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 대한 감정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런 느낌인 것 같다.그저 아주 평온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그런 느낌.오후에 이신우가 빈소를 찾았다.그는 이준혁을 지나치면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할머니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그리고 그는 윤혜인을 마주했다.수없이 많을 도움을 받았기에 윤혜인은 몸을 일으켜 고마움을 표시했다. 너무 급히 움직인 탓 그녀는 잠시 휘청거렸고 이신우가 잡아주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이준혁은 이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윤혜인과 삼촌... 어떻게 아는 사이지?이신우는 이내 자리를 떠나려 했다.그가 문을 나서려는데 이준혁이 먼저 그를 불렀다.“삼촌.”이신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짙은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혜인이는 내 와이프예요.”경고이면서도 떠보고 있는 것이었다.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삼촌이기 때문이다.모두들 36살 이신우가 아직 결혼하지 않는 이유가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어서라고 여겼지만 이준혁은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란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 때문에 할아버지와 대적할 정도였으니까.하지만 어렴풋하게 전해 들은 데 의하면 명문가의 아가씨라 윤혜인과는 출신부터 달라 이신우가 이러는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이신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지금은 너의 와이프란 걸 알고 있어.”지금은?여러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한마디에 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하지만 이신우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떠났다.이준혁의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었다.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윤혜인은 억지로 몇 술 뜨는 정도였다.이준혁이 뭐라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밤에 윤혜인은 빈소를 지켰다.이것은 그녀가 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이면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한다.비는 아직 내리고 있었고 이준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있었다.이건 그가 할머니께 마지막으로 해드릴 수
‘여보’란 말이 윤혜인의 마음을 후려쳤다.팔을 뺄 기운이 없던 그녀는 그저 차갑게 뱉을 뿐이다.“놔요!”전혀 숨김없는 혐오스러운 눈빛에 이준혁은 가슴이 아팠지만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몸을 돌린 윤혜인은 기진맥진한 몸을 움직였다.그러다-“털썩-”바닥에 쓰러진 그녀에게서 아무런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이준혁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그 순간,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혜인아!”그는 달려가 그녀를 안으며 외쳤다.“당장 병원으로 가!”...병원.눈을 감고 있는 윤혜인은 꿈을 꾸고 있었고 온통 이준혁과 임세희의 친밀한 모습이었다.자존심과 오만을 버리고 할머니를 보러 오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차갑게 비웃었다.“세희야 말로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야...”“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심장이 사방으로 찢기는 것 같았다.너무 고통스러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은 윤혜인은 고통스러운 악몽에서 깨어났다.“혜인아?”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의식이 또렷해지고 코끝에 짙은 소독수 냄새가 났다.“왜 그래?”이준혁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잘생긴 눈동자에 붉은 혈관으로 가득했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어?”윤혜인은 손을 빼며 거부했다.“보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나가요!”“혜인아 진정해...”이준혁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다 이내 윤혜인의 복부를 바라봤고 다시 따뜻해졌다.“임신이래.”의사가 임신이라고 했을 때 이준혁이 얼마나 기뻤는지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마치 벼랑 끝에서 되살아난 느낌이었다.그는 윤혜인이 힘들까 봐 주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적절한 때에 선물이 찾아왔다.아기가 생겼으니 윤혜인이 이제 더 이상 그와 이혼하겠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손을 뻗어 이불 위로 아기를 만지려 했다.하지만 윤혜인이 차갑게 으르렁거렸다.“이건 내아이에요.”전혀 놀라지 않는 윤혜인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렸고 목소리도 조금 다운되었다.“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 이미 죽었나요?”그녀의 말에 이준혁은 당황했다. 그에게 윤혜인은 너무 착해서 개미 한 마리 못 죽이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단 말인가?이준혁의 표정에 윤혜인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대신 대답할게요. 아직 안 죽었죠? 그렇다면 무엇으로 당신이 안 그럴 거란걸 보장할 수 있죠? 다음에도 그녀가 이런다면요? 그녀를 내버려두고 저를 선택할 건가요?”“그게 아니라 혜인아, 난...”흥분한 윤혜인이 그의 말을 잘랐다.“아니! 당신은 절대 그러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내 아이에요. 스스로 책임질 수 있으니, 당신은 상관하지 않아도 돼요. 이혼계약서는 이미 도장찍었고 1달 후에는 이혼할 거라고 어머님과도 약속했어요. 