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으며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준혁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이때, 이준혁이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세희를 병실에 데려다주고 할아버지 병실 앞을 잘 지키고 있어.”말을 마친 이준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고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렇다고 떠나는 이준혁을 잡을 수도 없었다.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준혁의 반감을 사는 꼴이다.임세희는 이준혁의 뒷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왠지 점점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히지 않았다.이준혁이 이렇게 된 건 윤혜인 저 나쁜 계집애가 중간에서 이간질한 게 분명하다.이런 생각에 임세희가 두 주먹을 꽉 쥔 채 절대 이준혁 저 남자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감히 준혁 오빠를 빼앗아가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준혁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해! 두고 봐, 준혁 오빠가 다시 예전처럼 나만 바라보고 나만 아끼게 만들 거야!’한편, 병실 안에서.병실로 돌아온 이준혁은 씩씩거리고 있는 문현미를 보며 물었다.“혜인이는요?”“무슨 혜인이? 혜인이가 누군데!”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되묻자 이준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요?”“내가 유치해? 너야말로 네 마음이 어떤 지도 모르면서 유치하게 굴고 있는 거야!”문현미가 팔짱을 끼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조금 전에 도우미 아주머니한테서 들었는데 네가 할아버지에게 혜인이와 이혼을 안 한다고 말했다며? 그게 정말 네 진심인 거야? 아니면 그냥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 거짓말이야?”“뭐가 달라요? 어쨌든 할아버지는 지금 자극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이준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문현미가 입술을 꽉 깨물며 호통을 쳤다.“당연히 다르지! 만약 네가 할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거면 나도 나서서 네 할아버지를 설득할 거야. 넌 더 이상 혜인이를 괴롭히지 말고 하루 빨리
문현미는 수상한 아들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내 탓이지 뭐, 굳이 혜인이를 베란다까지 끌고 가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네 할아버지가 오늘 따라 낮잠을 그렇게 조금 주무실 줄은 몰랐지…”문현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문현미는 그제야 조금 안심됐다.그래도 구제불능은 아니네!한편,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차 안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윤혜인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조금 전에 꼭 끌어안고 있던 임세희와 이준혁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에 윤혜인은 뺨을 강하게 맞은 듯 얼얼했다.2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결국 웃음거리로 끝나버렸고 그녀가 보여준 진심은 그렇게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두 눈을 꼭 감고 좌석에 기댄 윤혜인은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했다.이때, 갑자기 차문이 열리더니 이준혁이 차안으로 들어왔다.“피곤해?”윤혜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허공에 손이 멈춘 이준혁은 눈썹을 들썩이다가 이내 꾹 참고는 손을 거두었다.“미안해, 할아버지 일은 내가 널 오해했어.”이준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윤혜인은 살짝 놀라웠지만 단지 그 순간뿐이었다.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이준혁은 절대 누군가에게 그 귀한 머리를 숙일 리가 없으며 더군다나 여자에게는 더더욱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윤혜인은 가까이에 있는 이준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오늘도 여전히 나무랄 데 없이 잘생겼다. 예전에는 이 얼굴에 그토록 미쳐 있었는데 이젠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한 때는 다정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싸늘하게 돌변하는 저 얼굴. 윤혜인은 대체 어떤 게 진짜 이준혁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혜인 때문에 괜히 목젖이 흔들리던 이준혁은 예전처럼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선배, 이건 힘들 거 같아요.”윤혜인이 손에 쥔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난감한 듯 말했다.물론 그녀도 이 작업실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도 전에 이 작업실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으며 이곳 직원은 최저 학력도 디자인 학과 박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들 해외 유학파들이었기에 안목과 작품들이 더할 나위 없이 대단했다.“힘들 게 뭐가 있어. 네가 대학교 때 디자인했던 작품을 임 대표님께 보여줬는데 너에게 아주 큰 관심을 보였어.”윤혜인은 한구운이 그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더욱 난감하고 미안했다.그녀가 뭘 고민하는지 잘 알고 있는 한구운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임 대표님은 내가 추천한 사람이라고 절대 편의를 봐주진 않아. 넌 네 노력으로 이 일자리를 따내야 돼. 원고를 그릴 시간이 하룻밤밖에 없는데 괜찮겠어?”“그럼요, 문제없어요.”유일한 걱정이 사라지자 윤혜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낙하산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거라면 그녀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다.