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렇네. 민 실장이 뭐 별거라고.”“……”방 안.전 당주가 앞서서 들어섰다.뒤이어 민정화가 들어가 문을 닫더니 외투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전 당주를 뒤에서 끌어안았다.“차라리 죽고 싶어! 부끄러워서 이젠 못 살아.”전 당주가 돌아섰다. 가리지 않은 민정화의 몸을 보더니 담담하던 검은 눈에 음험함이 스쳤다.“쓸데없는 소리.”당주 전성이 가라앉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진작에 경고했었지? 백지안은 그저 네 경호 대상일 뿐이라고. 백지안과 강여름 사이의 개인감정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했잖아? 넌 회장님께서 지시하신 일만 해내면 되는 거였어.”“하지만 지안 님은 정말 너무 억울했다고요.”민정화가 훌쩍거렸다.“난 그냥 회장님의 분부대로 몸뒤짐을 한 것뿐인데. 강여름은 나한테 원한을 품고 복수한 거라고요. 왜 지안 님에 대한 분노를 나한테 쏟는 거야? 회장님도 그래. 지안 님하고 사이가 좋을 때는 하늘의 달도 다 따줄 것 같더니만 강여름하고 사이가 좋아지니 계속 우리한테만 죄를 뒤집어씌우고. 남의 아랫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피곤한 일이야.”“입 다물어!”전 당주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 그 수많은 남자 앞에서 옷이 벗겨지는데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민정화는 엉엉 울었다.“그 놈들 눈빛은 죽어도 못 잊어. 그… 그 더러운 눈 빛…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그러더니 민정화는 문으로 돌진했다.“이상한 소리 하지 마.”전 당주가 즉시 민정화를 잡더니 힘껏 품으로 당겨 안았다.“난 이제 어떡하지? 이제 앞으로는 날 안지 마.”민정화가 전성의 가슴에서 무너지듯 울었다.“쉿, 네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어릴 때부터 내가 다 봐왔어.”전성이 가볍게 민정화의 머리를 쓸었다.“안아 줘. 나 너무 견디기 힘들어.”민정화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전성의 가슴팍을 잡아당겼다.옷깃을 꼭 잡은 채 입을 맞추었다.민정화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덤벼들자 전성도 견딜 수가 없었다.긴 입맞춤이
하준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내가 전 당주와 민 실장 사이를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전성은 깜짝 놀랐다. 내내 하준의 눈을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저, 저는….”“뭐, 민 실장? 매력적이지. 하지만 전 당주도 그냥 나이만 먹은 건 아니잖나? 별별 사람 다 봐 왔잖아?”하준이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민 실장은 더 이상 내게 충성하지 않아. 지룡에 남겨 두기에는 영 안심을 할 수 없어.”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정화는 다릅니다. 그 녀석이 어릴 때부터 봐왔어요. 꼬맹이인 줄 알았던 녀석이 성숙한 여인이 되어 내게 애정을 보였을 때는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피가 순간적으로 들끓었단 말입니다.’“마음 아픈가?”하준이 갑자기 물었다.“아닙니다. 민 실장은 그냥 일개 지룡 멤버일 뿐인걸요. 하지만 민 실장을 이렇게 지룡에서 내보내면 내부에서 말이 많을 겁니다. 그냥 조용히 외국으로 내보내시죠.”전성이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룡의 당주로서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그래. 자네 체면도 살려줘야 하니 그 의견에 따르겠네.”하준은 말을 마치더니 전화를 끊었다.휴대 전화를 쥔 전성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후 민정화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바로 출국 준비해. X국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 나중에 시간 나면 내가 보러 갈게.”민정화는 경악했다.“무슨 말이에요? 내가 왜 갑자기 외국으로 나가? 시간이 나면 보러 오다니? 이번에 나가면 나 못 돌아와요?”“회장님 뜻이야. 네가 회장임의 역린을 건드렸어. 네 충성심을 의심하신다.”전성이 쓴웃음을 지었다.“회장님께서 널 지룡에서 내보내든지 해외로 내보내든지 선택하라고 하시더라. 내 말 들어. X국은 나름 괜찮은 나라야. 가서 임무를 수행하며 사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야.”“그런 곳은 가고 싶지 않아!”민정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회장님은 이미 내게 충분히 과한 벌을 주셨다고!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 민씨 집안이 대대손손 최가를 모셨다고 앞
