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구운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혜인아, 내 말 좀 들어봐...”“의사가 오진한 건가요?”하지만 윤혜인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한구운은 변명하려 했지만,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이내 고개를 살짝 숙였다.“응.”그러자 붉게 물든 눈동자를 하고 윤혜인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런 거예요?”그제야 한구운은 연기를 포기하고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모르겠어? 난 널 사랑해. 널 내 곁에 두고 싶었어.”분노가 차올라 윤혜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거짓말로요?”한구운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널 붙잡을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이든 시도할 거야.”“한구운 씨? 정말 한구운 씨 맞아요?”그 말을 들은 한구운의 안색이 변했지만 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전 그쪽 모릅니다.”이윽고 그녀는 눈물이 그득 고인 얼굴로 급히 가방을 집어 들며 떠날 준비를 했다.“미안해요. 선배가 날 구해줬다 해도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어요. 치료비는 제가 낼 테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한구운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아, 난 널 해친 적이 없어.”윤혜인은 어느새 문 앞까지 다다른 뒤였다.“전 거짓말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한구운의 눈빛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혜인이 넌 도망칠 수 없어.”...윤혜인이 밖에 나왔을 때,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그녀는 이준혁이 한구운이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의 실망과 분노가 담긴 눈빛을 떠올리며,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비록 그가 자신을 해친 적은 없을지 몰라도, 한구운의 많은 행동이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과 이준혁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처럼 느껴졌다.정말 어리석었다.마음이 답답하고 울적해진 윤혜인은 혼자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소원을 찾아갔다.한편, 육경한은 병원에서 이틀간
그녀는 거짓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소원 씨가 직접 부모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위궤양이라고. 거짓말 아닙니다. 직접 병실에 가서 물어보셔도 돼요.”이것은 소원이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말이었지만, 진아연은 바로 이 점을 이용했다.뒤이어 그녀는 간호사를 내보내고 주치의를 불러들였다. 육경한도 본 적이 있는 소원의 수술 담당 의사 말했다.진아연이 물었다.“의사 선생님, 경한 씨한테 말씀해 주세요. 소원 씨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그러자 의사는 떨리는 손으로 진단 보고서를 꺼내 육경한에게 건네주었다.“소원 씨는 위궤양입니다. 저한테 돈을 주면서 가족들에게 위암이라고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빚이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제발 신고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 저 병원에서 해고당하게 될 겁니다.”육경한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을 보며 진아연은 그가 분노에 가득 차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육경한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아직도 의사로 일하고 싶으세요?”남자의 웃음에는 따뜻함이 전혀 없었고, 지옥의 맹렬한 불길보다 더 무서웠다.의사는 그의 웃음에 다리가 풀려 떨며 말했다.“잘못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전 그냥 잠깐의 돈 욕심에 그 여자분의 말을 믿은 거예요. 그분 탓입니다, 전부 그분 탓...”그때, 육경한은 갑자기 손을 뻗어 철 같은 손으로 의사의 목을 단단히 움켜쥐었다.“당신 같은 놈도 의사라니!”그리고는 의사를 바닥에 세게 내동댕이쳤다.“쿵!”초라하게 바닥에 나뒹군 의사는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육경한은 차가운 목소리로 소종에게 명령했다.“저 사람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조사해. 사실이라면 손을 못 쓰게 만들어.”‘이런 사람도 다 의사를 하다니...’곧 소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사를 끌어냈고 진아연은 육경한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소원 씨가 이렇게 교묘한 방법으로 경한 씨를 속여 시간을 벌고 돈을 마련할 줄은 몰랐어요
육경한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소원의 찢어진 옷을 한 치 한 치 갈아내듯 바라보았다.그는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차가운 손끝으로 그녀의 빨갛게 멍든 피부를 살며시 쓰다듬다가 갑자기 힘을 주어 눌렀다.“으...”소원은 고통에 소리를 냈고 얼굴은 어느새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하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더욱 세게 눌렀다. 마치 원래 난 그 자국을 덮으려는 듯 말이다.그러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서 문도 채 못 닫고 하려는 거야?”소원은 그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육경한은 이미 포악해질 대로 포악해졌지만 단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애써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가슴이 계속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소원은 해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때, 육경한에게 차인 김재성이 벌떡 일어나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김재성은 분수를 모르고 소원의 앞을 가로막으며 죽음을 각오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소원이는 내 여자야, 어디 건드리기만 해봐!”그러자 육경한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피식 냉소를 지었다.“네 여자라고?”남자의 행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인함에 김재성의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지만, 엄청난 보수를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그래! 소원이는 내 여자야,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넌 절대 건드릴 수 없어!”“네 아이? 내가 건드릴 수 없어?”육경한은 두 문장을 반복하며 마치 엄청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오직 소원만이 그 웃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김재성을 세게 밀며 소리쳤다.“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언제 네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래?!”김재성은 밀려난 채로 억울한 듯 말했다.“소원아, 나한테 화나서 그런 말 하는 건 이해해. 하지만 아이에게는 온전한 가정이 필요하다고. 아빠 없는 아이로 태어나게 할 수는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네가 몇 명의 남자와 잤든 난 상관없어. 이 아이는 분명 내 아이니까!”
