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래? 그냥 좀 아까워서 그러지. 가만 생각해 보면 백지안 참 팔자 좋지 않냐? 그저 그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을 할 줄 몰라서 그렇지.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송영식이 요리를 아주 잘하더라. 갈비찜이며 튀김이 진짜 얼마나 맛있었는지 몰라.”임윤서는 지금도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그러고 보니까 송영식이 아주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네. 요즘 그렇게 음식 솜씨 좋은 사람이 흔한가 어디? 최하준을 봐도 그렇고….”여름은 한숨이 나왔다.“그 인간은 그저 내가 차려준 밥을 먹을 줄밖에 모른다니까. 나도 누가 나한테 밥 좀 해줬으면 좋겠다.”“양유진 대표 있잖아?”임윤서가 눈을 찡긋거렸다.여름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요즘 양유진은 여름의 계획에 방해가 될까 봐 일체 연락까지 끊고 있었다. 여름은 그야말로 양유진에게 마음의 빚이 컸다.한창 식사 중인데 하준에게서 전화가 왔다.“난 이제 접대 끝났는데 자기는 어디야?”여름이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7시였다.“뭐 이렇게 빨리 끝났대?”“응, 난 그쪽 대표들하고는 대충 저녁 먹고 나왔어. 김 실장이 2차 데리고 나갔지.”“난 윤서랑 밖에서 밥 먹는데. 먼저 들어가요.”여름이 느른하게 대답했다.하준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난 자기랑 같이 있고 싶은데, 당신은 왜 허구한 날 친구랑만 놀려고 그래?”“아니, 내 삶이 일 아니면 당신 밖에 없어야 돼? 나도 맛있는 것도 좀 먹고 놀고 싶다고.”여름은 전화를 끊었다.‘최하준이 이렇게 질척거리는 인간인지 왜 전에는 몰랐을까?’밥을 다 먹고 나서 여름은 윤서와 마사지 샵으로 갔다.가는 길에 계속 하준에게서 톡이 날라왔다.-마사지 샵은 뭐 하러 가? 집에서 팩하면 되잖아?여름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집에서 하는 팩이랑 전문 샵에서 남한테 마사지 받는 거랑은 천지차이라고.-난 그런 거 몰라. 주소 불러 봐. 내가 가서 결제나 해줄게.여름은 ‘결제’라는 말에 넘어가서 주소를 불러주고 말았다.두 사람이
곧 남자 넷이 침대로 달려들었다. “형님, 얘기 임윤서네요..”그 중 하나가 사진을 꺼내 임윤서의 얼굴을 대조해 보며 말했다.“그렇군. 끌고 가.”두목인 듯한 남자가 손을 휘저으며 명령하더니 여름을 노려보았다.“너희는 먼저 가. 난 여기서 재미 좀 볼라니까.”“형님, 저도 좀….”옆에 있던 녀석이 임윤서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어쨌든 그쪽에서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그러진 않았잖아요?”“그래.”“이거 놔!”달려드는 남자들을 보며 여름과 임윤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때 누군가가 문을 차고 들어왔다. 뛰어 들어온 최하준은 여름의 옷이 찢긴 것을 보더니 눈에서 불이 나오는 것 같았다.“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누…누구야?”넷은 들어온 사람의 기세에 눌렸다.“네놈들을 끝장내 주러 온 사람이다.”하준은 그대로 한 놈씩 처리하기 시작했다.넷을 모두 쓰러트리고 하준은 바로 옷을 벗어 여름을 감쌌다. 하얗게 드러난 여름의 피부에 난 상처를 보니 새삼 울화가 치밀어 쓰러져 있는 놈들을 한 번씩 더 걷어찼다.“살려 주십시오. 저희도 그냥 돈 받고 하는 일입니다.”두목으로 보이는 녀석이 애걸했다.“그쪽은 나름 거물이니 함부로 건드리진 마시고요.”하준이 싸늘하게 물었다.“누구냐?”“SE그룹의 한지용 대표입니다.”“한 대표가 보냈다고! 이 자식이!”임윤서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네. 당신이 오슬란으로 간다는 걸 알고 한 대표가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저희에게 데려오라고 했습니다.”두목으로 보이는 녀석이 하준을 바라보았다.“형씨, 한 대표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요. 오늘 일은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시죠. 보아하니 형씨도 한 가닥하시는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리 같이 잘 지내봅시다.”“잘 지내?”하준이 나지막이 웃었다. 웃음소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싸늘함이 섞여 있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누, 누군데요?”“나 최하준이야.”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다시 놈의 손가락을 밟았다.좁은 실내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
