡하게 거절당한 그들은 무안해하며 위층을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설우현은 응접실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이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마침 설태진의 딸 설현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설의종의 가족과 설태진의 가족 관계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설우현과 설현아가 사적으로 아주 친하게 지낸다는 사실을 몰랐다. 두 사람은 절친한 사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남자에 미쳐있고 한 사람은
설인아는 이 두 남자의 행동이 설기웅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오로지 설기웅을 만나 빨리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제발, 제발 용서해 주세요! 오빠를 만나고 싶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성혜인을 괴롭힌 것도, 성혜인에게 독을 먹인 것도, 죽일 뻔한 것도 다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차라리 죽여줘요.”하지만 두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들은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설인아는 크나큰 절망감에 빠졌다.눈물은 이미 말라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 더는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녀가 금방 이곳에 던져졌을 때 설기웅이 한 번 보러온 적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녀는 증오에 미쳐 있었다.“후회? 내가 왜 후회해. 설의종은 평생 그렇게 누워있어야 할 거야. 오빠, 나를 잘 살게 해주지 않으면 해독제를 넘겨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오빠 동생 성혜인도 오빠를 만나고 싶지 않겠지. 쌤통이야. 그러게, 누가 날 그렇게 믿으래?”매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설기웅의 심장을 미친 듯이 찔러댔다. 그때만 해도 설인아는 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다. 여전히 설기웅이 그녀에게 마음이 약해질 거라고만 믿었다. 설기웅의 표정은 마치 그녀의 말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차분했다. 그는 그녀를 놓아주며 이렇게 말했다.“그래, 내가 눈이 멀었지. 다신 보지 말자.”이 말에 설인아는 매우 당황했지만 여전히 설기웅이 자신을 무르게 대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설기웅이 그녀를 괴롭힌다니 참으로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때 그녀를 강물에 빠뜨리려고 할 때도 계속 스피커폰으로 경호원과 통화하지 않았던가? 그저 그녀의 반응을 떠보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 사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성혜인이 설씨 가문으로 돌아온다고 한들 어차피 설기웅은 영원히 성혜인을 친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건데. 오로지 설인아만 신경 쓰고, 언제나 설인아만 예뻐할 거니까.이
성혜인과 반승제는 설씨 가문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우미가 들어와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큰 사모님께서 서재로 오라고 하십니다.”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반승제는 옷을 갈아입고 따라가려고 했지만 도우미에게 제지당했다.“큰 사모님께서 아가씨만 부르셨습니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추고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성혜인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서재 밖에서 기다릴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컵을 바닥에 던져. 그럼 내가 데리러 들어갈게.”“네.”그는 도우미를 바라보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서재 밖에 서 있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은 없겠죠?”도우미는 잠시 머뭇거렸다. 실제로 그런 규칙은 없었다. 성혜인은 서재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안문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성혜인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안문희만 있었고 설경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중하게 불렀다.“할머니.”안문희의 시선이 성혜인에게 머물렀다. 특히 그녀의 눈을 보았을 때 표정이 온화해졌다.“넌 하늘이 그 아이 눈과 아주 닮았구나.”설씨 가족의 입에서 나하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성혜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말을 이어갔다.“그때 점쟁이는 나하늘 그 아이가 많은 화를 불러올 거라고 말했어. 의종이가 그 아이를 멀리해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의종이가 나하늘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어.”성혜인은 안문희가 주동적으로 이 얘기를 꺼내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안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곧 결과가 나올 거야. 오늘 아침 설씨 가문 사람들이 다 올 거야. 내가 왜 너만 불렀는지 궁금하지?”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혜인아,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이 많았어.”성혜인은 그다지 감동하지 않았다. 안문희는 분명 자상한 얼굴이었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자상함에 절망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