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김 대표님.”윤혜인이 약을 받으며 인사를 했고 김성훈이 실눈을 살짝 뜬 채 그녀를 괜히 놀렸다.“에이, 뭘 아직도 김 대표라고 불러요, 자, 이제 성훈 오빠라고 불러줘요.”“그만해!”윤혜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진료실을 나섰고 김성훈이 뒤에서 끝까지 언성을 높이며 장난을 쳤다.“혜인 씨, 우리 약속을 잊지 말아요!”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병원을 나섰고 윤혜인은 하마터면 그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뻔했다.병원을 나서자 이준혁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저놈은 신경 쓰지 마.”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혁이 말을 보탰다.“저놈이 장난치고 있는 거야.”“알아요.”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김성훈이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윤혜인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이준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담담하게 물었다.“어디로 갈 거야? 내가 바래다줄게.”“아니에요, 저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이준혁이 차문을 열며 그녀를 차에 태웠다.“오늘 나의 임무는 너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는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왠지 의심스러웠다.이준혁이 문현미의 말을 저렇게까지 잘 듣는다고? 그럼 이혼하지 말라는 말은 왜 안 듣는 거지?“그럼 저를 준혁 씨 본가에 데려다주세요.”윤혜인의 말이 끝나자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본가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서로 잘 알고 있었다.“혹시 시간 있으면 같이 갈래요? 지금 본가로 가서 준혁 씨 어머니께 잘 말씀드리면 오후에 이혼 수속 밟을 수 있어요.”윤혜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이준혁은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화가 나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했다.“그래.”이준혁의 대답에 윤혜인이 재빨리 차에 탔고 매우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직접 운전대를 잡은 이준혁은 셔츠 팔을 대충 거둔 채 가늘고 긴 손가락을
“좋은 소식 아닌가요?”윤혜인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솔직히 임세희의 혀 짧은 소리가 역겨워서 끼어든 것이다. 이제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세상이 다 맑아진 것 같았다.이와 반대로 표정이 확 굳어진 이준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혜인은 그가 점점 그녀를 싫어하는 게 느껴져서 마음이 조금 아팠다.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이제 이 모든 건 곧 끝날 것이니.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를 하는 법이니 윤혜인은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내 이씨 가문 본가에 도착했다.그들은 일부러 할아버지가 점심에 잠시 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을 골라서 온 것이다.윤혜인이 올 거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문현미는 한참 전부터 집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 문현미가 윤혜인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안쓰럽고 사랑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저번에 봤을 때보다 더 말랐네. 네놈이 우리 혜인이를 잘 돌보지 못한 거 아니야?”문현미가 윤혜인의 조그마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이준혁에게 따져 묻자 이준혁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어머님, 제가 따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윤혜인이 얼른 나서서 중재했고 문현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왠지 예상이 되는 듯했다.“그래.”한숨을 푹 내쉬던 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잡고 베란다로 갔고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문현미가 윤혜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야, 이제 편하게 말해봐.”“어머님,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결혼 생활 2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님을 제대로 모신 적이 없어서 너무 죄송해요.”“아니야, 그건 이 엄마가 잘못했어. 2년 동안 네 시아버지와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에게 소홀했던 거 같아. 하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네 곁에서 너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어여쁜 윤혜인의 눈망울이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어머님, 너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
이때, 이태수가 갑자기 문현미의 손을 강하게 뿌리치더니 언성을 높였다.“다들 날 곧 죽을 늙은이 취급하는 거야?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할아버지, 아니에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윤혜인이 다급하게 변명하려 했지만 화가 잔뜩 난 이태수가 호통을 쳤다.“너희들 얘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 준혁이 그놈에게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해!”이내, 이준혁이 이태수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를 보자마자 이태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준혁이 네가 혜인이와 이혼하는 거야?”할아버지의 질문에 이준혁은 입술을 오므린 채 묵인했고 순식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 이태수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러니까 지금 이게 다 사실이라는 거네?”