여름인 뜬금없이 하준을 보더니 웃었다.“그렇게까지 오버 안 해도 나 질투 안 해.”하준은 짐짓 눈을 크게 뜨고 여름을 쳐다봤다.“난 당신 말고 다른 여자한테는 손 대기도 싫단 말이야.”여름은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심장이 눈치도 없이 마구 두근거렸다.가련하게 집어 들려 있는 임윤서는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어떤 표정일지가 상상되었다.여름이 복수극의 대본대로 하준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아무래도 둘이 무슨 로맨스물이라도 찍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하준은 차 문을 열더니 무표정하게 임윤서를 뒷자석에 던져 넣고 여름은 조심스럽게 보조석에 앉혀 안전벨트를 해주었다.가는 길에 하준은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애들 좀 데리고 이쪽으로 와. 마사지 샵 봉쇄하고 경찰 신고하고 기자 불러. 오늘 내로 SE그룹 한지용을 무너뜨려야겠어. 오늘 마사지샵 사건 관련자는 하나도 빼지 말고 다 잡아들이도록 해.”“알겠습니다.”접대를 하던 상혁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하준은 내내 냉혹한 얼굴로 운전에 집중했다.임윤서와 여름은 떠들 기력도 없어서 아무 말 없이 기대어 있었다.병원에 도착하자 하준은 윤서를 바로 매정하게 의사에게 넘겨버리고 여름은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의사에게 채혈을 부탁했다.해결 결과를 기다리면서 마침내 하준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앞으로는 윤서랑 놀지 마. 밥만 먹으면 그냥 집에 들어오라고.”“오늘 일은 사고잖아….”“사고는 사고지. 하지만 이게 다 임윤서 때문이잖아.”하준이 차갑게 내뱉었다.“임윤서 때문에 당신까지 끌려들어 간 거잖아.”“최하준, 그만 해요. 나랑 윤서는 친구야. 끌려 들어가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내가 언제 당신 친구들 원망했어?”여름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불만 섞인 말투로 하준의 말을 끊었다.“더구나 요 몇 년 해외에 있는 동안 나랑 윤서는 우리 둘밖에 기댈 사람이 없었다고. 윤서는 나에게 가족이나 다름없어.그리고 잊어버리셨나 본데 3년 전 백윤택 일로 당신이협
송영식은 말문이 탁 막혔다.“아니, 내가 정말 전생에 송영식에게 무슨 죽을죄를 지어서 이럴까?”임윤서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내가 왜 당신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하나고?”“대체 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데…?”송영식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임윤서가 막 입을 열려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와 휴대 전화를 빼앗아 갔다.하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윤서 씨 병원이야. 당장 와서 네가 책임지고 집에 데려다줘.”“하준아….”“한지용의 스캔들은 이미 싹 언론에 자료 뿌렸어. 이 기회를 어떻게 잡을 지는 이제 네 손에 달렸어. 그리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어떻게 대접을 해야 하는지, 그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배우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그렇게 말하더니 하준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 전화를 임윤서에게 건네더니 다시 여름을 돌보러 가버렸다.20분 뒤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집에 가서 하루 푹 쉬면 된다며 내일이면 기력을 회복할 거라고 얘기했다.그 말을 듣더니 하준은 바로 여름을 안고 일어섰다.“집에 가자.”여름은 걱정스럽게 윤서를 돌아보았다.“하지만 윤서는….”“병원에 있으니 큰 문제 없을 거야. 곧 영식이가 도착할 테니 우리는 먼저 가자고.”윤서가 손을 휘휘 저었다.“먼저가. 너희들 남아 있다가 송 대표 만나면 또 싸울라.”“그래. 윤서 씨 말이 맞아. 나도 지금 영식이랑 싸우기 싫다고.”하준도 송영식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그럼 조심해. 혹시나 송 대표가 데리러 안 오거든 연락해.”여름이 말을 마치자 하준은 여름을 안고 나가버렸다.임윤서는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남자친구 따위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보고 있으니 괜히 또 남친 있으면 좋겠다 싶잖아.’곧 송영식이 도착했다. 머리가 온통 헝클어진 채 환자복을 입고 연체동물처럼 병상에 늘어져 있는 윤서를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느껴졌다.“하준이는?”“갔어요. 나랑 여름이랑
“거참. 내가 나름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이거든요.”송영식이 툭 뱉었다.돌아가는 길에 차에서는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윤서는 마취가 되는 향을 들이마신 탓에 도저히 내려앉는 눈꺼풀을 감당할 수 없었다.리버사이트파크게 도착해서 송영식은 실내등을 켰다. 돌아보니 윤서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숱 많은 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지만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가 드러나 보였다. 평소에는 미운 말만 뱉어내기 바쁜 임윤서였지만 이렇게 온순하고 무해한 아기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니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보였다.