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거북할 정도로 비꼬는 이준혁의 말에 잔뜩 화가 난 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더니 똑같이 비꼬았다.“이준혁 씨, 모든 사람들이 이준혁 씨 같은 줄 알아요?”그녀는 정정당당했으며 바람 피운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내가 어떤 사람인데?”싸늘하게 굳은 이준혁의 눈빛에 날카로운 빛이 반짝거렸고 윤혜인의 팔을 덥석 잡아 자신의 품으로 당기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해봐, 너와 2년 동안 잠자리를 가진 남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데?”윤혜인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지만 이준혁이 그녀를 품속으로 더욱 꽉 잡아당겼다.“이준혁 씨, 정신 좀 차려요 제발, 생리적인 요구가 있으면 임세희 그 여자를 찾아가라고요!”윤혜인의 말에 이준혁의 안색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 손을 툭 놓은 그는 입가의 미소마저 거둔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진짜 내가 세희를 찾아가길 원하는 거야?”윤혜인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하는 거냐고? 그녀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기나 할까? 그녀는 단지 이준혁 마음속에 있었던 생각을 그보다 먼저 입 밖에 꺼냈을 뿐이다.이준혁은 윤혜인이 그토록 바라던 유일한 사랑을 전부 임세희에게 주었기에 그의 마음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담아둘 공간이 없을 것이다.이준혁은 이제 더럽혀졌고 윤혜인은 더 이상 그런 이준혁을 갖고 싶지 않았다.“네.”윤혜인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간단한 한 글자를 입 밖으로 내뱉는 일에 그녀는 온몸의 힘을 다 써버렸다.그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윤혜인은 침대에 쓰러진 채 눈물을 줄줄 흘렸다.심장은 구멍이 난 것 마냥 너무 아팠다.‘윤혜인, 저 남자는 이미 더럽혀진 남자야. 대체 왜 저런 남자 때문에 이렇게 슬퍼하는 거야?’한편, 병원에서.이준혁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 임세희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임씨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고 있었다. 이준혁을 보자마자 임세희는 얼른 임씨 아주머니에게 따듯한 차 한 잔 준비하라고 했고
“방해가 될 건 없어. 많이 아프면 언제든 나한테 전화해.”이준혁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 결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을 이어갔다.“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해. 세희 넌 일찍 쉬어.”이준혁이 떠나고 병실에는 임씨 아주머니와 임세희만 남았다.“아줌마, 들었어요? 조금 전에 준혁 오빠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임세희가 침대에 축 늘어진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서로 기분이 안 좋아지는 거면 될수록 만나지 말라고? 저 뜻은 그녀에게 윤혜인을 그만 찾아가라는 거잖아!윤혜인이 벌써 이준혁에게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 된 건가? 그녀를 뛰어넘을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건가?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세희는 얼굴까지 일그러지고 있었고 임씨 아주머니가 얼른 임세희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위로했다.“아가씨, 상심하지 마세요. 준혁 도련님이 결혼에 대해 부정하지 않은 거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꾹 참으셔야 합니다.”“제가 더 어떻게 참아요! 그 나쁜 년은 임신까지 했단 말이에요!”얼굴이 퍼렇게 질린 임세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고 그 말에 임씨 아주머니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확실해요?”“그 여자가 임신한 게 확실해요. 아줌마, 나 이제 어떡해요?”임세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묻자 임씨 아주머니가 사악하게 웃었다.“그럼 그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사라지게 만들면 되죠.”“근데 그러다가 준혁 오빠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요. 준혁 오빠가 예전만큼 나를 믿지 않아요.”“아가씨, 아가씨가 직접 손을 쓰는 건 아주 바보 같은 방법이에요. 다른 사람 손을 빌려서 일 처리할 줄도 알아야죠. 그리고 아가씨는 깔끔하게 빠지는 겁니다.”임씨 아주머니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다가 임세희 목에 남겨진 키스마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임세희가 울고불고하던 그때, 동작이 너무 커서 목에 있던 빨간 흔적이 살짝 드러난 것이다.“아가씨
두 사람은 이내 병원에 도착했고 입구에 들어설 때 앞에서 걷고 있던 이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순간, 고개를 든 윤혜인은 핸드폰에 찍힌 ‘설’자에 마음이 씁쓸했다가 재빨리 시선을 거둔 채 이준혁을 추월하여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어차피 이준혁은 임세희의 전화를 받을 것이고 두 사람의 통화는 늘 그렇게 길어질 것이다.하지만 다음 순간, 핸드폰 울림소리가 멈췄고 이준혁이 빠른 걸음으로 윤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물었다.“왜 그렇게 혼자 빨리 걸어?”순간 멈칫하던 윤혜인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이준혁의 손도 발견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이었다.지금 이준혁이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은 건가? 그럴 리가! 그가 그렇게 신경 쓰고 애지중지 여기는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데?하지만 이준혁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고 이번에도 임세희였다. 그러나 이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기까지 했다.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깜짜 놀란 윤혜인이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자 이준혁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어색한 듯 얼굴을 살짝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이준혁은 고개를 돌린 윤혜인을 보며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조금 뒤, 두 사람은 한 진료실 앞에 섰고 윤혜인은 문 앞에 붙어 있는 ‘특급 VIP 진료실’이라는 몇 글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보통 이런 실밥을 푸는 간단한 처치는 간호사가 하는 거 아닌가?이때, 윤혜인의 귀에 익숙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앉으세요.”고개를 들어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눈앞에 서있는 이 남자는 다름아닌 김성훈이었다.“얼른 앉아요.”멍하니 서있는 윤혜인을 보며 김성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재촉했지만 윤혜인은 오늘따라