“회장님은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상혁이 말을 끊었다.“김 실장….”백지안은 깜짝 놀랐다.“그러면 회의 끝나고….”“간병인이 갔다면 다른 분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물론 앞으로는 간병인에게 함부로 성질부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간병인 분들도 사람입니다. 다들 자기 분수껏 열심히 돈을 버시는 분들이에요. 사람이 하는 일로 사람의 고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상혁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백지안을 찌르는 것 같았다.“무슨 말이에요? 지금 김 실장도 날 무시하는 거예요? 잘 들어요. 난 하준이 마음속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백지안 님,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상혁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백지안은 화가 나서 휴대 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다.그러나 곧 민정화가 나타났다. 그런데 민정아가 백지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그 강여름이란 인간 정말 너무 악독하더라고요….”민정화는 오후에 있었던 일을 백지안에게 풀어놓았다.백지안은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민정화가 안쓰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단 며칠 만에 최하준이 강여름에게 홀딱 빠져버린 데다 여름에게 지룡 본부까지 공개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정화 씨, 미안해. 이게 다 나 때문에….”백지안은 죄책감에 괴로운 척하며 눈물을 떨궜다.“내가 너무 무능해서 자기도 지켜주지 못하고 그런 모욕을 당하게 만들었네.”“그런 말씀 마세요. 저는 지안 님을 탓하지 않아요.”민정화가 얼른 말을 받았다.“그저 제가 앞으로는 지안 님을 보호해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지룡에서 새로운 사람을 보낼 거예요. 지안님 퇴원하실 때쯤에는 저는 함께하지 못할 거예요. 회장님이 이번에는 강여름에게 너무 푹 빠졌어요. 정말 너무 나빠요.”“그런 소리 마.”백지안이 중얼거렸다.“강여름이 자기를 첫 스텝으로 삼은 걸 거야. 앞으로는 이제 날 상대하려고 들겠지. 애초에 내가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한 것에 원망을 품고 있으니까 강여름의 복수 명단에 분명 내가 들어 있을 거야.
백지안은 그 말을 들으니 분노가 치밀었다.하준의 마음은 강여름이 훔쳐 가고 예비로 끼고 있으려고 했던 송영식은 임윤서에 메여있었다.‘그 인간은 강여름의 절친이잖아? 둘 다 똑같이 못된 것들이지.’“영식아, 나 너무 짜증 난다.”백지안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늘 내 곁에 붙여두던 민 실장도 이제 데려가 버렸어.”“민 실장은 네 보디가드였잖아?”송영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민 실장도 지룡에서 데려가 버리고….”백지안이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간병인도 가버렸어. 내가 성질이 더럽다나 어쨌다나?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을까?”“이런, 하준이 자식은 정말 인간도 아니구먼.”송영식은 하준이 이렇게까지 백지안에게 매정하게 굴 줄은 몰랐다.‘헤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아파서 입원했는데 옆에 붙여놨던 사람까지 거둬갈 일이냐?’“쓸데없는 생각 마. 내가 곧 갈게.”송영식이 전화를 끊고 막 가려고 돌아서는데 언제부터인지 임윤서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하얀 니트 원피스에 야구캡을 쓴 임윤서의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어려있었다. 아무리 봐도 웬 유명 배우가 소박하게 차려입고 나선 듯한 모양새였다.“안녕하세요? 아니, 내가 리버사이드파크로 이사한 건 대체 어떻게 아셨을까?”임윤서가 빙그레 웃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최하준 회장이 말한 건 아니겠지?”그 일을 생각하니 송영식은 열불이 뻗쳤다.실은 하준이 리버사이드파크의 아파트를 임윤서에 주었다는 이야기를 이주혁에게 들었던 것이다.임윤서는 느른하게 한숨을 쉬었다.“최하준 회장은 참 손이 크지 뭐예요. 난 원래 여름이랑 살려고 그랬는데 여름이를 만나는데 내가 거치적거렸던지 최하준 회장이 그냥 여기 집을 덜렁 주지 뭐야? 이 큰 집에 혼자 있으니까 어찌나 좋은지!”“말 다했나?”송영식은 이곳에 오는 길에 내내 스스로 성질을 잘 눌러야 한다고 되뇌며 왔는데 아무래도 임윤서와 대화만 시작했다 하면 혈압이 올라서 가만있기가 힘들었다.“뭐, 난 내 할말 다했어요. 그쪽은 지
