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손을 뻗어 소원의 잔머리를 넘겨줬다.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나도 알고 싶어.”소원의 미소는 그대로 얼굴에 얼어붙었다. 입술이 하도 심하게 떨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반대로 육경한은 기분 좋은 듯 피식 웃었다. 시선은 새끼손가락의 반지를 돌리는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지난번 구치소에서 여자들은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잘라 증명으로 했다. 비록 제때 잇기는 했지만 흉터가 하도 선명해서 이렇게 가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부모가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잠시 후 육경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일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줄게.”분명히 원하는 일인데도 소원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무릎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주먹을 쥐더니 비웃는 말투로 말했다.“내가 진찬성이 벌받는 날까지 살아있어야 할 텐...”그녀가 말을 마저 하기도 전에 눈앞에 어두워졌다. 차가운 입술은 닿기만 하고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육경한은 웃음기가 서린 눈빛으로 물었다.“지금 질투하는 거야?”소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토록 누군가의 머리를 열어서 생각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또 처음이었다.‘도대체 어느 단어에서 질투라고 착각한 건지? 역겨줘.’소원은 미친 듯이 입술을 문질렀다. 동작은 입술의 껍질을 벗겨내기라도 할 것처럼 거칠었다.순간 육경한의 안색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자기 몸에 대고 거리를 좁혔다.이번에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과감하게 치아를 뚫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픈 듯 신음을 낼 때까지 내몰았다.소원은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반항해 봤자 그는 간지럽기만 했다.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욕망은 위험한 신호처럼 밀려왔다. 소원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미친놈! 약혼녀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러고 싶을까? 지금 날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잖아.’이때 육경한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아연’이라는 두 글자가 떴다.육경한이 잠시 일어난 틈을 타서 그녀는 정확히 그의 상
소원은 육경한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가 아니다. 이런 말을 듣고 설렐 일도 없었다. 짐승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역겹기만 할 뿐이다.그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진아연이 찾아왔다.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그녀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진아연은 창문을 통해 소원을 노려봤다.소원이 들은 것은 대부분 사과를 요구한다는 말이었다. 진아연은 소원에게 사과를 듣고 싶어 했다. 소원이 사과할 리 없다는 것은 육경한도 알았다. 그래서 적당히 그녀를 달래 차에 태웠다.경찰이 도착한 다음 소원은 남자친구와 싸우다가 신고하게 됐다고 말했다. 경찰은 소원의 말을 듣고 별장을 검사하고는 그냥 거짓 신고는 처벌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떠나갔다.소원은 소종의 차를 타고 떠났다. 두 대의 차가 엇갈리는 순간 육경한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에 소원은 소름이 돋았다. 육경한이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이제는 추측도 못 할 것 같았다. 육경한이 아는 의사가 흉부외과 전문의만 아니었어도 진작 도망가고 말았을 것이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10일 후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한가요?][그럼요.]소원은 이제야 시름을 놓고 메시지를 지웠다. 육경한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절대 가담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빠른 시일 내로 부모님을 모시고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윤혜인은 아직도 별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를 감금한 장본인인 이준혁은 다섯 날이나 나타나지 않았다.도우미는 바뀌지 않았다. 도우미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빌리려고 했지만, 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핸드폰이 없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고 말았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논 것밖에 없는 덕에 건강은 나름 좋아졌다.갇혀 있는 시간이 오래 되자 그녀는 창문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
그는 따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으로 발목을 매만지면서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윤혜인은 그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아 간질거리는 마음을 참으며 말했다.“저 그동안 수업을 너무 많이 빼먹은 것 같아서 그러는데 내일은 가서 수업 들어도 될까요?”“내가 이미 대신 처리했어.”윤혜인의 두 눈이 커지고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네?”이준혁은 계속 말을 이었다.“내가 네 회사에 이미 말해뒀다고. 이젠 출근 안 해도 되는데 기쁘지 않아?”윤혜인은 속에 오만가지 욕이 떠올랐다. 천천히 대화를 해보자는 생각에 참고 참고 또 참았지만 실패했다.“이준혁 씨가 대체 왜 저 대신 회사에 연락해요?! 그건 제 직장이에요. 전 그만두고 싶다는 말도 한 적이 없는데 대체 왜 멋대로 그런 거예요!”눈앞에 있는 남자는 너무 제멋대로였다.그녀는 화가 났다.“왜라니?”그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내가 네 남자니까 그런 거지.”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은 음험하기도 하고 무서웠다.윤혜인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게 되었다.행여나 언짢아져 그날 밤처럼 밤새 동안 그녀를 괴롭힐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준혁 씨, 제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에요. 전 정말 한구운 씨와는 아무런 사이가 아녜요. 준혁 씨 억측으로 자꾸 저한테 죄명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돼요?”“내 억측이라고?”이준혁은 그녀의 말을 미묘한 어투로 곱씹었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필사적으로 설명했다.“저랑 선배 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준혁 씨가 오해한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조급한 마음에 또 선배라는 호칭을 내뱉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이준혁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말이다.