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한 차가 자리에 멈췄다.남자는 느긋하게 창문을 내리고 천천히 담배를 집어 들었다.“눈치껏 알아서 가.”소원은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육경한, 당신은 이럴 자격 없어! 이건 내 아이야!”“네 아이?”육경한 눈빛은 서늘했다.“그럼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애새끼와 네 아버지, 둘 중 하나만 골라.”하나를 고르라고?소원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가득했다.그녀는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육경한, 그냥 아이 지키게 해줘. 부모님께 마지막 희망이라도 남겨드리고 싶어. 난 어차피 암에 걸려서 곧 죽을 거야. 제발 부탁할게. 나 데리고 병원 가서 검사하면 되잖아. 여러 병원에서 검사하면 답이 나오지 않아?”육경한은 콧방귀를 뀌었다. “애새끼한테 감정이 깊은가 보네. 지키겠다고 암에 걸렸다는 얄팍한 수작까지 부리고!”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진짜 아니야. 거짓말 아니라고!”“하나만 물어볼게, 김재성 알아 몰라?”“알아, 하지만...”육경한이 짜증스럽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전 남자 친구야?”소원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그래.”육경한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내려!”그는 다시는 그녀의 거짓말에 속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았다.소원은 육경한의 팔을 꽉 잡았다.“내 말 좀 들어봐. 그 사람하고 아무 일도 없었어. 절대 그 사람 아이일 리 없어!”육경한은 얇은 입술로 말을 차갑게 내뱉었다. “그놈이 아니면 다른 놈이겠지, 어차피 다른 새끼 애잖아!”그 애새끼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게 내버려두는 건 그에게 큰 모욕이 될 것이었다!그리고 방금 전, 그는 비서 소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알아본 결과 모두 사실이라는 결론을 들었다.빚이 있었던 의사는 소원에게 수술하는 척 거액의 돈을 챙겼고, 그 돈은 한이 그룹 계좌에서 빠져나갔다.소원의 부모님도 정말 위궤양일 뿐이라고 말했다.김재성은 과거 소원의 남자 친구였고 그 사이 소원의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아이를 낳는 상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몇 년 전, 두 사람이 한창 사랑에 빠졌을 때 소원은 종종 그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곤 했다.“육경한, 나 당신 아이 낳고 싶어!”당연히 곧바로 그의 품에 갇혀 제대로 혼쭐이 났지만.다만 당시 두 사람 모두 대학생이었고, 아이를 갖기에는 여러 가지 여건이 여의찮아서 피임을 했었다.두 사람은 졸업하자마자 아기를 갖기로 합의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몇 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을 다시 들은 육경한의 마음에는 더 이상 처음의 희열이 아닌 조롱과 증오만이 가득했다.그녀가 애새끼를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냥 둘 수 없었다.그는 여자의 턱을 세게 그러잡고 차갑게 말했다.“소원, 내가 매번 끝나고 피임약을 먹였는데 그게 어떻게 내 아이야?”소원은 턱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에 눈물이 차오르며 설명했다.“약 다 토했어.”관계가 끝나고 약을 뱉어내는 일이 몇 번 있었다.당시 위가 아파 항상 구토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위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단지 소화 불량이라고 생각했다.“소원, 고작 애새끼 때문에 별 수작을 다 부리네.”육경한은 차갑게 웃었다.“왜 토했어? 설마 내 아이를 갖고 싶었어?”소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려는 순간, 남자가 턱을 세게 잡은 채 쾅 소리와 함께 얼굴이 반쯤 시트에 눌렸다.남자의 표정은 차갑고 매정했다.“내 애가 맞다고 해도 난 지울 거야! 네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아이를 낳아? 넌 그럴 자격 없어!”육경한은 자신의 아이라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그는 절대 여자에게 속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여자가 자신을 속일 모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자신의 아이라니, 이 여자가 거짓말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었다면 또 속을 뻔했다.악독한 여자는 지난번 그를 사랑한다던 말처럼 늘 그를 휘어잡는 방법이 있었다.아직도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절대 안 돼! 절대로!육경한의 눈가
