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해가 될 건 없어. 많이 아프면 언제든 나한테 전화해.”이준혁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 결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을 이어갔다.“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 세희 넌 일찍 쉬어.”이준혁이 떠나고 병실에는 임씨 아주머니와 임세희만 남았다.“아줌마, 들었어요? 조금 전에 준혁 오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임세희가 침대에 축 늘어진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서로 기분이 안 좋아지는 거면 될수록 만나지 말라고? 저 뜻은 그녀에게 윤혜인을 그만 찾아가라는 거잖아!윤혜인이 벌써 이준혁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된 건가? 그녀를 뛰어넘을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건가?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세희는 얼굴까지 일그러지고 있었고 임씨 아주머니가 얼른 임세희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위로했다.“아가씨, 상심하지 마세요. 준혁 도련님이 결혼에 대해 부정하지 않은 거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꾹 참으셔야 합니다.”“제가 더 어떻게 참아요! 그 나쁜 년은 임신까지 했단 말이에요!”얼굴이 퍼렇게 질린 임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고 그 말에 임씨 아주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확실해요?”“그 여자가 임신한 게 확실해요. 아줌마, 나 이제 어떡해요?”임세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묻자 임씨 아주머니가 사악하게 웃었다.“그럼 그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사라지게 만들면 되죠.”“근데 그러다가 준혁 오빠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요. 준혁 오빠가 예전만큼 나를 믿지 않아요.”“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손을 쓰는 건 아주 바보 같은 방법이에요. 다른 사람 손을 빌려서 일 처리할 줄도 알아야죠. 그리고 아가씨는 깔끔하게 빠지는 겁니다.”임씨 아주머니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임세희 목에 남겨진 키스마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임세희가 울고불고하던 그때, 동작이 너무 커서 목에 있던 빨간 흔적이 살짝 드러난 것이다.“아가씨
두 사람은 이내 병원에 도착했고 입구에 들어설 때 앞에서 걷고 있던 이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순간, 고개를 든 윤혜인은 핸드폰에 찍힌 ‘설’자에 마음이 씁쓸했다가 재빨리 시선을 거둔 채 이준혁을 추월하여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어차피 이준혁은 임세희의 전화를 받을 것이고 두 사람의 통화는 늘 그렇게 길어질 것이다.하지만 다음 순간, 핸드폰 울림소리가 멈췄고 이준혁이 빠른 걸음으로 윤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물었다.“왜 그렇게 혼자 빨리 걸어?”순간 멈칫하던 윤혜인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이준혁의 손도 발견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이었다.지금 이준혁이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은 건가? 그럴 리가! 그가 그렇게 신경 쓰고 애지중지 여기는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데?하지만 이준혁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고 이번에도 임세희였다. 그러나 이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기까지 했다.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깜짜 놀란 윤혜인이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자 이준혁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어색한 듯 얼굴을 살짝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이준혁은 고개를 돌린 윤혜인을 보며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조금 뒤, 두 사람은 한 진료실 앞에 섰고 윤혜인은 문 앞에 붙어 있는 ‘특급 VIP 진료실’이라는 몇 글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보통 이런 실밥을 푸는 간단한 처치는 간호사가 하는 거 아닌가?이때, 윤혜인의 귀에 익숙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앉으세요.”고개를 들어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눈앞에 서있는 이 남자는 다름아닌 김성훈이었다.“얼른 앉아요.”멍하니 서있는 윤혜인을 보며 김성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재촉했지만 윤혜인은 오늘따라
장난인 걸 알고 있는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오므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절하지 않았으니 받아들인 걸로 알고 있을게요.”김성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곁에서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준혁을 가볍게 무시했고 꽤 큰 장난을 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 그는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세요, 혜인 씨.”윤혜인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도무지 혼자 견딜 수 없는 공포였고 이준혁도 이를 눈치챘다.참다못한 김성훈이 곁에 서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던 이준혁에게 말을 걸었다.“저기요, 보호자분, 와서 좀 잡아줘야 할 거 같은데요.”그 순간, 윤혜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윤혜인 곁에 서있었고 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김성훈이 본격적으로 주사 바늘을 손에 들자 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은 눈꺼풀마저 덜덜 떨렸다.“못 보겠으면 보지 마.”갑자기 입을 연 이준혁이 윤혜인 곁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윤혜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꾹 눌렀다.윤혜인은 그를 단호하게 밀쳐내고 싶지만 지금은 주사 바늘이 너무 무서웠기에 잠시 고민했고 그 순간, 손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혼자 할 수 있다며?”머리위로 이준혁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고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혜인이 다급하게 손을 거두려던 그때, 이준혁이 그녀의 얼굴을 품에 더욱 꽉 껴안으며 말했다.“꽉 안고 있어.”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은 덕분에 빨개져도 그에게 들킬 일은 없었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윤혜인은 그렇게 이준혁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두근두근… 2년 동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윤혜인이 약을 받으며 인사를 했고 김성훈이 실눈을 살짝 뜬 채 그녀를 괜히 놀렸다.“에이, 뭘 아직도 김 대표라고 불러요, 자, 이제 성훈 오빠라고 불러줘요.”“그만해!”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진료실을 나섰고 김성훈이 뒤에서 끝까지 언성을 높이며 장난을 쳤다.“혜인 씨, 우리 약속을 잊지 말아요!”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병원을 나섰고 윤혜인은 하마터면 그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뻔했다.병원을 나서자 이준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저놈은 신경 쓰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혁이 말을 보탰다.“저놈이 장난치고 있는 거야.”“알아요.”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김성훈이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윤혜인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이준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담담하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 내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준혁이 차문을 열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오늘 나의 임무는 너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왠지 의심스러웠다.이준혁이 문현미의 말을 저렇게까지 잘 듣는다고? 그럼 이혼하지 말라는 말은 왜 안 듣는 거지?“그럼 저를 준혁 씨 본가에 데려다주세요.”윤혜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본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요? 지금 본가로 가서 준혁 씨 어머니께 잘 말씀드리면 오후에 이혼 수속 밟을 수 있어요.”윤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그래.”이준혁의 대답에 윤혜인이 재빨리 차에 탔고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준혁은 셔츠 팔을 대충 거둔 채 가늘고 긴 손가락을