아무 말도 없던 이준혁이 할아버지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고 이 돌발 행동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특히 윤혜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며 이준혁이 임세희를 위해 무릎까지 꿇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모든 걸 내려놓긴 했지만 여전히 아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이준혁이 무릎까지 꿇은 모습에 이태수는 화가 더욱 치밀었으며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든 채, 이준혁을 가리켰다.“너! 너…!”쿵!그 순간, 지팡이가 이태수의 손에서 흘러내렸고 이태수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눈치가 빠른 이준혁이 재빨리 할아버지를 부축한 채 차를 대기시키라고 소리를 질렀다.“할아버지!”“아버지!”윤혜인과 문현미가 이태수에게 달려갔고 순식간에 저택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이준혁은 빠르게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고 윤혜인과 문현미는 다른 차를 타고 그의 뒤를 따랐다.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과 문현미는 병실로 달려갔다. 평소에 카리스마 넘치던 문현미도 넋이 나간 채 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있기 힘들었고 윤혜인도 안절부절못했다.정말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녀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며 이씨 가문의 가장
“나한테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겨우 차분해진 이태수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했고 이준혁이 대답했다.“아니에요, 할아버지, 저와 혜인이는 조금 다퉜을 뿐이에요.”하지만 이준혁이 아무리 얘기해도 이태수는 전혀 믿지 않았으며 그의 말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려 윤혜인에게 물었다.“혜인아, 저놈 말이 사실이야?”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윤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다음 순간, 이준혁이 그녀를 품에 와락 껴안은 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할아버지가 물으시잖아.”그 모습에 이태수가 윤혜인을 확 잡아당기더니 버럭 화를 냈다.“감히 혜인이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아가야, 이리로 와, 할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봐. 정말 저놈이 말한 것처럼 두 사람이 다퉜던 거야?”이태수는 겉으로 이준혁을 원망하는 듯했지만 기대에 찬 눈빛만은 숨길 수가 없었고 입술을 살짝 깨물던 윤혜인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할아버지.”“그렇다면 너무 다행이야! 이 할아버지가 너희 때문에 심장이 멎을 뻔했어!”이태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이태수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할아버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아가야, 울지 마! 할아버지는 아직 건강하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제 거의 90세야, 하늘이 데려가고 싶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뭐. 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한이 너희 두 사람이 낳은 아이를 못 보고 죽게 되는 거야.”“할아버지, 그런 말 마세요! 할아버지는 오래오래 장수하실 거예요!”윤혜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그래, 이 할아버지가 우리 혜인이 아이를 낳는 것까지 보고 죽어야지. 우리 증손녀도 혜인이처럼 예쁘고 착할 거야!”이때,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가 이태수에게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다고 타일렀고 윤혜인이 얼른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혔다.이태수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이준혁에게 경고를 날렸다.“준혁이 네놈! 내가
“지금은 이혼 못 해, 할아버지 때문에…”이준혁이 굳은 얼굴로 낮게 말했다.“그럼 할아버지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나한테 연락해요. 전 언제든 시간 있으니까요.”눈물을 닦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돌아서서 떠났다.이젠 무감각해진 마음 덕분에 통증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두어 걸음 내딛었을 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혜인 씨, 준혁 오빠…”임세희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다가 이준혁 곁에 닿을 때쯤 갑자기 몸이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이준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묻자 임세희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병원에 재검사 받으러 왔다가 오빠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올라가는 걸 봤어. 준혁 오빠, 할아버지는 괜찮으셔? 나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이때, 윤혜인이 임세희의 앞을 막더니 굳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임세희 씨, 할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임세희 씨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준혁 오빠, 난 단지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한 말인데 혜인 씨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적대심을 보이는 거야…”임세희가 불쌍한 척하며 울먹거렸고 윤혜인은 그런 그녀의 연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막 응급실에서 나온 할아버지가 임세희를 만났다가 화가 나서 병이 재발하기라도 하면 매우 위험하다.윤혜인은 이준혁도 그 정도 눈치는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준혁이 임세희를 설득했다.