이준혁은 날카로운 눈길로 그녀를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네가 한구운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내가 오해한 거라고?”윤혜인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한구운이 식물인간이 된 후 한구운의 비서가 병원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박미선은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윤혜인도 놀라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한구운이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준다니. 이런 뜬금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이준혁의 눈빛이 더 가라앉았다.“이건 설명 못 하겠어?”윤혜인은 입을 벙긋거렸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하얀 백지장이 되었다.이준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한구운은 인간쓰레기가 맞긴 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아주 완벽하게 처리했다.순간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찢어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는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말하라고!”‘아파!'윤혜인은 고통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고 목마저 메어버렸다.“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요?”“아까부터 계속 설명하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계속 설명해 보라고.”윤혜인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그녀도 한구운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준혁은 더 화가 치밀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 차근차근 그녀와 대화해 봐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고 어투도 점차 빈정대기 시작했다.“윤혜인, 나를 갖고 노는 게 재밌었어? 감히 나를 두고 다른 남자를 꼬셔?”윤혜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제가 언제 준혁 씨를 갖고 놀았는데요?”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병실에 있을 때 난 원래 너를 상대해줄 생각 없었어. 근데 너는 뭘 했지?”“전...”“왜 말을 못 하겠어? 내가 대신 말해줄까?”이준혁은 병실에 있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한구운 때문이었다는 것이 떠올라 점점 화가 치밀었고 말도 거칠어졌다.“넌 항상 그랬어. 천박하게 이 남자 저 남자한테 어항을 치기 좋아했지. 그런 게 아니면 그냥 욕구를 푸는 것이 목적인 건가?”“무슨 그런!”‘나쁜 놈!'‘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윤혜인은 너무도 서러
확인한 후 남자는 침대에서 내려와 약상자를 뒤적이며 약을 꺼냈다.그녀가 거부하기도 전에 기다린 손가락으로 약을 쭉 짜 발라주었다.차가우면서도 시원한 것이 몸에 닿자 윤혜인은 당황해했다.순간 그녀는 치욕스러움을 느꼈다.서러워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남자는 그녀를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녀를 존중해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약을 바른 뒤 그녀는 또 남자에게 압박당했다. 행여나 쓸리게 될까 봐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윤혜인의 얼굴이 분노에 빨갛게 물들었다.이준혁은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집에 약이 있었는데 왜 안 발랐어?”“...”윤혜인은 바르기 쉬운 위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게다가 약을 발라 빨리 낫기라도 하면 그가 다시 짐승처럼 달려들 위험성이 있었다.그녀가 치료를 하지 않은 건 일종의 보장이기도 했다.이준혁이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설마 일부러 치료하지 않은 거야? 이 핑계로 내가 널 안지 못하게 하려고?”“...”윤혜인이 당황하던 순간을 남자는 바로 눈치챘다.그는 훅 다가오며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는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거짓말해도 소용없어!”이준혁은 이번에 정말로 마음속에 욕구가 생겨났다. 절대 그녀에게 벌을 주기 위함도 아니었다...그저 단순히 그녀를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는 전보다 조금 안정된 정서를 보이었고 그녀의 몸도 생각해 다른 방식으로 안으려 했다.윤혜인은 몸이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졌다. 두 팔로 힘껏 그를 밀어내면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를 냈다.“비켜요...당신은 못 해요... 안 돼요...”남자의 안색이 음험하게 변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다시 말해 봐, 누가 못한다고?”윤혜인은 조급한 나머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아니라, 제가...”그는 커다란 손으로 천천히 부드러운 그녀의 속살을 만졌다.“난 안 넣어도 돼. 하지만...”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뒷말을 이었다.윤혜인의 얼굴
윤혜인의 심장이 순간 쿵 내려앉았다.핸드폰도 툭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이준혁은 맨발로 들어왔다. 긴 팔다리엔 튼실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고 상체의 복근은 더욱 탄탄해 보였다.그는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워 윤혜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822822로 해봐.”윤혜인은 멈칫했다.8월 22일.그것은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했던 날이었다.그녀는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도 점차 그녀의 온기에 뜨거워지고 있었다. 특히 화면이 켜지고 그녀가 작성했던 내용이 남자의 눈에 확연히 들어갔다.이준혁은 한 글자씩 그녀가 작성한 문자를 읽었다.“아저씨, 저 혜인이에요. 지금 준혁 씨에게 감금당했는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이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지금 내 삼촌한테 도움 요청한 거야?”남자는 겉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속에선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역시나 내 곁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점차 화가 치밀어 감정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곤 그녀의 턱을 확 잡으면서 벽으로 밀었다.“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한테 꼬리치고 싶은 거야? 왜, 삼촌이 널 도와주면 뭐로 보답하려고?”윤혜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들킨 마당에 숨기지 않고 말했다.“이렇게 절 집에 가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준혁 씨에겐 제 자유를 제한할 권리가 없다고요.”이준혁의 표정이 순간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는 차갑게 피식 웃었다.“윤혜인, 그게 지금 네가 나한테 할 소리인 거야?”그의 단단한 팔이 순간 그녀의 허리를 꽉 감싸고 있었다. 그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그럼 넌 나를 위해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윤혜인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도 뜬금없었다.그녀의 머릿속으로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그들의 아이가 떠올랐다.그 아이는 그녀에게 커다란 가시가 되어 그녀의 살에 파고들었고 뽑을 수도 없
