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그녀는 단오혁을 째려보았다. 전혀 공격력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단오혁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일단 타요. 조수석은 우리 막내 빼고는 누구도 탄 적 없으니까요. 날 이렇게 계속 세워둘 생각인 건 아니죠? 송유나 씨, 내 체면을 봐서라도 얼른 타줘요.”송유나는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사양하지 않고 탈게요, 도오혁 씨.”그녀는 조수석으로 올라탔다.단오혁은 멈칫하다가 웃으면서 말했다.“도오혁이란 호칭과 송유나란
송유나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예전의 그녀는 돈 많고 든든한 집안을 믿고 하늘을 손에 쥔 것처럼 거만한 태도로 여자를 존중하지 않던 그런 인간을 혐오했다.눈앞에 있는 단오혁의 기세는 확실히 부잣집 철부지들과 비슷했다.만약 저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담배가 있었다면 그야말로 송유나가 극혐하는 것만 골라 한 것이다.그러나 이상하게도 단오혁에겐 별다른 혐오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잠깐 생각에 빠진 그녀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도도신 씨 이미지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많이 달랐
그때 그렇게 당하고도 포기할 마음이 드는가?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다시 고통과 역겨움을 참아가며 훈련하러 갔었다.그 탓에 그의 손목 부상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팀에서도 실력이 점점 달리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른다. 한때 팀원이었던, 그러니까 이미 은퇴한 선수인 밤하늘이 그를 찾아왔었다. 훈련 정도 하루쯤 미뤄두고 자신과 함께 하루를 보내지 않겠냐고 말이다.단오혁은 바로 응했다. 그러나 밤하늘이 여자를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 그들과 갈라지고 나서야 그는 그 여자가 밤하
단오혁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면 강하랑이 연유성을 대하듯 송유나도 그를 대했을 것이다.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송유나에게 잘한다면 적어도 연유성 꼴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단오혁은 자신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뭔 생각을 하는 거야.'‘내가 지금 나 자신을 연유성이란 비교한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머릿속에 떠오르는 잡생각을 집어치우고 단오혁은 조수석에 앉은 송유나를 보았다.그러곤 태연하고 웃으며 말했다.“그럼 우리 다시 알
그러나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좋은 성적을 따내는 수밖에 없었다.송유나는 대부분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좋은 학교에 온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겼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학교 선생님들의 강의는 아주 훌륭했다.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매주 2시간 동안만 휴식하게 해도 불만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가끔 교실에서 이런 아이들과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이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이런 편안한 느낌은 팀원과 같이 숙소 생활을 하는 지금도 느
그의 말에 송유나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고개를 돌려 걱정스런 눈빛을 자신을 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상하게도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그녀는 그저 본가로 왔을 뿐이다. 죽으러 오는 것이 아니니 굳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송유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으며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고마워요, 오혁 씨. 전 괜찮아요. 귀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집으로 가는 것뿐인데요. 아직은 남자친구가 함께 들어가 줄 필요 없네요.”그녀는 문을 열고 내리면서 말했다.“시간도
센서등이 다시 켜지고 나서야 그는 비스듬히 열었던 철문을 활짝 열었다.“아이고, 여보. 이 야밤에 누가 온 거래요? 대체 누가 왔길래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예요?”송병규가 문을 열 때 집안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인지 복도의 센서등은 꺼지지 않았다.어두운 불빛 아래서 송유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았다.그녀가 집을 나왔을 때보다는 많이 나이 든 모습이었고 머리에도 흰 머리가 많이 나 있었다. 그래도 전보다는 안색이 좋아진 것 같았다.송병규가 입고 있는 티셔츠는 아주 오래된 티셔츠로 보였다. 이런 티셔츠를
시곗바늘은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티브이에선 막장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고 부모님 연령대 시청자들이 좋아할 만한 드라마였다.마침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찾아가 따져 묻는 장면이 나왔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좋은 며느리가 아니라며, 며느리라면 응당 자기 아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는 둥 말하고 있었다.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대사였다.그 탓에 송유나는 머릿속에 생각해둔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되었다.그녀가 이번에 돌아온 것은 최숙이 해준 말로 인해 제대로 천천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다.최숙의 말이 진짜든 거짓이