“세희야, 넌 지금 할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안 돼.”뭐라고?울먹거리던 임세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준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준혁 오빠는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저렇게 대놓고 할아버지를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다니! 준혁 오빠 아버지를 제외한 이씨 집안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는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잖아? 날 좀 어르고 달랠 수는 있잖아?’임세희가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지나가던 간호사와 청소 아주머니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임세희는 처음 당하는 수모에 얼굴에 하얗게 질린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도 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정말 단순하게 할아버지가 걱정돼서 보러 온 거예요… 절대 나쁜 마음을 품은 게 아니에요…”“네가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뻔뻔하게 계속 들러붙는 거야! 할아버지 보러 왔다고?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남의 가정에 끼어들어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사람이야! 넌 할아버지를 보러 온 게 아니라 할아버지 화를 돋우러 온 거잖아!”문현미는 구경하는 사람이 많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임세희에게 호통을 쳤고 곁에서 지켜보던 이준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이러지 마세요.”문현미는 이씨 집안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공공장소에 이렇게 언성을 높이면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이 분명하다.“이제부터 날 엄마라고 부르지 마. 할아버지가 너 때문에 화가 나셔서 저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저런 사람을 이곳까지 데리고 와! 넌 미친 거야!”“엄마, 세희를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엄마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준혁 오빠!”이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세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이준혁이 혹시라도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게 될까 봐 너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되면 전에 그녀가 했던 거짓말들이 전부 들통나는 셈이다.임세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다.“준혁 오빠, 그만해. 아주머니께서 저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아주머니, 전 정말 준혁 오빠를 사랑해요. 저희는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고요…”임세희의 돌발 선언에 눈살을 확 찌푸린 이준혁이 해명을 하려던 그때, 임세희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아주머니, 제발 저희를 허락해 주세요. 아주머니께서 동의하지 않으시면 전 계속 이곳에서 무릎 꿇고 있을 거예요!”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
임세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으며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준혁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이때, 이준혁이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세희를 병실에 데려다주고 할아버지 병실 앞을 잘 지키고 있어.”말을 마친 이준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고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그렇다고 떠나는 이준혁을 잡을 수도 없었다.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준혁의 반감을 사는 꼴이다.임세희는 이준혁의 뒷모습을 보며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며 왠지 점점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히지 않았다.이준혁이 이렇게 된 건 윤혜인 저 나쁜 계집애가 중간에서 이간질한 게 분명하다.이런 생각에 임세희가 두 주먹을 꽉 쥔 채 절대 이준혁 저 남자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감히 준혁 오빠를 빼앗아가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준혁 오빠가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해! 두고 봐, 준혁 오빠가 다시 예전처럼 나만 바라보고 나만 아끼게 만들 거야!’한편, 병실 안에서.병실로 돌아온 이준혁은 씩씩거리고 있는 문현미를 보며 물었다.“혜인이는요?”“무슨 혜인이? 혜인이가 누군데!”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되묻자 이준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엄마,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요?”“내가 유치해? 너야말로 네 마음이 어떤 지도 모르면서 유치하게 굴고 있는 거야!”문현미가 팔짱을 끼더니 말을 이어갔다.“내가 조금 전에 도우미 아주머니한테서 들었는데 네가 할아버지에게 혜인이와 이혼을 안 한다고 말했다며? 그게 정말 네 진심인 거야? 아니면 그냥 할아버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한 거짓말이야?”“뭐가 달라요? 어쨌든 할아버지는 지금 자극을 받으면 안 되잖아요.”이준혁이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문현미가 입술을 꽉 깨물며 호통을 쳤다.“당연히 다르지! 만약 네가 할아버지 때문에 이러는 거면 나도 나서서 네 할아버지를 설득할 거야. 넌 더 이상 혜인이를 괴롭히지 말고 하루 빨리
