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아이를 낳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몇 년 전, 두 사람이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 소원은 종종 그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육경한, 나 당신 아이 낳고 싶어!”당연히 곧바로 그의 품에 갇혀 제대로 혼쭐이 났지만.다만 당시 두 사람 모두 대학생이었고, 아이를 갖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찮아서 피임을 했었다.두 사람은 졸업하자마자 아기를 갖기로 합의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몇 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을 다시 들은 육경한의 마음에는 더 이상 처음의 희열이 아닌 조롱과 증오만이 가득했다.그녀가 애새끼를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냥 둘 수 없었다.그는 여자의 턱을 세게 그러잡고 차갑게 말했다.“소원, 내가 매번 끝나고 피임약을 먹였는데 그게 어떻게 내 아이야?”소원은 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눈물이 차오르며 설명했다.“약 다 토했어.”관계가 끝나고 약을 뱉어내는 일이 몇 번 있었다.당시 위가 아파 항상 구토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단지 소화 불량이라고 생각했다.“소원, 고작 애새끼 때문에 별 수작을 다 부리네.”육경한은 차갑게 웃었다.“왜 토했어? 설마 내 아이를 갖고 싶었어?”소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려는 순간, 남자가 턱을 세게 잡은 채 쾅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반쯤 시트에 눌렸다.남자의 표정은 차갑고 매정했다.“내 애가 맞다고 해도 난 지울 거야! 네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아이를 낳아? 넌 그럴 자격 없어!”육경한은 자신의 아이라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그는 절대 여자에게 속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여자가 자신을 속일 모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자신의 아이라니, 이 여자가 거짓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었다면 또 속을 뻔했다.악독한 여자는 지난번 그를 사랑한다던 말처럼 늘 그를 휘어잡는 방법이 있었다.아직도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절대 안 돼! 절대로!육경한의 눈가
육경한은 광기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이 망할 여자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이윽고 소원은 남자의 피 묻은 손이 칼날을 따라 손잡이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게 보였다.두둑-소원의 손목이 그대로 무표정한 악귀 같은 남자의 손에 부러졌다!챙그랑-칼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아...” 소원은 고통을 호소하며 오른손을 맥없이 떨구었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비명으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그 고통이 가슴까지 뻗쳤다.육경한의 손바닥은 칼날에 베여 피가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소원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리며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수술을 원하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면 되지.”소원은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제 팔이 부러져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곧바로 그의 손에 안전벨트를 채워지며 차는 그렇게 병원을 떠났다.곧이어 클럽에 들른 육경한은 소원을 차에서 끌어 내려 밀실로 들어갔다.안에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며 살집이 두둑한 남자 몇 명이 있었다.육경한은 시체처럼 소원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소파 털썩 앉더니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수표 더미를 던지며 느릿하게 말했다.“이 아가씨 제대로 모셔. 이 여자 기분 좋게 만들어주면 이 돈은 알아서 나눠 가져.”경호원들은 몇십 년 동안 이렇듯 좋은 일은 처음 겪는다.돈도 챙기고 데리고 놀 여자도 있다니!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순식간에 소원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미쳤어!이 남자는 완전히 미쳤다!소원은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짓밟기 위해 남자 몇 명을 데려올 줄은 몰랐다…굶주린 늑대처럼 생긴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소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의 뒤에는 벽이었고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더듬더듬 술병 하나를 잡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저리 가! 나한테 손대지 마! 다 꺼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크게 비웃는 웃음소리뿐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그들은 단지 미인을 보기만 해도 돈을 챙길 수 있으니 실감 나게 연기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소원의 유리구슬처럼 예쁜 눈동자엔 아무런 빛도 없었다.그녀는 차갑고 매정한 남자를 바라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한, 육씨 집안에 일이 생겼을 때 우리 아빠가 유일하게 잘못한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혼사를 취소한 이기적인 결정밖에 없어. 아빠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고생할까 봐 걱정했던 거야. 그땐 나도 아빠가 미웠고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다투고 단식 투쟁까지 했어. 