장난인 걸 알고 있는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오므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절하지 않았으니 받아들인 걸로 알고 있을게요.”김성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곁에서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준혁을 가볍게 무시했고 꽤 큰 장난을 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 그는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세요, 혜인 씨.”윤혜인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도무지 혼자 견딜 수 없는 공포였고 이준혁도 이를 눈치챘다.참다못한 김성훈이 곁에 서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던 이준혁에게 말을 걸었다.“저기요, 보호자분, 와서 좀 잡아줘야 할 거 같은데요.”그 순간, 윤혜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윤혜인 곁에 서있었고 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김성훈이 본격적으로 주사 바늘을 손에 들자 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은 눈꺼풀마저 덜덜 떨렸다.“못 보겠으면 보지 마.”갑자기 입을 연 이준혁이 윤혜인 곁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윤혜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꾹 눌렀다.윤혜인은 그를 단호하게 밀쳐내고 싶지만 지금은 주사 바늘이 너무 무서웠기에 잠시 고민했고 그 순간, 손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혼자 할 수 있다며?”머리위로 이준혁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고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혜인이 다급하게 손을 거두려던 그때, 이준혁이 그녀의 얼굴을 품에 더욱 꽉 껴안으며 말했다.“꽉 안고 있어.”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은 덕분에 빨개져도 그에게 들킬 일은 없었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윤혜인은 그렇게 이준혁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두근두근… 2년 동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윤혜인이 약을 받으며 인사를 했고 김성훈이 실눈을 살짝 뜬 채 그녀를 괜히 놀렸다.“에이, 뭘 아직도 김 대표라고 불러요, 자, 이제 성훈 오빠라고 불러줘요.”“그만해!”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진료실을 나섰고 김성훈이 뒤에서 끝까지 언성을 높이며 장난을 쳤다.“혜인 씨, 우리 약속을 잊지 말아요!”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병원을 나섰고 윤혜인은 하마터면 그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뻔했다.병원을 나서자 이준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저놈은 신경 쓰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혁이 말을 보탰다.“저놈이 장난치고 있는 거야.”“알아요.”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김성훈이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윤혜인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이준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담담하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 내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준혁이 차문을 열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오늘 나의 임무는 너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왠지 의심스러웠다.이준혁이 문현미의 말을 저렇게까지 잘 듣는다고? 그럼 이혼하지 말라는 말은 왜 안 듣는 거지?“그럼 저를 준혁 씨 본가에 데려다주세요.”윤혜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본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요? 지금 본가로 가서 준혁 씨 어머니께 잘 말씀드리면 오후에 이혼 수속 밟을 수 있어요.”윤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그래.”이준혁의 대답에 윤혜인이 재빨리 차에 탔고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준혁은 셔츠 팔을 대충 거둔 채 가늘고 긴 손가락을
“좋은 소식 아닌가요?”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임세희의 혀 짧은 소리가 역겨워서 끼어든 것이다. 이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다 맑아진 것 같았다.이와 반대로 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혜인은 그가 점점 그녀를 싫어하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아팠다.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제 이 모든 건 곧 끝날 것이니.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를 하는 법이니 윤혜인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내 이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그들은 일부러 할아버지가 점심에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을 골라서 온 것이다.윤혜인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문현미는 한참 전부터 집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네. 네놈이 우리 혜인이를 잘 돌보지 못한 거 아니야?”문현미가 윤혜인의 조그마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준혁에게 따져 묻자 이준혁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어머님, 제가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윤혜인이 얼른 나서서 중재했고 문현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왠지 예상이 되는 듯했다.“그래.”한숨을 푹 내쉬던 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베란다로 갔고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문현미가 윤혜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야, 이제 편하게 말해봐.”“어머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결혼 생활 2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님을 제대로 모신 적이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아니야, 그건 이 엄마가 잘못했어. 2년 동안 네 시아버지와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에게 소홀했던 거 같아.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네 곁에서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어여쁜 윤혜인의 눈망울이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어머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