임윤서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별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요. 요즘 매일 바깥 음식을 먹었더니 속이 별로예요. 오늘은 집에서 먹고 싶은데 정 같이 밥을 먹고 싶다면 그쪽에서 저에게 밥을 한 번 해주시던가?”“뭐?”송영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싫으면 마시고. 만난 김에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 좀 했으면 좋았을 텐데….”“그, 그럼 해주지.”송영식은 할 수 없이 임윤서를 따라 들어갔다.오만한 송영식이 임윤서의 눈치를 살피는 날이 오다니 정말 별일이었다.집에 들어가자 임윤서는 바로 소파에 털썩 앉더니 테이블에 펼쳐진 주전부리를 먹기 시작했다.“빨리해주세요. 맛없으면 얘기 안 하고 싶을지도 몰라요. 누구 불러서 도움받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전 진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요.”송영식은 침울한 얼굴로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뭔가가 많긴 했는데 죄다 요거트, 우유, 과일, 치즈 같은 것뿐 식재료는 거의 없었다. 결국 한참을 뒤지다가 냉동실을 열어보니 소갈비와 생선, 냉동 새우가 나왔다.날짜를 확인해 보니 유통기한이 지나기 직전이었다.송영식은 한심한 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임윤서를 쳐다보았다.‘대충 어떤 인간인지 알겠구먼. 아주 요리하고는 담을 쌓았네. 저런 인간을 누가 데려가서 살지 정말 걱정이다.’임윤서는 칩스를 다 먹고 주방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더니 송영식이 갈비를 해동하고 있었다.전에 갈비를 사 올 때는 제대로 한번 해먹어 보겠다고 의욕적이었지만 밑간이 없이 구웠더니 너무 맛이 없는 데다 속은 익히기도 힘들었다.“어라, 갈비 하시게요? 그거 하기 되게 힘들던데.”임윤서가 알려주었다.“안 되겠으면 내려가서 뭐 먹을 거 대충 사가지고 오세요.”“됐어요.”송영식은 무표정하게 임윤서를 쓱 쳐다보더니 다시 음식을 하는데 집중했다.그 모습을 보니 임윤서는 동성에 있는 자기네 집 강아지가 생각났다.임윤서는 바로 엄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엄마 포롱이는요? 조금 아까 어떤 남자를 봤는데 포롱이를 닮은 거 있죠
송영식이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내가 요리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그럼요. 난 그쪽 같은 도련님은 허구한 날 백지안 뒤꼭지나 따라다니면서 부르면 부르는 대로 따라다니고 다른 일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줄 알았죠.”임윤서가 서슴없이 말을 뱉었다.“……”‘내가 갈비찜에 독을 탔어야 해. 그러면 아주 깨끗하게 모두 다 끝났을 텐데.’임윤서는 갈비찜을 집어 맛을 보았다.‘어머 어머, 이게 뭐야? 너무 맛있잖아? 이거 뭐 완전 궁중 요리 수준인데?튀김은 어지간한 유명 일식집 튀김 못지않아. 생선구이도 완전 겉바속촉!흠흠, 뭐 워낙 재료가 좋아서 그런지도 몰라.’“이게 다 직접 한 거예요?”임윤서는 신기해 죽을 지경이었다.“뭐 집에 있는 쉐프가 만들어서 드론으로 날렸다던지 그런 거 아니고?”“무슨 소립니까? 다 내가 직접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요리하는 거 좋아해서 꽤나 솜씨가 좋다고요.”송영식은 슬슬 참을 수가 없었다.“최하준 회장은 그렇게 요리에는 곰손인데 친구는 이렇게 요리 천재라니 정말 뜻밖이네요.”임윤서는 다시 감탄해 마지않았다. 처음으로 송영식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흠, 뭐 이목구비가 꽤 시원스럽단 말이야. 웃으면 초승달이 되는 저 눈이 평소에 나만 보면 불을 뿜어서 그렇지. 키도 크고 늘씬하니 아주 타고난 모델이란 말이야.이대로 데뷔했으면 아마 팬덤도 어마어마하게 형성됐을 그런 타입이거든.’“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내가 그쪽을 좋아할 일 없습니다.”송영식은 임윤서의 시선에 은근히 불편해서 덧붙였다.“흠흠, 그러면 이제 정식 주제로 들어가 볼까요?”“그래요. 말해 보세요.”임윤서가 끄덕였다.송영식이 말했다.“그쪽에서 SE와 협력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SE는 어쨌거나 국내에서 늘 2선 브랜드요. 보통은 10대, 20대 학생을 타깃으로 하는 피부 보호 라인 위주의 브랜드죠. 그러니 브랜드 자체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아니라서 그쪽이 SE와 협력해 봤자 당신의 레벨을