육경한은 광기에 휩싸여 당장이라도 이 망할 여자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이윽고 소원은 남자의 피 묻은 손이 칼날을 따라 손잡이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목을 잡는 게 보였다.두둑-소원의 손목이 그대로 무표정한 악귀 같은 남자의 손에 부러졌다!챙그랑-칼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아...” 소원은 고통을 호소하며 오른손을 맥없이 떨구었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비명으로도 사그라지지 않았다.그 고통이 가슴까지 뻗쳤다.육경한의 손바닥은 칼날에 베여 피가 멈추지 않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소원의 턱을 잡고 들어 올리며 뼛속까지 서늘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수술을 원하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면 되지.”소원은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제 팔이 부러져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곧바로 그의 손에 안전벨트를 채워지며 차는 그렇게 병원을 떠났다.곧이어 클럽에 들른 육경한은 소원을 차에서 끌어 내려 밀실로 들어갔다.안에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며 살집이 두둑한 남자 몇 명이 있었다.육경한은 시체처럼 소원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소파 털썩 앉더니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수표 더미를 던지며 느릿하게 말했다.“이 아가씨 제대로 모셔. 이 여자 기분 좋게 만들어주면 이 돈은 알아서 나눠 가져.”경호원들은 몇십 년 동안 이렇듯 좋은 일은 처음 겪는다.돈도 챙기고 데리고 놀 여자도 있다니!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순식간에 소원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미쳤어!이 남자는 완전히 미쳤다!소원은 그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짓밟기 위해 남자 몇 명을 데려올 줄은 몰랐다…굶주린 늑대처럼 생긴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소원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녀의 뒤에는 벽이었고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더듬더듬 술병 하나를 잡고 미친 듯이 휘둘렀다. “저리 가! 나한테 손대지 마! 다 꺼져!”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크게 비웃는 웃음소리뿐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그들은 단지 미인을 보기만 해도 돈을 챙길 수 있으니 실감 나게 연기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사건이 생겼다.소원의 유리구슬처럼 예쁜 눈동자엔 아무런 빛도 없었다.그녀는 차갑고 매정한 남자를 바라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한, 육씨 집안에 일이 생겼을 때 우리 아빠가 유일하게 잘못한 거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혼사를 취소한 이기적인 결정밖에 없어. 아빠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고생할까 봐 걱정했던 거야. 그땐 나도 아빠가 미웠고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다투고 단식 투쟁까지 했어. 근데 자기 딸을 아낀 게 죄야? 우리 집에서 당신 부모님 죽였어? 왜 이렇게까지 우리한테 모질게 구는 건데! 내가 당신을 갖고 놀고 속였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억지 때문에? 그래, 그게 진짜라고 쳐. 내가 정말 그랬다고 쳐. 오늘 죽음으로 갚을게, 됐지?”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 힘을 모아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목에 밀어붙였다.탁! 술병이 발에 차여 벽에 부딪혔다.쓰지 않는 왼손은 결국 육경한의 발만큼 빠르지 않았다.그가 발로 걷어차자 소원은 손목에 날카로운 통증만 느꼈다.결국 죽으려는 바람조차 빼앗기고 말았다.“모두 나가!”육경한은 거세게 포효했다.몇 안 되는 덩치 큰 남자들은 감히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물러갔다.육경한은 연약한 그녀의 몸을 벽에 밀착시키며 윽박질렀다.“소원, 죽어도 내 말은 안 듣겠다는 거지? 내가 말했지, 죽는 것도 내 허락받아야 한다고.”소원은 화난 표정도 없이 두 손을 힘없이 들어 축 늘어뜨렸다.그래, 허락을 받아야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또 잊었다.자신의 생사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조차 없었다.소원은 웃었다. 아름답고도 괴이한 미소였다.“육경한, 당신이 동의하든 안 하든 어차피 내 이 몸은 오래 못 버텨. 얼마나 화가 났든 빨리 푸는 게 좋을 거야, 나 정말 곧 죽을 거거든.”소원은 이 순간 죽음을 그토록 갈망했다. 죽으면 모든
