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미정이 거들었다.“맞아. 소미가 나한테도 별것도 아닌 것을 크게 만들었다고 그 사람 욕을 어찌나 하는지.”“이건 아줌마가 주는 것이니 받아. 이 일은 소미가 입이 싸서 벌어진 거여서 할머니께 정중하게 사과드리라고 내가 단단히 일렀어.”윤혜인은 그 봉투를 문미정의 얼굴에 뿌리며 분노했다.“꺼지라고 했잖아! 안 들려? 당장 꺼져!”지폐가 공중에 흩어졌다. 예리한 모서리가 하마터면 두 모녀의 얼굴에 상처를 남길 뻔했다.그날 소위 말한 그녀의 ‘부끄러운’ 흔적들처럼, 인간의 심리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지고 있었다.언어폭력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지만, 거짓된 사죄 한마디면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들의 생활로 돌아간다.왜!송소미는 겁에 질려 소리쳤다.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정도껏 해야지 할머니가 노쇠해서 돌아간 거지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 게다가 80세가 넘지 않았어요? 매일 병원에 서 누워있으면서 돈만 축내고 있는데 당신 같은 가난뱅이가 어떻게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내가 당신을 도와준 거나 다름없은데 나에게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인데...”“닥쳐!”문현미가 송소미의 따귀를 날리려 했다. 하지만 윤혜인이 한발 빨랐다. 그녀는 송소미의 목을 졸랐다.그녀는 화난 한 마리 야수 같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너무 힘을 준 탓에 하얗게 변했고 손등의 힘줄이 떠질 듯이 돋아났다.마음 깊숙히 억눌려 있던 아픔과 분노 그리고 미움이 한꺼번에 폭발했다.무엇 때문에 그녀가 이런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할머니는 정직하고 부지런히 살아왔던 아들을 잃었지만, 단 한 번도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한 적 없었고 오히려 삶을 갈망하고 사랑했으며 열심히 그녀를 보살폈다.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걱정했고, 그녀를 믿는다고 말하며 거듭 미안하다고만 했다...이렇게 자애롭고 착한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불행을 맞이해야 하는가! 왜 마지막까지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항상 착하고 고분고분한 윤혜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줄은 몰랐다.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송소미는 호흡을 되찾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딸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문미정은 그제야 안도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내 딸을 죽이려 해!”“죽어 마땅해!”단답으로 내뱉는 윤혜인는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문미정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흠칫 놀랐고 공포를 느꼈다.윤혜인은 어마어마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겨우 정신을 차린 송소미는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엄마... 저년이 날 죽이려 해요. 도와줘요.”딸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문미정은 달려들어 윤혜인의 머리채를 잡으려 했다.하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그 둘 모녀를 보고 싶지도 않았던 이준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끌어내! 다시 나타나면 그때는 강에 던져버려!”그렇게 빈소는 고요를 되찾았다.이준혁은 외할머니의 초상 앞에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머리를 숙였다.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윤혜인에게 다가갔다.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항상 씩씩했지만, 지금은 미움과 자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같이 극심한 고통이 이어졌다.그에게 할머니를 보러 오라고 애원했을 때, 뭐라고 했던가?억지 부리지 말라며 유치하다고 했고 왜 그렇게 독하냐고 무턱대고 차분해지라고만 했다.그녀가 제일 힘든 순간에 그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고 냉혹한 말들로 그녀에게 상처를 줬다.그는 할머니를 유감 가득한 채로 떠나게 했다.그는 나쁜 자식이다.“혜인아... 미안해...”이준혁은 무릎을 꿇었다. 마음 아팠던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려고 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를 뿌리쳤다.눈시울이 붉어지고 긴 머리가 흐트러졌다. 그녀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그녀의 두 눈은 차갑게 식었다.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런 느낌인 것 같다.그저 아주 평온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그런 느낌.오후에 이신우가 빈소를 찾았다.그는 이준혁을 지나치면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할머니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그리고 그는 윤혜인을 마주했다.수없이 많을 도움을 받았기에 윤혜인은 몸을 일으켜 고마움을 표시했다. 너무 급히 움직인 탓 그녀는 잠시 휘청거렸고 이신우가 잡아주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이준혁은 이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윤혜인과 삼촌... 어떻게 아는 사이지?이신우는 이내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가 문을 나서려는데 이준혁이 먼저 그를 불렀다.“삼촌.”이신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짙은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혜인이는 내 와이프예요.”경고이면서도 떠보고 있는 것이었다.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삼촌이기 때문이다.모두들 36살 이신우가 아직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라고 여겼지만 이준혁은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란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때문에 할아버지와 대적할 정도였으니까.