근데 자기 딸을 아낀 게 죄야? 우리 집에서 당신 부모님 죽였어? 왜 이렇게까지 우리한테 모질게 구는 건데! 내가 당신을 갖고 놀고 속였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억지 때문에? 그래, 그게 진짜라고 쳐. 내가 정말 그랬다고 쳐. 오늘 죽음으로 갚을게, 됐지?”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모아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목에 밀어붙였다.탁! 술병이 발에 차여 벽에 부딪혔다.쓰지 않는 왼손은 결국 육경한의 발만큼 빠르지 않았다.그가 발로 걷어차자 소원은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만 느꼈다.결국 죽으려는 바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모두 나가!”육경한은 거세게 포효했다.몇 안 되는 덩치 큰 남자들은 감히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물러갔다.육경한은 연약한 그녀의 몸을 벽에 밀착시키며 윽박질렀다.“소원, 죽어도 내 말은 안 듣겠다는 거지? 내가 말했지, 죽는 것도 내 허락받아야 한다고.”소원은 화난 표정도 없이 두 손을 힘없이 들어 축 늘어뜨렸다.그래, 허락을 받아야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또 잊었다.자신의 생사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조차 없었다.소원은 웃었다. 아름답고도 괴이한 미소였다.“육경한,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어차피 내 이 몸은 오래 못 버텨. 얼마나 화가 났든 빨리 푸는 게 좋을 거야, 나 정말 곧 죽을 거거든.”소원은 이 순간 죽음을 그토록 갈망했다. 죽으면 모든
“스읍…”소원은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며 고통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조금만 더 힘을 주면 죽을 수도 있는 동맥이었다.순간 악귀처럼 보였던 육경한이 그녀에게 엎드린 채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다시는 다른 남자 생각도 못 하게 해줄게.”남자의 손이 밑을 파고들며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이럴 때만 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불같이 뜨거운 그녀의 몸이 그의 자제력을 잃게 했다.소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검은 깃털 같은 속눈썹에 젖은 눈물방울이 맺혔으며, 온몸의 비늘이 벗겨져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 몸부림치는 것조차 부질없어 보였다.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육경한이 차갑게 쏘아붙였다.“꺼져!”문밖에는 소종이 있었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고했다.“도련님, 진아연 양이 몸이 안 좋아서 와달라고 합니다.”소원은 처음으로 진아연의 이름이 거룩하게 들렸다. 그녀를 구해주었다.육경한은 그래도 계속하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동했다.그는 주먹으로 테이블 유리를 내리치며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하지만 소원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육경한은 옷을 입은 뒤 아무렇게나 그녀에게 옷을 던져주고 함께 데려갔다.차는 육경한이 진아연을 위해 사둔 저택 마당에 멈춰 섰다.그런데 뜻밖에도 진아연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열이 난 듯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육경한을 보자 그녀는 단숨에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내 곁에 있어 주지도 않고.”육경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서 왔잖아.”진아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한눈에 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저 망할 여자는 멀쩡했고 아이도 지우지 않았다!그녀는 불쾌한 듯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도 같이 왔어요?”육경한은 무슨 생각인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진아연이 물었다.“왜 데려왔어요?”“너 몸 안 좋다며. 너 돌보라고 데려왔지.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손목까지 부러진 소원이 인질을 잡고 협박할 줄이야.역시나 이 교활한 여자를 간과했다. 그녀를 두고 방심하는 게 아닌데.“소원, 두 번 말 안 할 테니까 당장 아연이 놔줘!”그의 한없이 깊은 눈동자가 소원의 얼굴을 노려보며 맹독을 묻힌 화살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그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떨게 만들었고, 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육경한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짓밟을 것만 같은 분노가 유난히 강렬했다.그건 다름 아닌 소원이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진아연을 건드렸기에 이 지경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방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아빠라는 약점을 육경한 저 미친놈에게 계속 쥐어 줄 수는 없었다.혹시나 기분이 안 좋거나 자신이 말을 안 들으면 아빠는 당장이라도 감옥에 들어갈 테니까.아버지처럼 신체 기능이 저하된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목숨을 반쯤 잃을 수도 있었다.한 번 들어가면 이번 생에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리하여 그녀는 도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포크를 진아연의 목에 겨눈 채 겁 없이 육경한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육경한, 20분만 줄 테니까 계약서랑 자료 가져와. 안 가져오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이건 그녀의 한계였다. 지금 다친 그녀는 몸도 허약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기에 빨리 끝내야 했다. 육경한의 눈동자에 거센 폭풍이 몰아쳤고 그는 가늘어진 눈매로 분명하게 말했다.“소원, 죽고 싶어!”지옥보다 더 서늘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했다.소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벽에 걸린 시계추를 쳐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도련님, 이제 19분 30초 남았네요.”퍽-살기 어린 남자의 주먹에 수억 가치
