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하준이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하나 꺼냈다.“리버사이드 파트 꼭대기 복층이야. 이미 인테리어 끝내 놓았으니까 그리로 이사 가요. 이제부터 이 집은 당신 거야.”“……”임윤서가 멍하니 쳐다봤다.몇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리버사이트 파크가 최고급 단지라는 것은 알았다.‘그런 고급 아파트의 복층집을 갑자기 나한테 준다고?’“안 가져?”하준이 위협적으로 물었다.“가, 가져요.”임윤서가 카드 키를 홱 채갔다.‘이런 나쁜 놈이 아파트를 공짜로 주겠다는 게 마다할 이유가 없지.’“내일 바로 이사할게요.”“그래요”하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갔다.‘드디어 장애물을 처리해 버렸군.’----임윤서는 집에 들어서자 마자 여름의 눈 앞에 카드키를 흔들어 보였다.“이거 봐라~ 최하준이 방금 나더러 이사하라더라? 리버사이드 파크 복층이래.”물을 마시던 여름은 그대로 물을 뿜었다.멍하니 그 카드키를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그래서 이사하겠다고 한 건 아니겠지?”“왜 아니야? 내가 바보니?”임윤서가 헤헤 웃었다.“왜? 이 아파트 너 줄까?”“됐어. 그런 아파트 살 돈은 나도 있어.”여름은 하준이 그 많은 돈으로 이렇게나 어리석은 짓을 할 거면서 이혼할 때는 집 한 채 해주지 않더니 이제서 자기들 사이에서 윤서를 치우기 위해서 아파트를 턱 내주는 걸 보니 좀 우스웠다.“뭐, 요즘 둘이 진도 잘 나가는 것 같으니 난 방해하지 않고 사라져 주겠어. 냐하하하.”임윤서가 의미심장하게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나가라, 나가.”여름은 귀찮다는 듯 그대로 목욕을 하러 가버렸다.다 씻고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열었더니 ‘여하간 Love’에게서 친구 신청이 들어와 있었다.‘여하간 Love’…여름은 한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가 한참 좋았을 때 하준의 대화명이 그것이었다.‘여전히 연애할 때는 요란하구먼.’여름이 친구 신청을 받아주자 바로 톡이 날아왔다.-차단했길래 다시 신청했어.
스타벨리하준은 뽀뽀 이모티콘을 보고 나니 화끈하고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목젖이 꿀렁했다. 갑자기 견딜 수 없이 흥분이 되었다.누워서 머릿속으로 여름이 자신에게 입 맞추는 상상을 했다.그리고…하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여름에게 ‘내일 하고 싶어’라고 보내더니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백지안과는 그렇게 오래 사귀었는데도 일말의 반응이 없었는데 여름의 이모티콘 하나에 자기 몸이 이렇게 열렬히 반응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씁쓸한 웃음이 났다.욕실에서 나오니 휴대 전화가 다시 울렸다.민 실장이었다.“회장님, 정말 안 오실 겁니까? 지안 님은 치료받기도 거부하고 계속 울기만 하고 계십니다.”하준은 울컥 화가 올라왔다.“자기 몸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해.”하준의 고함에 민 실장이 당황했다.“하지만 지금 지안 님께는 회장님이 너무 필요합니다. 요즘 회장님이 통 안 오시니 지안 님은 먹지도 자지도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회장님 생각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계단을 구르신 거예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지금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 못 쓰게 될 수도 있답니다.”민 실장은 이렇게 말해서 하준을 꾹꾹 압박해 왔다.그러나 하준은 백지안과의 관계에서 죄책감이 아니라 피곤함이 느껴졌다.‘여름이 말처럼 난 지안이랑 연애 잠깐 한 것뿐이잖아.왜 우리 사이가 이렇게 내가 지안이의 평생을 책임져 줘야 할 것 같은 관계로 변한 거지?’“알았어. 지금 바로 가지.”하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병원.민 실장은 즉시 백지안에게 하준이 온다는 사실을 알렸다. 백지안은 매우 기뻐했다.‘그래, 결국 올 줄 알았지.’전화 한 통으로는 올지 않을 줄 알았지만 차츰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민 실장이 결국 하준을 불러낸 것이다.하준이 나타나기만 하면 대기하고 있던 기자가 사진을 찍을 것이고 내일이면 전국에 자신이 사고를 당했으며 하준이 다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는 사실이 알려질
