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의 하준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최양하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후다닥 내려온다고?내가 조만간 저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놓고야 말겠어. 시동생하고는 그래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지 말이야.’곧 여름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여울은 창문을 내리고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여름은 바로 이쪽으로 다가왔다. 하준은 곧 차에서 내려서 뒷문을 열어주었다.“여울이 데리고 영화 보러 가게.”“아니….”여름이 입술을 달싹거렸다.하준이 휴대 전화를 열어 예약 화면을 보여주었다.“표도 다 사놨어. 환불 안 돼.”여름은 ‘헐…’하는 얼굴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지금 나랑 곰돌이 만화 보러 가자고?”“이모, 내가 곰돌이 만화 보고 싶다고 했어요.”여울이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을 해 보였다.“여울이 영화관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여름은 울고 싶었다. 두어 시간을 영화관에 앉아서 아가들 보는 만화를 보고 있을 생각을 하니 괴로웠다.“요요, 사기꾼 같으니라고!”여름이 여울의 귀를 잡아당겼다.여울이 불쌍한 얼굴을 했다.“미안해요. 아빠랑 왔다고 안 그랬으면 이모가 안 올까 봐 그랬어요.”“거짓말인지는 아까부터 다 알고 있었거든.”여름이 시큰둥하게 답했다.하준의 눈이 반짝 빛났다.“그러면… 양하가 아니라서 내려온 거야?”여름의 까만 눈동자가 하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를 내는 듯한 눈이었지만 뭔가 연인들 사이에 투정이 섞인 느낌에 도리어 친밀하게 느껴졌다.하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가 나서 퉁퉁부은 볼을 보고 있자니 너무 사랑스러워서 뽀뽀를 해주고 싶었다. ----여울이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준은 할 수 없이 둘을 데리고 패밀리레스토랑을 들어갔다.셋은 갈비피자를 먹었다.하준은 별 감흥이 없어서 조금 먹다가 말았다.‘여름이가 해준 것처럼 맛있지 않아.’여울이 눈을 깜빡였다.“큰아빠 그것만 먹으면 금방 또 배고파질걸요?”괜찮아. 집에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이 잔뜩 있거든. 이따 집에 가서
“이모는 그게 무슨 설탕인지 알아요? 다음에는 나도 먹어볼래.”여울이 순진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나도 모르겠네. 난 여울이 큰아빠처럼 아는 게 많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감정이 울렁울렁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여름은 한 마디 비꼬고는 식사에 집중했다.하준은 답답한지 물을 원샷했다.‘내가 뭘 그렇게 울렁울렁 변덕스럽다고?평생 나는 딱 여름이랑 지안이 사이에서만 고민해 봤다고. 심지어 진짜 여자를 느껴본 건 강여름이 유일한데 말이야.’----식사를 끝내고 세 사람은 영화관으로 출발했다.여울은 하준의 목에 올라타고 여름은 여울의 겉옷을 들고 함께 걸었다.다른 사람 눈에는 단란한 한 가족으로 보였다.영화관에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만화를 보러온 어린애들이 많았다. 대부분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었다. 다들 부러운 듯 여울을 쳐다봤다.“엄마, 쟤는 엄마랑 아빠가 다 왔다. 좋겠다.”“네 아빠는 돈을 벌어야 해서 회사 갔잖아. 어쩔 수가 없지.”“나도 엄마 아빠 손잡고 만화 보고 싶다.”“……”여울은 아이들의 말을 듣고 득의양양해서 고개가 더욱 빳빳해졌다.여름은 빙그레 웃으며 여울을 바라보았지만 속은 쓰렸다. 외국에 있을 때 여울도 여름에게 다른 친구들처럼 엄마 아빠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했었다. 여울과 하준이 왔는 줄 뻔히 알면서도 억지로 내려온 진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불현듯 하늘이가 떠올랐다. 요즘 최하준이 툭하면 찾아오는 바람에 여름은 며칠 연속 하늘을 만나지 못했다. 하늘이는 그 나이에 너무 애가 철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누군가에게 와락 손을 잡혀서 보니 하준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뭐 먹고 싶냐니까? 내가 가서 사올게.”“난… 나는 팝콘!”여울이 먼저 외쳤다.“내가 자기들처럼 먹보인 줄 아나 봐?”여름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하준의 귀에는 들리고 말았다.하준이 정색했다.“내가 뭐 그렇게 먹보라고 그래?. 