말을 마친 남자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소원을 노려보며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유언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소원은 뜻밖에도 전례 없는 평온함을 보였다.곧 죽게 될 사람이 뭐가 두렵겠나.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결국 죽으면 끝이 아닌가.곧이어 소종이 자료 더미를 들고 나타나 소원의 요청에 따라 하나하나 보여주며 모두 원본임을 확인시켰다.확인을 마친 소원이 매섭게 말했다.“여기서 태워버려!”소종은 육경한을 돌아보았고 그는 잘생긴 얼굴에 어둠이 드리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태워!”타오르는 불길이 순식간에 종이와 디스크를 집어삼켰다.소원의 표정은 더 이상 침착하지 않았고 다소 흥분한 기색도 보였다.숨겨진 위험은 제거되었고 아빠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그릇에 검은 재만 남았을 때 육경한은 이미 검은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비로운 검은색이 살기 어린 그의 잘생긴 모습을 덮고 있었다.육경한은 곧 죽일 듯한 무서운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더니 잇새로 한 마디를 뱉었다.“이제 놔!”소원은 여전히 진아연의 목을 조른 채 육경한과 신경전을 벌였다.“한 가지 더 약속해 줘.”“소원!” 남자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지금 당장 네 부모님을 잡아서 산골에 데려가 늑대 먹이로 던져 줘야겠어?”육경한의 얼굴에는 눈앞의 여자를 정말 짓밟고 싶다는 살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이렇듯 누군가에게 놀아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그럼 도련님이 더 빨리 움직이는지, 내 손이 더 빠른지 한번 볼까요?”소원은 침착하게 말을 뱉어냈지만 곧 손에 힘이 풀릴 거라는 걸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 오른손이 부러진 후 그녀는 팔의 힘으로 진아연을 포박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통은 무시할 수 없었다.손에 쥔 포크도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닿을 듯 위협적이었다.협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그녀는 분노에 찬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다시는 우리 부모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가 한 일은 내가
쾅!소리와 함께 화분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났다.소원은 통증이 가슴을 뚫고 퍼지며 결국 참지 못하고,“훅!”피를 한 웅큼 토하고 말았다.붉은 액체가 바닥을 물들였다.육경한은 반쯤 의식을 잃은 진아연을 안아 든 채 고개를 돌려 소원을 바라보았다. 지구 종말이 온 듯 빛 한줄기 없이 핏빛만 어린 새까만 눈동자였다.“소원, 네가 치르게 될 대가를 기대해.”뼛속까지 서늘한 냉기가 소원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둔탁한 발길질에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고 숨 쉬는 것조차 아팠다.그녀는 힘겹게 기침을 했고 입가에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지옥에서 온 듯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한, 내가 찌른 게 아니라 저 여자가...”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도 싫다는 듯 진아연을 안고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소종은 그를 뒤쫓으며 물었다.“대표님, 소원 씨는 어떻게 할까요?”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서늘하고 무정한 목소리가 들렸다.“들여보내야지.”그는 지금 그녀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기에 우선 경찰서에 넘기려 했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죽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소원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동공이 흐려진 채 소종이 자신을 끌어올릴 때까지 점점 더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만 보았다....윤혜인은 소원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당황했다.수업이 없는 날이면 소진용과 전미영을 돌보기 위해 병원에 가는데 두 어르신도 소원의 행방을 몰랐다.윤혜인은 두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소원이 실종되었다는 걸 알려도 걱정만 더할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일이 생겨 바쁘다며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둘러댔다.48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닿지 않자 윤혜인은 신고하러 경찰에 갔다가 소원이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았다.윤혜인은 소진용과 전미영의 건강 상태로는 이 충격