“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백지안이 하준의 품에서 우는 바람에 하준의 셔츠를 적셨다.“그동안 반성 많이 했어.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이제부터 다시는 너에게 미안할 짓 하지 않을게. 돌아와. 너무 보고 싶었어.”하준은 백지안을 털썩 내려놓더니 의사에게 말했다.“들어오시죠. 이제부터 치료하십시오.”“싫어!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치료 따위 받지 않을 거야.”백지안이 흥분해서 외쳤다.그 모습을 보니 하준은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얼굴에 점점 냉기가 돌았다.“그만 해. 네 몸으로 날 협박할 생각 하지 마.”하준은 백지안이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성을 잃고 난동을 피우고 심지어 하준이 가장 혐오하는 방식으로 협박까지 해왔다.하준이 자신에게 이렇게 냉혹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백지안은 잠시 얼이 빠져 있더니 곧 눈물을 더욱 펑펑 쏟았다.“나도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이러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러면 내가 뭘 어떡해? 두 눈 멀쩡히 뜨고 널 잃을 판인데. 난 그렇게는 못 해.”“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왜 깨끗하게 헤어지지 못하는 거야?”하준은 별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피로감이 올라왔다.“네 다리는 네 거야. 치료 거부로 못 걷게 된다면 그건 네 일이야. 내 책임이 아니야. 내가 널 계단에서 민 것도 아니잖아.”백지안은 늘 자신에게 다정했던 하준에게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세상이 뒤집어진 것만 같았다.“지안 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다급해진 민 실장이 끼어들었다.“어렸을 때는 정신병원에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셨고, 얼마 전에는 회장님 병도 치료해 주신 분인데요.”“그래서 결혼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내게 한 짓을 생각해 보라고.”하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이제는 누구나 날 비웃어. 결혼식장에서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는 사실이 밝혀졌잖아. 그래, 난 그냥 현실을 인정하고 용서했어. 그 정도 했으면 이제 날 놓아줘야지. 곽철규
“말 다했어?”하준의 버튼이 눌렸다.“백지안의 명예는 백지안 거지. 내가 백지안의 명예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어.”“너랑 지안이랑 10년을 넘게 사귀었는데 책임을 안 지면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이야?”송영식이 씩씩거렸다.하준은 처음으로 백지안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강렬한 피로감을 느꼈다.‘그저 결혼이 안 하고 싶다는데 이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야?지안이가 해외에 나갔을 때 내가 지안이를 건드렸나? 내가 곽철규랑 억지로 붙여 놓은 거야?아니잖아.’“그렇게 지안이가 좋으면 네가 잘 해봐. 나한테 자꾸 뭐라고 하지 말고.”하준은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잠시 신선한 공기를 쐬고 싶었다.송영식은 창백한 백지안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따라나섰다. 하준의 어깨를 잡더니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나는 지안이랑 결혼 안 하고 싶은 줄 알아? 하지만 지안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내내 사귄 것도 너잖아. 최하준, 네가 싫어졌다고 사람을 남에게 떠넘기다니, 지안이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너만 바라보고 너만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난 지안이를 사랑하지 않아.”하준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분노한 짐승처럼 날카롭고 어두운 눈빛이 쏘아져 나왔다.“뭐라고?”송영식은 멍해졌다.“내가 나쁜 놈이다 싶으면 멋대로 생각하도록 해. 어쨌든 나는 이제 걔랑은 결혼 못하겠어.”하준이 결연하게 답했다.“이 자식이!”송영식은 화가 뻗쳐서 결국 주먹을 날렸다.“또 강여름이 널 꼬드긴 거지? 가만두지 않겠어.”송영식이 어디론가 뛰어가려고 하자 하준이 막아서더니 무표정하게 경고했다.“여름이 찾아갈 생각 하지 마. 여름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 강여름이 아니었더라도 난 지안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어.”“날 속일 생각하지 마. 강여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게 다 괜찮았어. 지안이가 당한 고통은 강여름이 다 물어내야 해.”송영식은 하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두 사람은 복도에서 투덕거리기 시작했다.결국 송영식은 주먹을 날렸다.하