육경한을 미행하던 사람이 진아연에게 보고했다.“대표님께선 오아시스 아파트로 들어가셨습니다.”전화가 끊긴 후 방에서는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쿵! 콰앙!진아연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를 전부 던졌다.더 이상 던질 가구가 없어진 진아연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육경한이 소원을 대하는 태도는 점점 분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장 내일이 결혼식인데도 이 야밤에 소원을 찾으러 간 것을 보면 설령 그와 결혼한다고 해도 소원을 계속 만나러 갈 것 같았다.그녀는 사실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육경한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임감 때문에 그녀와 결혼한다는 것을 말이다.만약 나중에 잘못된 대상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그녀를 어떻게 대할까?육경한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었다. 그가 소원을 상대할 때 그녀는 눈치챘었다.하지만 소원과는 적어도 어린 시절의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이었다.게다가 육경한이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책임감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그는 끊임없이 좋은 물건으로 그녀에게 보상해주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대답을 피했고 꼭 영혼 없는 마리오네트와 결혼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여하간에 육경한이 그녀에게 준 재산은 평생 다 쓸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하지만 그 상대가 소원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니, 문제가 커진다.불안과 초조함에 진아연은 바닥에 있던 핸드폰을 주워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내일 결혼식이 시작될 때 그 파일들을 전부 전송해줘요.”지금 이 순간 진아연의 두 눈은 너무도 음험하여 꼭 극독을 지닌 독사의 눈빛 같았다.‘이번엔 반드시 소원을 끌어내릴 거야!'...오아시스 아파트.소원은 이미 짐을 다 정리한 상태였고 내일 아침 이삿짐센터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육경한이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까지 오아시스 아파
느껴지는 통증에 소원은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육경한의 얼굴이 다시 한번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육경한?”그녀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면서 그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화가 난 듯 씩씩거렸다.내일이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가 지금 그녀의 침대에 누워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뻔뻔하지 않은가.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여긴 왜 왔어? 우리 계약 끝난 거 아니었나?”전에 이미 서로 합의했었다. 그가 결혼하면 계약은 끝이라고.그녀는 전부터 오아시스에서 지낼 때 방문을 잠그지 않는 습관을 길들었다.매번 문을 잠그면 육경한은 발로 문을 뻥 차버려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는 벌로 그녀를 괴롭혔다.그 뒤로 그녀는 더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 덕에 육경한이 아주 쉽게 그녀의 침대까지 올라온 것이다.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집은 애초에 이 남자의 소유였다.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미 그를 쫓아냈을 것이다.소원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육경한은 바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몸을 돌려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분노를 억누르는 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내가 지금 결혼했어?”“...”말을 마친 남자는 그녀의 잠옷 바지 사이로 손을 넣으며 익숙하게 움직였다.소원은 그런 그의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이거 놔!”그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그러나 육경한은 아랑곳하지도 않았고 버둥거리는 그녀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당황한 소원은 조급한 나머지 이마로 힘껏 그에게 들이받았다.퍽.힘을 너무 세게 써서 그런지 그녀의 이마가 빨갛게 물들었다.육경한의 행동은 멈추었지만,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다만 그 웃음소리는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세상에, 소원 씨 정말로 힘이 세네요.”육경한은 일어나 앉아 달칵 소리를 내며 라이터를 켰다.은은한 라이터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차갑고 섬뜩한 육경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속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만약 그가 화를 낸다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상황에서 소원이 저항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지금 나 위협하고 있는 거야?”육경한이 입을 떼자마자 강렬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소원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평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위협이 아니야. 단지 거래지. 내가 현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가 유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서야. 그때 그 해변 절벽에서 현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유진이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거야. 현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유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소원은 육경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서현재에게도 불리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육경한에게 서현재의 안전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이건 육경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변화무쌍한 서울에서 뿌리 없는 두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정말 쉽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비록 그 적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맞서야만 했다.