이때, 소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사전에 윤혜인과 약속이 잡혀 있었던 소원은 커피숍 앞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다음엔 꼭 식사를 대접할게요.”윤혜인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하자 한구운이 다정하게 웃었다.“괜찮아.”커피숍에서 나와 소원의 차를 타고 떠나는 윤혜인을 지켜보던 한구운은 환한 미소가 점점 사라지더니 이내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한편, 소원과 윤혜인은 블루라인 와인바로 들어섰고 한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았다.아직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기에 와인바에는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았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소원은 이런저런 술을 다양하게 잔뜩 시켰고 술을 마시지 않는 윤혜인을 위해 자몽 주스도 한 잔 주문했다.오랜만에 만난 윤혜인을 보며 소원이 다급하게 물었다.“그래서 요즘 이준혁과 어떻게 지내?”“곧 이혼할 거야.”임세희가 오늘 하루만 해도 저렇게
임세희는 취조하는 듯한 이준혁의 눈빛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소식은 그녀가 임씨 아주머니를 시켜 이준혁 본가 도우미를 매통하여 얻은 정보였기에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세희야, 난 누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해!”임세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이준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준혁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말을 하던 임세희는 갑자기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까지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추측한 거야. 오빠가 할아버지한테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잘하는데 당연히 그런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했겠지!”이준혁은 여전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임세희는 그의 눈빛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참고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준혁 오빠, 설마 혜인 씨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래서 이혼하기 싫은 거야?”오늘 이 질문을 여러 번 들은 이준혁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그가 윤혜인을 좋아하게 된 거라고? 그럴 리가! 그는 절대 아무도 좋아하게 될 리가 없다!그 순간, 머릿속에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윤혜인의 모습이 떠올랐고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있다.임세희는 아무 대답도 없는 이준혁을 보며 분노가 차올랐고 절망스러웠다!그녀가 계속 이준혁에게 따져 물으려던 찰나, 임씨 아주머니가 병실로 들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그러더니 갑자기 과장된 연기로 엉엉 울기까지 했다.“우리 가여운 아가씨, 조금 전에 의사가 흥분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순간, 임씨 아주머니의 의도를 눈치챈 임세희도 아주머니를 와락 끌어안더니 슬피 울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며 이준혁은 그제야 임세희가 환자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이내 날카로운 눈빛을 거뒀다.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세희야, 네가 꼭 나에게 시집오고 싶은 지 잘 생
“아니, 친구가 차린 부업을 엎어버린 다니! 지금 그게 할 소리야?”김성훈의 호통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 이준혁이 병실을 나서기 전에 임세희를 안아 침대에 다시 눕혔다.이 모습에 임세희는 다시 의기양양했다. 그녀가 이렇게 불쌍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준혁은 무조건 마음이 약해지니까! 이렇게 고분고분 그녀를 다시 안아주니까!두 사람은 알고 지낸 세월이 이렇게 긴데 이준혁은 그녀에게 정이 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그는 아직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이런저런 생각에 눈물을 글썽이던 임세희가 손을 뻗어 이준혁의 목을 감싸려던 순간, 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임씨 아주머니를 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앞으로 아가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아주머니는 이제 그만 고향으로 내려가서 노후를 즐겨도 될 것 같습니다!”이 말은 당부이자 적나라한 경고였기에 듣고 있던 임씨 아주머니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주머니는 임세희가 태어난 순간부터 그녀를 모시고 있었고 이 사실을 이준혁도 알기에 평소에 아주머니에게 예의를 갖췄다.오늘처럼 이렇게 직설적으로 경고를 한 건 처음이었다.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임씨 아주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임세희는 뒤에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뒤로 안 돌아보고 떠나는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와 그를 쫓아가려던 그때, 임씨 아주머니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아가씨, 겨우 남은 준혁 도련님의 인내심까지 도전하지 마세요.”임씨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온몸에 힘이 풀려버린 임세희가 침대에 축 늘어져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아줌마, 나 진짜 너무 무서워요. 준혁 오빠가 나 진짜 버리고 가면 어떡해요? 진짜 나 필요 없다고 하면 어떡해요?”임씨 아주머니가 임세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아가씨, 준혁 도련님은 잠시 이혼을 미뤘을 뿐이에요. 두 사람을 이혼하게 만들 방법은 많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참고 지켜보는 거예