며칠만 참으면 당신은 자유로울 수 있으니...”윤혜인은 아니꼽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더 이상 애쓰지 말아요.”분명히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뭐지?또다시 임세희를 선택했을 때 그는 이미 그들의 금이 간 부부관계를 완전히 깨뜨렸다.그녀는 물러나기로 결심했고 그들을 축복해 주기로 했다.그들에게 걸림돌인 자신이 사라지면 된다.굳게 다문 이준혁의 입술이 한참 후 벌어졌다.“싫어.”“당신에게 거절할 자격이 있어요?”윤혜인의 차가운 웃음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내 이 심장은 당신이 직접 짓밟은 거예요.”둘 사이에 어떠한 회유의 여지도 없었다.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시는 믿지 않을 것이다.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을 것이다.상처로 가득한 마음은 더는 견딜 수 없다.윤혜인의 말은 칼날이 되어 이준혁의 심장에 내리꽂혔다.윤혜인이 단단히 결심한 것을 느껴졌지만 그는 손을 놓기 싫었다.그녀가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생각만으로도 극심한 고통이 전해졌다.그녀를 안으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윤혜인이 몸을 피했다.이준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보상해 줄게. 반드시 보상해 줄 거야.
이준혁은 멈칫하며 해명했다.“할머니께서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때 세희는 침대에 누워있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에 가담할 수 있다는 거야?”듣고 있던 윤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거 봐요. 당신의 맹세는 아무 가치도 없어요.”이준혁이 임세희에 대한 믿음은 이미 뼈에 새겨진 것이었다.임세희와 연관 있다고 그녀가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즉시 조사하는 대신 임세희를 대신해 변명하고 있지 않는가?“네가 할머니를 잃은 마음은 이해해. 그러니 그런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소미로부터 만족스러운 해답을 가져다줄게.”“됐어요.”너무 우스웠다.할머니의 죽음도 임세희의 한 개 손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이렇게 견고한 자리를 자신이 어떻게 넘볼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임세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했을까?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던 이준혁은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느낌이다.당황한 그는 그녀의 거절을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그는 그녀를 품속에 와락 껴안았다.“혜인아, 내가 너의 마음을 돌려놓을 거야. 시간을 줘.”윤혜인은 발버퉁쳤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미약했다.그녀의 마음은 이미 재가 되었다.“제발 날 놓아줘요. 이혼은 서로에게 좋아요.”“안돼.”이준혁은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절대 안 돼. 꿈도 꾸지 마.”윤혜인의 말투에는 짙은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이미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들판에 피어 난 꽃도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하다니 너무 욕심이 과한 거 아니에요?”눈살을 찌푸린 이준혁이 말하려는데 윤혜인 그를 밀쳤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이 이혼 꼭 하고 말겠어요. 당신 가문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면 당장 도장 찍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윤혜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그녀는 확고하고 말했다.“이혼 소송을 할 거예요.”이건 진흙탕 싸움을 하겠단 뜻이었다.그야말로 빅이슈일 것이다.이준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야?”그들이 법정 싸움까
이준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보았다.윤혜인은 이을 악물었다.“이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지울 거예요.”그녀는 마음속으로 힘껏 ‘퉤퉤퉤’ 하며 아이에게 사죄했다.[아가, 진심이 아니야. 엄마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혼하고 싶어서 그래. 엄마는 널 끝까지 책임질 거니까. 화내지 말아줘.]순간, 이준혁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분노했다.“그러기만 해 봐 어디!”윤혜인은 강경하게 말했다.“당신에게 통제당하지 않을 거예요. 내 아이이고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이 이혼은 꼭 하고 말 테다.영원히 절대적인 선택을 받지 못하는 느낌은 너무 최악이었다.그녀는 한번 두번 반복되는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분노가 쌓인 이준혁이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전에 본적 없는 살기였다.“내가 안된 다면 안 되는 줄 알고 벗어나려고 꿈도 꾸지 마.”...병실 밖.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임세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송소미 이 바보 같은 년이 아이를 처리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오빠가 아이 존재를 알아채기까지 했다.큰 공을 들여 오빠를 붙잡고 해외에서 3일 더 머물렀는데 자신이 깨어나기도 전에 오빠는 이미 귀국해서 그녀도 바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그녀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오늘 들은 그녀는 특별히 병문안을 온 척하며 방문해 윤혜인을 자극하려 했는데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오빠는 왜 이혼 하려 하지 않는 걸까?그리고 어떻게 저 년이 자신을 의심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화가 난 그녀는 과일 바구니를 휴지통에 버리고 자리를 떠났다.임향숙이 그녀에게 물었다.“아가씨, 이대로 돌아가게요?”“안 가고 여기서 오빠가 저년을 잡는 거 지켜볼까요?”그녀는 화를 내며 덧붙였다.“그녀가 죽었으면 좋겠어요.”‘그녀’가 누구를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들을 수 있었다.임향숙은 그녀를 위로했다.“아가씨, 저에게 좋은 방법이 있어요.”“그게 뭐죠?”“3개월 전에 대표님이 거의 한 달을 L 국의 계열사에 머