지난밤 만약 영숙의 말이 아니었다면 소원은 지금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영숙이 말했다.“스스로 살아가는 게 고결하게 보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오히려 스스로만 의지해서 초라하게 산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거야.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기회를 붙잡는 법이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옳은 길이야.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영숙의 위로에 소원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수없이 부딪혀 왔던 벽들,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원은 눈앞에 놓인 담백하고 향긋한 보양식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몸이 다쳤을 때는 보양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건강한 몸이 필요했다.절식하며 저항하는 건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할 짓이었다.약해진 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다.억지로 먹긴 했지만 그 양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정상적인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남은 음식을 도우미가 들고 나갈 때, 육경한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연근을 좋아하니까 다음 끼니엔 연근 요리를 준비해.”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도우미는 속으로 생각했다.‘연근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다니... 이 여자는 정말 육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어.’다음 날 아침, 소원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도우미에게 말했다.“육 대표님을 불러주세요.”그녀에게는 삼일이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유진이의 안전은 단 한순간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곧이어 육경한이 방 안에 들어서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원이 입을 열었다.“조건 받아들일게.”이 결정에 육경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사람은 약점이 있으면 잡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소원의 약점은 언제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어머니를 포기할 수도,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소원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동안 그런 수를 쓰지 않았다.자신에게 아직 그 알량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결국 육경한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고 소원은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소원이 덧붙였다.육경한은 그녀가 조건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조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건 소원
육경한은 눈앞의 여자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욕망이 뒤섞였다.조금 전의 짧은 접촉만으로도 그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듯했다.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눌러 제 몸 어디 한 부분에라도 붙여두고 싶었다.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말이다.특히 그녀가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현재야’라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그는 지금 당장 서현재를 붙잡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육경한,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모자에게 부끄럽지 않아? 왜 내가 당신에게 빌어야 하지? 유진이는 당신 아들 아니야?!”소원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깊은 증오를 느꼈다.육경한은 차분히 말했다.“내가 두 사람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그걸 만회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그의 말은 소원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그렇지만 육경한은 개의치 않았다.소원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비웃음을 사는 것쯤은 상관없었다.“네가 유진이의 엄마로 돌아와 내 곁에 머문다면 내가 필요한 권리를 줄 거야. 하지만 네가 유진이의 엄마가 아니라면 그 권리는 너와 아무 상관없어.”육경한의 말은 현실적이고도 냉정했다.교환을 원하는 것이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했다.곧 소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육경한, 당신 왜 이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엔 사랑 따윈 없어!”극도로 지친 소원은 무력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그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서현재조차 위험에 빠져 있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경한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이제 와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는 소원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으며 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키스는 어젯밤 일에 대한 대가야. 이제부터가 내가 내놓을 조건이야.”소원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뭘 하겠어? 당연히...”눈을 가늘게 뜨더니 육경한은 고개를 숙였다.“널 가질 거야.”뒤이어 거칠고 압도적인 키스가 다시금 그녀에게 덮쳐왔다.이번 키스는 이전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더 거침없었다.조금 전의 키스는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소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그녀의 손톱이 등과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자는 소원을 침대 위로 강제로 밀어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가슴 위로 억누르며 반항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는 소원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이어졌고 술에 취한 듯한 짙은 욕망이 가득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며 탐욕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서로 뒤엉킨 숨소리는 남자가 흥분했을 때만 내뱉는 거친 숨결이었다.정신이 아득해지며 소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육경한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분명 최근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빛에 진한 욕망의 빛이 서린 채 육경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아까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건은 간단해. 널 내게 줘. 그러면 내가 유진이의 엄마로 만들어줄게.”소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진이의 엄마’라니.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아이다.‘난 이미 유진이의 엄마잖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말뜻을