“어떻게 천해도 이렇게 천할 수 있어?! 서울에 있는 모든 남자로도 만족 못 할 것 같아? 날 속이고 다른 남자랑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그 잡종의 아이까지 임신해?!”그의 목소리는 덧없이 차가웠으며 주변에는 한기만이 가득했다.소원은 그 한기에 눌려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녀는 힘겹게 육경한의 손목을 잡고 숨을 쉬려 애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니야... 그게 아니고... 저 자식이 갑자기 들어와서 내 옷을...”그 뒤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온 얼굴은 비정상적인 자주색을 띠었고 산소가 부족해진 페는 곧 터질 것만 같았다.육경한이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것이 바로 배신이었다!무엇이든지 육경한의 낙인이 찍히면, 언젠가 그가 싫증이 나서 버린다 해도 다른 사람은 손대지 못하게 했다!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차례 소원에게 배신을 당했다!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을 생각할 때마다, 육경한은 분노가 차올라 소원을 불태워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소원은 점점 시야가 어두워졌다. 가슴은 답답했고 목도 아팠으며 이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았다.‘정말 날 죽이려는 건가? 이렇게 난 드디어 해방되는 건가? 아기도 나랑 함께 가는 건가?’의식이 흐려짐과 동시에 그녀의 매혹적인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그 눈물은 새빨개진 소원의 작은 얼굴에서부터 육경한의 피로 얼룩진 손등까지 곧장 떨어졌다.소원은 울고 싶지 않았다. 냉혈한 육경한의 앞에서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마지막 순간, 그녀의 의식은 더 이상 눈물을 통제할 수 없었고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웃기지 않은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떠나야 한다니!‘다음 생에는, 제발 다음 생에는, 육경한을 만나지 않기를...’그러다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조르던 육경한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차갑고 냉혹한 그의 얼굴에는 오직 증오만이 가득 남아있었다.“이렇게 죽는 건, 너무 쉽잖아?”소원은 마침내 숨을 쉴 수
소원은 힘겹게 육경한의 말을 들었다.위궤양, 잡종의 아이,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김재성...인제 와 보니 모든 것이 그녀를 노린 일련의 덫이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그녀를 옭아매려는 계략이었다.‘대체 무슨 이유로 이토록 공을 들여 나를 괴롭히는 거지? 굳이 이런 죄명을 덧씌우지 않아도 난 육경한한테 죽을 때까지 괴롭힘을 당할 텐데! 왜 그러는거지, 대체?’소원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들 전부 진아연이 당신한테 한 거지?! 위궤양에, 바람피워서 임신한 아이에, 진찬성까지... 치밀하게 이야기를 꾸미느라 진아연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이렇게 많은 증인들까지 찾으려고 말이야.”“닥쳐!”붉게 충혈된 눈을 한 채 육경한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아연이를 그 천한 입에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연이는 머릿속이 소름 끼치는 계략으로 가득 찬 너랑은 다르다고!”육경한은 마음속으로 진아연이 조금 거칠긴 해도 솔직한 사람이라 그런 거지 절대 그런 음흉한 술수를 부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내가 위궤양인지 아닌지는 잘 조사해보면 알 거 아니야. 그리고 내 배 속의 아이는...”소원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이 아이는 부모님이 그녀를 떠올릴 수 있게 남겨주려던 기억과도 같은 존재였다.하지만 만약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육경한이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 소원이 아이를 낳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육경한은 소원을 노려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왜, 너도 말 못 하겠어?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많은 남자들이랑 자는게 소원이라는데, 내가 오늘 그 소원 이뤄줄게!”이윽고 육경한은 갑자기 소원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그러나 웬일인지 소원이 매우 가볍게 느껴졌다. 한 손으로 들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말이다.‘임신한 사람 맞아? 10살짜리 애보다 더 가벼운 것 같은데?’소원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두려워하며 몸부림쳤다.“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이거 내려놔! 회사도 다 포기할게. 당신은 나한테 이럴 자격 없
가장 충실하고 정직해 보였던 안태웅이 소진용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준 배신자였다는 사실에 소원은 충격을 받았다.혼란스러워진 그녀는 그 종이 뭉치를 미친 듯이 찢어 작은 조각으로 만들었고 육경한은 차 옆에 기대어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네가 아무리 찢어봐야 다시 붙이면 그만이야.”그 말을 듣자 소원은 미친 사람처럼 그 종잇조각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아예 삼키려고 말이다.육경한은 처음엔 재미있게 보다가 점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정말로 일고여덟 장의 종이를 모두 삼킬 기세였으니 말이다!‘미친 거 아니야 진짜?!’화가 난 그는 즉시 담배를 끄고 그녀를 막아 나섰다.“너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뱉어내!”하지만 소원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입을 꼭 막고 필사적으로 종이를 삼켰다.