문현미가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이준혁을 나무랐다.“임신한 몸이야. 여기서 화를 돋우지 말고 의사 선생님한테서 초음파 결과 가져와.”문현미는 자신의 계획이 있었다.남자는 여자보다 세심하지 못한 법이다.피검사에서 임신을 확인한 후 그녀는 초음파검사를 시켰다.첫 초음파 사진을 이준혁이 받게 하여 아기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시키면 꼿꼿한 저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와이프를 아끼게 될 것이다.윤혜인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본 이준혁도 더 이상 대립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렸고 의사에게로 향했다.의사는 그에게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당부했다.“임신 15주이지만 발육이 더뎌서 영양에 각별히 신경 쓰세요.”의사를 뚫어지고 바라보는 이준혁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몇 주라고요?”그의 눈빛에 의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초음파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대답했다.“십, 십오 주요...”주먹을 쥔 이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생긴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어떻게 15주란 말인가!그때, 그는 회사 계열사 일을 처리하느라 거의 한 달은 돌아오지 못했다.병실.죽을 들고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던 문현미는 그가 들어오자, 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받았어?”“네.”차갑게 대답하는 이준혁은 저기압이었다.하지만 문현미는 신경 쓰지 않았다.몸을 너무 급히 일으킨 탓에 그녀는 휘청거렸고 이준혁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문현미는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요 며칠 윤혜인과 함께 거사를 치르느라 무리했던 것 같다. 이준혁은 집사에게 문현미를 집으로 모시라고 지시했다.하지만 문현미는 거절했다.“내가 혜인이를 돌봐야 해.”이준혁이 차갑게 말했다.“내가 돌 보면 돼요.”두 사람이 함께 있길 바라는 문현미여서 마지못해 동의했다.그녀가 떠나기 전 이준혁이 당부 한마디 했다.“혜인이가 임신한 건 당분간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해요.”문현미는 흠칫했다.“할아
이준혁의 눈에는 그녀가 켕기는 것이 있어서 망설이고 있다고 여겼다.이준혁은 실망감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그래서... 그래서 네 아이라고 했군.”“그게...”윤혜인은 무의식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미친 듯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분노했다.“해명해 봐! 어디 한번 해명해 보라고!”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너무 강해서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이준혁의 행동은 둘 사이에 거론할 믿음 따위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그래서 이준혁은 문현미더러 할아버지께는 비밀로 하자고 한 것이다.초음파를 받아 든 그는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를 불신하고 있었다.이왕 그렇게 믿고 있는 거라면 무슨 해명이 더 필요한가?그녀가 뭐라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텐데 말이다.그녀의 눈가가 살짝 젖어 들었다. 그녀는 이준혁을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할 말 없어요.”“하!”이준혁은 갑자기 처량하게 웃었다.“그 정도로 내가 미웠던 거야? 그래서 거짓말 한마디도 하기 싫어? 네가 임신한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넌 모를 거야!”윤혜인이 임신한 소식을 듣고 기뻤던 마음과 그 꿈이 산산이 부서짐으로 인한 분노는 정비례했다.그는 여태 윤혜인이 마음만 떠난 것이라고 생각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되돌릴 거라고 다짐했다.그런데 인제 와 보니 그녀는 몸까지 더러워진 것이다.3개월?허!지난 3개월 동안 그녀와 몸을 섞은 차수를 떠올리니 갑자기 너무 역겨웠다.깨끗한 여자를 좋아하는 그는 지금 너무 더럽다고 느꼈다.이준혁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그놈이 누구야!”이불을 잡고 있는 윤혜인은 얼굴이 일그러졌다.점점 다가오는 이준혁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한 씨야? 아니면 새로 만난 내... 삼촌?”빈소에서 두 사람이 악수하던 장면과 의미심장한 내뱉던 이신우의 모습이 떠오른 이준혁은 한기를 뿜어내며 말했다.“그렇게 몸을 놀리고 싶었던 거야? 야수도 가려가며 먹이를 사냥해. 넌 어떻게 이
이 순간, 윤혜인은 이준혁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살기를 확실하게 느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되레 자신의 가는 목을 조금 더 빳빳하게 치켜들었다.만약 이준혁의 분노를 감당하는 것으로 그녀가 그를 영원히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절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윤혜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하지만 이준혁의 손은 새하얀 윤혜인의 피부에 닿기 전에 흠칫했다가 뒤에 있던 벽에 강하게 내리꽂았다.쿵!거대한 마찰음이 들렸다. 윤혜인이 눈을 떴을 때 이준혁의 얼굴은 코앞에 있었다. 그의 손등은 피범벅이 되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꽉 잡았다.