소원의 숨이 순간 멎었다.물론이다. 당연히 유진이의 양육권을 원했다.그것만이 유진이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 말이다.유진이는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허약했다.다른 사람이 조금만 속임수를 써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소원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걸고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 부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유진이의 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게다가 의사는 유진이의 건강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며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유진이를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고 이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소원은 평생을 후회할 것이었다.“나는 당연히...”하지만 소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육경한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쉿’하고 말했다.약간 거친 그의 손가락 끝은 마치 사포처럼 꺼끌꺼끌한 촉감을 남겼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몸에 소름이 돋으며 소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육경한은 가볍게 비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원한다면 진심을 보여야지.”소원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한 발 더 물러섰다.“원하는 게 뭔데?”그녀가 다시 묻기도 전에 육경한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육경한은 소원을 옷장 문에 밀어붙였고 열기가 느껴지는 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가에 닿았다.그것은 마치 시험하듯 시작되었고 이내 그녀의 입술로 깊숙이 파고들었다.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소원은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소원이 손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육경한은 무릎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꽉 누르고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거칠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은 거칠었고 심지어는 물기까지 했다.소원은 그의 강압적인 키스에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남자의 힘 앞에서는 그녀의 저항은 무력할 뿐이었다.결국 육경한의 입술이 소원의 것을 물어 피가 묻어났고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동안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담담하게 소원의 얼굴빛을 살폈고 소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유진이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마인 내가 할 수밖에 없지. 내일...”“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모두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야.”소원의 단호한 말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백업 파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물었다.“그리고 나면?”소원은 잠시 멈칫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육경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공개한다고 해도 연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야. 우리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 해외로 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만이지. 연주의 이후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방민아와 방민기도 마찬가지야. 방씨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네가 벌이는 이 작은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만약 돈과 인맥을 써서 이슈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육경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들의 대응 방식은 연주와 다를 게 없어.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거야.”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덧붙였다.“소원, 꿈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방민아와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야.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 유진이에게 나쁜지 좋은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육경한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이 속속 보였다.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지금 그녀가 가진 영상은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님 부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그녀가 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결국 육경한이 유진이를 놓아주지 않는 이상 양육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으며 잠재적인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