“스읍…”소원은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며 고통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조금만 더 힘을 주면 죽을 수도 있는 동맥이었다.순간 악귀처럼 보였던 육경한이 그녀에게 엎드린 채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다시는 다른 남자 생각도 못 하게 해줄게.”남자의 손이 밑을 파고들며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이럴 때만 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불같이 뜨거운 그녀의 몸이 그의 자제력을 잃게 했다.소원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검은 깃털 같은 속눈썹에 젖은 눈물방울이 맺혔으며, 온몸의 비늘이 벗겨져 도마 위에 올려진 물고기가 된 듯 몸부림치는 것조차 부질없어 보였다.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육경한이 차갑게 쏘아붙였다.“꺼져!”문밖에는 소종이 있었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고했다.“도련님, 진아연 양이 몸이 안 좋아서 와달라고 합니다.”소원은 처음으로 진아연의 이름이 거룩하게 들렸다. 그녀를 구해주었다.육경한은 그래도 계속하고 싶었지만 휴대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진동했다.그는 주먹으로 테이블 유리를 내리치며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하지만 소원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육경한은 옷을 입은 뒤 아무렇게나 그녀에게 옷을 던져주고 함께 데려갔다.차는 육경한이 진아연을 위해 사둔 저택 마당에 멈춰 섰다.그런데 뜻밖에도 진아연은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열이 난 듯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육경한을 보자 그녀는 단숨에 남자의 품에 뛰어들었다.“내 곁에 있어 주지도 않고.”육경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서 왔잖아.”진아연은 매서운 눈빛으로 한눈에 차 안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저 망할 여자는 멀쩡했고 아이도 지우지 않았다!그녀는 불쾌한 듯 말했다.“경한 씨, 소원 씨도 같이 왔어요?”육경한은 무슨 생각인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진아연이 물었다.“왜 데려왔어요?”“너 몸 안 좋다며. 너 돌보라고 데려왔지.
잘생긴 육경한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손목까지 부러진 소원이 인질을 잡고 협박할 줄이야.역시나 이 교활한 여자를 간과했다. 그녀를 두고 방심하는 게 아닌데.“소원, 두 번 말 안 할 테니까 당장 아연이 놔줘!”그의 한없이 깊은 눈동자가 소원의 얼굴을 노려보며 맹독을 묻힌 화살처럼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그 표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떨게 만들었고, 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육경한이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짓밟을 것만 같은 분노가 유난히 강렬했다.그건 다름 아닌 소원이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진아연을 건드렸기에 이 지경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방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아빠라는 약점을 육경한 저 미친놈에게 계속 쥐어 줄 수는 없었다.혹시나 기분이 안 좋거나 자신이 말을 안 들으면 아빠는 당장이라도 감옥에 들어갈 테니까.아버지처럼 신체 기능이 저하된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멀쩡한 사람이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목숨을 반쯤 잃을 수도 있었다.한 번 들어가면 이번 생에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그리하여 그녀는 도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포크를 진아연의 목에 겨눈 채 겁 없이 육경한을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육경한, 20분만 줄 테니까 계약서랑 자료 가져와. 안 가져오면 이 여자 죽여버릴 거야.”이건 그녀의 한계였다. 지금 다친 그녀는 몸도 허약해 시간을 오래 끌 수 없었기에 빨리 끝내야 했다. 육경한의 눈동자에 거센 폭풍이 몰아쳤고 그는 가늘어진 눈매로 분명하게 말했다.“소원, 죽고 싶어!”지옥보다 더 서늘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했다.소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벽에 걸린 시계추를 쳐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도련님, 이제 19분 30초 남았네요.”퍽-살기 어린 남자의 주먹에 수억 가치