“윤혜인,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일부러 날 화나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이준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지만 등은 꼿꼿하게 세웠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준혁처럼 평생을 고고하게 살아온 사람은 절대 상대방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그는 자신을 배신한 상대방이 역겹고 더럽게 느껴질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은 그가 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이준혁이 한번 또 한번 임세희를 감쌀 때마다 점점 차갑게 식어버렸다.이준혁의 분노가 지금 그녀가 느끼는 분노보다 더 할까?2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보면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는 윤혜인에 대한 믿음이 추호도 없다.검사 결과지 하나로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하고 있고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다.심지어 이준혁은 다시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으니 뱃속의 아이는 윤혜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그녀는 뱃속의 아이까지 잃으면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와 이준혁은 결국 오랫동안 함께 하지 못할 것이고 그때가 되어 윤혜인이 이씨 가문의 핏줄을 데리고 떠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다.잘못된 검사 결과가 누군가가
‘이건 협박이잖아. 전부 육경한이 이미 써먹고 남긴 수작일 뿐이지.’그는 사람과 협박을 주고받으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실질적인 상업 전쟁을 선호했고 필요하다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말 몇 마디로 강한 척하며 겁을 주는 방식은 방현수의 스타일이 아니었다.역시나 방현수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그게 무슨 뜻이지?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모자라 내 자식들까지 망하게 하겠다는 건가?”‘돌봐주긴 뭘!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육경한 이 녀석, 결국 내 자식과 손주들을 협박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성대하게 열어주겠다고? 파렴치한 놈, 칼로 사람의 가슴에 직접 찔러 넣는 것처럼 아픈 곳만 골라 찌르다니!’분노한 방현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이놈의 자식, 내가 못할 줄 알아? 내 나이에 이 늙은 뼈다귀가 뭘 더 아끼겠어? 네가 그 여자 때문에 친척이고 뭐고 다 끊겠다면 난 자네 미우 그룹 대문 앞에서 죽어버리겠어! 정말 나한테 망신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벌일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정말 모든 사람들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하지만 육경한은 오히려 더욱 차분해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번 해보시죠. 다만 그 뒤로는 대표님의 사생자들조차 돌볼 수 없게 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방현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가 알기로만 해도 서울에 세 명, 아르틴국과 리셀국에도 각각 있고 유학 중인 손주들도 세 명이 있더군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결혼하고 자식 낳는 걸 지켜보지도 못하고 떠나실 건가요?”그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아마 대표님께선 크게 후회하실 겁니다.”육경한이 자신의 속내를 샅샅이 조사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방현수는 말을 잃었다.심지어 사생자들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니, 육경한은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기다렸던 게 분명했다.“육경한! 자네 정말 그 미친 여자를 위해 우리 방씨 가문을 적으로 돌릴 거야?”방현수는 분노에
육경한의 얼굴이 단번에 싸늘해졌다.방현수의 말은 듣는 사람을 우롱하는 태도로 육경한을 바보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오랜 시간 수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히 단련된 육경한은 누구보다도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제가 대표님을 존경하는 건 사실입니다. 대표님은 저희보다 먼저 사업을 시작하셨고 경험도 풍부하시죠.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당시 대표님께서도 충분히 이익과 손실을 따져본 후 결정을 내리신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죠. 그때 대표님께서 그 프로젝트를 받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제 죄책감을 조금 더 이용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수락하신 순간, 저희 관계는 돈과 물건이 모두 깨끗이 정리된 상태가 된 겁니다. 방씨 가문이 그동안 가져간 이익은 투자 대비 몇 배, 아니 몇십 배나 됩니다.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꺼내 드시는 건 저로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신다면 저도 공공의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할 겁니다. 상관없거든요. 대표님 생각은 어떠신가요?”육경한의 긴 발언은 방현수를 완전히 말문 막히게 만들었다.그는 육경한이 평소 강단 있고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침착한 목소리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하지만 방현수도 노련한 사람이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다 이내 그는 표정을 비틀며 말을 꺼냈다.“육경한, 자네 말은 내가 잘못했다는 뜻인가? 내가 늙은 몸으로 직접 찾아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나온다니...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목소리가 떨리는 채로 방현수는 지팡이를 바닥에 힘껏 내려쳤다.그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바로 죽음을 빌미로 하는 협박이었다.그는 자신의 나이를 무기로 삼아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다.방씨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방현수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민기는 어찌 됐