하지만 곧 그녀는 이 생각을 부정했다.영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영숙을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영숙이 소원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줄 필요도 없었고 지금 같은 시점에 와서 그녀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육경한이 알아챈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몰랐다.‘내가 육연주와 방민아를 몰래 찍어둘 줄 어떻게 알아챘지?’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초소형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조용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이미 소용없어.”확인해 보니 과연 카메라 안의 저장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육경한이 이걸 손에 넣고 안에 있는 내용을 봤다면 그녀에게 돌려줄 리 없었다.그 안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의 조카, 약혼녀, 그리고 그의 큰처남이었다.그들과의 관계가 워낙 가깝기에 육경한이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도록 놔둘 리 없었다.소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장카드를 가져갔다면 그 안의 내용도 이미 보셨겠죠, 육 대표님.”“응, 봤어.”육경한은 솔직히 인정했다.“봤다면 당신 약혼녀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요?”소원은 약간 흥분하며 물었다.“그 여자가 정말 유진이 새엄마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육경한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하지만 이 순간, 문득 어젯밤 무의식중에 소원이 흘린 한마디가 떠올랐다.“현재야...”그리고 그동안 소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장난처럼 다루었는지, 그 안에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던 것들이 떠올랐다.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바꾸었다.“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될 거야. 유진이는 어쨌든 새엄마가 필요하니까. 누구도 유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필 수 없다면 차라리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낫지.”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자신의 아이를 이익의 발판으로 삼
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육경한과 이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어젯밤, 소원이 영숙에게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게 한 것은 방민아의 수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 외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방민아의 수를 깨뜨리지 못하면 유진이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육경한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이후 소원은 영숙에게 부탁해 숨겨 둔 소형 카메라를 가져오게 했다.현재 그 증거는 영숙의 손에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그래야만 육경한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증거를 본다면 육경한도 미우 그룹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방민아와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설사 결혼을 강행하려 해도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었다.소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나가야겠어. 내 옷 줘.”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너무 헐렁해 입고 나가면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민망했다.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옷? 그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입고 나가겠다고?”소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싸움으로 옷이 모두 찢겨나갔던 것이다.“그럼 부탁할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 좀 찾아줘.”그러나 육경한은 냉소하며 말했다.“왜 내가 널 위해 옷을 찾아줘야 하지? 나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입은 채로 나가.”소원은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곧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지금 입은 그대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문까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육경한이 발로 문을 차며 문을 닫아버렸다.소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정말 그렇게 나가려는 거야?”육경한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뭔가 숨은 의도를 담고 있는 듯했다.속이 덜컥 내려앉았
피가 끝없이 번져가 끝내는 눈까지 뒤덮자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눈이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머릿속은 웅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낯선 방을 둘러보며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이전의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방민아가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그 룸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영숙이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다음은 육경한이 그녀를 데려간 장면이 이어졌다.머리를 감싸 쥐고 문질렀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정신도 완전히 맑지 않았다.공기 중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맴돌았다.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소원은 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졌다.‘어젯밤...’소원은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방민아, 방민기와 몸싸움을 벌이며 생긴 상처들 외에 민감한 곳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허리에 남은 손자국이 의심스러웠다.그 자국은 너무 깊어서 마치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흔적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분명 싸움에서 생긴 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려니 겁이 났다.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본래 소원이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육경한이 성큼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원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깼네.”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베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육경한은 손을 살짝 들어 그것을 쳐냈고 베개는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구해줬더니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나한테 무슨 짓 했어?”소원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물었다.육경한은 그녀가 화가 난 모습을 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도우미가 가져다 놓은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뭘 했다면 네가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 같아?”순간 멍해졌지만 소원은 이내 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