난 당신이 한 음식만 좋아하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갑자기 하준의 한쪽 팔이 자기 의자 등받이 위에 올려진 것을 느꼈다.여름은 하준을 흘겨보았다. 하준은 사뭇 뻔뻔했다.“팔이 아파서 좀 펴고 있게.”“……”신경 쓰기도 싫어서 여름은 스크린만 바라보았다.그러나 역시나 아기들 보는 만화를 보고 있자니 재미가 없었다. 여울만이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집중하고 있었다.여름은 휴대 전화를 열어 게임을 했다.하준은 여름이 게임에 집중하는 것을 보더니 큰 손을 여름의 어깨에 슬쩍 얹었다. 얇은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손에 잡히는 여름의 어깨는 부드럽고 가녀린 느낌이었다.“최하준….”여름이 고개를 들어 하준을 노려보았다.하준은 얼른 손을 빼서 둘 사이에 놓여 있던 밀크티를 들더니 마셨다.“그거 내 건데.”여름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좀 마시면 어때?”하준이 여름의 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하준의 저음이 귓가에서 울리자 간질간질했다.“당신 립스틱도 많이 먹었는데.”여름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하준을 발로 차버렸다.‘이 변태가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상영관 안이 캄캄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온통 새빨개진 여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하준이 건드린 것은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그러나 좀 지나니 목이 말라서 결국 어쩔 수 없이 하준과 같이 밀크티를 나누어 마시고 말았다.그러다가 하준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일어섰다. 여름은 여울에게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은지 물었다. 여울은 고개를 흔들며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여름이 여울을 받아 안는 순간 뜨끈한 오줌이 흘러나와 옷을 다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여름은 완전히 당황했다.“미안…”잘못을 저지른 여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곧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쉬가 마려운데 왜 물어볼 때 안 간다고 했어?”“만화를 못 보잖아. 참을 수 있을 줄 알았어요.”여울이 울먹거렸다.“……”여름은 한숨을 쉬었다.“됐어. 이제 그만 봐. 옷 사서 갈아입어야지.
여름은 이마를 짚었다.“우리 집에 놓을 데도 없거든….”“그럼 스타벨리에 놓자. 다음에 와서 잘 때 입어.”하준은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마치 이미 두 사람 관계는 결정되었다는 듯한 말투였다.그 두꺼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없었다.“저기요, 제가 왜 거기 가서 자는데요?”“내 집에서 안 자면 어디서 자? 다른 남자 집은 안 돼.”하준이 멋대로 말했다.그러나 여름은 이제 하준과 그런 일로 싸우기도 피곤했다.‘그렇게 돈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 그냥 그러라고 하지 뭐. 어쨌든 가서 잘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이렇게 해서 급히 입을 바지 하나 사러 들어갔다가 옷 수십 벌을 사게 되었다. 일부는 스타벨리로 보내고 일부는 하준이 주렁주렁 들고 여름의 집으로 향했다.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쇼핑을 나왔던 하정현의 눈에 포착되고 말았다. 하정현은 바로 그 장면을 찍어서 백지안에게 보냈다.“최 회장이랑 무슨 일이야? 방금 보니까 강여름이랑 쇼핑하고 있던데 옷을 많이도 샀더라.”하정현은 백지안이 최하준과 결혼하게 된 것을 무척 부러워하면서 혹시나 떨어질 콩고물이 있을까 싶어서 백지안에게 몇 년 동안 적잖은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물거품이 되는 모양이었다.‘쯧, 이럴 줄 알았나? 최하준이 없으면 백지안은 아무것도 아니지. 일개 정신과 의사? 식구 중에 누가 상담받을 일이 있지 않고서야 쓸모도 없잖아.’----해변 별장에 있던 백지안은 그 사진을 보고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요즘 하준은 아무리 전화를 해도 톡을 보내도 답이 없고, 회사로 찾아가도 보안요원에 저지당하기 마련이었다.완전히 버려진 것이었다.‘하준이가 많이 화가 난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쪼르르 강여름에게 갈 건 없잖아. 게다가 옷까지 사줬다고? 둘이 애까지 데리고, 완전 한 가족처럼 보였을 거 아냐?나랑은 쇼핑도 같이해준 적이 거의 없으면서.’백지안은 그야말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안 되겠어. 계속 이대로 뒀다가는 큰일 나겠어.’