문현미는 수상한 아들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내 탓이지 뭐, 굳이 혜인이를 베란다까지 끌고 가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네 할아버지가 오늘 따라 낮잠을 그렇게 조금 주무실 줄은 몰랐지…”문현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고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문현미는 그제야 조금 안심됐다.그래도 구제불능은 아니네!한편,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차 안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윤혜인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조금 전에 꼭 끌어안고 있던 임세희와 이준혁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에 윤혜인은 뺨을 강하게 맞은 듯 얼얼했다.2년 동안의 결혼 생활은 결국 웃음거리로 끝나버렸고 그녀가 보여준 진심은 그렇게 그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두 눈을 꼭 감고 좌석에 기댄 윤혜인은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노력했다.이때, 갑자기 차문이 열리더니 이준혁이 차안으로 들어왔다.“피곤해?”윤혜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이준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지려고 했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허공에 손이 멈춘 이준혁은 눈썹을 들썩이다가 이내 꾹 참고는 손을 거두었다.“미안해, 할아버지 일은 내가 널 오해했어.”이준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하자 윤혜인은 살짝 놀라웠지만 단지 그 순간뿐이었다.늘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이준혁은 절대 누군가에게 그 귀한 머리를 숙일 리가 없으며 더군다나 여자에게는 더더욱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윤혜인은 가까이에 있는 이준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는 오늘도 여전히 나무랄 데 없이 잘생겼다. 예전에는 이 얼굴에 그토록 미쳐 있었는데 이젠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한 때는 다정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싸늘하게 돌변하는 저 얼굴. 윤혜인은 대체 어떤 게 진짜 이준혁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혜인 때문에 괜히 목젖이 흔들리던 이준혁은 예전처럼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안지철은 코피가 터져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병약한 여자 하나도 처리 못 해?”소종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운전 실력이 꽤 좋아 보였습니다.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사람을 들이받은 적이 없어서... 감을 못 잡겠어요.”“빨리 끝내.”상대방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안지철은 몸을 떨며 말했다.“저 그만두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저는 오늘 밤이라도 바로 떠나겠습니다.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요. 안 될까요?”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안지철은 그저 몰래 도망치고 싶었다.다른 방식이면 몰라도 사람을 죽이라는 건 도저히 할 수 없었다.처음에 그는 소종에게 돈을 받고 유시연을 통해 혈액 샘플을 빼돌리게 했다.그러고는 일이 끝나면 바로 해외로 떠나겠다고 약속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하지만 유시연과 이전부터 내연 관계였던 그는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녀와 시간을 보내려다가 일이 지체되고 만 것이다.사실 안지철은 이미 내일 떠날 계획을 세우고 정식 경로가 아니라도 은밀히 빠져나갈 방법까지 마련해 둔 상태였다.그런데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혼란스러워진 안지철은 소종에게 연락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고 소종은 그녀를 차로 들이받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살아 있는 사람을 죽이라고요?”안지철은 살인을 저지를 용기가 전혀 없었다.그러자 소종은 말했다.“그래, 안 해도 돼.”안지철은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안심하세요. 저 절대 입도 뻥긋하지 않을 겁니다...”“하지만 받은 돈은 전부 돌려줘야 할 거야. 잔금도 지급하지 않을 거고.”여전히 싸늘한 소종의 목소리에 안지철은 당황하며 외쳤다.“그건 안 됩니다!”“일은 제가 다 했잖아요. 약속을 어기시면 저도 입을 다물지 못할 겁니다!”안지철이 소종을 협박했다.“그럼 지금 당장 떠들어봐. 어차피 그 여자 오늘 죽지 않으면 당신 정체도 전부 탄로 날
하지만 만약 안지철을 뒤쫓는다면 그는 절박해져서 소원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은 주석훈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대신 상황을 문자로 알렸다.의외로 주석훈은 자고 있지 않았는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제가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볼게요.]소원은 차로 돌아와 유시연의 집으로 다시 가 잠복할 준비를 했다.유시연을 돌파구로 삼아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었다.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는 육경한의 감정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부족했다.확실한 증거, 예를 들어 자백 같은 것이 필요했다.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육경한은 항상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고 매수한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혹적인 조건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또한 협박을 통해 입을 다물게 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그가 매수한 사람들은 보통 쉽게 입장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었다.하여 소원은 증거를 더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특히 두 사람이 사적으로 교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이를 증거로 활용할 수 있었다.이를 잘 이용하면 여론을 조성하거나 감정소를 압박해 육경한에 대한 재검사를 요구할 수 있었다.그렇게 차를 출발시켜 코너를 돌았을 때, 소원은 갑자기 정면에서 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차량은 눈부신 상향등을 켜고 있었고 그 빛 때문에 소원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눈을 깜빡인 찰나, 차량은 순식간에 그녀 앞까지 다가왔다.그 속도는 마치 질주하듯 위협적이었다.이내 소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차... 분명 나를 겨냥하는 거야!’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소원은 핸들을 급히 틀어 옆으로 차를 돌렸다.겨우 목숨을 건진 그녀는 차량이 은색 승용차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바로 조금 전 급히 떠났던 안지철의 차량이었다.소원은 곧바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급히 기어를 넣고 출발하려 했지만 차는 하도 낡아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시동이 꺼졌다.고요한