육경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의 통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그의 키가 큰 체구와 균형 잡힌 몸은 우뚝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서른 살이라는 남자의 가장 좋은 시기에 성숙함과 재력, 자신감까지 더해져 그의 매력은 한층 빛났다.그는 알고 있었다.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또 하나의 배은망덕하다는 낙인이 찍힐 거라는 것을.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왜냐하면 방씨 가문을 등지는 또 다른 한쪽에는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남자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응접실에 들어섰다.그의 곧은 자세와 당당한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응접실 안에서 방현수는 마치 하룻밤 사이에 더 늙어버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육 대표, 요즘은 당신 얼굴 보기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네.”육경한은 그에게 다가가며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무슨 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찾아오시니 미우 그룹으로서는 정말 영광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든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방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말했다.“내가 여기 앉아 있는다고 해서 방씨 가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 방씨 가문에는 고작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는데... 둘 다 감옥에 들어갔어. 이봐, 육 대표.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육경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그 말씀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 방씨 가문을 직접적으로 해칠 이유도, 의도도 없습니다.”하지만 방현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그 여자가 한 짓이나 네가 한 짓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야? 자네의 묵인이 없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었겠어? 자네는 그냥 작게라도 손을 써서 그 여자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막아야 했어.”육경한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여자가 그 영상을 경찰에 넘길 거라고는 정말 몰랐습니다.”이 말은 완
소원은 진아연의 방 한가운데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그 사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진이었다.게다가 사진 위에는 자신을 저주하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이로써 소원은 선미가 진아연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게 아니면 두 사람은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고 원한도 없는데 왜 소원을 저주했겠는가?밖에서 집주인 아주머니는 계속 분노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중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아! 귀신이다! 아아아악!”소원은 놀라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비명 소리가 난 곳은 화장실이었다.화장실로 다가간 소원은 욕조 안에 누워 있는 선미를 발견했다.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고 선미의 손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는 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고 욕조의 물은 그녀의 입술 바로 아래까지 차 있었다.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물이 코까지 차올라 익사할 뻔한 상황이었다.그 끔찍한 장면은 누구라도 충격과 공포를 느낄 만큼 끔찍했다.하지만 소원은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며 경찰과 구급차를 불렀다.그리고 집주인 아주머니를 부축해 집 밖으로 나왔다.집 안은 발을 딛을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원은 아주머니를 계단에 앉혔다.아주머니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셔츠의 단추를 풀어준 뒤,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소원은 진아연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대어 숨을 확인했다.미약하나마 숨은 쉬고 있었다.이 상황을 보며 소원은 진아연 스스로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대체 누구의 원한을 샀길래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목숨을 위협받아야 하는 걸까?’소원은 진아연을 미워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사람을 다룬다고 해서 자신이 행복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악인이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다.경찰은 현장을 조사했고 진아연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소원과 집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차를 타고 함께 경찰서로 가서 진술을 했다.한편, 미우 그룹.