하준의 얼굴이 확 변했다. “구급차 불러서 병원으로 가. 나도 바로 가지.”통화를 끝내더니 하준은 액셀레이터를 있는 대로 밟아서 여름을 성운빌 입구까지 내달렸다.“오늘 여울이는 여기서 좀 재워 줘. 내일 데리러 올게.”여울은 이미 여름의 품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눈을 내리깔고 평화롭게 자는 여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름은 심장이 욱신했다.‘여울이는 아빠가 좋다면서 우리 둘이 재결합하기를 원하던데, 아빠라는 인간이 툭하면 저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툭툭 날 버려놓고 다른 여자에게 가는 인간이란 말이지.’“애가 이렇게 무거운데 나더러 혼자서 여기부터 집까지 애를 안고 혼자 올라가란 소리군?”여름이 비아냥거렸다.하준은 움찔하더니 즉시 답했다.“그럼 내가 안고 올라갈게.”“최하준, 조카까지 나한테 던져놓고 부랴부랴 가려는 거 보니 백지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보지?”여름이 갑자기 하준을 쳐다보았다. 실은 방금 통화할 때 여름에게도 얼추 통화내용이 들렸었다.하준의 목젖이 살짝 꿈틀했다. 지금 이 순간 적절히 말을 둘려대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까만 여름의 눈을 마주하지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한참 만에야 겨우 입을 뗐다.“별장에 불이 나가서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지안이가… 계단에서 굴렀다나 봐.”“구급차 불러서 병원에 데려갈 사람이 없는 거야? 여름이 날카롭게 물었다.“민 실장이 병원에 연락은 했다는데….”“그런데 당신이 꼭 그렇게 급히 가야 해? 당신이 의사야? 아니면 남자친구? 남편?”여름이 하나씩 불러댈 때마다 하준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변해갔다.“그게… 심하게 다쳤대.”하준이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여름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웃었다.“주절주절 대는 걸 보니 걱정도 되고 백지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면 당신 책임인 것 같고, 그래서 그러는 거 아냐? 당신이 백지안에게 느끼는 감정이 정이든, 사랑이든, 미안한 마음이든, 당신은 본능적으로 백지안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거야.”“아니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여름의 말을 듣고 나니 하준은 속이 시원했다.내내 자기가 변심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어렸을 때 지안과 장래를 약속했었 데다 심각한 병에 걸렸을 때 지안이 돌아와 자신을 치료해 주었는데도 지안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이 심했다.그러나 여름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둘은 그저 잠깐 연애를 한 것뿐, 육체적 관계는 맺어본 적도 없었다. 물론 곽철규 일만 밝혀지지 않았더라면 진심으로 지안과 결혼할 생각이긴 했지만….물론 지안에게 생겼던 불행한 일에 대해서는 안쓰럽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을 하준이 벌인 것도 아니었다.여름이 말을 이었다.“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쪽에 정 사람이 없으면 지인으로서 당신이 가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 돌봐줄 사람이 있다며? 게다가 그 사람 오빠도 가까이 살잖아? 그런데도 당신이 굳이 가보겠다면 난 당신하고는 영원히 빠이빠이야.”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여울을 안고는 차에서 내렸다.“알았어. 안 가.”여름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고는 하준이 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따라나서더니 바로 여울을 안아 들었다.“그럼 나 오늘 당신이랑 같이 있어도 돼?”‘또또 급발진하시는군.’“아까 보니까 당신도 어지간히 내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던데.”“내가 언제? 난 그냥 팩트를 말했을 뿐인데?”방금 그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더라면 하준이 애진작에 백지안에게 달려갔을 거면서 그따위 소리를 하는데 여름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화났어?”하준이 은근한 뜻을 담아 씩 웃었다.여름이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쓸데없는 소리. 자고 난 다음 날 바로 이혼당하는 일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언제 버려질 지 모르는 불안에 떨면서 당신을 만나고 싶지는 않아.”그러더니 여름은 그대로 가버렸다.밤바람이 매끄러운 머리를 스치면서 여름의 보드라운 곡선을 그려내자 하준의 심장이 찌릿했다.하준은 얼른 따라