소원은 차에서 내려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그리고 그의 이름을 바로 불렀다.“안지철 씨.”남자는 깜짝 놀랐다. 이미 감정소를 퇴직한 그는 소원을 알 리 없었다.“누구세요?”그러자 소원이 가까이 다가서며 담담히 말했다.“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묻고 싶은 건, 이달 13일에 감정소의 혈액 샘플에 손을 댄 적이 있냐는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소원을 쳐다보더니 입을 움직였다.“무슨 헛소리 하는 거예요?! 난 벌써 퇴직했는데 감정소에 어떻게 손을 대겠어요?”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지만 소원은 그의 표정에서 이미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다.하여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퇴직한 것 맞죠. 하지만 유시연 씨는 퇴직한 게 아니잖아요?”이 말에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유시연 씨랑 난 아무 상관 없어요.”남자는 소원이 이미 며칠 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또한 그녀가 자신과 유시연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입조심해요. 헛소리 계속하면 입 찢어버릴 거니까!”남자는 으름장을 놓았다.지금은 한밤중이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남자는 소원이 여자라 겁을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기회 삼아 위협하려 한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가 자신을 해치며 이 기회에 그를 경찰에 넘겨 조사하게 만들 수 있겠다 생각하며 말이다.“아까 안지철 씨랑 유시연 씨가 이 식당에서 차례로 나왔잖아요. 이 안에 그런 곳이 있나 봐요? 지금 제가 경찰에 신고하면 안지철 씨는 조사받게 될 텐데... 어떡할래요?”그러자 남자는 잠시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당... 당신 나 따라다녔던 거예요?”“물론이죠. 안지철 씨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유시연 씨는 남편이 있잖아요. 그 남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소원은
“그건 절대 안 됩니다.”소원이 아무리 설득하고 애원해도 강백호는 단호했다.감정소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고 강백호는 직원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도무지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던 소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벽에 적힌 ‘자원봉사자 모집’ 문구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소장님, 제가 자원봉사자로 일하면 안 될까요?”그러자 강백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고 소원은 급히 손을 들어 보이며 약속했다.“걱정 마세요. 감정소의 물건을 훔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제 인품이 어떤지는 주석훈 변호사님께 물어보셔도 됩니다.”하지만 강백호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다.“그래도 이렇게 하시면 제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소원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소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퇴직과 관련된 상황을 직접 알아보고 싶어서 그래요. 작은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이렇게 솔직한 태도에 강백호는 오히려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게다가 그는 소원이 조사한다고 해서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녀가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오히려 감정소에 대한 그의 신뢰는 더욱 확고해질 터였다.“자원봉사자 모집은 담당 직원에게 문의해야 합니다.”강백호는 말했다.“면접도 거쳐야 하고 그 과정에 제가 관여하지는 않을 겁니다.”소원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감사합니다, 소장님.”곧바로 소원은 자원봉사자 모집 담당자를 찾아가 절차를 밟았고 비교적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자원봉사자로 합격했다.주 2회 근무 조건으로 그녀는 매번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다.성실한 태도로 인해 감정소 직원들에게도 호감을 얻었고 일을 하며 틈틈이 정보를 수집해 최근 반년 동안 퇴직 의사를 밝혔던 직원들을 파악했다.소원은 단 한 명의 정보도 놓치지 않으려 범위를 넓혀 조사를 이어갔다.육경한처럼 신중한 사람이 무언가를 꾸미려 했다면 반드시 정밀하게 준비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그 결과, 최근