“당신에게 나는 그저 일개 조제사일 뿐이었는지 몰라도 우리 같은 조제사들이 얼마나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조제사가 되는지는 생각해 봤어요?그때 당신들 같은 재벌 2세가 클럽에서 먹고 마시고 노는 동안 우리는 실험실에 갇혀서 연구를 거듭하고, 당신들이 골프하고 요트에서 낚시할 때, 우리는 죽어라고 책을 씹어 먹을 듯 공부했다고.”그러면서 임윤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때 당신이 날 블랙리스트에 넣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막다른 곳까지 몰렸었는지 알기나 해요? 게다가 그때 백윤택 사건까지 겹치면서 난 마트에서 사람들에게 계란을 맞기도 했다고. 그래서 결국 국내에서는 버틸 수가 없어서 해외로 나간 거예요.해외에서는 또 완전 이름도 모르는 새내기로 시작하다 보니 또 무시를 당했지. 매일 퇴근도 못 하고 1년 365일에 360일을 실험실에서 보내다가 몇 번을 기절했는지 몰라.2번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서 밤을 넘기다가 깨어나 보면 병원이고 그랬어요.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만 난 내 존엄을 되찾기 위해서 그때마다 더 스스로를 채찍질하곤 했어요.”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쓰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저기, 울지 말라고.”송영식은 속이 따끔따끔 찔리던 참에 임윤서가 울어버리니 어쩔 줄을 몰랐다.자신이 아주 세상 나쁜 놈이 된 기분이었다.“난 슬프고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울지도 말라고?”임윤서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그런데 사람이 워낙 예쁘다 보니 우는 모습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빗속에 꽃이 피는 듯한 느낌이었다.“그, 그럼 울어요.”송영식은 움찔하더니 입을 다물었다.“송영식!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내가 이렇게 우는데 달래줄 생각은 안 하잖아. 이러니까 여자 친구가 없지.”임윤서가 눈물을 닦던 휴지를 송영식에게 집어던졌다.“…임윤서 씨, 이거 진짜 어이없네.”송영식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그래, 나 원래 이렇게 어이없는 인간이다!”임윤서는 코를 팽 풀었다. 예쁘장한 작은 얼굴이 우는 바람에 발
백지안은 보통 화가 난 게 아니었다.어장 관리 대상인 송영식이 회의 따위 때문에 자신을 잊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전에는 완전히 자기 손바닥 위에서 놀던 송영식이었다. 백지안이 말 한마디면 얼마나 멀리 있든 무슨 일을 하던 중이건 무조건 달려오곤 했었다.그런데 임윤서 때문에 자신을 바람 맞출 줄이야….그러나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어서 괜찮은 척하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괜찮아. 그래서 임윤서랑은 얘기가 잘 됐어?”“얘기를 하기는 했는데 그쪽에서 오슬란 지분의 10%를 요구하고 있어.”송영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방금 임원진 미팅을 했는데 다들 그 정도는 내 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 임윤서를 오슬란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10%라고?”백지안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서? 다들 동의했어?”“어쩔 수가 없어. 그렇게 해서라도 신제품 라인을 출시하고 나면 오슬란의 시장 점유율은 높아질 거야.”백지안은 송영식에게 멍청이라고 욕을 한바탕 퍼붓고 싶었다.그러고 싶은 걸 꾹 참느라고 속이 다 터져나갈 지경이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여름은 바로 백윤택에게 전화를 걸었다.백윤택은 그 말을 듣더니 엉덩이가 들썩거렸다.“송 대표가 완전히 임윤서에게 넘어갔구먼. 임윤서에게 10%를 주느니 그냥 너에게 주는 게 훨씬 나을 텐데 말이야.”영하의 상장가를 생각해 보니 임윤서의 몸값이 자기와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백윤택 눈에 임윤서는 그저 동성에서 온 촌뜨기에 지나지 않는 데 생각할수록 분했다.“도저히 못 참겠어. 기회를 봐서 임윤서를 어떻게 좀 해봐.”백지안이 이를 갈았다.“그리고 나서는 강여름을 손봐주자고.”“나도 임윤서를 이대로 표기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3년 전 못다 한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어.”백윤택이 갑자기 음험하게 웃었다.“고것이 오슬란의 주주가 된 뒤에 내가 고것을 내 아내로 만들어 버리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설마….”백지안의 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