마른 종잇조각이 목구멍을 지나갈 때, 마치 날카로운 낫에 베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매우 고통스러웠다.육경한은 그녀의 턱을 꽉 잡고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뱉어내라니까!”그러자 소원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종이를 삼켰다.하여 육경한은 어쩔 수 없이 손을 그녀의 입에 집어넣었다. 억지로라도 빼내려고 말이다.“너 정말 바보야?! 이건 복사본이야, 아무리 삼켜봐야 소용없다고!”‘복사본...’소원은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 육경한처럼 영리한 사람이 원본을 줄 리가 없지. 하하! 복사본이라니!’그녀는 육경한이 입안의 종이를 꺼내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목이 너무 아팠고 종잇조각에는 피가 묻어 나왔다.그 피는 마치 암세포에 감염된 것처럼 끔찍한 색이었다.육경한은 소원을 끌어내고 생수병을 그녀의 목구멍에 부어 깨끗이 씻어냈다.물을 너무 많이 쏟는 바람에 소원은 온몸이 다 젖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꼭두 각시처럼 움직이지도 저항하지도 않으며, 육경한이 물을 부어 씻어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그녀의 외투는 김재성에 의해 찢어졌고 안에는 회색의
가뜩이나 약하고 여린 소원의 몸이 남자의 무릎에 세게 눌리자 조금씩 무릎이 접히다 결국 그의 앞에 꿇고 말았다.육경한의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이 벨트 버클에 닿더니 달칵 소리와 함께 열렸다.순식간에 소원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변했다.이 행동만으로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그녀는 역겨운 마음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육경한, 진아연으로 만족할 수 없는 거야? 병이 낳자마자 달려들게?”육경한은 조롱 섞인 가벼운 웃음을 내뱉었다.“이런 건 네가 해야지, 아연이한테는 차마 손 못 대잖아.”노골적으로 모욕감을 주는 말이었다!대놓고 너처럼 천한 여자만 남자의 노리개가 된다는 뜻이었다...소원은 수치심에 입술이 검붉은 빛을 띨 정도로 깨물었다.육경한은 서두르지 않고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다음 눈을 내리깔고 쳐다보다가 이윽고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당기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소 대표님이 언제 들어갈지는 내 기분에 달렸을걸?”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그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든 것은 초조하고 걱정하던 마음이었다.이 여자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남에게 무릎을 꿇어도 남자는 결국 그녀가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그는 자신이 그녀의 함정에 빠지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싫었다.위선적이고 속물적이며 속에는 온통 꿍꿍이뿐인 여자는 결코 입에 진실을 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놓아주기 싫었다. 그 어떤 수단과 협박을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곁에 남겨둘 생각이었다.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의 이유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증오 탓으로 돌렸다.자신의 진심을 가지고 놀았던 여자가 싫어서 곁에 두고 천천히 괴롭히고 싶었다.하는 동안 소원의 속눈썹이 파들거리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물을 흘리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눈을 질끈 감았다.그러나 육경한은 계속 그녀를 노려보더니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 차가 자리에 멈췄다.남자는 느긋하게 창문을 내리고 천천히 담배를 집어 들었다.“눈치껏 알아서 가.”소원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육경한, 당신은 이럴 자격 없어! 이건 내 아이야!”“네 아이?”육경한 눈빛은 서늘했다.“그럼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애새끼와 네 아버지, 둘 중 하나만 골라.”하나를 고르라고?소원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가득했다.그녀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육경한, 그냥 아이 지키게 해줘. 부모님께 마지막 희망이라도 남겨드리고 싶어. 난 어차피 암에 걸려서 곧 죽을 거야. 제발 부탁할게. 나 데리고 병원 가서 검사하면 되잖아. 여러 병원에서 검사하면 답이 나오지 않아?”육경한은 콧방귀를 뀌었다. “애새끼한테 감정이 깊은가 보네. 지키겠다고 암에 걸렸다는 얄팍한 수작까지 부리고!”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진짜 아니야. 거짓말 아니라고!”“하나만 물어볼게, 김재성 알아 몰라?”“알아, 하지만...”육경한이 짜증스럽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전 남자 친구야?”소원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그래.”육경한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내려!”그는 다시는 그녀의 거짓말에 속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소원은 육경한의 팔을 꽉 잡았다.“내 말 좀 들어봐. 그 사람하고 아무 일도 없었어. 절대 그 사람 아이일 리 없어!”육경한은 얇은 입술로 말을 차갑게 내뱉었다. “그놈이 아니면 다른 놈이겠지, 어차피 다른 새끼 애잖아!”그 애새끼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내버려두는 건 그에게 큰 모욕이 될 것이었다!그리고 방금 전, 그는 비서 소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알아본 결과 모두 사실이라는 결론을 들었다.빚이 있었던 의사는 소원에게 수술하는 척 거액의 돈을 챙겼고, 그 돈은 한이 그룹 계좌에서 빠져나갔다.소원의 부모님도 정말 위궤양일 뿐이라고 말했다.김재성은 과거 소원의 남자 친구였고 그 사이 소원의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