하지만 어렴풋하게 전해 들은 데 의하면 명문가의 아가씨라 윤혜인과는 출신부터 달라 이신우가 이러는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이신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지금은 너의 와이프란 걸 알고 있어.”지금은?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한마디에 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이신우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떠났다.이준혁의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윤혜인은 억지로 몇 술 뜨는 정도였다.이준혁이 뭐라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밤에 윤혜인은 빈소를 지켰다.이것은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이면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비는 아직 내리고 있었고 이준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있었다.이건 그가 할머니께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여보’란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후려쳤다.팔을 뺄 기운이 없던 그녀는 그저 차갑게 뱉을 뿐이다.“놔요!”전혀 숨김없는 혐오스러운 눈빛에 이준혁은 가슴이 아팠지만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몸을 돌린 윤혜인은 기진맥진한 몸을 움직였다.그러다-“털썩-”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서 아무런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준혁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 순간,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혜인아!”그는 달려가 그녀를 안으며 외쳤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눈을 감고 있는 윤혜인은 꿈을 꾸고 있었고 온통 이준혁과 임세희의 친밀한 모습이었다.자존심과 오만을 버리고 할머니를 보러 오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차갑게 비웃었다.“세희야 말로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야...”“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심장이 사방으로 찢기는 것 같았다.너무 고통스러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은 윤혜인은 고통스러운 악몽에서 깨어났다.“혜인아?”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의식이 또렷해지고 코끝에 짙은 소독수 냄새가 났다.“왜 그래?”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잘생긴 눈동자에 붉은 혈관으로 가득했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윤혜인은 손을 빼며 거부했다.“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나가요!”“혜인아 진정해...”이준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다 이내 윤혜인의 복부를 바라봤고 다시 따뜻해졌다.“임신이래.”의사가 임신이라고 했을 때 이준혁이 얼마나 기뻤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마치 벼랑 끝에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그는 윤혜인이 힘들까 봐 주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적절한 때에 선물이 찾아왔다.아기가 생겼으니 윤혜인이 이제 더 이상 그와 이혼하겠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손을 뻗어 이불 위로 아기를 만지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이 차갑게 으르렁거렸다.“이건 내아이에요.”전혀 놀라지 않는 윤혜인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목소리도 조금 다운되었다.“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 이미 죽었나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당황했다. 그에게 윤혜인은 너무 착해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이준혁의 표정에 윤혜인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대신 대답할게요. 아직 안 죽었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당신이 안 그럴 거란걸 보장할 수 있죠? 다음에도 그녀가 이런다면요? 그녀를 내버려두고 저를 선택할 건가요?”“그게 아니라 혜인아, 난...”흥분한 윤혜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아니! 당신은 절대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내 아이에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니, 당신은 상관하지 않아도 돼요. 이혼계약서는 이미 도장찍었고 1달 후에는 이혼할 거라고 어머님과도 약속했어요. 며칠만 참으면 당신은 자유로울 수 있으니...”윤혜인은 아니꼽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더 이상 애쓰지 말아요.”분명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지?또다시 임세희를 선택했을 때 그는 이미 그들의 금이 간 부부관계를 완전히 깨뜨렸다.그녀는 물러나기로 결심했고 그들을 축복해 주기로 했다.그들에게 걸림돌인 자신이 사라지면 된다.굳게 다문 이준혁의 입술이 한참 후 벌어졌다.“싫어.”“당신에게 거절할 자격이 있어요?”윤혜인의 차가운 웃음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내 이 심장은 당신이 직접 짓밟은 거예요.”둘 사이에 어떠한 회유의 여지도 없었다.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것이다.상처로 가득한 마음은 더는 견딜 수 없다.윤혜인의 말은 칼날이 되어 이준혁의 심장에 내리꽂혔다.윤혜인이 단단히 결심한 것을 느껴졌지만 그는 손을 놓기 싫었다.그녀가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생각만으로도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그녀를 안으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윤혜인이 몸을 피했다.이준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보상해 줄게. 반드시 보상해 줄 거야.