주방에서 여울과 윤서를 위한 아침을 준비하던 여름은 갑자기 마루에서 큰 소리로 욕지거리를 하는 윤서의 목소리를 들었다.윤서는 곧 휴대 전화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야야, 이거 좀 봐봐. 근데 보고 화내지 마라.”여름이 휴대 전화를 받아서 보니 아침 헤드라인 뉴스였다.-백지안 부상, 최하준 회장 즉시 병원으로 와. 헤어진다는 소문 거짓이었던 듯영상을 플레이해보니 기자가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최근 최하준 회장과 백지안의 결혼식이 갑작스럽게 중지된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미 헤어졌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지난밤 병원에 있던 기자는 백지안 씨가 xx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하준 회장이 백지안 씨의 병세가 걱정되는지 어두운 얼굴로 부랴부랴 도착했습니다. 제가 밤새 기다리고 있었는데 최하준 회장은 초췌한 얼굴로 아침 7시에 병원을 나서…”여름은 뉴스를 꺼버리더니 윤서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이었다.“너, 괜찮아?”임윤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솔직히 최하준이 이 정도로 쓰레기인 줄은 몰랐다. 어젯밤에는 나에게 아파트까지 주면서 여름이에게 진심인 것처럼 굴더니 뒷구멍에서는 백지안에게 달려갔어? 와, 진짜 쓰레기 자식 때문에 완전 짜증 난다.’“내가 뭘? 그냥 저 인간 저질인 데는 할 말이 없다.”여름은 속으로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젯밤 집에서 찍은 그런 사진까지 보내서 정말 믿을 뻔했다.‘여하간 러브는 개뿔…. 죽어라!뭐 이번에도 당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긴 한다.’“아침이나 먹자. 다 먹고 나면 나 여울이 유치원 데려다줘야 해.”여름이 아침 식사를 들고나왔다.----식사가 끝나자 여름은 여울을 데리고 유치원에 갔다.도착했을 무렵 하늘을 태운 서욱의 차도 도착했다.“아저씨, 오늘도 감사합니다.”여름은 매우 고마웠다. 하늘이 의심을 사지 않도록 서경주가 서욱에게 하늘의 아빠 노릇을
하준이 싸늘하게 상혁을 노려보았다.“……”‘내가 뭘 또 잘못했나? 그냥 서류 처리해 달라고 말씀드린 것뿐인데. 아아 회장님 모시기가 왜 점점 더 힘들어지냐고?’“줘 봐.”여전히 싸늘한 시선을 한 채로 하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상혁이 사류를 내밀자 후다닥 사인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아 참, 회장님 어제 병원 가셨던 일이 기사로 나왔습니다.”상혁이 뉴스를 열어서 하준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강 대표님과 만나고 계신데 강 대표님이 보시게 되면 좀 불편하시지 않을까요?”“왜 그런 얘기를 이제서 해?”뉴스를 보더니 하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이거 어떤 놈이 찍은 거야?”“쓰리윅스 쪽인 것 같습니다. 원래 가십성 기사에 강한 매체입니다. 병원 쪽에는 늘 기자가 한 명 상주하는 모양입니다.”하준이 입을 일자로 다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오전 안으로 관련 기사 싹 삭제하고 그 매체는 박살내 버려. 그리고 홍보팀 동원해서 앞으로 내 사진 함부로 찍으면 다들 이렇게 박살 날 거라고 언론에 흘려.”“알겠습니다.”안 그래도 상혁도 쓰리윅스는 쓰레기 언론이라고 생각하던 차였다.상혁이 나가자 하준은 바로 차를 끌고 화신그룹으로 갔다. 그런데 여름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엄 실장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하준이 마땅찮았지만 하준의 신분이 있다 보니 대접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강 대표님께서 매일 이쪽으로 출근을 하시는 건 아닙니다. 가끔 개인 일정을 소화하시기도 하고요.”“전화 걸어봐요. 당장 출근하라고 해.”하준이 강경한 말투로 명령했다.엄 실장은 하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최하준 회장님께서 지금 화신에 오셨습니다. 뵙고 싶으시다는데요.”“바빠요. 시간 없으니까 꺼지라고 하세요.”그러더니 여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준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했다. 엄 실장은 숨도 크게 못 쉴 지경이었다.다행히도 하준은 더는 머무르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다.----송영식이 없는 틈을 타서