“자, 어디 한번 소리 질러봐.”팍!남자가 깐족거리며 말을 하던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와인병이 꽂혔고 유리조각들이 여기저리 튀었다.“당장 내 친구한테서 떨어져!”손에 절반 남은 와인병을 들고 있던 소원이 남자를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고 얼굴에서 피가 줄줄 흐르던 남자가 소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이 천박한 계집애가! 너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입고 와인바에 온 거잖아!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말을 하던 남자가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을 들더니 윤혜인을 보며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냈다.“이 계집애는 오늘 내가 반드시 따먹을 거야!”한편, 이를 지켜보던 웨이터가 곁에 있던 김성훈을 보며 다급하게 물었다.“대표님, 내려가서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우리가 나설 입장이 아니야.”김성훈이 가볍게 피식 웃었다.이때, 팍 소리와 함께 재킷을 입은 남자 손에 들고 있던 와인병이 그대로 본인의 머리에서 깨져버렸고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이런 젠장, 누구…”남자가 욕설을 채 퍼붓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팔이 잡혔고 몸이 하늘 위로 붕 떴다가 이내 바닥에 던져졌다.다음 순간, 이준혁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발로 짓밟았고 와인바에 남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와인병 던지려고 했어?”싸늘하게 굳은 이준혁의 목소리가 들렸고 얼굴이 짓밟힌 남자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수려하게 생긴 이준혁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마치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같았다.이때, 이준혁이 손가락을 살짝 튕기자 웨이터가 카트에 비싼 술을 가득 담아 그의 앞에 대령했고 이준혁은 그 중 한 병을 손에 쥐고는 얼굴을 짓밟고 있던 발을 거둔 채 술병을 그대로 떨어트렸다.술병이 바닥에 떨어진 채 산산조각이 났고 유리파편들은 이리저리 튀었으며 하마터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눈에 박힐 뻔했다.“악! 악!”그 남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처참한 비명 소리를 질렀고 주위에 몰려 있던 손님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이준혁을 바라보았다.저런 사
윤혜인의 말은 이준혁이 더 이상 전처의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준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살기에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난 아직 네 남편이고 네 일에 관여할 자격이 있어.”말을 마친 이준혁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품에 안아 올린 채 그대로 와인바를 나섰고 윤혜인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이준혁 씨, 이거 당장 놔요! 당장 내려놓으라고요!”하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이준혁에게 그 어떤 타격도 주지 못했다.김성훈이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끝까지 아니라고 하더니, 대체 누가 이혼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네.’이때, 소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혜인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김성훈이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소원 씨, 윤혜인 씨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경한이가 위에서 소원 씨를 기다리고 있어요.”그의 말에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리던 그녀는 김성훈의 부축에 겨우 몸을 가눴다.“소원 씨, 왜 그래요?”김성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육경한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소원이 이렇게까지 겁을 먹은 거지?“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겨우 정신을 차린 소원이 창백한 얼굴로 한 걸음씩 위층으로 올라갔다.한편, 위층의 룸이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야릇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원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큰 결심을 한 듯 다가갔고 룸과 가까워질수록 살결이 맞닿은 마찰음이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밝은 불빛이 비추고 있던 룸 안에서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소파에 앉은 채 한 여인의 허리를 잡고 한데 엉켜 있었으며 그 여인은 황홀한 표정으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도련님, 진짜 너무해요…”“좋아?”남자가 여인의 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으며 물었다.“너무 좋아요…”룸 밖에 서있던 소원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지난번 일을 생각하면 이를 악물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소파에
육경한이 소원을 두 팔에 가둔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 여긴 싫어? 밖에 가서 할래? 소씨 집안 공주님이 얼마나 방탕한 여자인지 보여주고 싶어?”입술을 덜덜 떨고 있던 소원이 육경한의 팔을 잡은 채 애원하듯 그를 쳐다보았다.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이 남자는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저번에 소원은 그저 싫은 내색을 조금 보였을 뿐인데 육경한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소씨 가문 회사의 주식을 폭락하게 만들었고 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소원이 아무리 빌고 애원해도 육경한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이제 드디어 그녀를 만나준 이상, 소원은 절대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된다.