송영식은 잠시 망설이다가 트렁크에서 담요를 꺼내다가 가만히 윤서의 몸에 덮어주었다. 자기는 다시 운전석으로 가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성운빌.하준은 잠든 여름을 살그머니 안방 침대에 뉘었다.돌아오는 길에 여름은 결국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가만히 여름을 들여다보던 하준은 곧 물을 받아다 가만가만 여름의 옷을 벗겼다. 몸에 남은 멍과 상처를 보니 사뭇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서 점점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하준은 결국 얼굴이 달아올랐다.전에는 여름을 안을 때마다 너무나 충동적이고 급했던 탓에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 없었다.‘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곡선이야.’한창 혈기 왕성한 남자인 하준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몸을 꼼꼼히 닦아낸 하준은 다시 여름에게 조심스럽게 잠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신은 냉수로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하준은 여름의 수건을 썼다. 익숙한 여름의 냄새가 너무나 포근하게 느껴졌다. 결벽증이 있는 하준인데도 여름이 사용했던 수건은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샤워를 마치고 하준은 그대로 여름 옆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여름과 한 이불을 덮고 여름 냄새를 맡으며 누워있자니 흐뭇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결국 하준은 여름을 품에 안았다.여름은 깨지 않았다. 오히려 하준의 품을 파고들더니 착 감겨들었다. 익숙한 듯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하준은 심장이
“아니거든….”여름은 한참을 몸부림쳐 봤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리어 하준의 눈빛만 더욱 불타오를 뿐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여름은 일순 숨도 크게 쉴수가 없었다.“놔. 함부로 굴지 말고.”“난 함부로 굴고 싶은데. 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해?”하준이 휘릭 몸을 굴리니 단단한 팔이 여름의 양옆에 놓였다. 뜨거운 숨결이 여름의 얼굴이 닿았다.“뭘 언제까지야?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여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굴을 피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차마 하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 자세가 오히려 매끈하고 아름다운 목선을 드러내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여름아, 우린 부부였잖아.”하준이 여름이 자신을 바라보도록 얼굴을 살그머니 돌리더니 거세게 입을 맞췄다.“싫어….”여름은 마구 몸부림을 쳤다.그러나 하준은 힘도 세지만 여름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하준이 그간 아무도 안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전처럼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침대에서 벗어나려던 여름의 의지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한편.푹 자고 난 윤서도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뒷좌석에 누워서 얌전히 베개를 베고 담요까지 덮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윤서는 놀라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과 송영식이 데려다주는 가운데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는 사실을 간신히 기억해 내다.‘그러면 지금 베고 있는 베개도 송영식이 베어주고, 담요도 송영식이 직접 덮어준 거야?”윤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내내 윤서에게 송영식은 악랄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그러니 윤서가 자기 차에서 잠들었다면 밖으로 차내 버리거나 누굴 시켜서 괴롭혔다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이렇게 세심하고 다정한 송영식은 윤서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살그머니 일어나 앉아서 운전석에 있는 송영식을 바라보았다. 송영식이 꼼짝도 않고 있자 윤서는 가만히 앞으로 몸을 숙여 송영식을 들여다보았다.송영식은 눈을 감고 쉬고 있었는데 정말 대리석 같은 피부에 코는