강하랑은 붓으로 그리는 그림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비록 현지에 있었지만 서양의 유화가 색감이 진하고 화려한 것이 더 잘 어울릴 수 있을 거 같다. 사진으로도 이미 한 폭의 유화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그래서 인터넷 영상을 따라 하나하나 연습하기 시작했다.첫눈이 내릴 때, 강하랑의 조금 만족스러운 첫 작품이 완성되었고 동시에 그녀의 다음 여행도 시작되었다.추위를 두려워하는 강하랑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북쪽으로 향했다.그녀는 국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도시로 가서 전에
굳이 단점을 말하자면, 이 마을의 물가가 너무 비싸다는 점이었다.강하랑은 초등학교에 머무는 동안, 다 함께 아껴 쓰고 절약하며 지내느라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이 여행에서도 같은 습관을 유지했다.그녀는 이 생활의 정취가 짙은 이 작은 마을이, 생활 리듬이 느리면서도 물가가 수도권 도시를 능가할 정도로 비쌀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정말 믿기 어려웠다.강하랑은 이곳에 한 달만 머물렀다.햇살이 따스한 날, 아파트의 작은 창가에 누워 맞은편 초등학교의 어린이날 예술 공연을 다 보고 나서야 집주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음 여행
강하랑은 설이 끝난 후 도망쳤다.그전에는 단이혁의 회사에서 잠시 일을 했다.솔직히 말해서, 연예인 지망생들의 외모는 정말로 훌륭했다.예쁜 여자들은 하얀 피부에 다리가 길쭉하고, 잘생긴 남자들은 몸매가 엄청 좋았다.정말로 선택해야 한다면, 강하랑은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것이다.자신의 플레이 본능을 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놀고 싶었다.몸매 좋은 남자들이 강하랑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정말 좋았지만 예쁜 여동생들이 그녀를 볼 때마다 인사하면서 미소를 짓는데, 그 미소는 정말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그녀는 돈도 많고
이것은 그녀가 예전에 행복했을 때와 다름없는 미소였다.예전 같았으면, 단유혁은 한숨을 돌리고는 강하랑을 따라 산책하고, 사진 찍고, 밥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하지만 최근에는, 그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오빠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듯, 강하랑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머리를 기울이고, 차 문 앞에 기대어 말했다. "오빠, 나는 어떤 사람의 죽음 때문에 조금 슬펐던 건 인정하지만, 예쁘고 똑똑한 여동생이 쓰레기 같은 사람 때문에 죽고 살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줘, 알겠지?"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은 선행으
“하랑이는 추후 어떤 계획 있어?”단유혁은 질문을 피하며, 갑자기 화제를 전환했다.그는 강하랑의 시선을 따라 멀지 않은 해변을 바라보았다. 해변에서 햇볕을 받으며 배구를 치는 아이들과 얇은 옷을 입고 일광욕을 즐기는 청년들을 보면서, 이런 날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인생은 곧 걸어가는 과정에서의 수행이기에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사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평화로운 햇살 아래에서 뛰어놀고 즐기는 것이다.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있을까?그는 시선을 거두어 다시 강하랑에
“하지만 너 이 며칠 동안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안심할 수가 없었어.”단유혁은 정희월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차를 몰고 가며 강하랑을 한 번 흘겨본 후 농담처럼 말했다.별장에서의 어조에 비해 지금은 많이 가벼워졌다.“아이구.” 강하랑은 깊게 한숨을 쉬며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아무리 말해도 난 과다 출혈로 다친 환자야. 휴식을 취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이 말은 당연히 둘러대는 말이었다.연바다에게 끌려갔을 때, 그녀의 팔 부상은 완벽하게 처치되어 있었고 이후에도 상처가 부딪혀도 다시 열리지 않았다. 병원과 별장에서
정희월이 원래 긴장을 풀었던 마음이 다시 조여졌다.그녀는 강하랑을 달래며 말했다. “하랑아, 너 왜 그런 걸 묻니? 그 장면은 보기 좋지 않아. 만약 집에서 지루하다면 오빠에게 데리고 나가서 놀거나 나와 함께 정원에 가서 꽃을 심자.”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필요가 있을까?정희월은 직접 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뉴스에서 온서애를 실어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연씨 가문의 온서애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산의 상황은 더 위험했을 것이다.비디오가 인터넷에 올라오지
강하랑은 단시혁이 돌아온 후 바로 퇴원을 했다.병원 창밖의 풍경이 좋기는 했지만 병원에 있는 것은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공기에서도 그녀가 싫어하는 냄새가 났다.그녀는 집에 가고 싶었다.단시혁의 행동은 매우 빨랐다.동생의 기분이 좋지 않고 잘 쉬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의사가 몸에 큰 이상이 없고 입원할 필요도 없다고 했으니 집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그는 강하랑을 데리고 서해시에 있는 단씨 가문의 별장으로 돌아갔다.이곳에는 사람이 많아 그녀를 돌보기가 편했다.게다가 곧 설날이 다가와 그녀를 자신의 아파트로 보내는
강하랑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이었고, 귀에는 전자 기기의 소리가 들려왔다.공기 중에는 자극적인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그녀는 한참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창밖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느리게 돌아가는 머리를 서서히 회전시켜 지금 자신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그녀가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던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죽었다.그가 케인에게 묻히는 것을 그녀는 지켜보았다.이후로는 더 이상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가고 강제로 감금시키고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