한편, 육경한이 싸늘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쳐다보며 그녀가 더러운 몸으로 순진한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한국에 없던 이 몇 년 동안, 그녀의 몸은 수많은 남자들에게 놀아났을 것이다.이런 생각에 육경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옷을 거칠게 찢어버린 뒤, 치마를 위로 올렸다.소원은 그렇게 목이 조인 채 소파에 누워 육경한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에는 조금의 연민도 없었으며 소원에게 끝없는 고통만 남겨주었다.소원은 시체 마냥 누워서 육경한의 갈취를 버텨내 수밖에 없었다.두 시간 뒤, 육경한은 소원의 몸 위에서 내려와 곁에 있던 옷을 바닥에 툭 던졌고 소원에게 입으라고 눈치를 줬다.소파에서 일어난 소원이 바닥에서 옷을 주웠다. 그 옷에서는 술집 아가씨들이 자주 쓰는 저렴한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소원은 코를 찌르는 향기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녀가 입고 온 옷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졌기에 그가 준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우리 소씨 공주님이 표정이 별로 안 좋네, 왜? 만족 못했어?”육경한이 코웃음을 치며 비꼬자 휘청거리던 소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이 남자는 분명 조금 전에 그 여자와 충분히 즐겼을 텐데 대체 어떻게 아직도 힘이 저렇
불사신, 영원한 젊음 따위는 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고 족장은 그야말로 야비한 사기꾼이었다. 불에 그을린 냄새가 족장 몸에서 뿜어져 나오자 나무에 달려 있던 독벌레가 놀랐는지 칵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껍데기가 부서지며 독벌레들이 아래로 우수수 떨어졌는데 숙주를 찾기 위해 사람의 기운을 따라 빠른 속도로 기어가기 시작했다.무녀들은 끔찍한 광경에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고 나뭇가지에 걸쳐있던 노인도 족장이 죽은 걸 보고 영혼을 뺏긴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도망가. 다 도망가. 여긴 곳 잿더미가 될 거야...”허나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빠 그가 중얼거리는 걸 아무도 듣지 못했다. 노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껄껄 웃었다.“하하하하. 아들아, 봤니? 이 아비가 너 대신 복수했으니 이제 편히 눈 감아. 다음 생에 또 내 아들로 태어나야 한다. 그리해 줄 거지...”소원과 서현재는 아직 연꽃 제단에 묶여 있었다.서현재가 먹은 알약은 지금 그의 몸 안에서 다른 것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놀라운 효과가 있는 것 맞지만 바로 소화할 수는 없었기에 먹고 나서도 조용히 누워서 흡수해야 했다. 묶여 있는 상태라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없었던 서현재는 얼른 속박에서 벗어나 소원을 구하고 싶었지만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누나, 혹시 알아서 밧줄 끊어낼 수 있어요? 나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서현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소원도 노력하고 있었지만 철사로 묶여있어 벗어나려면 살가죽이 벗겨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는데 그건 상상만 해도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래도 서현재를 다독이기 위해 덤덤하게 말했다.“괜찮아. 할 수 있을 것 같아.”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소원은 말하자마자 눈을 질끈 감더니 이를 악물고 손을 힘껏 당겼다.우지직.뼈에서 살이 발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소원도 고통을 이기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아악...”고통스러운 소원의 절규에 서현재가 걱정하기 시작했다.“누나... 누나... 괜찮은 거예
족장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지금 당장 이 요망한 여자를 없애야 했다.하지만 그 전에 겉치레라도 해야 했기에 족장은 횃불을 든 채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악령을 제거하고, 위대한 선을 쌓으리라!”그 아래 머리 없는 꼭두각시처럼 무녀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족장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바로 이 효과를 원한 것이었다.이들이 있는 한, 무당가는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사실 처음엔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자신의 뜻을 이어받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여겼기에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그러나 지금 보니 그녀는 신념이 부족했다그래서 스스로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그래, 오히려 잘됐어. 내가 직접 손을 쓸 필요도 없고 말이야.’족장은 횃불을 내려 제단에 불을 붙이려 했다.그때였다.휙!바람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 하나가 족장의 어깨를 정확히 꿰뚫었다.핏방울이 로브를 적셨고 아래에 있던 무녀들은 일제히 술렁였다.놀란 족장이 비틀거리며 안색이 창백해질 틈도 없이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무릎을 관통했다.“아악!”족장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주변의 무녀들은 공포에 질려 허둥대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찾았다.고개를 돌린 순간, 모두가 숨을 삼켰다.나뭇가지 위에 선 한 노인이 손수 만든 활을 든 채 족장을 겨누고 있는 것이었다.뒤이어 거친 목소리가 숲을 가로질렀다.“이 늙은 악마야! 내 아들의 목숨을 내놔라!”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화살이 날아갔다.이번에는 정확히 족장의 심장을 관통했다.족장의 손이 경련을 일으켰고 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그와 동시에 손에 쥔 횃불이 그녀의 로브 끝자락에 불을 붙였다.족장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 묶여 있던 약병을 풀어냈다.‘이 약만 있으면... 아직 살 수 있어...!’떨리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병뚜껑을 열고 한 움큼 쏟아내 입에 털어 넣으려던 순간...퍽!공중에서 날아온 발차기로 인해 약병이 그대로 나뒹굴어 떨어졌다.