말을 마친 남자의 짙고 검은 눈동자가 소원을 노려보며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유언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소원은 뜻밖에도 전례 없는 평온함을 보였다.곧 죽게 될 사람이 뭐가 두렵겠나.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결국 죽으면 끝이 아닌가.곧이어 소종이 자료 더미를 들고 나타나 소원의 요청에 따라 하나하나 보여주며 모두 원본임을 확인시켰다.확인을 마친 소원이 매섭게 말했다.“여기서 태워버려!”소종은 육경한을 돌아보았고 그는 잘생긴 얼굴에 어둠이 드리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태워!”타오르는 불길이 순식간에 종이와 디스크를 집어삼켰다.소원의 표정은 더 이상 침착하지 않았고 다소 흥분한 기색도 보였다.숨겨진 위험은 제거되었고 아빠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그릇에 검은 재만 남았을 때 육경한은 이미 검은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비로운 검은색이 살기 어린 그의 잘생긴 모습을 덮고 있었다.육경한은 곧 죽일 듯한 무서운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더니 잇새로 한 마디를 뱉었다.“이제 놔!”소원은 여전히 진아연의 목을 조른 채 육경한과 신경전을 벌였다.“한 가지 더 약속해 줘.”“소원!” 남자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지금 당장 네 부모님을 잡아서 산골에 데려가 늑대 먹이로 던져 줘야겠어?”육경한의 얼굴에는 눈앞의 여자를 정말 짓밟고 싶다는 살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이렇듯 누군가에게 놀아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그럼 도련님이 더 빨리 움직이는지, 내 손이 더 빠른지 한번 볼까요?”소원은 침착하게 말을 뱉어냈지만 곧 손에 힘이 풀릴 거라는 걸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 오른손이 부러진 후 그녀는 팔의 힘으로 진아연을 포박할 수밖에 없었지만 고통은 무시할 수 없었다.손에 쥔 포크도 흔들리며 금방이라도 닿을 듯 위협적이었다.협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그녀는 분노에 찬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다시는 우리 부모님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내가 한 일은 내가
쾅!소리와 함께 화분이 바닥에 산산조각이 났다.소원은 통증이 가슴을 뚫고 퍼지며 결국 참지 못하고,“훅!”피를 한 웅큼 토하고 말았다.붉은 액체가 바닥을 물들였다.육경한은 반쯤 의식을 잃은 진아연을 안아 든 채 고개를 돌려 소원을 바라보았다. 지구 종말이 온 듯 빛 한줄기 없이 핏빛만 어린 새까만 눈동자였다.“소원, 네가 치르게 될 대가를 기대해.”뼛속까지 서늘한 냉기가 소원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둔탁한 발길질에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고 숨 쉬는 것조차 아팠다.그녀는 힘겹게 기침을 했고 입가에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다. 지옥에서 온 듯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경한, 내가 찌른 게 아니라 저 여자가...”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기도 싫다는 듯 진아연을 안고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갔다.소종은 그를 뒤쫓으며 물었다.“대표님, 소원 씨는 어떻게 할까요?”남자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더니 서늘하고 무정한 목소리가 들렸다.“들여보내야지.”그는 지금 그녀를 상대할 시간이 없었기에 우선 경찰서에 넘기려 했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죽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었다.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소원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동공이 흐려진 채 소종이 자신을 끌어올릴 때까지 점점 더 멀어지는 남자를 바라만 보았다....윤혜인은 소원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당황했다.수업이 없는 날이면 소진용과 전미영을 돌보기 위해 병원에 가는데 두 어르신도 소원의 행방을 몰랐다.윤혜인은 두 어르신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소원이 실종되었다는 걸 알려도 걱정만 더할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그저 소원에게 일이 생겨 바쁘다며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둘러댔다.48시간이 넘도록 연락이 닿지 않자 윤혜인은 신고하러 경찰에 갔다가 소원이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무슨 일인지 알아내려고 하지만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알려주지 않았다.윤혜인은 소진용과 전미영의 건강 상태로는 이 충격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