이때 하준이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하나 꺼냈다.“리버사이드 파트 꼭대기 복층이야. 이미 인테리어 끝내 놓았으니까 그리로 이사 가요. 이제부터 이 집은 당신 거야.”“……”임윤서가 멍하니 쳐다봤다.몇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리버사이트 파크가 최고급 단지라는 것은 알았다.‘그런 고급 아파트의 복층집을 갑자기 나한테 준다고?’“안 가져?”하준이 위협적으로 물었다.“가, 가져요.”임윤서가 카드 키를 홱 채갔다.‘이런 나쁜 놈이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다는 게 마다할 이유가 없지.’“내일 바로 이사할게요.”“그래요”하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드디어 장애물을 처리해 버렸군.’----임윤서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여름의 눈 앞에 카드키를 흔들어 보였다.“이거 봐라~ 최하준이 방금 나더러 이사하라더라? 리버사이드 파크 복층이래.”물을 마시던 여름은 그대로 물을 뿜었다.멍하니 그 카드키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이사하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왜 아니야? 내가 바보니?”임윤서가 헤헤 웃었다.“왜? 이 아파트 너 줄까?”“됐어. 그런 아파트 살 돈은 나도 있어.”여름은 하준이 그 많은 돈으로 이렇게나 어리석은 짓을 할 거면서 이혼할 때는 집 한 채 해주지 않더니 이제서 자기들 사이에서 윤서를 치우기 위해서 아파트를 턱 내주는 걸 보니 좀 우스웠다.“뭐, 요즘 둘이 진도 잘 나가는 것 같으니 난 방해하지 않고 사라져 주겠어. 냐하하하.”임윤서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나가라, 나가.”여름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목욕을 하러 가버렸다.다 씻고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열었더니 ‘여하간 Love’에게서 친구 신청이 들어와 있었다.‘여하간 Love’…여름은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가 한참 좋았을 때 하준의 대화명이 그것이었다.‘여전히 연애할 때는 요란하구먼.’여름이 친구 신청을 받아주자 바로 톡이 날아왔다.-차단했길래 다시 신청했어.
스타벨리하준은 뽀뽀 이모티콘을 보고 나니 화끈하고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목젖이 꿀렁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누워서 머릿속으로 여름이 자신에게 입 맞추는 상상을 했다.그리고…하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여름에게 ‘내일 하고 싶어’라고 보내더니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백지안과는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도 일말의 반응이 없었는데 여름의 이모티콘 하나에 자기 몸이 이렇게 열렬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씁쓸한 웃음이 났다.욕실에서 나오니 휴대 전화가 다시 울렸다.민 실장이었다.“회장님, 정말 안 오실 겁니까? 지안 님은 치료받기도 거부하고 계속 울기만 하고 계십니다.”하준은 울컥 화가 올라왔다.“자기 몸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하준의 고함에 민 실장이 당황했다.“하지만 지금 지안 님께는 회장님이 너무 필요합니다. 요즘 회장님이 통 안 오시니 지안 님은 먹지도 자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회장님 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계단을 구르신 거예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지금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 못 쓰게 될 수도 있답니다.”민 실장은 이렇게 말해서 하준을 꾹꾹 압박해 왔다.그러나 하준은 백지안과의 관계에서 죄책감이 아니라 피곤함이 느껴졌다.‘여름이 말처럼 난 지안이랑 연애 잠깐 한 것뿐이잖아.왜 우리 사이가 이렇게 내가 지안이의 평생을 책임져 줘야 할 것 같은 관계로 변한 거지?’“알았어. 지금 바로 가지.”하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병원.민 실장은 즉시 백지안에게 하준이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백지안은 매우 기뻐했다.‘그래, 결국 올 줄 알았지.’전화 한 통으로는 올지 않을 줄 알았지만 차츰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민 실장이 결국 하준을 불러낸 것이다.하준이 나타나기만 하면 대기하고 있던 기자가 사진을 찍을 것이고 내일이면 전국에 자신이 사고를 당했으며 하준이 다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는 사실이 알려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