“준,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나중에 얘기하자.”곁눈질로 보니 서류에는 부동산 계약서 등이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백지안은 얼른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이 상황을 모면할 셈이었다.“피하려고 하지 마.”하준은 이제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해변 별장 계약서야. 다른 집도 두 채 더 마련해 줄게. 그리고 이 통장에 있는 금액이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을 거야.”“그만! 난 너랑 못 헤어져.”백지안이 흥분해서 난동을 부리다가 뜨거운 물을 쏟아서 손을 데었다.“지안 님!”민 실장이 깜짝 놀라서 급히 의사를 부르러 갔다.“아파. 손이 너무 아파.”백지안은 고통에 눈물이 흘렀다.민 실장이 다가왔다.“회장님, 아직 아픈 분에게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예전 같았으면 하준이 아마도 한 번 더 참았을 것이다.그러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내 난동을 부리는 백지안을 보니 더욱 멀어지고 싶은 충동도 일고 백지안과 계속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백지안은 울며 막 물건을 부수고 집어 던졌다.나중에 송영식이 와서 보고 부어오른 지안의 손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영식아, 하준이가 날 버리겠대. 이딴 걸 나에게 주고 날 쫓아내려고 해.”백지안은 송영식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었다.“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걸까? 난 하준이 자체가 좋은 거지 하준이의 돈이 좋은 게 아닌데.”“정말 너무 하구먼.”하준이 놓고 간 서류와 카드를 보니 송영식은 하준이 녀석이 너무 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울지 마. 하준이는 내가 혼내 줄게.”송영식이 주먹을 꽉 쥐었다.“네 뒤에는 나도 있어.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하지 않도록 널 지켜줄게. 내가 하준이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쿠베라도 FTT에 뒤지지는 않는다고.”“영식아….”백지안이 멍하니 있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안 돼. 어떻게 내가 너에게 그렇게 상처를 줘? 그리고 너희 식구들이 날 인정하지 않을 거야.”“내가 원한다면 식구들도 어쩔 수
백지안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송영식을 잡을 정신도 없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영 하준을 못 잡을 것 같으면 송영식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싶었다.그러나 쿠베라의 후계자도 아니고, 미래 대통령의 조카도 아니라면, 최하준과 결혼하는 것과 비교해서 너무나 초라해질 게 아닌가?쿠베라에서 송영식을 내쳐서 그룹의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된다면 꼴랑 오슬란 하나 보유한 것으로 송영식은 개뿔도 아니었다. 결국 자신은 시아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는 것이다.‘왜 이렇게 일이 안 풀려? 진짜 미쳐버리겠네.’----송영식은 그 길로 본가로 달렸다.정자에서 송우재가 송근영와 회사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네가 잘해주고 있으니 내가 안심이 된다.”손녀와 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송우재는 회사를 전부 송근영에게 맡기지 못하는 것이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네. 믿어주시니 감사해요.”송근영이 웃었다.송우재가 막 다음 말을 하려는 참에 송영식이 들어왔다.“할아버지, 쿠베라 계승권은 제게도 있잖아요? 왜 저는 후계자 권리를 박탈당했나요?”“네 녀석이 워낙에 어리석으니 그렇지.”송우재는 송영식이 나타날 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고요히 차를 따를 뿐이었다.“……”‘내가 어리석다고?’송영식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태어나면서부터 뭘 배워도 제가 우리 집에서 젤일 빨리 익혔고, 수능 성적도 전국 3등이었어요. 대학도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할아버지도 제가 삼촌보다도 똑똑하다고 하셨잖아요?”송우재가 우습다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왜 너더러 어리석다고 하는지도 모르니 멍청하다는 게야. 그래, 어렸을 때 머리가 비상했는지는 모르겠다면 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멍청해지는데 내가 어찌 널 믿고 쿠베라를 맡기겠느냐? 아니, 혹시 이제는 내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할 마음이 들었느냐?”송영식은 이제야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았다.“이제 알겠어요. 이게 다 절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수단이었군요.”“수단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