이때, 이태수가 갑자기 문현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더니 언성을 높였다.“다들 날 곧 죽을 늙은이 취급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할아버지, 아니에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지만 화가 잔뜩 난 이태수가 호통을 쳤다.“너희들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 준혁이 그놈에게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이내, 이준혁이 이태수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자마자 이태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준혁이 네가 혜인이와 이혼하는 거야?”할아버지의 질문에 이준혁은 입술을 오므린 채 묵인했고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이태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사실이라는 거네?”아무 말도 없던 이준혁이 할아버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고 이 돌발 행동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특히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며 이준혁이 임세희를 위해 무릎까지 꿇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모든 걸 내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아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이준혁이 무릎까지 꿇은 모습에 이태수는 화가 더욱 치밀었으며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든 채, 이준혁을 가리켰다.“너! 너…!”쿵!그 순간, 지팡이가 이태수의 손에서 흘러내렸고 이태수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치가 빠른 이준혁이 재빨리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차를 대기시키라고 소리를 질렀다.“할아버지!”“아버지!”윤혜인과 문현미가 이태수에게 달려갔고 순식간에 저택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이준혁은 빠르게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고 윤혜인과 문현미는 다른 차를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과 문현미는 병실로 달려갔다. 평소에 카리스마 넘치던 문현미도 넋이 나간 채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있기 힘들었고 윤혜인도 안절부절못했다.정말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며 이씨 가문의 가장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겨우 차분해진 이태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고 이준혁이 대답했다.“아니에요, 할아버지, 저와 혜인이는 조금 다퉜을 뿐이에요.”하지만 이준혁이 아무리 얘기해도 이태수는 전혀 믿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윤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저놈 말이 사실이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윤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다음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할아버지가 물으시잖아.”그 모습에 이태수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버럭 화를 냈다.“감히 혜인이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아가야, 이리로 와,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봐. 정말 저놈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다퉜던 거야?”이태수는 겉으로 이준혁을 원망하는 듯했지만 기대에 찬 눈빛만은 숨길 수가 없었고 입술을 살짝 깨물던 윤혜인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할아버지.”“그렇다면 너무 다행이야! 이 할아버지가 너희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했어!”이태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이태수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아가야, 울지 마! 할아버지는 아직 건강하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거의 90세야, 하늘이 데려가고 싶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한이 너희 두 사람이 낳은 아이를 못 보고 죽게 되는 거야.”“할아버지, 그런 말 마세요!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장수하실 거예요!”윤혜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그래, 이 할아버지가 우리 혜인이 아이를 낳는 것까지 보고 죽어야지. 우리 증손녀도 혜인이처럼 예쁘고 착할 거야!”이때,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가 이태수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타일렀고 윤혜인이 얼른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혔다.이태수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이준혁에게 경고를 날렸다.“준혁이 네놈! 내가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소원은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이성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든 순간 조사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태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다.서진태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만 해도 서진태를 경계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그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씨?”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찰싹.소원은 여자가 날리는 귀싸대기를 제대로 맞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귀싸대기를 더 날리려는데 소원이 얼른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하게 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했다.“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얼른 잡고 때려요.”데스크 직원이 넋을 잃었다.비서실에 전화를 넣을 때 미래의 사모님도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서가 사람을 일단 남겨두라고 하자 데스크 직원은 소원이 말한 것처럼 서현재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거나 떨어지지 않고 질척거리는 외간 여자 같았다.소원은 그제야 내려온 사람이 육연주임을 알아봤다.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려는데 육연주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렸다.“일을 왜 이따위로 해요? 회사에 누굴 들이고 누굴 들이지 말아야 할지 몰라요?”데스크 직원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그저 데스크 직원을 이용해 기선을 제압하여 미래의 서한 그룹 사모님이 누군지 알려주려 했다. 선제공격이 제일 타격감이 큰 편이다. 육연주는 오늘 모든 사람에게 서현재의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감히 서현재를 넘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소원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그날 분명히 경고했죠. 현재 씨 유혹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회사까지 찾아와요? 정말 너무 뻔뻔하네요.”육연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소원은 볼이