이준혁은 멈칫하며 해명했다.“할머니께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세희는 침대에 누워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에 가담할 수 있다는 거야?”듣고 있던 윤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거 봐요. 당신의 맹세는 아무 가치도 없어요.”이준혁이 임세희에 대한 믿음은 이미 뼈에 새겨진 것이었다.임세희와 연관 있다고 그녀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즉시 조사하는 대신 임세희를 대신해 변명하고 있지 않는가?“네가 할머니를 잃은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 그런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소미로부터 만족스러운 해답을 가져다줄게.”“됐어요.”너무 우스웠다.할머니의 죽음도 임세희의 한 개 손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견고한 자리를 자신이 어떻게 넘볼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임세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했을까?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준혁은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느낌이다.당황한 그는 그녀의 거절을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그녀를 품속에 와락 껴안았다.“혜인아, 내가 너의 마음을 돌려놓을 거야. 시간을 줘.”윤혜인은 발버퉁쳤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그녀의 마음은 이미 재가 되었다.“제발 날 놓아줘요. 이혼은 서로에게 좋아요.”“안돼.”이준혁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윤혜인의 말투에는 짙은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이미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들판에 피어 난 꽃도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다니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에요?”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이 말하려는데 윤혜인 그를 밀쳤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이혼 꼭 하고 말겠어요. 당신 가문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장 찍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윤혜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녀는 확고하고 말했다.“이혼 소송을 할 거예요.”이건 진흙탕 싸움을 하겠단 뜻이었다.그야말로 빅이슈일 것이다.이준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야?”그들이 법정 싸움까
이준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윤혜인은 이을 악물었다.“이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지울 거예요.”그녀는 마음속으로 힘껏 ‘퉤퉤퉤’ 하며 아이에게 사죄했다.[아가, 진심이 아니야. 엄마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혼하고 싶어서 그래. 엄마는 널 끝까지 책임질 거니까. 화내지 말아줘.]순간, 이준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분노했다.“그러기만 해 봐 어디!”윤혜인은 강경하게 말했다.“당신에게 통제당하지 않을 거예요. 내 아이이고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이 이혼은 꼭 하고 말 테다.영원히 절대적인 선택을 받지 못하는 느낌은 너무 최악이었다.그녀는 한번 두번 반복되는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분노가 쌓인 이준혁이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전에 본적 없는 살기였다.“내가 안된 다면 안 되는 줄 알고 벗어나려고 꿈도 꾸지 마.”...병실 밖.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임세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송소미 이 바보 같은 년이 아이를 처리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오빠가 아이 존재를 알아채기까지 했다.큰 공을 들여 오빠를 붙잡고 해외에서 3일 더 머물렀는데 자신이 깨어나기도 전에 오빠는 이미 귀국해서 그녀도 바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오늘 들은 그녀는 특별히 병문안을 온 척하며 방문해 윤혜인을 자극하려 했는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빠는 왜 이혼 하려 하지 않는 걸까?그리고 어떻게 저 년이 자신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화가 난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휴지통에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임향숙이 그녀에게 물었다.“아가씨, 이대로 돌아가게요?”“안 가고 여기서 오빠가 저년을 잡는 거 지켜볼까요?”그녀는 화를 내며 덧붙였다.“그녀가 죽었으면 좋겠어요.”‘그녀’가 누구를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들을 수 있었다.임향숙은 그녀를 위로했다.“아가씨,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그게 뭐죠?”“3개월 전에 대표님이 거의 한 달을 L 국의 계열사에 머
문현미가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이준혁을 나무랐다.“임신한 몸이야. 여기서 화를 돋우지 말고 의사 선생님한테서 초음파 결과 가져와.”문현미는 자신의 계획이 있었다.남자는 여자보다 세심하지 못한 법이다.피검사에서 임신을 확인한 후 그녀는 초음파검사를 시켰다.첫 초음파 사진을 이준혁이 받게 하여 아기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시키면 꼿꼿한 저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와이프를 아끼게 될 것이다.윤혜인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본 이준혁도 더 이상 대립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렸고 의사에게로 향했다.의사는 그에게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당부했다.“임신 15주이지만 발육이 더뎌서 영양에 각별히 신경 쓰세요.”의사를 뚫어지고 바라보는 이준혁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몇 주라고요?”그의 눈빛에 의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초음파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대답했다.“십, 십오 주요...”주먹을 쥔 이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생긴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어떻게 15주란 말인가!그때, 그는 회사 계열사 일을 처리하느라 거의 한 달은 돌아오지 못했다.병실.죽을 들고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던 문현미는 그가 들어오자,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받았어?”“네.”차갑게 대답하는 이준혁은 저기압이었다.하지만 문현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몸을 너무 급히 일으킨 탓에 그녀는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문현미는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요 며칠 윤혜인과 함께 거사를 치르느라 무리했던 것 같다. 이준혁은 집사에게 문현미를 집으로 모시라고 지시했다.하지만 문현미는 거절했다.“내가 혜인이를 돌봐야 해.”이준혁이 차갑게 말했다.“내가 돌 보면 돼요.”두 사람이 함께 있길 바라는 문현미여서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녀가 떠나기 전 이준혁이 당부 한마디 했다.“혜인이가 임신한 건 당분간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해요.”문현미는 흠칫했다.“할아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