그건 그가 그녀를 차단했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그는 이제 정말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윤혜인은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던 그날을 기억했다. “지금부터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야. 다신 너 보고 싶지 않아.”순식간에 가슴이 답답하고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그를 찾아가 설명할까 생각도 했지만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한구운은 위선적이고 그녀도 당당하지 않았다.문현미의 말대로 그에게서 멀어질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심호흡을 하고 안개가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억지로 참았다.결국 그녀는 이신우에게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를 찾아갔다.하지만 뜻밖에도 이신우는 이 일이 육경한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준혁에게 물었지만 이준혁은 신경 쓸 시간이 없다며 매정하게 대답했다.이신우는 윤혜인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지만 소원이 연행된 정확한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윤혜인은 소원이 사람을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 말이 너무 황당했고 소원이 임신한 걸 떠올리며 구치소에서 잘 지내지 못할게 분명했다.제일 먼저 육경한의 회사에 가서 육경한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육경한은 그녀를 만나주지도 않았다.하루 동안 헛물만 캔 윤혜인은 결국 다시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연결음만 들리는 걸 봐서 번호도 차단한 것 같았다.어쩔 수 없이 다시 주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주훈은 전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고 그저 바쁘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윤혜인은 너무 불안한 나머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결국 뻔뻔하게 찾아가기로 했다.결과 주훈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대표님께서는 바쁘세요.”밤 10시가 넘을 때까지도 돌아오는 대답은 바쁘다는 말뿐이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던 그녀는 주훈을 귀찮게 할 수밖에 없었다.“주 비서님, 대표님께선 밤에도 쉬지 않나요? 잠깐이면 돼요. 몇 마디만 하고 올게요.”주훈은 계속되는 질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상대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은색 미니밴을 압도하며 그를 몰아붙였다.검은색 SUV는 마치 밤의 사냥꾼처럼 두 개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신의 먹잇감을 정확히 노렸다.은색 미니밴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검은색 SUV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같았고 그 틈을 타 소원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속도를 올렸다.소원이 검은색 SUV를 돕지 않은 것은 일부러가 아니었다.우선, 자신의 운전 실력이 명백히 검은색 SUV의 운전자에 미치지 못했고 괜히 멈췄다가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게다가 소원은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닌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이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소원은 반드시 그녀들을 넓은 도로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검은색 SUV의 도움 덕분에 소원은 은색 미니밴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하지만 백미러로 여전히 두 차량이 치열하게 맞붙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검은색 SUV가 교묘한 기술로 미니밴을 몰아붙였다면 은색 미니밴은 마치 물뱀처럼 교활하고 악랄한 움직임으로 대응했다.몇 차례나 검은색 SUV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상황이 매우 위태로웠지만 검은색 SUV의 운전자는 상당히 노련했고 미니밴의 계략을 여러 번 피하며 반격했다.오히려 미니밴을 바위로 몰아가 차체에 더 큰 손상을 입혔다.그 바람에 미니밴의 옆면에 있던 백미러가 부서지고 차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검은색 SUV는 이를 계산이라도 한 듯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미니밴이 뒤에서 들이받도록 유도했다.그리고 곧이어 SUV는 날렵하게 방향을 틀며 다른 쪽 백미러도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게 만들었다.결국 은색 미니밴은 양쪽 백미러를 모두 잃었는데 이런 험난한 산길에서는 백미러가 없는 상태로 운전한다는 것은 눈 한쪽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검은색 S
소원은 마침 차 안에서 발견한 가위를 사용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그리고 모자를 쓰고 얼굴에 흙을 조금 묻히니 얼핏 보면 그 남자와 닮아 보이기까지 했다.차에서 내리지 않기만 하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소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열쇠를 꽂은 뒤 가속 페달을 밟아 시동을 걸었다.차량이 움직였지만 밖에 있는 경비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라 동료가 돌아오지 않은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소원은 차량을 문 앞까지 몰고 가 남자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비원은 대충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차량이 대문을 지나가는 순간, 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첫 번째 관문을 넘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두 번째, 세 번째 관문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이 조직은 매우 교묘하게 여러 겹의 관문을 설계해 두었기에 혼자든, 둘이든, 무리로 도망치려고 해도 도보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첫 번째 관문조차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뒤이은 두 번째 관문에서도 소원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비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통과시켰다.