‘만약 현재가 날 모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앞쪽에서 택시 기사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소원은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하고 서현재와 관련된 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하나씩 차근차근 풀어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의문점이 드러나리라.택시에서 내린 소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선미가 살고 있는 곳은 고급스럽지 않은 낡은 아파트 단지였다. 건물은 오래된 데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영숙이 준 주소를 따라 1층에 있는 선미의 집을 찾은 소원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다시 영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언니, 선미 출근한 거예요?”“아니야. 그 애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사흘째 안 나왔어.”영숙이 물었다.“거기 아무도 없니?”소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네, 조금 전부터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도 없어요.”“저 죽일 놈의 계집애 혹시 도망친 거 아냐?”영숙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나한테 1억 6000만 원 갚지 않았거든.”과거 선미가 저지른 사고로 생긴 빚의 일부는 방민기를 잘 구슬려 덜어냈다.방민기는 몸이 불편해도 마음은 따뜻했고 선미가 그의 취향을 잘 맞춰준 덕분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었다.하지만 선미가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여권과 신분증이 모두 영숙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더욱이 선미의 성형미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는 없었기에 그녀를 위해 헌신하려는 남자도 없었다.소원은 말했다.“그럼 제가 더 알아볼게요.”그녀는 선미의 직장 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고 집 안에서도 전화벨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때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단으로 올라오다가 소원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아가씨, 여기 사는 여자 찾으시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아줌마, 혹시 아세요?”“알죠. 여기 집도 내가 세 준 거니까요
소원이 집을 나선 후,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영숙에게 연락해 선미의 거처를 물었다.주소를 받은 소원은 택시를 타고 선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차 안에서 소원은 내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두려웠다.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기 때문이다.사실 처음에는 소진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그녀의 기억 속에서 소진용은 늘 강인한 사람이었다.한이 그룹이 그동안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지만 소진용은 늘 이를 버텨냈었다.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었다.한 번은 큰 실수가 발생해 회사가 파산하고 수십억대의 빚을 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그때 아버지는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었다.“걱정하지 마라. 이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일 뿐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아. 파산하면 어때? 천천히 갚으면 되고 집을 팔고 전세로 가도 괜찮아. 결국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야.”결국 그 일은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소진용의 뛰어난 스트레스 대처 능력과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큰 힘이 되었다.그런 소진용이 왜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당시 파산과 청산을 맞닥뜨린다 해도 과거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게다가 그녀와 전미영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은 소진용답지 않은 행동이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문투성이였다.머리가 터질 듯 아픈 소원은 눈을 감고 천천히 진정하려고 했다.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겠다고.잠시 후 소원은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았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차량이 멈춰 있는 순간, 옆 차선의 컨버터블 스포츠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서현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소원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지만 ‘현재야’하고 나지막한
“알겠어요, 언니. 꼭 그렇게 할게요.”강민혜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둘은 어느새 안상철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이곳은 20년 넘게 재개발되지 않은 오래된 동네였다. 현재는 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만약 철거가 시작되고 나서 이곳에 왔다면 안상철의 집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안상철의 집은 매우 낡은 삼층짜리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다.소원은 3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과연 안상철이 여전히 여기 살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게다가 안상철이 정말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었다.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나타났다.노인은 물었다.“누구를 찾으시는 겁니까?”소원은 노인을 알아보지 못했고 집 안을 둘러봤지만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어르신, 혹시 여기가 안상철 아저씨 댁인가요?”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안상철? 그런 사람 모르오.”