“좋은 소식 아닌가요?”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임세희의 혀 짧은 소리가 역겨워서 끼어든 것이다. 이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다 맑아진 것 같았다.이와 반대로 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혜인은 그가 점점 그녀를 싫어하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아팠다.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제 이 모든 건 곧 끝날 것이니.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를 하는 법이니 윤혜인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내 이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그들은 일부러 할아버지가 점심에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을 골라서 온 것이다.윤혜인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문현미는 한참 전부터 집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네. 네놈이 우리 혜인이를 잘 돌보지 못한 거 아니야?”문현미가 윤혜인의 조그마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준혁에게 따져 묻자 이준혁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어머님, 제가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윤혜인이 얼른 나서서 중재했고 문현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왠지 예상이 되는 듯했다.“그래.”한숨을 푹 내쉬던 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베란다로 갔고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문현미가 윤혜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야, 이제 편하게 말해봐.”“어머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결혼 생활 2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님을 제대로 모신 적이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아니야, 그건 이 엄마가 잘못했어. 2년 동안 네 시아버지와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에게 소홀했던 거 같아.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네 곁에서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어여쁜 윤혜인의 눈망울이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어머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
이때, 이태수가 갑자기 문현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더니 언성을 높였다.“다들 날 곧 죽을 늙은이 취급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할아버지, 아니에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지만 화가 잔뜩 난 이태수가 호통을 쳤다.“너희들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 준혁이 그놈에게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이내, 이준혁이 이태수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자마자 이태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준혁이 네가 혜인이와 이혼하는 거야?”할아버지의 질문에 이준혁은 입술을 오므린 채 묵인했고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이태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사실이라는 거네?”아무 말도 없던 이준혁이 할아버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고 이 돌발 행동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특히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며 이준혁이 임세희를 위해 무릎까지 꿇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모든 걸 내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아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이준혁이 무릎까지 꿇은 모습에 이태수는 화가 더욱 치밀었으며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든 채, 이준혁을 가리켰다.“너! 너…!”쿵!그 순간, 지팡이가 이태수의 손에서 흘러내렸고 이태수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치가 빠른 이준혁이 재빨리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차를 대기시키라고 소리를 질렀다.“할아버지!”“아버지!”윤혜인과 문현미가 이태수에게 달려갔고 순식간에 저택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이준혁은 빠르게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고 윤혜인과 문현미는 다른 차를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과 문현미는 병실로 달려갔다. 평소에 카리스마 넘치던 문현미도 넋이 나간 채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있기 힘들었고 윤혜인도 안절부절못했다.정말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며 이씨 가문의 가장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겨우 차분해진 이태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고 이준혁이 대답했다.“아니에요, 할아버지, 저와 혜인이는 조금 다퉜을 뿐이에요.”하지만 이준혁이 아무리 얘기해도 이태수는 전혀 믿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윤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저놈 말이 사실이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윤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다음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할아버지가 물으시잖아.”그 모습에 이태수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버럭 화를 냈다.“감히 혜인이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아가야, 이리로 와,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봐. 정말 저놈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다퉜던 거야?”이태수는 겉으로 이준혁을 원망하는 듯했지만 기대에 찬 눈빛만은 숨길 수가 없었고 입술을 살짝 깨물던 윤혜인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할아버지.”“그렇다면 너무 다행이야! 이 할아버지가 너희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했어!”이태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이태수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아가야, 울지 마! 할아버지는 아직 건강하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거의 90세야, 하늘이 데려가고 싶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한이 너희 두 사람이 낳은 아이를 못 보고 죽게 되는 거야.”“할아버지, 그런 말 마세요!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장수하실 거예요!”윤혜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그래, 이 할아버지가 우리 혜인이 아이를 낳는 것까지 보고 죽어야지. 우리 증손녀도 혜인이처럼 예쁘고 착할 거야!”이때,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가 이태수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타일렀고 윤혜인이 얼른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혔다.이태수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이준혁에게 경고를 날렸다.“준혁이 네놈! 내가
“지금은 이혼 못 해, 할아버지 때문에…”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낮게 말했다.“그럼 할아버지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나한테 연락해요. 전 언제든 시간 있으니까요.”눈물을 닦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돌아서서 떠났다.이젠 무감각해진 마음 덕분에 통증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두어 걸음 내딛었을 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준혁 오빠…”임세희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다가 이준혁 곁에 닿을 때쯤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이준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자 임세희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재검사 받으러 왔다가 오빠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올라가는 걸 봤어. 준혁 오빠, 할아버지는 괜찮으셔? 나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이때, 윤혜인이 임세희의 앞을 막더니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임세희 씨, 할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임세희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준혁 오빠, 난 단지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한 말인데 혜인 씨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적대심을 보이는 거야…”임세희가 불쌍한 척하며 울먹거렸고 윤혜인은 그런 그녀의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임세희를 만났다가 화가 나서 병이 재발하기라도 하면 매우 위험하다.윤혜인은 이준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를 설득했다.“세희야, 넌 지금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안 돼.”뭐라고?울먹거리던 임세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준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준혁 오빠는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렇게 대놓고 할아버지를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다니! 준혁 오빠 아버지를 제외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날 좀 어르고 달랠 수는 있잖아?’임세희가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