소원은 외교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전화했다. 외국인이라 인맥이 매우 넓었기에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서씨 가문이 밖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지, 그리고 맏며느리가 임신했는지만 확인하면 아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가 기억을 잃은 게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해치지 않고 다리까지 고쳐줬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서씨 가문은 제일 큰 악마 소굴이었기에 빨리 서씨 가문에서 도망쳐야 했다.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이나 기다렸지만 조이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그들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거라고 생각하려는데 조이가 소식을 보내왔다.“소원, 전에 말했던 거 조사해 봤는데 확실히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더라고요. 서씨 가문 맏며느리도 회사 관리에 참여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대요.”모든 게 들어맞았다. 소원은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서현재가 자신을 벗어나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이용하려 한다면 서현재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소원은 영숙에게 반차를 올리고 차를 잡아 서현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서현재의 번호가 없어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가 서한 그룹에 도착하자 소원은 바로 데스크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서현재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안녕하세요. 예약은 하셨나요?”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데스크 직원이 말했다.“저 서 대표님과 친구예요. 전화해서 소원이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잠깐 내려오라고 하면 돼요.”“죄송합니다. 예약한 손님만 접대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요.”데스크에서 바로 거절했다. 작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서현재를
“우리 아빠가 말해준 거야. 외국에서 장사할 때 서씨 가문과 접점이 있었는데 우연히 서씨 가문 사람을 만나서 물어본 거래. 그래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는 마. 나도 어르신에게 밉보이긴 싫거든. 무서운 사람 같아.”“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나까지만 아는 걸로 하고 절대 외부로 얘기하지 않을게.”소원은 서씨 가문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 역시 소원의 직감이 맞았다. 서진태는 서현재를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서현재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저번에 직접 사람을 불러 서현재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만 봐도 서진태가 서씨 가문의 일원인 서현재를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만약 위층에서 토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진태가 그동안 행동과 어느 정도 맞았지만 희생양이 된 서현재가 너무 위험했다.소원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얼른 벽을 붙잡고 서는데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났다.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거기 누구예요?”소원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위에서 보일지도 모른다. 토론자 중 한 명이 아래로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아래 내려가서 봐봐.”소원은 정말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 납작 없이 잡힐 것이다. 도망간다고 해도 복도 CCTV만 조사하면 누가 엿들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야옹.그때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온몸이 눈덩이처럼 하얀 고양이가 기어 나오더니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연신 야옹거리며 울부짖었다.위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을 불러세웠다.“됐어. 고양이가 낸 기척이었어.”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내가 그랬잖아. 이 시간에 여기로 걷는 사람이 없다고.
영숙은 차갑게 말했다.“그 셋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참을 수 있으면 참아. 아니면 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내가 대신 해결해줄 일은 없을 거야!”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는지라 영숙의 말 속에 담긴 선의를 금세 알아챘다.다음에 또 그 셋을 마주친다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서로 계산만 가득한 곳에서 같은 여성이 보여주는 호의는 그녀에게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소원은 영숙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언니. 절대 폐 끼치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영숙은 잠시 멍해 하더니 어딘가 어색한 듯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면서 넌지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너 도와주는 거 아니라니까.”소원은 영숙이 떠난 후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숙은 선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왜 자신을 돕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심과 가식은 구분할 수 있었다.그렇게 씻고 나서 소원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걸어가던 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서현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말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 기억 상실이 현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서현재는 분명 싸울 것이었다.서씨 가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통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뒤편 문 근처에 도착했다.그 순간, 2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속에 ‘서씨 가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소원은 멈춰 서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서씨 가문에서 요즘 그 사생아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더라.”“사생아라니? 그 자식은 사생아보다도 더 낮은 존재야. 사생아조차도 못 되는 잡종이지.”“야,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서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데... 네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