“감사합니다, 주 변호사님.”소원은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보를 얻기가 더 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너무나 성의껏 도와주자 소원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말했다.“다음에 제가 수고비 추가로 드릴게요.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요.”“그럴 필요 없습니다.”그러자 주석훈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처음에 합의한 금액 그대로 주시면 됩니다. 저는 사건 단위로 일을 처리하지 시간을 기준으로 하진 않아요.”“예전에 이선 그룹 이준혁 대표님한테서 많은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번 일도 이선 그룹 사모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거라 사건을 맡은 이상 전 끝까지 책임질 겁니다. 소원 씨, 나중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저와 상의하세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그렇게 주석훈과 헤어진 후, 소원은 주소에 적힌 감정 기관으로 택시를 타고 향했다.도착해서 본 기관은 규모도 크고 분위기가 엄숙했다.벽에는 여러 신고 관련 홍보 문구가 붙어 있었다.홍보 문구에는 ‘의사나 조수가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익명 신고 시 거액의 포상이 지급된다’고 쓰여 있었다.이런 점을 보면 이 기관이 사법 당국에서 전문 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인맥이 아닌 철저한 절차와 엄격한 심사를 통과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그럼에도 소원은 육경한이 어떻게 이런 철저한 검사를 피해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주석훈이 소개해 준 동창, 강백호를 찾아가 감정 과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강백호는 말했다.“저희는 각 과정마다 최소 다섯 번 이상 검증을 거칩니다. 이렇게 철저히 검증하는 이유는 어떤 작은 오류나 부정행위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초반 두 번의 검사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후반 세 번의 검사는 다른 기관으로 혼합 샘플을 보내 재검사하기 때문에 절대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 재검사 기관들은 모두 비공개로 운영되며 샘플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조작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렇게 대해야 마땅하지. 잘 대해줘봤자 소용없어!’“민아 씨한테 사과해.”육경한은 방민아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주려는 듯 말했다.이내 소원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그녀는 유진을 떠올리며 결국 마지못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제가 오해해서 그런 말을 했어요. 물론 민아 씨도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다행이고요.”소원이 잠시 멈추고 나서 말을 이어갔다.“나중에 엄마가 되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모든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다는 걸요.”소원은 사과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방민아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유진에게 손을 대기라도 한다면 자신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워낙 통찰력이 뛰어났던 방민아는 이를 단번에 알아챘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물론이죠. 이해합니다. 저와 경한 씨와 결혼 후 바로 임신 준비를 할 예정이에요. 벌써 엄마의 마음이 어떤지 느껴지네요. 모든 엄마가 아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도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서라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하지 않을 겁니다.”가벼운 대답인 듯 보였지만 방민아 역시 소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미리 축하드릴게요.”자연히 그 뜻을 이해한 소원이 답했다.그러자 방민아는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그들의 대화를 들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은 방민아에게 고개를 숙여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요?”방민아가 말했다.“한 번 해볼게요.”한 걸음 내디디자마자 소원은 고통스러운 듯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윽...”결국 육경한은 방민아를 들어 올리며 뒤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차가운 바람이 지나가자 소원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휘감으며 유진에 대한 걱정이 더욱 깊어졌다.그때 주석훈이 나와 말했다.“소원 씨, 육경한 씨가 감정을 의뢰한 기관은 이곳입니다.”그는 소원에게 주소를 건네며 덧붙였다.“이곳은 전문 사법 기관으로
방민아는 온몸을 육경한의 품에 기댄 채, 힘없는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그 모습은 누가 봐도 애처로워 보였고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저... 저는 괜찮아요. 소원 씨랑은 상관없어요.”이 말은 소원을 감싸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갈등을 피하려는 방민아의 태도를 부각시켰다.억울함을 감내하는 부잣집 딸, 이 얼마나 보기 좋은 이미지인가.방민아의 말에 육경한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원을 향했다.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민아 씨한테 사과해.”자신이 본 상황이 전부였기에 그는 방민아가 무슨 말을 하든 개의치 않았다.이 순간, 육경한은 예전의 그 차갑고 냉정한 남자로 되돌아갔다.소원이 자신의 뜻을 계속 거스르자 육경한은 이번에 확실히 그녀에게 교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이제 그는 더 이상 소원을 달래거나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원하는 건 소원이 두려워하고 겁을 먹으며 예전처럼 자신에게 굴복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소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첫째, 난 민아 씨를 밀지 않았어. 둘째, 내가 민아 씨를 죽이겠다고 한 건 민아 씨가 유진이에게 악의를 품었기 때문이야. 육경한, 만약 민아 씨가 유진이를 해치는 걸 묵인한다면 너도 함께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소원의 말에 방민아는 입을 가리고 크게 놀란 척하며 말했다.“소원 씨, 왜 이러세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한 적 없어요. 그냥 소원 씨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예요.”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물은 뺨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저는 단지 엄마로서 소원 씨가 안쓰러워서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소원 씨, 제발 사실을 왜곡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이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그녀는 고개를 돌려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육경한에게 말했다.“경한 씨, 저희 집안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요. 저는 절대로 아이에게 나쁜 일을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저
