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이내 병원에 도착했고 입구에 들어설 때 앞에서 걷고 있던 이준혁의 핸드폰이 울렸다.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순간, 고개를 든 윤혜인은 핸드폰에 찍힌 ‘설’자에 마음이 씁쓸했다가 재빨리 시선을 거둔 채 이준혁을 추월하여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어차피 이준혁은 임세희의 전화를 받을 것이고 두 사람의 통화는 늘 그렇게 길어질 것이다.하지만 다음 순간, 핸드폰 울림소리가 멈췄고 이준혁이 빠른 걸음으로 윤혜인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물었다.“왜 그렇게 혼자 빨리 걸어?”순간 멈칫하던 윤혜인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이준혁의 손도 발견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이었다.지금 이준혁이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은 건가? 그럴 리가! 그가 그렇게 신경 쓰고 애지중지 여기는 임세희에게서 걸려온 전화인데?하지만 이준혁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고 이번에도 임세희였다. 그러나 이준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끊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기까지 했다.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깜짜 놀란 윤혜인이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자 이준혁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어색한 듯 얼굴을 살짝 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자.’이준혁은 고개를 돌린 윤혜인을 보며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조금 뒤, 두 사람은 한 진료실 앞에 섰고 윤혜인은 문 앞에 붙어 있는 ‘특급 VIP 진료실’이라는 몇 글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보통 이런 실밥을 푸는 간단한 처치는 간호사가 하는 거 아닌가?이때, 윤혜인의 귀에 익숙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앉으세요.”고개를 들어보니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눈앞에 서있는 이 남자는 다름아닌 김성훈이었다.“얼른 앉아요.”멍하니 서있는 윤혜인을 보며 김성훈이 다정하게 웃으며 재촉했지만 윤혜인은 오늘따라
장난인 걸 알고 있는 윤혜인은 입술을 살짝 오므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절하지 않았으니 받아들인 걸로 알고 있을게요.”김성훈은 더욱 환하게 웃으며 곁에서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이준혁을 가볍게 무시했고 꽤 큰 장난을 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진 그는 더욱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움직이지 마세요, 혜인 씨.”윤혜인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손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도무지 혼자 견딜 수 없는 공포였고 이준혁도 이를 눈치챘다.참다못한 김성훈이 곁에 서서 안쓰러운 표정으로 윤혜인을 쳐다보고 있던 이준혁에게 말을 걸었다.“저기요, 보호자분, 와서 좀 잡아줘야 할 거 같은데요.”그 순간, 윤혜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이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윤혜인 곁에 서있었고 김성훈은 그런 이준혁을 보며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김성훈이 본격적으로 주사 바늘을 손에 들자 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은 눈꺼풀마저 덜덜 떨렸다.“못 보겠으면 보지 마.”갑자기 입을 연 이준혁이 윤혜인 곁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윤혜인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꾹 눌렀다.윤혜인은 그를 단호하게 밀쳐내고 싶지만 지금은 주사 바늘이 너무 무서웠기에 잠시 고민했고 그 순간, 손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자 화들짝 놀란 윤혜인이 이준혁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혼자 할 수 있다며?”머리위로 이준혁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고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혜인이 다급하게 손을 거두려던 그때, 이준혁이 그녀의 얼굴을 품에 더욱 꽉 껴안으며 말했다.“꽉 안고 있어.”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은 덕분에 빨개져도 그에게 들킬 일은 없었기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윤혜인은 그렇게 이준혁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두근두근… 2년 동
“감사합니다, 김 대표님.”윤혜인이 약을 받으며 인사를 했고 김성훈이 실눈을 살짝 뜬 채 그녀를 괜히 놀렸다.“에이, 뭘 아직도 김 대표라고 불러요, 자, 이제 성훈 오빠라고 불러줘요.”“그만해!”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진료실을 나섰고 김성훈이 뒤에서 끝까지 언성을 높이며 장난을 쳤다.“혜인 씨, 우리 약속을 잊지 말아요!”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병원을 나섰고 윤혜인은 하마터면 그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뻔했다.병원을 나서자 이준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저놈은 신경 쓰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혁이 말을 보탰다.“저놈이 장난치고 있는 거야.”“알아요.”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김성훈이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윤혜인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이준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담담하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 내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준혁이 차문을 열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오늘 나의 임무는 너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왠지 의심스러웠다.이준혁이 문현미의 말을 저렇게까지 잘 듣는다고? 그럼 이혼하지 말라는 말은 왜 안 듣는 거지?“그럼 저를 준혁 씨 본가에 데려다주세요.”윤혜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본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요? 지금 본가로 가서 준혁 씨 어머니께 잘 말씀드리면 오후에 이혼 수속 밟을 수 있어요.”윤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그래.”이준혁의 대답에 윤혜인이 재빨리 차에 탔고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준혁은 셔츠 팔을 대충 거둔 채 가늘고 긴 손가락을
“좋은 소식 아닌가요?”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임세희의 혀 짧은 소리가 역겨워서 끼어든 것이다. 이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다 맑아진 것 같았다.이와 반대로 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혜인은 그가 점점 그녀를 싫어하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아팠다.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제 이 모든 건 곧 끝날 것이니.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를 하는 법이니 윤혜인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내 이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그들은 일부러 할아버지가 점심에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을 골라서 온 것이다.윤혜인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문현미는 한참 전부터 집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네. 네놈이 우리 혜인이를 잘 돌보지 못한 거 아니야?”문현미가 윤혜인의 조그마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준혁에게 따져 묻자 이준혁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어머님, 제가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윤혜인이 얼른 나서서 중재했고 문현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왠지 예상이 되는 듯했다.“그래.”한숨을 푹 내쉬던 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베란다로 갔고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문현미가 윤혜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야, 이제 편하게 말해봐.”“어머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결혼 생활 2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님을 제대로 모신 적이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아니야, 그건 이 엄마가 잘못했어. 2년 동안 네 시아버지와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에게 소홀했던 거 같아.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네 곁에서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어여쁜 윤혜인의 눈망울이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어머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