이 남자가 조직의 주요 인물들과 연관이 깊었는지 신분증만 보여주면 경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줬다.생각해 보면 조직의 상층부와 관련이 없었다면 남자는 한밤중에 이런 곳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그 뒤로 검문하는 사람이 없었고 소원은 꿈에도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다.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소원이 신분증을 보여주자 옆에 있던 경비원이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남자의 허리에 걸려 있던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무전기에서 무언가 급박한 말이 쏟아졌고 소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경비원은 갑자기 사냥총을 들어 소원을 겨누며 말했다.“내려!”어설픈 한국어로 소원에게 명령한 것이다.소원
상대방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대략적으로 이해한 듯했다.그는 총으로 소원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말했다.“가!”그가 가리킨 곳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의미 같았다.소원의 심장이 곧 목을 뚫고 나올 듯 했다.나무 오두막 안에는 그 남자의 시체와 피로 물든 바닥뿐이었다.그곳으로 간다면 사실확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상황을 보고 바로 총알이 자신의 머리를 뚫을 가능성이 컸다.마지못해 오두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소원은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부드러운 흙바닥이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소원은 협조하는 척하며 이 감시자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어색한 한국어로 차 안에 있던 소녀들에게 조용히 말했다.“열쇠, 땅에 있어요. 내가 이따가 잡을 테니까, 다들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이 한마디는 거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다름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맨몸으로 총을 가진 사람과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소원이 생각하는 ‘붙잡는 방법’은 총을 빼앗아 이 경비원과 함께 죽는 길뿐이었다.결과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선택지가 없었다.소원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열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말이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유진이와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니,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유진아, 엄마를 용서해줘. 끝까지 널 되찾아 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소원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은 마치 수백 킬로그램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거웠다.경비원은 소원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성급하게 말했다.“빨리...”“쿵!”갑작스러운 소리에 경비원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소
이 둘은 방심한 채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두 경비는 달랐다. 그들은 진짜 총을 들고 있었다.만약 정면으로 뛰쳐나간다면 소원과 그녀의 일행은 접근도 못 하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마당에 있는 픽업트럭이었다.소원은 조금 전에 처리한 경비원의 몸에서 열쇠를 빼냈다.모든 사람을 트럭 안에 숨겨 탈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터무니없는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산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산속에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경비원들이 있었고 소녀들은 안에서 물과 식량도 없이 있었기에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구조대가 오기 전에 발견되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결국 이 계획은 소원이 깊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성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소원은 문밖에 서 있는 경비원 둘 중 한 명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았다.큰일을 보러 간 듯했는데 이런 경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예의 따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작은 일이었다면 어디서든 적당히 해결했을 것이었다.그들의 삶의 습성이 거의 야만인과 다름없었다.소원은 남은 경비원이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작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바깥 문에 달린 자물쇠를 조용히 풀고 문을 열었다.안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소녀들이 떨고 있었다.소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소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 구조대를 기다리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 전에 들킬 수도 있고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같이 나간다면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을 지킬게요.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