순간,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소원의 두 손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대로 반응할 수도 없었다.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이렇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목을 칼날에 들이밀어 자결할 줄이야.“아...!”누군가 먼저 비명을 질렀고 곧 모든 무녀들이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성녀라서 죽지 않는 몸이 아니었나?그런데 왜 이렇게 피를 흘리는 거지? 게다가 상태도 위독해 보였다.소원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급히 몸을 낮춰 로브를 벗어 상처를 누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핏줄이 끊어지면서 피가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쏟아졌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 크게 뜨였고 목에서 쉰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이미 성대가 베여 말을 할 수도 없었다.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소원이 다급하게 말했다.“말하지 마! 제발 말하려고 하지 마! 버텨야 해! 네가 내게 준 그 약, 그걸로 널 살릴 수 있어? 피를 멈출 수 있냐고?”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다.하지만 생명이 빠져나가는 건 본인도 알 수 있었다.그제야 후회가 밀려왔다.‘정말로 죽는 건가? 설마 내가 불사의 몸이라는 말이 거짓이었던 건가? 족장님이 날 속였던 건가?’믿고 싶지 않았다.아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그저 절망적으로 족장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흰머리의 노인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걸 본 순간,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모든 걸 깨달았다.족장은 정말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그것도 수년 동안을 말이다.오로지 족장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을 뿐,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었다.그런데 결국 이렇게 속임수에 당해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이다.“크... 억...!”피로 얼룩진 손이 족장을 가리키다 힘없이 떨어졌다.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소원은 급히 고개를 돌려 외쳤다.“그 약 어디 있
족장이 내려갈 리가 없었다. 속으로 방금 말한 무녀를 저주하며 ‘멍청한 것’이라고 이를 갈면서 말이다.그녀는 겉으로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내가 너희 말을 듣고 내려가야 한단 말이냐? 단순한 요녀의 망언 때문에 이 족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정신이 나갔구나!”그 말을 들은 무녀는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오랜 세월 동안 족장의 권위에 눌려 살아왔던 터라 그녀의 분노에 잔뜩 겁을 먹고 그 자리에서 움츠러들었다.다른 무녀들도 마찬가지였다.제멋대로 족장을 끌어내리려 한 그녀가 어리석다는 듯 모두 속으로 비웃었지만 정작 그 누구도 감히 족장을 의심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그러나 오직 한 사람,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이 흔들렸다.다른 무녀들은 족장을 가까이서 본 적도 없었고 그 모습조차 희미하게만 기억할 뿐이었지만 그녀는 달랐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유일하게 족장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가끔씩 족장의 목에서 기괴한 모습을 보곤 했다.그곳의 살갗은 바싹 마른 가죽처럼 거칠었고 얇은 막처럼 뼈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심지어 피부가 늘어져 주름이 겹겹이 잡혀 있었는데 마치 벗겨지기 직전의 뱀 허물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가 평생 믿어온 것은 ‘족장은 초월적인 존재’라는 신념이었고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녀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족장은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여유가 없었는지라 서늘한 눈빛으로 소원을 노려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요망한 년, 네가 지금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는 걸 아느냐?”그녀는 소원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결코 그녀를 놓아줄 수 없다고 확신했다.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곧 그녀는 손에 쥔 횃불을 가볍게 흔들었다.그러자 불꽃이 갑자기 치솟으며 거대한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했다.순간 족장은 바닥에 엎드리며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성령님께서 노하셨다! 성령님께서 노하셨다! 용서