소원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어르신, 이 집에 새로 이사 오셨나요?”그러나 노인은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우리 집에는 나랑 아내밖에 없소.”소원은 다시 물었다.“그럼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노인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곧 소원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어르신, 이전에 살던 분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아세요?”그러자 노인은 갑자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돈 달라는 거요? 돈 없으니 다른 데 가서 찾으시오.”그러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소원은 한숨을 쉬었다.“...”안상철은 이미 이사 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단서가 끊긴 것이다.강민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제가 나중에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안상철 가족의 출입국 기록을 한번 확인해볼게요.”하지만 강민혜는 팀장이 아니라 일반 경찰관이었기에 이런 일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 했다.이번에는 주소를 얻은 후 바로 오긴 했지만 그녀
“찾을 수 있을 거예요.”소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그건 예전에 안상철의 딸 덕분이었다.한 번은 그 아이가 병을 앓던 날, 폭우까지 내리던 날씨 속에서 안상철이 딸을 데리고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다.마침 그때 소지용이 안상철에게 업무와 관련된 전화를 걸었고 통화 중 안상철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챈 소진용은 사정을 듣고 바로 차를 몰아 그 아이를 병원까지 데려다줬다.소원 역시 그때 차에 동승했으며 병원으로 가는 동안 아이를 돌봐줬던 기억이 있었다.“그럼 다행이네요.”강민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평소 그녀는 당찬 성격으로 팀에서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소원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수줍음을 타는 모습이었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민혜 씨, 괜찮으면 저를 언니라고 불러요. 소원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딱딱하게 들리잖아요.”강민혜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 했다.“그럼 제가 소원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강민혜는 소원과 자신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소원은 명문가의 장녀였고 자신은 후원이 필요했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생활 방식부터 교육까지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하지만 다른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공적인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그녀도 소원만큼은 다르게 느꼈다.직접 만나본 소원은 소진용처럼 정직하고 선하며 강한 사람이었다.소원 가족은 강민혜에게 은인이었고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소원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물론이죠. 민혜 씨 같은 동생 있었으면 참 좋았겠어요.”만약 동생이 있었다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렇게나 버거운 시간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더 안정적이었을 것이다.소원은 강민혜를 보며 어릴 적 부모님이 동생을 낳으셨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난 아기가 떠올랐다.그 사건으로 온 가족이 한동안 큰 슬픔에 잠겼었다.비록 아무도 그 아기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잊지 못하
“알겠어요, 여보.”윤혜인은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아, 그리고 다음 주에 센디오로 출장 가야 해.”윤혜인은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비록 이씨 집안은 재력이 풍부했지만 윤혜인은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산후 우울증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일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다행히 이준혁은 그녀의 복직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다.다른 남편들처럼 집이 넉넉하니 아내가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며 남편을 보살피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오히려 윤혜인의 복직을 먼저 제안한 사람도 이준혁이었다.그는 그녀의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고 말했다.“원하면 언제든지 다시 일하러 나가도 돼.”윤혜인은 그의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다음 주?”이준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일정 조정해서 데려다줄게.”“괜찮아요. 당신 일도 중요한데요.”윤혜인은 남편이 자신의 일을 제쳐 두는 게 부담스러웠다.“걱정 마. 잘 조정할 테니까. 내 아내만큼 중요한 건 없어.”이 말에 윤혜인의 가슴은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알겠어요. 내 일도 이틀 정도 비울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이번 기회에 휴가처럼 보내요.”아이가 생긴 이후로 둘이 함께 여행을 간 건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게다가 집에는 문현미와 홍승희를 비롯한 여러 도우미들이 있어 아이들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좋아. 벌써 기대돼.”이준혁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이어서 덧붙였다.“여보, 지난번에 내가 사준 그 잠옷 가져갈 수 있어?”“그거요?”윤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그 잠옷은 일종의 코스튬 같은 옷이었다.그녀가 과거 이선 그룹에서 이준혁의 비서로 일했을 때 입던 정장을 변형한 스타일이었다.하지만 원래 정장보다 훨씬 노출이 심했고 필요한 부분이 다 드러나는 디자인이었다.“응. 난 당신이 그거 입은 모습이 너무 좋아.”그는 자신의 취향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그 잠옷을 입은 윤혜인을 보면 그는 스스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