하준은 아파서 헉하더니 원망스러운 말투로 툭 뱉었다.“다른 남자를 칭찬하니까 그러지.”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내 말이 틀려? 송영식 대표가 얼굴 잘생긴 것 말고는 천하에 쓸모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장점이 꽤 있잖아.”“걔가 당신 욕한 적도 있다고.”하준이 부루퉁해서 말했다. 자다 깨서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 칭찬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우울한 일이 있겠는가?“당신은 안 했어?”여름이 하준을 일깨웠다.“남 험담하지 말지? 내가 당신 옛날얘기 하나씩 꺼내길 바라는 거야?”“……”하준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자기야, 나 배고프다.”여름은 웃었다.“이런 우연이 있나? 밥도 안 먹고 지금까지 있었더니 난 힘이 하나도 없어.”“…내가 먹을 것 좀 만들어 줄까?”하준이 여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그런데 내가 한 음식은 자기가 한 것처럼 맛있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먹어 줄 거지?”“정 안 되면 계란찜 해 먹자. 가르쳐 줄게.”여름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여름의 도움을 받아 하준은 간단한 점심을 차릴 수 있었다. 둘 다 너무 시장했던 덕에 하준의 처참한 요리 실력에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밥을 다 먹자 상혁이 회사 일로 전화를 걸어왔다. 하준은 지시를 마치더니 말했다.“내 옷 좀 성운빌로 가져 와. 이제 여기서 지낼 거야.”“쿨럭, 아, 알겠습니다.”여름이 휴대 전화를 빼앗아 가더니 외쳤다.“그럴 필요 없어요.”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아, 왜?”하준의 입이 튀어나왔다.“일단은 동거하고 싶지 않아.”여름이 일어났다.“밤을 보낼 거면 내가 당신 집으로 갈게. 그리고, 집안일 하는 사람 불러줘. 당신 집에 가서 밥하고 빨래할 생각은 없거든.”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여름은 생글생글 웃었다.“우리 집은 좁잖아? 그리고 일해주는 사람도 없으면 당신 삼시 세끼에 옷이며 양말이며 다 내가 빨아야 한다면, 미안하지만 안 되겠어. 절대 안 할 거야. 백지안은 무슨 공주님 모시듯이
하준의 여름의 눈에 짙게 깔린 분노를 보고 깜짝 놀랐다.“난 그냥 장난으로….”“장난이거나 말거나 날 때렸잖아? 아침에는 좋다고 안아놓고 이제는 사람을 괴롭혀? 됐어. 가!”여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그냥 화난 시늉만 할 생각이었지만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늘 갑이었던 하준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쫓겨나 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화를 내려고 했지만 눈시울을 붉히는 여름을 보자 당황스러웠다. 다급히 여름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는 속삭였다.“자기야, 내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날 한 대 때릴래?”“됐어. 당신 몸에 손대기도 싫어.”여름은 얼굴을 돌렸다. 촉촉한 입술을 부루퉁하고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 나름대로 또 너무나 귀여웠다.하준은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여름의 손을 잡아 자기 뺨에 댔다.“용서해 줘.”“싫어.”여름은 눈을 내리깔고 고집을 부렸다.“그러면 반성 의자에 가서 앉아 있을까?”늘 누군가에게 갑이었던 하준이 이렇게 여자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누군가가 봤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백지안이라고 해도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을 터였다.“뭐, 알았어. 그만 해.”여름은 하준의 간절한 얼굴을 보고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하준은 여름의 미소를 보자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하준도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달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해보았다.백지안과 사귈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백지안은 종종 하준에게 삐친 척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하준은 그냥 ‘그러던지’정도의 느낌으로 여름이 삐쳤을 때처럼 마음이 떨린다든지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가만 생각해본 백지안과 사귈 때는 마음에 어떤 파문이 느껴지거나 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의례적인 일을 하듯이 그다지 분노하지도, 달콤한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그저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자신을 지배할 뿐이었다.‘너는 백지안을 사랑한다. 백지안에게 잘 해줘라.”‘그런데… 그게 사랑이었을까?난 정말 지안이를 사랑했던 걸까?진정한 사랑은 지금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