방민아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소원 씨, 방금 법정에서 경한 씨가 아이를 이용해 소원 씨를 다시 곁으로 끌어들이려 한다고 하셨죠? 제 생각엔 그건 오해인 것 같아요.”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방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말을 이어갔다.“경한 씨랑 약혼한 지 몇 달이 됐는데 그동안 저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잘 지내왔어요. 게다가 결혼 날짜도 정해졌고요. 그래서 저는 경한 씨를 믿어요.”소원은 이 말을 듣고 방민아가 의도적으로 자신과 육경한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민아 씨가 육경한을 믿는 건 민아 씨 일이고 굳이 저에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소원이 단호히 대답했다.“민아 씨는 민아 씨가 믿는 걸 믿으시면 되고 저도 제가 믿는 걸 믿을 겁니다.”방민아는 망신을 당했지만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고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경한 씨는 항상 말을 간결하게 하는 사람이라 어쩌면 소원 씨가 그 뜻을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어요. 경한 씨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사실 소원은 방민아와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소원은 방민아에게 짧고도 간단한 대답을 해줬다.그러자 얼굴에 살짝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지만 방민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더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소원의 변호사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방민아는 곧 표정을 바꾸더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소원 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이 잘 돌볼 테니까.”이 말에 소원의 얼굴이 굳어졌다.잘 돌본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었다.방민아는 유진이를 빌미로 소원을 위협하려는 것이 분명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소원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다.“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유진이를 건드리면 그쪽도 후회하게 될 겁니다.”그러나 방민아는 오히려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소원 씨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그녀는 육연주처럼 무모
소원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아이를 어머니 곁에서 빼앗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육경한은 단 한 번의 말로 다시 한번 그녀를 깊은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은 마치 자신을 가로막는 커다란 그물이 머리 위에 드리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주석훈은 소원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애써 위로의 말을 건넸다. “소원 씨,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소원 씨 말대로라면 육경한 씨가 약을 복용해 온 건 확실한 사실일 겁니다. 이번엔 분명 무슨 술수를 쓴 거겠죠. 기운 내세요. 함께 노력하면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변호사는 냉철했고 고작 몇 마디 말로 소원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그래, 육경한이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리 없어. 이번 결과에는 분명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주석훈은 법원에 아는 사람을 찾아가 육경한이 감정을 받은 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로 했다.그리고 소원에게 먼저 차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그렇게 소원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입구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다 그만 한 사람과 부딪혔다.코를 세게 부딪쳐 아팠지만 그녀는 급히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괜찮습니다.”맑고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에 소원은 멈칫했다.얼굴을 들어 확인하니 역시나 서현재였다.원래도 아팠던 코가 더 시큰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소원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이 터질까 봐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했다.“미안해요.”그리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잠시만요.”서현재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소원은 그의 부름에 걸음을 뚝 멈췄고 서현재는 그녀의 손을 가리킨 후 다정하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싸매요.”여전히 따뜻하고 친절한 서현재의 모습에 소원은 더 가슴이 아려왔다.하여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괜찮습니다. 고마워요.”이내 소원이 다시 떠나려 했지만 서현재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았다.그러고 나서 단숨에 그녀의 상처를 손수건으로 감싸며 응급처치를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