이때, 이태수가 갑자기 문현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더니 언성을 높였다.“다들 날 곧 죽을 늙은이 취급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할아버지, 아니에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지만 화가 잔뜩 난 이태수가 호통을 쳤다.“너희들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 준혁이 그놈에게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이내, 이준혁이 이태수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자마자 이태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준혁이 네가 혜인이와 이혼하는 거야?”할아버지의 질문에 이준혁은 입술을 오므린 채 묵인했고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이태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사실이라는 거네?”아무 말도 없던 이준혁이 할아버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고 이 돌발 행동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특히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며 이준혁이 임세희를 위해 무릎까지 꿇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모든 걸 내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아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이준혁이 무릎까지 꿇은 모습에 이태수는 화가 더욱 치밀었으며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든 채, 이준혁을 가리켰다.“너! 너…!”쿵!그 순간, 지팡이가 이태수의 손에서 흘러내렸고 이태수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치가 빠른 이준혁이 재빨리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차를 대기시키라고 소리를 질렀다.“할아버지!”“아버지!”윤혜인과 문현미가 이태수에게 달려갔고 순식간에 저택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이준혁은 빠르게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고 윤혜인과 문현미는 다른 차를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과 문현미는 병실로 달려갔다. 평소에 카리스마 넘치던 문현미도 넋이 나간 채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있기 힘들었고 윤혜인도 안절부절못했다.정말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며 이씨 가문의 가장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겨우 차분해진 이태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고 이준혁이 대답했다.“아니에요, 할아버지, 저와 혜인이는 조금 다퉜을 뿐이에요.”하지만 이준혁이 아무리 얘기해도 이태수는 전혀 믿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윤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저놈 말이 사실이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윤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다음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할아버지가 물으시잖아.”그 모습에 이태수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버럭 화를 냈다.“감히 혜인이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아가야, 이리로 와,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봐. 정말 저놈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다퉜던 거야?”이태수는 겉으로 이준혁을 원망하는 듯했지만 기대에 찬 눈빛만은 숨길 수가 없었고 입술을 살짝 깨물던 윤혜인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할아버지.”“그렇다면 너무 다행이야! 이 할아버지가 너희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했어!”이태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이태수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아가야, 울지 마! 할아버지는 아직 건강하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거의 90세야, 하늘이 데려가고 싶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한이 너희 두 사람이 낳은 아이를 못 보고 죽게 되는 거야.”“할아버지, 그런 말 마세요!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장수하실 거예요!”윤혜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그래, 이 할아버지가 우리 혜인이 아이를 낳는 것까지 보고 죽어야지. 우리 증손녀도 혜인이처럼 예쁘고 착할 거야!”이때,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가 이태수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타일렀고 윤혜인이 얼른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혔다.이태수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이준혁에게 경고를 날렸다.“준혁이 네놈! 내가
“지금은 이혼 못 해, 할아버지 때문에…”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낮게 말했다.“그럼 할아버지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나한테 연락해요. 전 언제든 시간 있으니까요.”눈물을 닦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돌아서서 떠났다.이젠 무감각해진 마음 덕분에 통증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두어 걸음 내딛었을 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준혁 오빠…”임세희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다가 이준혁 곁에 닿을 때쯤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이준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자 임세희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재검사 받으러 왔다가 오빠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올라가는 걸 봤어. 준혁 오빠, 할아버지는 괜찮으셔? 나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이때, 윤혜인이 임세희의 앞을 막더니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임세희 씨, 할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임세희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준혁 오빠, 난 단지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한 말인데 혜인 씨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적대심을 보이는 거야…”임세희가 불쌍한 척하며 울먹거렸고 윤혜인은 그런 그녀의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임세희를 만났다가 화가 나서 병이 재발하기라도 하면 매우 위험하다.윤혜인은 이준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를 설득했다.“세희야, 넌 지금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안 돼.”뭐라고?울먹거리던 임세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준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준혁 오빠는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렇게 대놓고 할아버지를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다니! 준혁 오빠 아버지를 제외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날 좀 어르고 달랠 수는 있잖아?’임세희가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지나가던 간호사와 청소 아주머니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임세희는 처음 당하는 수모에 얼굴에 하얗게 질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도 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정말 단순하게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보러 온 거예요… 절대 나쁜 마음을 품은 게 아니에요…”“네가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뻔뻔하게 계속 들러붙는 거야! 할아버지 보러 왔다고?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남의 가정에 끼어들어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사람이야! 넌 할아버지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할아버지 화를 돋우러 온 거잖아!”문현미는 구경하는 사람이 많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임세희에게 호통을 쳤고 곁에서 지켜보던 이준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이러지 마세요.”문현미는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공공장소에 이렇게 언성을 높이면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이 분명하다.“이제부터 날 엄마라고 부르지 마. 할아버지가 너 때문에 화가 나셔서 저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저런 사람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 넌 미친 거야!”“엄마, 세희를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엄마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준혁 오빠!”이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세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혹시라도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게 될까 봐 너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되면 전에 그녀가 했던 거짓말들이 전부 들통나는 셈이다.임세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그만해. 아주머니께서 저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주머니, 전 정말 준혁 오빠를 사랑해요. 저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고요…”임세희의 돌발 선언에 눈살을 확 찌푸린 이준혁이 해명을 하려던 그때, 임세희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주머니, 제발 저희를 허락해 주세요. 아주머니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면 전 계속 이곳에서 무릎 꿇고 있을 거예요!”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