“말도 안 돼!”무녀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란을 피웠다.“맞아, 족장님께서 자비로워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신 것뿐이야!”그 말을 들은 족장은 이를 기회 삼아 덧붙였다.“그래, 나는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를 놓친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그러자 소원이 도전적으로 소리쳤다.“굳이 그럴 필요 없어. 지금 당장 나를 끔찍하게 죽여봐. 그쪽들 신도들이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말이야.”“이...!”족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에 띄게 화가 난 모습이었다.소원은 콧방귀를 뀌었다.“이는 무슨. 그럼 어떻게 할래? 지금 당장 나를 처형하든가 아니면 저 제단 위의 사람들을 풀어주든가. 이건 명백한 학살이야! 깊은 산속에 숨어 있다고 그쪽 만행이 가려질 것 같아? 이제 그쪽 멋대로 폭정을 휘두를 수 있는 시대는 끝났어!”무녀들은 자신들이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었기에 자신들이 나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그들에게 있어 정화의식은 곧 선행이었고 제물 역시 축복받은 존재였다.족장은 소원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라! 감히 우리 무당가를 선동하려 들다니, 네 따위가 함부로 조종할 상대가 아니다!”그때, 인질로 잡혀 있던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족장님! 이 여자가 족장님의 권위를 도발하고 있습니다. 어서 이 여자를 처단해 주세요!”소원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가장 심하게 세뇌된 인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조금 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다.“아가씨... 아니, 동생이라고 불러야겠네. 넌 사실 나보다 나이가 어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누군가가 네게 너는 여든 살이다라고 반복해서 주입했지. 그러다 보니 네 스스로도 그렇게 믿게 된 거야. 하지만 네 기억 속에 여든 년 동안 살아온 흔적이 있어?”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 사실 그녀는 과
네 명의 여자가 서현재를 붙잡아 제단으로 끌고 갔다.그리고 연꽃 모양의 제단 한가운데에 그를 눕힌 뒤, 팔다리를 네 개의 모서리에 단단히 묶어 대자 형태로 만들었다. 그의 얼굴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족장은 거룩한 표정을 지으며 장엄하게 선언했다.“오늘 우리 무당가의 모든 구성원이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성령께서 악령에게 오염된 이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과정을 함께 목도할 것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의 심장을 깨끗이 정화할 수 있으며 우리 성령께서는 백성을 위해 자신의 정수를 아낌없이 사용하신다. 그것은 오직 사방의 평안을 위함이다! 오늘의 이 의식을 통해 세상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기원한다!”제단 아래에서 무녀들이 일제히 외쳤다.“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 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 세상에 평화를! 성령님 영원하소서!”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파도처럼 몰아쳤다.무녀들은 완전히 족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듯 마치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하나같이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이 광경을 본 소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이 사람들, 진짜 정신이 나갔군. 허무맹랑한 불사의 신앙 때문에 이렇게까지 맹목적으로 족장을 믿다니... 바보 같은 광신도들이야!’그때 족장이 손에 횃불을 들고 성스러운 제단으로 다가갔다.곧 불을 붙이고 그것을 연꽃 제단에 던지려는 찰나, 순식간에 움직인 소원이 군중의 혼란을 틈타 빠르게 뒤로 접근했다.그리곤 단검을 빼 들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목에 겨누고 외쳤다.“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광기에 휩싸여 있던 무녀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넋을 놓고 얼어붙었다.모두가 숨을 죽이고 소원이 인질로 잡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바라보았다.족장 역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소원을 본 순간,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도망쳐놓고 다시 스스로 걸어 들어오다니... 손 안 대고 다시 잡을 수 있게 됐군.’족장은 조소하며 말했다.“우리 성녀를 감히 협박해? 네가
족장의 얼굴이 급격히 변했다.“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서현재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내가 헛소리를 하는지 아닌지 그쪽이 제일 잘 알 텐데? 거짓말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도 믿게 된 건가? 하하...”“어린놈이 뭘 안다고! 나를 속이려 하다니 어림도 없다!”족장이 날카롭게 쏘아붙였고 서현재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속이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제일 잘 알겠지.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여든 살이라고 했었지? 그 여자는 그쪽이 내세우는 살아 있는 광고판이야. 여든이 되어도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많은 무녀들이 그쪽의 말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겠지. 그해 가장 적합한 족장을 선출했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올랐다고.”“원래 그런 일이었는데 뭐가 맞고 틀리다는 거야.”“사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올해 겨우 스물두 살이잖아. 당연히 아름다울 수밖에 없지.”서현재는 단번에 그녀의 비밀을 폭로해버렸다.“그쪽은 그 여자가 어릴 때부터 최면을 걸어서 스스로 일흔을 넘겼다고 믿게 만들었지. 이후로도 계속 나이를 더해 가도록 세뇌했고 여자는 최면에 걸린 채 그 사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어. 하지만 언젠가 여자가 실제로 나이를 먹고 얼굴에 변화가 생기면 몰래 제거한 후, 성공에 들어가 성령이 되었다고 떠벌릴 계획이었겠지.”“꽤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내는구나.”순간적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던 족장은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비웃으며 말했다.“네 말대로라면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그걸 믿을 것 같아? 자기 나이를 너보다는 더 잘 알지 않겠어?”족장은 서현재가 떠벌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오랜 세월 세뇌된 결과,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믿든 말든 내 상관 아니야. 병원에 데려가서 골밀도 검
다행히 어둠이 짙게 깔린 데다 넓은 망토가 몸을 감싸고 있어 소원은 쉽게 들키지 않았다.곧 그녀 차례가 되었다.소원은 앞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숙인 채 불길을 향해 걸어갔다.수많은 무녀들이 불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원을 이루고 있었는데 족장이 한 마디 외치면 아래의 무녀들이 일제히 따라 외쳤다.소원도 입술만 달싹이며 따라 하는 척했다.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그리고 틈을 타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단상 위에는 족장이 열렬하게 연설을 이어가고 있었다.그 옆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제단 위, 거기에는 십자가 형태로 묶인 채 축 늘어진 한 남자가 있었다.그의 머리는 아래로 떨궈져 있었고 생명의 징후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다.소원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걸어야 한다는 것도 따라 외쳐야 한다는 것도 잊고 멍하니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왜냐하면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현재였으니 말이다.‘말도 안 돼... 어째서 현재가 제물이 된 거지?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아무나 제물이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게다가 현재는 남자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현재가 제물로 선택된 거지?’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그때, 묶여 있던 서현재가 힘겹게 눈을 떴다.그의 시선이 아래를 훑다가 이상하게 가만히 서 있는 소원을 발견했다.수백 명의 무녀들 속에서 그녀는 너무도 눈에 띄었다.그 순간 소원은 뒤쪽에 있던 무녀와 부딪쳤다.“왜 멈춰 있어?”불만스러운 듯 고개를 든 무녀는 앞에 서 있는 인물이 낯선 얼굴이라는 걸 깨달았다.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뭔가 말하려던 찰나...쾅!제단 위에서 서현재가 거세게 몸부림치자 십자가를 결박하고 있던 구조물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엄청난 굉음에 무녀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멍하니 제단을 바라보았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즉시 소리쳤다.“다들 조용히 해! 의식을 계속 진행하라!”족장은 비록 내심 화가 났지만 당황하
어둠은 이미 짙게 깔려 있었다.소원은 하늘이 완전히 검게 물들기를 기다려 그 틈을 타 침입할 계획이었다.그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먼저 할 일이 좀 있어서요.”“네.”소원은 노인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몰랐다.하지만 그가 무녀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무엇을 하든 깊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노인은 손에 쥔 도구를 들어 올리며 다시 한번 말했다.“그쪽이 구하려는 사람을 찾든 못 찾든 해가 뜨기 전엔 반드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알겠죠?”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던 소원은 당황한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왜요?”그러자 노인이 말했다.“들어올 때 산속 계곡에 붉은 열매가 잔뜩 열린 걸 봤을 거예요. 그게 뭔 뜻인지 알아요? 오늘 밤, 무녀들이 제사를 올린다는 거예요. 아침이면 의식이 끝나고 무녀들과 사룡족들이 대거 흩어질 거예요. 수가 많기 때문에 그때 이 안에 남아 있으면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거예요.”소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제사라니...’갑자기 한 기억이 떠올랐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자신을 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일 말이다.‘지금 난 도망쳤는데 그럼 이번 제물은 누굴까?’노인은 소원이 생각에 잠긴 걸 보자 다시 한번 강조했다.“절대 잊지 마요. 해가 뜨기 전에 반드시 떠나야 해요. 알겠죠?”소원은 노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그제야 노인은 안심한 듯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깔린 뒤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결국 소원은 혼자 움직이기로 하고 지난번 탈출했던 경로를 따라 다시 의식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그런데 묘하게도 가슴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이상했다.어딘가 석연치 않았다.제사장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자 이미 수백 명의 무녀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그들은 모두 거대한 붉은 테두리가 둘러진 검은 망토를 입고 있었다.두꺼운 모자가 얼굴을 완전히 덮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그들은 일제히 땅에 무릎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